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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집에만 있는 조현 환우를 위한 가족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돌처럼 (경기 성남)
곽한나 “침대에 팔다리 묶인 채 오줌싸면서 ‘예수님 십자가가 별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40년 정신병원, 정신요양시설 생활 후 지역사회 자립한 곽한나 씨
보육원에서 가정부로, 다시 부녀보호에서 정신병원으로 58년을 그렇게 살아
정신병원에서 도망치다 두 번이나 잡히고 침대에 묶여...그곳은 억압의 장소
정신병원에 부조리하게 들어간 심정 생각할 틈도 없이 일만 해
지역사회 자립 권유받았을 때 “사회생활 해 보자” 마음 굳혀
지역사회 독립 생활은 당연한 인간 심리...돈과 기반 없으니 못 나와
팔다리와 가슴까지 묶고 움직일 수 있는 건 목뿐...강박은 없어져야
강박 대신 대안적으로 독방에서 반성하게 하는 시간 줘야
40년 만에 나온 세상...지하철 타는 법, 은행 돈 찾는 법부터 배워
시는 나의 목표...누구한테 해 주고 싶은 말을 글로 풀어 써
완벽하게 행복한 삶은 없어...현실에 일정 정도 만족하면서 지내야
그가 자기 존재와 운명에 대해 의심을 시작하게 된 건 갓난아기 상태로 보육원에 맡겨졌다고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그곳에서 18살까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삶. 생의 허허벌판에서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보육원을 나온 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과제에 충실하기 위해 그는 서울의 부유한 집안의 가정부로 들어갔다. 일을 했고 다시 일을 했고 또 돌아서서 일을 했다. 삶이 고통을 주는 건 차후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누가 말했는가. 의지할 곳이 없고, 깊고 쓴 눈물방울을 닦아줄 형제가 없다는 것.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이 그가 체험한 삶이 민낯이었다.
생을 증명하려 해도 아무도 눈여겨주지 않는 벌판. 그곳이 생의 허허로운 벌판이었다. 희망을, 또는 행운을 그는 만나본 적이 있을까.
23살이 되던 해, 그는 가정부 일을 그만두고 서울 대방동의 부녀보호소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싶었다. 며칠을 그곳에서 머문 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보호소 앞에 멈춘 승합차에 올라탔다. 서울 은평구의 한 정신병원으로 그는 실려갔다. 왜 그곳에 가야 하는지, 무슨 이유로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는 병동에서 주는 정신과 약을 주는대로 다 먹었다.
졸립고 침이 나왔다. 생은 허허로웠다. 죄 없이, 아프지 않고도 인간이 폭력과 고통이 교차하는 공간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걸 그는 그때 알았을까. 그곳에서 17개월을 보낸 뒤 다시 부녀보호소로 돌아왔다. 그러자 보호소는 그를 다시 경기도의 한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그 병원에서 15년을 살았다. 그리고 국가와 병원은 ‘만기’가 됐다며 그를 그 병원에서 내보냈다.
그는 다시 부녀보호원으로 왔고 이 기관은 다시 그를 경기도 용인의 영보자애원으로 보냈다. 38살 때였다. 이후 영보자애원에서 분화된 영보정신요양원에서 20년을 다시 보냈다. 살았다. 아니 견뎠다. 생이란 견디는 것이다. 모욕과 수치와 슬픔이 교차하는 그 생의 모든 것을 껴안아야 한다. 피하는 순간, 삶은 시절을 넘어 어느 날, 고통의 청구서를 들고 다시 찾아온다. 그는 오래 앓는 이의 얼굴로 바람에 흔들리는 생의 가지를 바라보곤 했다.
그때, 우연처럼 누군가 찾아왔다. 한울정신건강재단의 사회복지사가 요양원의 그에게 지역사회에서 살 것을 권유했다. 그 역시 나가고 싶었다. 믿고 싶었다. 설마 가진 거 하나 없는 ‘나’를 해코지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요양원 원장수녀님도 그의 지역사회 복귀를 권했다. 58살 때, 그는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견뎠다.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고 지하철 타는 법, 전기세와 각종 공과금을 내는 법, 은행에서 돈 찾는 법 등을 하나씩 배웠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시(詩)를 쓰기 시작했다. 시집을 풍성하게 읽어본 적도 없었지만 그의 날것으로의 정신이 보내는 시의 위로는 컸다. 그는 자신을 위로하기보다 타자를 위로하는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나’만의 공간, 원룸에서 그는 오늘도 시를 쓴다.
