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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무의식, 욕망, 주체
이론
무의식, 욕망, 주체
--프로이트-라캉적 담론의 통찰과 맹목
도 정 일
경희대 교수, 비평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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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프렌치 프로이트'(French Freud)학파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심리기제를 연구하는 제한된 학문영역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또 그것은 정신질환 치료라는 실행 차원에만 매달리는 정신분석도 아니다. 한정된 연구대상과 고유의 과학적 연구방법, 전문적 훈련과정과 치료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이 프로이트를 조상으로 하는 정신분석학의 기본 성질이라고 한다면, 라캉의 이론과 실천은 정신분석의 이런 정의적 자질로부터 많은 점에서 이탈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통성의 기준으로 따졌을 때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정통'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라캉은 1964년 '프랑스 프로이트학회'를 창설하면서 정신분석이나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대거 회원으로 받아들여 정신분석의 영역을 천하에 개방하고, 자신이 개설한 소정의 대중적 공개 세미나를 거친 사람들에게는 분석가 또는 분석의(analyst)의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전문영역으로서의 정신분석학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의 '학회'가 국제정신분석학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고 그의 세미나도 "중단하라"는 요구를 받는 등 정통학계로부터 끊임없는 시비에 휘말리게 된 데는 우선 이런 사정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이단적' 라캉이 내건 줄기찬 구호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것이었고 정통파 학계 역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이름으로 그를 파문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현대 지성사의 한 에피소드가 된 이 분규는 '아버지(프로이트)의 이름'을 놓고 벌어진 친자확인 소동인가? 아비(기원)의 문제 또는 동일성의 문제를 놓고 가장 과격한 발언을 해온 사람 중의 하나인 라캉이 바로 그 아비의 이름 소유권 싸움과 의발계승 소동의 한 당사자가 됐다는 사실은 에피소드 이상의 어떤 시사를 던지는 일일까? 라캉이 '정신분석의 집'을 개방하여 역사학, 철학, 문학, 언어학, 해석학 등 정신분석과는 직접적인 학문적 연계가 없어 보이는 분야의 사람들까지도 포섭한 것은 이들 타영역에 정신분석의 통찰을 '제공'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 영역들로부터의 지식과 발견을 정신분석이 '흡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정신분석이 라캉에 이르러 여러 학문들 사이의 울타리를 허물고 지식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무국경의 특권적 자유통행자가 됨과 동시에 해석학, 시학, 철학, 언어학, 문화이론으로서의 정신분석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이 라캉적 정신분석의 야심만만한 제국주의적 유혹이다. ('경계 허물기'의 이 제국주의적 성격은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최근 우리의 일부 지식인들에게서 보듯 무턱대고 흉내내어서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비의 이름' 문제와 관련해서 보면 이같은 침투와 월경, 경계 삭제와 유혹이 이미 프로이트적 정신분석의 전통 자체에 그 내재적 근거를 둔 힘이고 전략이지 않았던가 하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라캉의 구호는 정신분석의 통합학문 내지 통합담론적 전략이 프로이트 담론의 진정한 성격이고 방법이었다는 주장을 깔고 있다.
