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소명 요절
누가복음 4:16-21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절 셋째 주일이다. 설 명절을 맞았다. 우리 경험에 따르면 설날이 지나면 음력 대보름 어간에 봄이 기웃거린다. 아직 겨울 한복판이지만, 이미 새 봄에 대한 기다림과 설레임이 있다.
며칠 전에 신앙과 담을 쌓고 사는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님과 설 인사를 나누었다. 평소 내가 교회에서 하는 대로 “새해 복 많이 받으셨다지요”라고 했더니, 그이는 정색을 하며 평소 내가 경험한 이들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니예요. 저 앞으로도 계속 받아야 해요.”
아하! 그리스도인과 아닌 사람은 이런 차이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우리나라 전통 예절의 어법도 같다.
설날의 즐거움은 마음껏 덕담(德談)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흔히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미래의 소망을 말하는데, 원래 덕담은 이미 복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축복하는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 앞에서 올해도 반짝반짝 긍정하고, 두루두루 감사하고, 미리미리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이길 빈다.
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소명 요절이다. 세례 후 잠시 광야에 머무시던 예수님은 다시 고향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다니시던 나사렛 회당에서 책, 곧 성경 두루마리를 낭독하신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유대인 경건 전통에 익숙하며, 회당예배의 의무를 다하신 분으로 소개한다. 유대인 성인은 회당예배에서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안식일 성경 낭독을 자기 주민과 세상을 향해 자신의 소명에 대해 선언하실 기회로 삼으셨다.
소년 시절부터 예수님은 정직하고, 신실한 분이었다. 누가는 열두 살 경 소년시절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2:52).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은 ‘바 미쯔바’라는 성인식에 참여하였다. 성인식을 마친 소년을 가리켜 ‘언약의 아들’ 또는 ‘계명의 아들’로 부른다.
나사렛 회당에 참석하신 예수님은 미리 선택한 부분을 펼쳐서 낭독하셨다. 누가가 이 장면을 특별히 주목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의 소명 요절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소명 요절’을 늘 강조한다. 색동교회 전통이 되었다. 날마다 톨레레게의 그날 말씀에서 내게 주시는 요절을 찾는 일은 얼마나 기분 좋은 경험인가? 연초에 위임식에 참여하면서 소명 요절을 고르는 일은 얼마나 짜릿한 은총인가?
예수님은 소명 요절을 선택하여 공개적으로 낭독하신 후 이를 하나님의 파송과 연결하여 말씀하신다. 역사가인 누가가 이런 극적인 장면을 놓칠 리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명과 파송에 대한 말씀을 공생애 첫 머리에서, 가장 우선순위로서 기록하고 있다.
2)
그래서 예수님의 소명 요절을 가리켜 마틴 루터는 황금 요절로 강조하여 구분하였다. 예수님이 펼쳐서 읽으신 두루마리 성경 ‘이사야 61장 1-2절’의 말씀이었다. 헬라어로 쓴 누가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18-19).
예수님은 자기 동네 사람들, 곧 그의 유대인 동포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나사렛의 회당에서였다. 예수님의 위임식은 소명에 비해 아주 소박했던 셈이다. 예수님이 낭독하신 이사야의 말씀은 세상을 품은 예수님의 출정식 선언이었다. 예수님의 사명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19)에 잘 요약되어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의 선포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기 위해 전국에서 유대 광야로 몰려나왔다. 심지어 유대의 관헌과 산헤드린의 첩보원들은 군중의 반응을 살피려고 탐문 활동을 하였다. 요한은 변두리 요단강에 있었으나 가히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파송은 아주 작은 동네에서 시작되었다. 대상도 늘 보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특별한 날을 택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안식일 중 한 날이었다. 주님은 세례 요한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하나님의 진노나, 무서운 심판을 선언하지 않으셨다. 세례 요한과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이 베푸실 자비,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를 선포하신다.
예수님의 소명은 하나님의 대사면(大赦免) 곧, 희년으로 요약된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 부자유와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넘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특히 사회적인 약자, 변두리 인생들, 율법의 구원에서 제외된 이방인에게로 향하고 있다.
이제 선언은 행동으로 옮겨져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고, 온갖 병자를 치유하신다. 주님은 소명에 따라 그대로 실천에 옮기셨다. 과연 권위 있는 메시야의 가르침과 행동이었다.
