50년간 밥을 사준 교회 형.
내가 태어난 교회는 대구 서남교회이나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부모님이 서현교회로 이사 가면서 나도 초등학생이 되기 전에 서현교회로 부모님을 따라갔다. 그곳 서현교회에서 1989년, 서른 살의 나이로 벨기에 선교사로 떠나기까지 지냈고 이후 잠시 귀국하였을(1992년) 때 삼덕교회로 옮겨가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삼덕교회는 서른이 넘어 출석하게 되었고 서현교회에서 초등부, 중·고등부와 청년대학부 생활을 했다. 그러하기에 서현교회야말로 나의 인생에 있어서 황금기를 보낸 고향과도 같은 교회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내가 태어난 서남교회가 아닌 서현교회를 나의 모교회로 여기는 것이다.
(실제로 서현교회도 서남교회에 속해있던 몇 분의 교인들이 나와서 세운 교회이기도 하다)
나의 지난날의 이력이 이러하니 내게 있어서 서남교회에서 함께 자란 친구는 내 아들 노엘의 주치의이며 지금 소아과병원장으로 일하고 있고 남산교회 시무장로로 수고하고 있는 김상관 장로님이 유일하고 수 백명에 이르는 귀한 믿음의 지체들은 거의 모두 서현교회에서 함께 자란 선배요 동기요, 후배들이며 나아가 내가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친 제자들이다.
며칠 전에도 내가 중등부에서 성경을 가르쳤던 제자인 민혁(홍민혁 목사)이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는 대구대학교 대학교회인 영광교회를 찾아가 그와 복된 만남을 가지기도 했고 그제는 어릴 때부터 친밀하게 지내던 선후배 5명이 포항으로, 강구로, 경주로 다녀오기도 했다. 경주에선 우리들을 지도하셨던 최재규 목사님의 막내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황리단길에 있는 ‘예’게스트하우스를 찾기도 했다. 사랑하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강구에 가서는 대우건설 리비아 현장에서 청춘을 바치며 직장인 선교사로 더 맹활약을 했던, 귀국하여 대구예술대학교수로 정년 퇴임한 의정형(대구서현교회 사역장로)이 그 비싼 영덕대게를 배부를 정도로 사주었다.
박의정(朴義正) 형.
1956년생인 형은 나보다 두 살 위다. 교회에서 늘 후배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며 모범이 되었던 귀한, 보배와도 같은 형이고 교회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충성스러이 행하였던 신실한 선배였다. 잊지 못할 일은 우리가 십 대, 이십 대일 때 교회의 행사 때마다 필요한 대형 현수막들을 손재주가 탁월했던 의정형이 다 만들었는데 특히 성탄절 축하 간판을 만들 때면 늘 나보다 한 살 위인 시권형(대구예수사랑교회 담임)과 우인형(미국 달라스 한인교회 장로)과 함께 온갖 일을 돕는 ‘시다바리’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런 의정형은 서울 대우그룹 본사로 가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리비아 건설현장으로 수년간 파견되어 일을 하기보다도 만사를 제쳐두고 복음을 전하다시피 할 정도로 복음증거의 열정에 불타던 전문인 선교사이기도 했고 그 후 귀국하여 석박사학위를 마친 후 대학교수로 평생 후학을 양성하며 또 모 교회인 서현교회 장로로 하나님을 섬겨왔던 것이다.
지금은 대구에서 개인 건축사무실을 운영 중이다.
그런 형과의 추억이 대단히 많지만 그중에도 형에게 밥을 얻어먹은 역사는 그야말로 길고도 방대하다.
서울에서, 광명과 부산과 대구에서, 그리고 만나는 곳이 그 어디였건 간에 형은 늘 자신의 주머니를 여는 일에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으며 늘 나를 비롯해서 후배들을 대접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나만 해도 십 대일 때부터 지금까지, 그저께 동해안 강구에서 맛있는 영덕대게를 푸짐하게 얻어먹은 것 까지 거의 50년의 긴 나날들 동안 형으로부터 밥을 얻어먹은 것이다. 대 기록감이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그 많은 후배들을 다 먹였으니 하나님께서 의정형의 주머니가 마르지 않도록 특별히 채워주셔야만 했을 것이다.
의정형이 머문 곳은 아프리카 땅 리비아 빼고는 다 찾아다녔다. 그만큼 형이 소중했던 까닭이리라. 부산 구포제일교회의 담임목사님의 예쁜 막내 따님과 결혼을 할 때도 나는 그곳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선교사와 목사 후배들을 어여삐 섬겨 주는 형의 사랑이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전염성이 강하다 했던가.
의정형 바로 한 살 아래인 우인형(김우인 장로, 1983년 도미 후 미국에서 한인교회 장로로 신실한 날들을 보내고 현재 잠시 업무차 한국에 거주 중이다)이 그 대代를 이어 우리에게 식사초대를 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 생활 40년 아니랄까봐 자주 ‘맥모닝’을 한다. 맥도날드에서 모닝 메뉴로 식사를 하며 커피를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누는 멋진 시간을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나를 비롯해 의정형님, 기진(안기진 서현교회 시무집사, 개인사업)과 20여 년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아랑곳 않고 이백 명 가까은 청년들을 데리고 대구백화점 앞에서 길거리 찬양으로 복음을 증거 하던 믿음의 사람 송병기(대구 그이름교회 담임목사)가 함께 한다. 자주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로 몇 시간 동안 수십 년을 오르내리며 지구를 몇 바퀴 돌아오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생 가운데서 50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밥을 사주는 형을 만나기도 대단히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늘 의정형이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