라캉이 "돌아가자"고 말하는 그 프로이트는 후기 프로이트가 아니라 {꿈의 해석}(1900)에서 시작하여 {무의식}(1915)을 쓰기까지의 전기 프로이트이다. 전후기로 프로이트를 나누는 통상적 기준은 그가 인간의 정신심리기제를 '의식'(전의식 포함)과 '무의식'으로 나누어 파악했던 단계를 전기로 잡고, 이 양분체계가 후일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라는 삼분체계 속으로 통합되는 단계를 후기 프로이트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 구분은 무용하지 않다. 의식/무의식이라는 양분체계와 이드/자아/초자아라는 삼분체계는 프로이트의 절묘한 통합에도 불구하고 정신심리의 지형학으로서 각각 다른 성격과 논리를 가진 별개 체계라는 점이 무엇보다도 그 구분을 정당화한다. 라캉 자신도 바로 그 차이를 이용하고 있다. 라캉의 정신분석이 활용하는 것은 후기 프로이트에 근거하는 '자아심리학'이 아니라 전기 프로이트에게서 시작되는 '무의식의 심리학'이다. 그러나 전기 프로이트 또한 엄연히 '프로이트인 한' 라캉의 정신분석이 최소한 프로이트 집안의 부인할 수 없는 전통 일부를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에는 외면상 큰 잘못이 없어 보인다. 더구나 '무의식의 발견'이 프로이트적 혁명의 실질적 전재산이란다면 그 무의식의 전통으로 되돌아가려는 라캉이 오히려 정신분석의 본령에 더 충실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불행하게도 (어쩌면 다행히도)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로 분열된다. 라캉은 분명 무의식의 발견이라는 프로이트의 유산을 상속받고 있다. 그러나 그 유산을 어떻게 쓰는가는 프로이트의 문제가 아니라 상속자 라캉의 문제이다. 이 유산의 사용법, 정확히 말해 그 '증식 방법'에 있어서 라캉은 근본적으로 프로이트를 넘어서고 이탈한다. 재산증식은 '아들'의 의무인가? 라캉은 프로이트의 이름으로 프로이트의 담론을 재편, 수정, 확대한다. 더 엄밀히 말한다면 그는 자기 방식으로 정신분석을 재구성하고 다시 시작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이 라캉적 정신분석의 모험이며, 이 모험의 궤적을 그리는 일은 현대 서구 지성의 성취와 실패, 영광과 추문, 진실과 허위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이 글의 주제인 무의식, 욕망, 주체의 문제는 현대 서구 지식인들을 매료해온 화두들일 뿐 아니라 라캉학파를 둘러싼 정신분석의 정통성 시비도 아주 정확하게 그 세 가지 문제에 대한 라캉의 이론에서 발단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론이 다분히 생물학적 모형을 따른 것이라면 라캉의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구조론적 무의식 이론이다. 프로이트의 초기 정의를 따르면 무의식은 인간이 "스스로 의식하거나 의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정신심리 내용과 활동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하면 의식주체가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이 무의식이다. 그러나 라캉의 무의식 이론을 요약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무의식이 "언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의 확장(그러나 틀린 확장이 아니다) 결과는 "무의식은 언어이다"라는 것이다. 정의항과 피정의항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정의의 원칙을 따른다면 '무의식은 언어'라는 말은 곧 '언어가 무의식'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정상적 의사소통행위로서 언어는 의식적인 것이고 의식적 판단, 선택, 조직의 결과이자 대상이라는 것이 언어에 대한 일반적 사고라고 한다면 '언어가 무의식'이라는 라캉의 원리는 분명 과도한 혁신 같아 보인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주장인가? '욕망'의 경우에도 라캉은 유사한 혁신을 시도한다. 그의 욕망론이 지닌 여러 복잡한 우회로와 곁가지들을 다 제거하고 골자만 추리면 욕망은 '언어의 산물'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것은 플라톤 이후 지금까지 나온 서구의 수많은 욕망론 중에 가장 과격하고 급진적인 것이다. 이 주장의 과격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자면 '욕망=언어의 산물'이라는 규정을 한바퀴 돌렸을 때 나오는 당연한 추론("언어가 없으면 욕망도 없다")의 충격성을 생각해보면 된다. 이 역시 프로이트적 정신분석의 전통에 근거한 이론이고 주장인가? '주체'에 대한 라캉의 관점도 그의 무의식론과 욕망론의 이론적 연장이고 결과이다. 주체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탄생하는가?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는 라캉이 '말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에 의하면 주체의 탄생 설화는 개체가 자궁에서 떨어져나오는 분리의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함께, 언어 속에서,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것은 언어라는 질서 속의 주체이며 따라서 언어를 떠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주체가 탄생하고 주체로 선언되고 주체로 인정받는, 주체의 '전체적 우주'이다. 그 우주 바깥에 실물의 세계가 있지만 주체는 죽음의 순간에만 그 세계(라캉의 '실재계')로 들어갈 수 있다. 언어를 떠나는 순간 주체는 소멸한다. 언어는 주체가 탄생해서 소멸하기까지 그의 존재와 가능성의 조건 전부를 지배하는 질서이다. 이 주체 이론은 프로이트적 정신분석의 담론과 관계있는 것인가?