곽한나(59·여)씨를 만난 건 지난 1일 서울 관악구의 한울정신건강센터에서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곳으로 와 프로그램을 하고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고 조용히 지내다가 귀가한다. 영보정신요양원은 그에게 부재(不在)하는 엄마의 신체였다. 원장수녀님, 수녀님, 그리고 친동생처럼 아꼈던 여자애를 언젠가 불러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을 사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기억의 원형에 담긴 엄마. 혹은 가족. 하지만 현존하지 않는 그들의 자리. 한나 씨는 그래도 엄마를 기다린다.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희망은 그 자체로 독이 되기도 한다. 그 희망의 독에 속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던가.
그래도, 그는, 기다린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처럼 오지 않는 무엇을. 그 부조리한 기다림을 그는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우리는 비판할 수 없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면 이 소망 때문이기에. 다음은 일문 일답.
곽한나 씨. ©마인드포스트.
-발병한 게 아닌데 부녀보호원에서 정신병원으로 보낸 거군요.
“정신병이 뭔지도 몰랐고 발작한 것도 없는데 약만 주는 거예요. 무슨 약인지도 모르고 주는 대로 먹었어요. 약 먹으면 졸립고 변이 안 나와요.”
-정신병원에서 내보내 달라고 하지는 않았나요.
“내보내지 않아서 제가 도망을 쳤어요. 맨발로 복덕방에 뛰어들어가서 구해달라고 했는데 내가 거기서 온 줄 알고 부동산에서 전화를 하더라고. 내가 잠옷 바람에 맨발로 뛰어나왔거든요. 직원 둘이 와서 나를 데려갔어. 침대에 묶였는데 너무 힘들더라고. 두 번째 도망갔는데 이번에는 식당으로 뛰었어요. 병원 뒤가 식당이거든. 내가 그 길을 알고 뛰었는데 붙잡혔어. 이번에 3일 동안 침대에 묶어놨어요.”
-왜 정신병원이 그렇게 힘들었습니까.
“자유도 없고 사람이 억압당하는 거 같고 친구도 없고 먹을 것도 형편없고 옷도 없고 막. 이게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 감옥이더라고요. 내보내도 갈 데가 없고 차라리 여기서 죽은 게 낫겠다 싶더라고. 직원들은 밥하고 약만 갖다 주고 아무도 없어요. 우리끼리만 사는 거야. 다 통제돼서 문도 딱 잠가요.”
-정신병원으로 갔다가 나중에 영보정신요양원으로 가신 건가요.
“거기 기능 분화로 해서 제가 영보자애원에서 3년6개월 있다가 영보정신요양원으로 온 거죠.”
-영보정신요양원 시설이 어떻던가요.
“거기는 수시로 뜯어고치고 개조해요. (지내기) 좋게 해 주려고 넓혀주고 시스템도 갖다 놓고 의무실 고치고 사우나탕 하나 들여다 놓고 식당 고치고 카페 만들고. 거기는 살 만해요. A정신병원보다는 거기가 나아. 조금 더 자유롭고 수녀님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해 주는 거 같고. 우리끼리 돈이 좀 있으면 매점에서 사 먹고. 그 안에 갇혀 있어도 철창이 아니라 마음대로 나와서 마당에서 여자들끼리 놀고요. 미사도 가고 교회도 가고 좋아요.”
-그때가?
“2001년에 거기 들어가서 2021년에 나왔어요.”
-돈이 늘 부족했겠네요.
“저요? 돈도 필요 없어요. 그때그때 일해서 벌어먹지 뭐. 결혼할 것도 아니고 부모님께 바칠 것도 없고 내가 공부할 것도 아니고 돈이 필요가 없더라고요.”
-그래도 매점에서 뭘 좀 사 먹어야 하잖아요.
“그 돈은 벌었죠. 요양원에서 제가 입원실 봉사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봉투접기도 하고 그랬죠. 입원실 봉사자로 밥 같은 거 준비해주고 방 닦아주고 옷 같은 거 날라주고 하면 돈을 줘요. 제가 거기서 800~900만 원은 벌었나 봐요.”