예수님의 소명 요절은 한 마디로 ‘기쁜 소식’이었다. 이를 복음(福音)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위로하시며,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실 때가 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 이사야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이다. 선지자가 바라본 미래가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인 오늘이 된다. 은혜의 해, 하나님이 속죄하실 해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
사람들은 모두 놀랐을 것이다. 지금 예수님이 낭독하신 말씀이 그저 선지자의 말씀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 자신이 그 예언의 실현자라는 말인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모두 예수님을 주목하여 보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예언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귀에 들은대로 성취되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3)
예수님은 말씀하신 후에 책을 덮어 담당자에게 건네주시고 자리에 앉으셨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이 일로 나사렛 회당은 갑자기 떠들썩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 때문에 시비가 일어났고, 심지어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며 분노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29)하였다.
그들은 참을 수 없었다. 그들 가운데 살던 평범한 예수가, 보통 사람 예수가 하나님의 사자요 메시야라니, 믿겨지지 않았다. 불쾌하고 모욕감을 느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칭찬받던 예수님을 이제는 죽이려고 하였다. 말씀 한마디가, 황금요절 한 구절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불러오는가? 동시에 위대한 탄생을 낳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고집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결코 겸손하지 못하였다. 회당의 제도는 점점 변화하고, 발전하지만 복음을 수용하지 못하는 현실과 같다.
유대교 랍비 세 명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자신이 회당이 얼마나 혁신적인지 자랑하였다.
첫 번째 랍비가 말했다. 우리 회당에는 의자 사이에 재떨이가 있어서 누구든지 기도 시간에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자기 자리에서 피울 수 있다고 하였다.
두 번째 랍비는 한술 더 떴다. 우리 회당에는 스낵바가 있어 대속죄일에도 금식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식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세 번째 랍비가 말했을 때 모두 그 혁신성에 놀라 두 손을 들었다. 우리 회당에서는 대속죄일에 회당 현관에 큰 글자로 안내문을 붙여놓는다네. ‘금일휴업.’
유대교 보수수의는 보수주의대로, 또 유대교 진보주의는 진보주의대로 그들은 다만 형식을 고치려고 할 뿐, 진실한 개혁을 통해 본질적인 은혜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꼬집는 말이다.
예수님의 시대에 유대인들은 지나치게 율법적이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장애인이나 고통당하는 자, 억눌린 자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율법에 대한 부자유함 때문에 세상을 품으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정말 가난한 사람이다. 그들은 남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율법에서도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가 되신다.
또 다른 경우 ‘가난’과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겸손한 마음을 의미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QT(Quiet time)를 한다. 이 시간은 마음이 가난해 지는 시간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 시간은 하나님과 나와 개인적인 만남의 시간이다.
지난 주간에 최인호 작가의 유작을 묶은 <눈물>을 읽었다. 그는 1970년대 이미 100만 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유명한 소설가이다. 마흔이 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 평생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또 소설을 쓰는 작가로 균형을 이루며 본이 되는 모습으로 살았다.
그는 만년 5년간 침샘암으로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빠진 손톱에 골무를 끼고 소설을 썼다고 한다. 오죽하면 그의 묘비명은 ‘원고지에서 죽고 싶다’이다.
작가는 삶의 위기의 순간에 자신은 막무가내 떼쓰기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 청했던 그 어머니의 마음에 의지하여 기도하였다.
“아이고 어머니. 엄마. 저 글 쓰게 해 주세요. 앙앙앙앙. 아드님 예수께 인호가 글 좀 쓰게 해 달라고 일러주세요. 엄마, 오마니! 때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드님은 오마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앵앵앵앵, 오마니 저를 조도주로 만들게 해 주세요.”(<눈물> 중에서)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가난해 지난 시간이다. 그리고 세상을 품는 시간이다.
현재 교회력인 주현절은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절기이다. 어떻게 알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바로 성경이다.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자주 기쁨을 얻는가? 색동교회가 설립 5주년을 맞아 시작한 톨레레게는 벌써 10년째이다. 내 평생 소명요절은 1981년 4월에 선택한 것이다. 설교대회를 위해 준비한 예레미야의 소명 본문 중 한 구절이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렘 1:6).
우리가 성경에서 내게 주시는 요절을 고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으로 내 마음의 등불로 삼고, 그 말씀에서 비전을 찾으려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읽지만, 예수님은 그 말씀을 통해 나를 품어주신다. 사실 말씀을 사랑하는 일은 먼저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노래하고, 말씀이 주시는 교훈대로 살려고 애쓰는 일이다.
사람들은 불안과 염려를 느낄 때 먼저 하나님께 의뢰하고, 의지한다. 당장 할 일이 많아 시간이 부족해도, 우선 기도부터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다. 말씀과 함께 기도하면 나 자신이 자연스레 겸손해진다.
그러니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신 주님을 받아들여라. 주님은 그런 나를 품어주신다. 나를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마지막 죽음 앞에서도 나를 변호해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이루신 구원의 은총을 믿고 따르는 여러분 위에 언제나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