라캉의 영광은 무의식, 욕망, 주체의 문제를 현대 서구의 지적 담론들 속에 핵심적 화두로 제기한 데 있고, 그의 성취는 무의식의 확대, 욕망의 기원과 사회성 분석을 통해 '주체'에 대한 서구의 전통적 사고를 흔들어 놓은 데 있다. 이 영광과 성취가 라캉 혼자만의 것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하이데거,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데리다, 푸코와 함께 금세기 후반을 풍미한 지적 반란자 집단들의 추장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60년대 이후 20년간 그가 파리 지식인들을 유혹한 매력의 비결은 그의 어법과 통찰을 빌렸을 때 역사, 철학, 문학, 해석학, 문화비판이 매우 새로운 각도와 수준에서 일련의 신선한 어휘들을 구사할 수 있다는 환상적 확신을 심어준 데 있다. 히틀러적 방법 이외의 방식으로 파리를 유혹하려는 자는 먼저 그곳이 지적 담론에 있어서도 새로운 어법의 메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3백년도 더된 케케묵은 주체확립 선언이 넝마처럼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있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신선한 충격일 것인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내가 아니라 타자이다"(우리의 작가 이인화의 소설 제목은 그대로 라캉의 것이기도 하다)라거나 "나는 내가 아니로다"라는 선언은 진부한 동일성의 논리에 식상한 사람들을 한 순간 권태에서 해방시키고 시인을 매혹한다. 정신분석은 문득 시가 된다. 주체/객체의 이분법, 대상과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서의 주체론은 2천 6백년전 이오니아학파 이후 서양의 자연과학과 철학을 지배해온 관점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버티어 온 이 사고의 틀을 "객체(대상)란 환상이다, 고로 객체와 완전 분리된 주체라는 것도 환상이다"라는 한 마디로 격파하는 것은 주술과도 같은 마력을 갖고 있다.
최소한의 문학적 혹은 지적 훈련을 가진 사람이라면 라캉의 이런 언명들이 뒤집기와 패러디의 시학이라는 것을 금방 포착할 것이다. 그의 새로워 보이는 언명들이 수사학과 시학의 오래된 형식인 반전과 패러디의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그러나 문제는 라캉의 담론이 시가 아니라는 데 있다. 그는 시적 진술들만을 던진 사람이 아니라 그 진술들을 '과학적' (프로이트의 경우처럼, 그러나 프로이트와는 좀 다른 의미에서 정신분석은 라캉에게도 여전히 과학이며, '학문 중의 학문'이다) 체계 속에서 제시한 이론가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이론가로서의 책임이 있고 우리는 일단 그의 담론을 책임있는 이론으로 대접하고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이론서들을 읽기 어렵게 하는 자질은 그가 이론까지도 종종 신탁(oracle)의 구조(모호성, 비결정성, 이현령 비현령)로 전개한다는 점이다. 신탁은 그 끝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모든 폐쇄체계에의 경고이고 완결구조의 불가능성에 대한 환기이다. 이것이 라캉적 담론의 함정이다. 그 함정을 다루는 데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거기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라캉의 유령(그는 죽은 지 13년 된 유령이다--아니, 유령이 죽는가?)을 거꾸로 그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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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말하지 않고 의식되지 않으며 접근불가능'하다는 자질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무의식이 제 존재를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의식되지도 않으며 따라서 접근불가능하다면 무의식이라는 형태의 정신심리 활동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접근불가능한 것을 이론화한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이론화란 대상을 의식하는 적극적 행위인데, 의식되지 않는 것을 의식한다는 것은 언어적으로도 모순이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이론화할 때 봉착한 난점이다. 