-선생님은 정신장애인도 아닌데 정신병원에 들어간 거죠. 그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그걸 생각할 틈이 어딨어요. 살다 보니까 정신장애인들이 좋아졌어요.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더라고. 그래서 열심히 일해주고 나눠 먹고 그러다 왔어요. 내가 상태가 안 좋다 이런 걸 별로 못 느끼겠어요. 다 지난 일이죠.”
-정신요양시설에서 나오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한울(한울정신건강복지재단)에서 나한테 자립하는 곳이 있는데 가 볼 생각 없냐고 물었어요. 수녀님이 나한테 한울 사람하고 인터뷰를 시키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해 보겠다. 나이 60살 넘기 전에 나가서 사회생활 해 보자는 마음도 있었고 저도 할 수 있을 거 같고. 그래서 작년 8월 20일에 나왔어요.”
-요양원에서 나오기까지 몇 달 걸렸습니까.
“금방이었어요. 그 말이 떨어지고 한 달 정도.”
-요양원 나올 때 시원섭섭했었나요?
“거기도 있고 싶고 여기도 좋고. 처음 나올 때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힘들면 요양원이 자꾸 생각나고요. 거기가 정이 들어버렸어요.”
곽한나 씨. ©마인드포스트.
-요양시설에서 나오고 싶지만 살 집이 없어서 시설에 머무르는 이들도 많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편이었습니까.
“저는 집도, 돈도 없으니까 그런 건 꿈도 안 꿨죠. 그런데 기회를 주니까 일단은 믿었죠. 영보정신요양원 선생님들과 데려간다는 한울을 일단 믿었어요. 왜냐하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나쁘게 하겠나 싶었거든요. 뭐 가진 게 있다고. 그러니까 잘 해주시겠지. 믿고 따라온 거죠.”
-집이 없어서 못 나온 사람들이 있지 않나요.
“집이 없어서 못 나오는 사람이 있죠. 저도 그런 식이었죠. 나와서 사회생활 기능이 있고 돈도 좀 있어야죠. 몸이 아프거나 병이 심해서 못 나오는 사람도 있긴 해요. 그런데 솔직히 나오고 싶은데 못 나오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기반을 닦아놓지 못했고 나처럼 확실하게 끌어주는 사람도 없어요. 한번 나가서 생활해 보라고 추천해주는 기회는 많지 않아요. 제가 초창기죠.”
-선생님을 행운아로 봐야 할까요.
“기회가 주어진 건 그분들의 도움 덕분이고 저도 살면서 이날을 그렸어요. 영보요양원에서 63빌딩이나 서울 남산에 나오면 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도 저 길에 서 있을 수 있나, 저 찻길을 걸어갈 수 있나, 저 길가에 식당이 있으면 저런 데서 언제 밥 먹어보나 이렇게 매일 생각했어요. 저기를 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죠.”
-예전부터 나오고 싶기는 조금 했었는데요.
“인간 심리가 당연한 거예요. 거기(정신요양원) 있는 사람들 다 그럴 거예요. 그렇지만 사회 기반이 없고 아프고 돈도 없고 보호자도 확실치 않고 하니까.”
-요양시설에서 작업치료 요법이라며 노동을 강제로 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선생님도 그곳에서 노동을 해야 했습니까.
“봉투접기하는 사람도 있고 저는 거기 카페에서 일했어요. 한 달에 5만 원 받고. 나중에 매점으로 옮겨서 1년 5개월 일하고요.”
-하루에 5만 원을?
“하루가 아니죠. 밥 주고 옷 주고 다 하니까 한 달에 7만 원 정도 줘요.”
-그 돈으로 뭘 했을까요.
“제가 씀씀이가 커요. 남하고 나눠 먹고 하는 걸 좋아했어요. 시장에 가서 실컷 먹어봐라 하면서 사 주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나올 때 돈이 없이 나왔어요.”
-거기 가족들이 오잖아요.
“가족은 별로 안 와요. 거기 사람들 면회 오는 보호자 몇 명 안 돼요.”
-보면 감정이 어떻던가요.
