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롬1:3~7절 2023.11.12. 주일오전
* 성령으로 다시 사심
지난 시간에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종과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종이란 복음을 그대로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오직 택하신 자기 백성들에게만 기쁜 소식입니다. 선택되지 아니한 사람, 즉 성령을 통해서 복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은 인간의 본성과 부딪히는 걸림돌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인간의 본성을 극복하십니다. 즉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이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구별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종의 입장에서 아주 난처한 일이 발생합니다. 복음이 인간의 본성과 대치되다 보니 복음을 전할 뿐인 종에게 핍박과 욕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종의 말로 받아 들여버리기 때문에 한 인간의 고집과 사상으로 여기고 핍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만을 그대로 전하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곧 종이며 종은 오늘날 복음의 비밀을 맡은 모든 자를 포함하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종은 주인이 자신을 사용하도록 자기 몸을 맡긴 자입니다. 주인을 위해 존재하는 몸이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몸은 복음의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할 몸입니다. 아들이 사용하시도록 맡긴 몸이기 때문에 내 몸이 아닌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답답해하고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성도로서 타당한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입니까? 2절에 복음은 아들에 대한 약속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아들은 어떤 분입니까? 3,4절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합니다.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습니다. 이것은 아들이 왕가의 후손이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으로 죽으심을 입었습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몸이 죽었다는 것은 결국 다윗의 혈통에 포함된 모든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혈통인 육신은 죽음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날 뿐입니다. 태어나고 커가면서 자기만의 포부와 야망을 간직한 채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뛰어보지만 결국 죽어야 할 육신입니다. 야망을 이루면 뭐합니까? 죽음 앞에서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까? 이것이 세상 육신의 삶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결의 영으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여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합니다. 육신으로 죽으시고 성령으로 다시 부활하셔서 아들로 인정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앞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모든 자들 역시 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았던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아들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길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서는 아들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이란 주님의 길에 자신을 맡기고 순종함으로서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되는 것입니다.
* 성령으로 사는 인생
하나님의 아들 되었다는 것은 참 아들이신 예수님과 동일하게 성결의 영으로 부활하고 영생을 얻을 자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육신의 죽음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서 나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에 매인 자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항상 답답하고 걱정으로만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부터 보면 복음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언급합니다. 5,6절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순종케 하나니'라는 말과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들은 하나같이 주님께서 하신 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순종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순종하게 하셨다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부르셨을 때 내가 '예'하고 달려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렀다'가 아니라 '부르심을 입었다'라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불렀다는 것은 부름에 대한 반응이 우리에게서 나와야 함을 의미하는 말이고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부름에 순종하는 것까지 주님께서 하신 일임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말씀들은 복음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개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게 되고 믿고 순종하게 된 모든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복종하게 된 모든 사건들이 성령이 하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도의 할 일은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지 않아도 주님이 하신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혹 이 말을 듣고 '주님이 하시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 중심으로 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다 하신다는 말을 들었다면 '아하 내가 지금까지 한 것들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하신 일이었구나'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30년을 믿었든 40년을 믿었든 그것은 모두 성령이 하신 일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서 믿게 하신 것이라면 우린 결코 믿음의 세월을 내세워서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보실 때 오늘 믿은 자나 40년을 믿은 자나 믿음의 연수는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껏 내가 믿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40년간 내 힘으로 믿었다면 오늘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에게 '나는 40년을 믿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연수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음의 연수가 없는데 어떻게 믿음의 연수를 자랑합니까? 믿음의 연수가 있다면 주님께서 40년동안 나를 주장하시면서 일하신 것만 있을 뿐입니다. 즉 주님의 일만 있지 내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의 방식에 우리의 모든 것을 대입시켜 보면 내가 했다는 것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과연 행함을 주장하고 율법을 주장하겠습니까?
* 나는 없고 그리스도만 존재함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자' '해야 한다'라는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애당초 구원과 상관이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약속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아들로 인해서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고 믿고 순종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이 은혜라면 믿는 자로서 보여지는 모든 것에도 역시 우리 공로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성도는 내가 커다란 은혜의 손길에 붙들려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 것, 아들을 알게 된 것, 이것이 복음이며 영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아들을 아는 것은 개별적인 앎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신앙을 모두 교회와 연관지어서 강조하다보니까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사이비 신자만 잔뜩 양성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을 왜 욕하느냐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비록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설사 자기 집을 팔아서 헌금을 했다 하더라도 주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헌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당연히 구원받을 것을 받았다는 생각도 버리십시오. 당연히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이방인에 불과했던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입고 부르심을 입어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교회로 모이면서도 이러한 은혜를 너무 무시한 채 모입니다. 은혜가 담겨 있지 않은 예배가 예배일 수 없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내가 복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을 알게 되고 믿음이 있게 되고 순종케 된 모든 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되어진 기적임을 잊지 마시고 이 기적이 이방인에 불과했던 나에게까지 주어진 사실에 대해서 더욱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 아래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죽은 자입니다. 죄 중에 나의 중심으로 살던 나는 죽고 생명의 본질이신 그리스도로 다시 살아난 자입니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과 정신이 그리스도의 정신이고 가치관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만족하고 기뻐하며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육신 적이고 세상 적인 일 때문에 고민하고 속 상해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감사하며 사는 자를 복음을 깨달은 자요, 성령의 사람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