그가 찾아낸 돌파구는 의식의 연쇄에 나 있는 구멍, 간극, 균열을 통해 역으로 무의식의 존재에 도달한다는 것인데, 이 방법은 이미 학문사상 방법론의 한 고전적 사례가 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어서 구태여 이 지면에 반복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방법이 현대 비평담론에 끼친 영향의 크기를 인식하는 일은 중요하다. 예컨대 루이 알튀세르와 피에르 마슈레가 개발한 '징후독법'(symptomatic reading)의 방법적 목표는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의 재해석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의 발견이다. 이 경우 말하지 않는 것이란 텍스트의 의도적 은폐가 아닌 비의도덕 침묵과 생략, 텍스트가 의식하지 않는 구멍과 불연속과 간극(gap)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때 텍스트와 그 생산자(저자)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런 침묵, 생략, 구멍, 간극은 텍스트에 감추어진 무의식의 흔적이자 징후들이며, 징후독법은 이 징후적 구멍들에 주목함으로써 '텍스트의 무의식'에 도달코자 한다. 그러므로 징후독법의 방법적 절차는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을 통해 그것이 '말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고, 이 발견의 결과를 '텍스트의 진리'로 파악하자는 것이 그 방법의 목표이다. 이 절차는 거의 정확하게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추적할 때의 방법을 텍스트 읽기의 비평적 원리로 차용한 경우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데리다의 '흔적 읽기'와 푸코의 '침묵의 고고학', 리오 스트로스의 간극의 해석학 등등은 '균열을 열어젖히고 그 너머에 도달'하려는 프로이트적 방법의 현대적 원용이다. 그러나 그 균열을 넘어 무엇에 도달하는가가 프로이트적 방법을 원용하는 현대 비평담론들 사이에 결정적 차이를 낸다. 균열 너머에서 어떤 것(예컨대 '진리')에 도달하려는 이론가들이 있는 반면에, 그 균열이 열어젖히는 틈새 사이로 오로지 바닥 없는 '무간나락'(abyss)만을 보려는 이론가들도 있다. 후자의 경우 도달 지점은 없다. 나락 또는 심연이란 정확히 바닥의 부재(Abgrund)이기 때문이다.
이 현대적 맥락에서 본다면 의식의 틈새에서 무의식을 찾아내는 프로이트의 목표가 무간지옥에 빠지려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심연'과 매우 유사한 용어('어둠' 같은)로 무의식을 묘사했지만 그의 목표는 무의식의 심연에서 어떤 진실, 진리, 지식을 건져올리자는 것이었다. 그의 발견은 인간의 '의식'이 의식 주체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전하고 흠없고 연속적이며 전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만약 의식이 '무봉의 하늘옷'처럼 기운 자리 없는 완벽한 현상이라면 인간의 의식적 행위에 단절, 불연속, 실수, 망각, 당착 등의 괴이한 복병들이 끼어들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그런 완벽한 동질성의 연속적 사슬이 아니다. 의식주체는 의식의 가장 왕성하고 철저한 통제 속에서도 끊임없이 실수하고 망각하고 의도에 반하는 행위를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다. 예컨대 국회의장이 '개회' 선언을 한다는 것이 "성원이 되었으므로 이에 폐회를 선언합니다"라고 말할 경우 그 의식적 발화는 '개회'의 정반대 용어이자 그 발화의 의도에 반하는 '폐회'라는 실수어를 채택함으로써 연속성을 훼손당한 불완전한 발화가 된다. 그것은 '구멍 뚫린' 발화이며 비의도적 이질 요소의 개입 때문에 의도와 결과 사이에 '간극'이 발생한 문장이다. 문장을 하나의 연쇄고리(사슬)로 본다면 위의 발화는 연쇄의 고리 하나가 빠져버려 연결되지 않는 '깨어진' 문장이다. 