“나야 보호자가 없으니까 관심도 없었죠. 보호자가 있으면 저도 보호자 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겠죠. 보호자가 와서 그냥 먹을 것하고 돈만 주고 가는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은 가족과 대화 나누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마다 다 다른가 봐요. 저도 보호자 온다면 기다리고 그럴 텐데. 기다릴 사람도 없고.”
-강박이나 격리 등 폭력에 노출된 적도 많았지 않았을까요.
“강박 당하고 격리당했는데 괴롭죠. 화장실 가는 것도 불편하고 밥 먹는 것도 불편하고. 그런데 난동 피우고 거울 막 깨뜨리면서 상태가 안 좋을 때는 강박을 해 놓아야 되겠더라고요. 강박은 의사 허락을 받아야 돼요. 의사가 주사를 맞히든가 강박을 시키라고 그렇게 해요. 옛날 1985~86년 때는 간호사들이나 직원들이 강박을 했어요. 이제는 당직 의사가 와서 몇 시간 강박시키라는 허락을 받아야 해요. 초창기 때는 우리가 반항이 심했는데 의사가 타이르면서 안정제를 먹이니까 우리들이 순응하는 거죠. 나중에는 차분해지더라고요. 저도 그랬어요.”
-1980년대에는 그냥 막 묶었나 보죠.
“처음 왔을 때는 그냥 막 묶더라고요. A정신병원에서. 영보정신요양원은 묶는 건 없었어요.”
-선생님이 묶였을 때는 어땠습니까.
“답답하니까 빨리 풀어줬으면 좋겠어요. 강박당하면 먹고 또 누워야 되고 싸야 되고 불편하잖아. 그냥 풀리는 날만 기다리면서 계속 누워 있는 거예요. 나는 등짝도 아프고 너무 힘들더라고요. 여름에 더 집어넣어요.”
-창이 있던가요.
“창이 있어도 철창이죠. 나무침대인데 매트리스도 없었고 묶인 채 오줌을 쌌어요. 내가 예수님 십자가가 별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참았어요. 예수님도 이렇게 사셨구나. 나는 팔다리 묶고 가슴까지 묶였어요. 목만 돌릴 수 있어. 너무 힘들어서 세상에.”
곽한나 씨. ©마인드포스트
-시설에서 사람이 사람을 폭행하고 간호사나 보호사가 당사자 입원환자를 때리고 하는 건 봤겠네요.
“직원이 때리는 건 잘 못 보고 환자들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건 봤어요. 여자끼리 머리채 잡고 싸우고 간식 때문에 싸우고, 말다툼으로 싸우고. 폭행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보면서도 못 본 척 해야 되겠네요.
“못 본 척하는 사람도 있고, 싸움에 말려드는 사람도 있고. 나는 막 말리고 선생님 부르기도 하고. 저도 많이는 아닌데 막 싸우기도 했어요. 누가 밤에 소리 지르고 떠들어서 걔 머리채를 잡았거든요. 그래서 둘 다 침대에 묶였어요. 그런데 얘가 침대에 묶인 채 똥을 싸요. 그런데 직원들이 똥을 안 치워요. 왜냐면 벌 좀 받으라고. 그러다보니까 성깔이 가라앉더라고. 처음에는 드세게 하는데 나중에 풀릴 때는 안 그러겠다고 하면서 차분해져요. 덤비고 난리치는 게 없어져요. 그건 좋았어요. 성깔도 죽고.”
-강박을 선생님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강박은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진짜 아니에요. 강박을 당하면 힘들다는 걸 알 거 아니에요. 강박은 안 해야 돼요.”
-대안이 있을까요.
“사람으로서 할 짓이 못 된다고요. 대안적인 방법은 독방에 들어가서 혼자 생각하고 반성하게 하는 시간을 주는 게 좋아요. 안 묶고 반성하는 거죠. 두 시간 반성하고 그래도 반성 안 하면 한 시간 더. 이렇게 하는 게 좋아요.”
-묶지 않고.
“묶지 않고 밥은 주면서 한 시간, 두 시간 이렇게. 반성하라고 하는 게 좋아요.”
-코로나19 시기에 요양시설에 있었습니다. 정신요양시설이 섬처럼 고립됐어요. 그때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그때는 열 나는 사람은 2층, 안 나는 사람은 3층으로 구분해놓고 열 재고 코로나 주사 맞고. 우리 같이 갇혀 있는 사람들이 코로나 걸리면 더 어려울 거 같더라고요.”
-어떤 점이요.
“우리는 방에만 있어야 되니 자유가 없어져요. 저는 코로나 안 걸렸어요. 열도 엄청 재고 맨날 줄 서고 하니 불편했죠. 사회 사람들은 외식을 못 한다며 불편해했지만 우리는 사람 많고 좁은 데 갇혀 있으니 더 힘들었죠.”
-요양시설에 침대가 있었습니까.
“코로나 터지고 침대 들어왔어요. 그전에는 바닥에서 생활했어요. 입원실만 침대가 있었고. 우리는 바닥에 매트리스 깔고 잤어요.”
-정신요양시설에서 오래 살다가 거기서 삶을 마친 사람도 봤겠습니다. 심정이 어땠습니까.
“거기서 병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고 연세가 있어 사망한 사람도 있고 닭고기 먹다가 뼈가 목에 걸려서 죽은 사람도 있었어요. 자기들끼리 용돈으로 치킨을 배달시켰는데 할머니가 이빨도 없는데 그걸 먹다가 목에 걸려서 돌아갔어요. 요양원 측이 위험하다며 치킨 주문을 당분간 중지시켰어요. 한 사람이 실수하거나 할머니처럼 뭘 먹다가 사망하면 한동안은 그걸 안 줘요. 단체로 시키면 치킨이 열몇 통이 오잖아요. 그럼 직원들이 우리를 쫙 앉혀요. 손대지 말라고 하면서 뜯어서 뼈다귀 구분하는데 그 순간에 난리가 나는 거예요. 먼저 먹으려고. 119 부르고 완전 비상이예요.”
-돌아가신 걸 보면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난 저런 일은 없을 건데 싶어요. 나하고는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 거죠. 병도 없고.”
-정신요양시설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신요양시설을 없앤대요? 영보요양시설요? 그런데 거기가 노인요양시설이 되잖아요. 제가 여길 23살에 들어왔는데 60살 노인이 됐잖아요. 그러니 젊은 애들하고 어떻게 섞여 살아요. 노인요양시설이 돼야 우리가 케어를 받고 시설도 우리한테 맞게끔 되니까 좋죠.”
-정신요양시설이 노인요양시설로 바뀌어야 한다?
“옆에 영보자애원 가보면 노인들이 살기가 좋게 돼 있더라고요. 간호사들이 많아서 일일이 세심하게 케어해요. 침대하고 화장실에 손잡이도 돼 있고 식사도 안전하게 돼 있어요. 영보요양시설이 노인요양원으로 바뀌면 괜찮겠다 싶었죠. 앞으로 그렇게 돼요. 왜냐하면 자꾸 시스템이 바뀌어요. 노인요양원으로 바뀌는 건 괜찮다고 봐요.”
-우리나라에 정신요양시설이 59개 있습니다. 다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거 없애면 그 사람들 다 어디로 가요. 갈 데가 없어요. 저도 행운이 없었으면 거기서 계속 살아야 되는데 그게 없어지면 나 어디 가서 살라고. 안 돼요, 없어지면.”
곽한나 씨. ©마인드포스트
-지역사회 독립생활을 하는데 선생님에게 어떤 서비스가 제공됩니까.
“내가 40년 만에 사회로 나오니까 지하철 타는 법도 모르죠. 이 거리가 저 거리 같고 저 거리가 이 거리 같고. 한울 사회복지사가 지하철 타는 법 가르쳐주고 기초생활수급비 나오게 해 주고 주민센터 가서 쌀 신청하고 재난지원금 카드 받고 내과 가서 코로나 주사 맞는 것, 농협에서 돈 찾는 거 다 도와줬어요.”
-지금도 서비스를 받습니까.
“지금은 제가 하니까 덜하죠. 쌀은 한 달에 한 번씩 배급받아요. 반찬은 반찬가게에서 김치나 나물 서너 개 사다가 먹고. 물은 끓여서 페트병 4개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둬요. 물 사는 것도 비싸거든요. 가끔 혼자 외식도 하고요.”
-거주하는 집은 살만하시던가요.
“원룸에 혼자 살아요. 화장실, 침대, 텔레비전 있고 농 있고 싱크대 있고. 7층 건물인데 4층에 살아요. 옆집들은 누가 사는지 몰라요.”
-수급비로 생활하면 충분하던가요.
“수급비 90만 원 받아요. 작년 8월에 요양원 나올 때 한울 사회복지사가 수급비를 받을 수 있게 해 줬어요. 지금 수급비로 살 만해요. 제가 호강하는 거죠. 제가 90만 원을 어디서 받아봐요.”
-원룸 한 달 월세는?
“37만 원. 전기세 따로 내고, 그리고 먹어야 되죠. 머리도 해야 되고 속옷도 사야 되고 책도 사야 되고 외식도 하고. 취업성공패키지라는 작업을 해서 거기서 50만 원씩 여섯 번 받았어요. 재난지원금 받은 것도 있고.”
-특별히 어디 쓰고 싶은 데가 있던가요.
“요양원 있을 때 수녀님하고 원장수녀님, 그리고 제가 돌봐주던 애가 있어요. 거의 내 동생이죠. 이 세 분하고 같이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어요. 1~2만 원 아니라 더 비싼 걸로 그분들에게 사 주고 싶어요. 그분들이 먹고 싶어 하는 걸로. 저는 아무거나 좋아요. 전 그동안 여기서 잘 먹었잖아요.”
-혼자 생활하면서 힘든 점은 없나요.
“처음 3개월은 힘들었어요. 별안간 무서운 거예요. 누가 집에 쳐들어올 거 같고 옆집 문소리만 들어도 불안하고. 또 누가 나를 때릴 것 같고 길거리 남자들이 쫓아오는 거 같고 무섭고 이상한 생각이 막 들어요. 제가 나중에 주사제로 처방을 바꿨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맞고 알약도 4알씩 먹다 보니 서너 달 지났는데 안정이 돼요. 혼자 있으면 밤에도 무섭고 문소리만 들려도 무서웠는데 이제는 그런 게 없어진 거 같아요.”
-요양시설이 낫던가요, 아니면 독립생활이 낫던가요.
“독립생활이 낫죠. 요양시설 들어가 살면 뭐하겠어요. 내가 살려면 거기서 나오는 게 낫죠. 나와서 제대로 사람 구실하고 재밌게 사는 거죠. 요양시설 사람들이 좋기도 하지만 거긴 장래가 없잖아요. 시설 안에서 주는 밥 먹고 프로그램을 해도 그 안에서잖아요. 여기서는 좀 자유롭고 많은 걸 보고 겪고 하니까 재밌죠.”
-시설에 있는 사람들한테 나와서 독립하라고 추천하고 싶은가요.
“할 수 있으면 나왔으면 좋겠어요. 처음에는 어렵지만 좋을 거예요. 저도 그랬어요.”
-거기서 나오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몰라서 그래요. 저도 처음에는 안 나온다고 했어요. 자신이 없는 거죠. 맨날 있는 그대로가 좋았던 건데 기회가 생겨서 나와 살다 보면 힘든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살게 되죠. 자꾸 사회생활을 해야죠. 시설에는 어느 정도 있는 거지 마냥 거기 있는 건 안 좋아요.
-잠 자는 시간과 기상 시간이 자유롭지요. 보통 몇 시에 일어나 몇 시에 잡니까.
“자유로워서 문제예요. 저는 뒤죽박죽이에요. 새벽 한 시에 잤다가 어떤 날은 밤 열 시에 잤다가 또 저녁 일곱 시에 잤다가 새벽 네 시에 깼다가 막 뒤죽박죽이죠. 그래도 센터 결석하거나 어디 가는 거 빠지거나 약속을 어기고 한 적은 없어요. 막 공부하고 싶으면 일어나서 했다가 졸리면 잤다가 새벽 두 시에 일어나서 커피도 먹었다가 이래요. 그래도 제 생활에서 방해받은 적은 없어요. 센터는 토일 빼고 나오죠.”
곽한나 씨. ©마인드포스트
-토, 일요일은 뭐하십니까.
“토·일요일은 자조모임 있어서 가기도 하고, 미용실 갈 때도 있고 시장도 가고 일요일은 미사 가고요. 시장에 뭐 살 거 없나 하고 둘러보기도 하고 집에 하루종일 있기도 하고 그래요. 대중없이 사는데 제가 무슨 사고를 친 적은 없어요.”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게 뭡니까.
“일어나면 양치질부터 해요. 그리고 물 마시고 커피 한 잔 먹고. 빨래 빨아놓은 거 말랐으면 개서 옷장에 넣어놓고 핸드폰 전화 온 데 있나 보고 카톡도 확인하고 책 펴놓고 공부도 하고. 공부하다 졸리면 앉아서 졸 때도 있고, 막 생각을 그렇게 해요.”
-무슨 생각을요.
“여러 가지 돈 쓰는 문제, 요양원 사람들 보고 싶은 문제, 내가 어떻게 앞으로 할까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런 게 시로 나오는 거죠. 글로도 나오고.”
-컴퓨터로 작업하십니까.
“컴퓨터는 비싸서 없어요. 쓸 줄도 모르고 아직까지 제가 그 단계까지는 아니에요.”
-손으로 쓰는 겁니까.
“손으로 다 써요. 스마트폰은 활용할 줄 알죠. 센터에서 조금 배웠으니까.”
-어떤 일을 해보고 싶습니까.
“돈은 수급비가 나오니까 일도 하면서 사람이 사는 즐거움도 있죠. 저도 일을 하려 하는데 몸이 아프더라고요. 지금 피아노를 배우고 글도 쓰고 있어요.”
-피아노는 왜 갑자기 배우십니까.
“피아노는 원래부터 좋아해요. 어릴 적에 바이엘 뗐어요. 고아원에 있을 때 피아노학원이 옆에 있어서 거기를 보내줘서 2년 동안 다녔거든요. 요양원에 있을 때도 피아노학원에 보내달라고 해서 학원에서 3년 동안 배웠어요. 여기서도 내가 돈이 조금 있길래 지금도 배우는 중이에요.”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제가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말을 너무 하고 싶어서요. 요양원에 있을 때 거기서 지나온 시절의 소감을 쓰라고 해서 쓰는데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몇살 때죠.
“2019년 말에 요양원 나가면서 그때부터 아마 썼을 거에요. 그 전에는 글을 안 썼거든요.”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지나온 과정을 남기고 싶더라고요. 요양원의 사랑했던 동생, 수녀님 등 이런 사람들을 글로 남기고 싶더라고요. 쓰고 있는데 마침 후견인이 <마인드포스트>에 글을 낼 수 있다고 해서 그때부터 열심히 썼죠. 시를 320편 정도 썼어요. 버릴 거 버리고 정리하니까 170편 정도 추려놨어요. <마인드포스트>에 72편이 나갔더라고요. 시집을 내 본 적은 없어요.”
-선생님에게 시는 어떤 의미일까요.
“시는 제 목표죠. 제가 하고자 하는 말, 제가 원했던 거, 제가 누구한테 해주고 싶은 말. 제가 또 남들한테 나누고 싶은 말 그런 게 목표거든요. 내가 나한테 해 주고 싶은 말, 내가 남한테 사랑으로 해 주고 싶은 말. 그게 목표거든요. 그런 목표를 글로 쓰는 거예요. 시를 통해 남을 바꾸는 게 제 목표죠.”
곽한나 씨. ©마인드포스트
-시집은 많이 읽지는 않았죠.
“네 거의 안 읽어요. 지금도 갖다 놓고 읽지도 않아요.”
-시를 통해 얻고 싶은 건 자신에 대한 위로였을까요.
“저는 스스로를 시로 위로받지는 않아요. 저는 남한테 목소리를 전할 때 그 사람이 공감해줬으면 좋겠어요. 이게 사랑이구나. 이렇게 나도 남한테 해 줘야 되는 거구나 느끼는 거요. 저에 대한 위로는 없어요.”
-정신적 장애로 인해 선생님은 청춘과 장년기를 모두 시설에서 보냈습니다. 뭔가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지금 이렇게 잘 풀렸는데 뭐가 억울해요. 시도 300편 썼고 이렇게 몸도 건강하고 사랑하는 요양원의 가족도 있고 뭐가 불편해요. 제가 다친 데도 없고.”
-젊은 시절 사랑도 하고 싶지 않았나요.
“아, 그런 거는 제가 생각할 틈도 없이 지나가버렸어요. 후회도 없고 미련도 없어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없겠네요.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었죠. 영보정신요양원 살았을 때 거기 여자 의사가 있었거든요. 이쁘고 매력적인데 그 의사하고 말 한 번 해봤어요. 저런 분이 보호자였으면 좋겠고 내 엄마가 있으면 저런 분이면 좋겠다 싶었죠. 그분이 안 잊혀져요.”
-신이 왜 나를 이렇게 살아가게 했을까라는 원망은 해보지 않았나요.
“하느님을 원망할 새가 어딨어요. 그런 걸 신경 쓸 새도 없었어요. 하느님이 날 사랑하게 했으면 난 좋아요. 엄마를 비록 못 만났지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거. 또 하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들이 참 좋아요. 나를 태어나게 해 준 게 좋아요. 사람들도 얼마나 착해요. 사람은 다 변할 수가 있거든요. 좋단 말이에요.”
-선생님은 이 세상으로부터 상처 입은 사람이라 생각하십니까.
“상처요? 글쎄. 사람은 살면서 완벽하게 행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부모 잘 만나서 병원에 안 들어와 있고 잘 지냈다 해도 완전히 행복하다고 볼 수는 없을 거에요.”
-어느 정도 현실을 인정하고 살아가야 된다?
“현실에 만족하고 그냥 사는 거죠. 지금 잘 사는 거죠. 잘 사는 게 좋은 거죠.”
-지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죠. 저는 잘 사는 거 같아요.”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소망은 선생님은 갖고 있습니까.
“다시 태어난다면 전 부모님 만나고 또 후원도 하고 돈이 있으면 봉사도 하고 싶고요. 요양원에서 그런 애들을 만나서 이뻐해 주고 살고 싶어요. 또 부모님 만나서 가족과 살고 싶은 그런 생각. 그게 소망이고 지금 살던 식으로 아픈 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리고 사는 게 좋아요.“
-인생을 살아보니 선생님에게 인생이 무엇이던가요.
“인생이요? 재밌어요. 누군가를 만난다는 거.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는 것이 재밌어요. 예쁜 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거. 공부를 하면서 시를 쓰는 거. 음악을 듣는 거 다 재밌어요. 사는 게 재밌어요.”
-힘든 부분도 있겠죠.
“나이가 드니까 옛날처럼 일을 못 하는 게 힘들어요. 누구 씻겨주고 밥 먹여주고 바닥 청소도 하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밥도 나르고 옷도 한 보따리씩 옮기고. 그런 걸 내가 못하잖아요. 그게 힘들어요.”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들이죠. 선생님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늙어가는 거죠. 부모님 만나기 전까지 죽는 거 나는 인정할 수 없어요. 부모님 뵙고 그때 가서 죽으면 난 괜찮아요.”
곽한나 씨. ©마인드포스트.
-부모님은 선생님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 말을 어떻게 다 믿어요. 왜 버려요. 자기 자식을. 난 자식을 버리는 그런 엄마의 존재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가정을 꾸리고 싶지는 않은가요.
“저는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는 지금 공부도 하고 시도 써야 하고 봉사도 해야 되고 엄마도 찾고, 그런 게 더 급해요.”
-지금, 행복합니까.
“이제 가서 피아노도 쳐야 되고 내일도 센터 나와야 되고 재밌잖아요. 사는 게 재미있는 거 같아요. 지나가다가 배고프면 자기 한도 내에서 냉면 한 그릇 사 먹을 수도 있고. 집에 와서 쉬었다가 글을 쓰고요. 물론 심심하고 혼자 있구나 이런 생각도 하지만 그건 잠깐이죠. 또 내일 센터 갈 거 생각하면서 씻고 밥 먹고 텔레비전 보다가 쉬었다가 이렇게요. 좋죠. 사는 게 재밌어요.”
더 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한나 씨는 “요양원 원장수녀님, 수녀님, 그리고 친동생 같았던 그 아이와 같이 밥을 먹고 싶어요. 그럼 한풀이가 될 거 같고”라고 말했다. 한풀이라니. 기자는 문득 ‘슬픔’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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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집에만 있는 조현 환우를 위한 가족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돌처럼 (경기 성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