실수를 의식하는 순간 의식주체는 "본의 아닌 실수였다"고 말함으로써 재빨리 그 발화의 사슬에 난 구멍을 메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적 정신분석의 심문이 시작된다. 의식주체가 자기도 모르게 실수했다면 그 실수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본의 아닌 말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은 본의 아닌 것을 말하게 하는 어떤 심리기제가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 아닌가? 또 의식주체는 '본의 아닌 실수'라고 말하지만 그 실수야말로 오히려 발화자가 공개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밀한 소망의 '변형된 표현'은 아닌가? 문제의 국회의장은 그 실수를 통해 "이게 개회가 아니라 폐회였으면 좋겠다"는 '의식되지 않은 본의'를 표현한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진담일 수 있다. 발화주체가 그 실수의 진담성을 부정하는 것은 의식의 저항 때문이다. 발화자는 이 저항 때문에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이 점에서 그는 부정을 통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의 의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진리' 또는 '진실'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있다. 그렇다면 무의식의 텍스트야말로 발화주체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의 진정한 텍스트일 수 있다. (더 과격하게 말하면, 의식주체가 모르는 것을 무의식은 알고 있다. 라캉이 무의식을 '진정한 텍스트'로 보고 이것을 프로이트적 통찰의 정당한 결론으로 내세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의식주체는 이 진정한 텍스트의 주인이 아니므로 이미 주체랄 수 없다. 무의식의 진리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라캉은 '심연파' 소속이 아니다.)
여기서 무의식의 텍스트라는 말은 일단 해명될 필요가 있다. 무의식이 말하지 않는다면 무의식의 텍스트란 가능한가? 무의식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적 행위와 의식적 지각의 과정에 난 구멍, 간극, 불연속, 단절, 실수 등의 균열은 의식만이 인간 정신심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무의식의 흔적들이며 무의식의 세계를 지시하는 표지판이다. 그러므로 이 구멍과 간극, 실수, 망각, 실언 등등은 엄격히 통제된 의미에서 '무의식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꿈은 의식의 해석학이 통합해낼 수 없는 대표적인 무의식 언어의 텍스트이다. 꿈의 주인이 자기 꿈을 풀이하지 못하는 것은 꿈이 소통가능한 의식의 언어가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이다. 꿈은 알 수 없는 문법으로 되어 있다. 그 문법은 의식의 언어에 필수적인 논리적 연결고리(그러나, 그러므로, 때문에, 만약)를 갖고 있지 않고 분명한 접속사(그리고, 그래서)를 공급하지 않으며 시간질서 또한 갖고 있지 않다. ( 를테면 꿈은 '과거'를 갖지 않는다. 과거시제가 없기 때문에 모든 사자(死者)는 꿈 속에 살아 있다.) 연결사, 접속사, 시간질서의 '부재' 때문에 꿈은 의식의 해석학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 양식, 곧 무의식의 언어이다. "논리적 법칙은 무의식의 영역에서는 아무 영향력도 없다. 무의식은 '비논리의 왕국'이다." 무 식의 텍스트 속에서는 상호배타적 반대/모순의 요소들이 배타성과 모순성의 인식없이 (인식한다면 그것은 이미 의식이므로) 상호공존한다. 무의식의 텍스트에서는 어떤 요소가 실은 그 반대 요소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텍스트는 누군가가 의식의 언어로 '번역'해주지 않는 한 읽어낼 수 없는 수수께끼(rebus)이다. 그러나 그 텍스트를 번역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의식의 과정을 지배하는 법칙, 곧 무의식 언어의 문법을 알아야 한다.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시도한 가장 중요한 작업은 꿈이라는 수수께끼 텍스트를 의식 언어로 번역하는 데 필요한 무의식의 문법(예컨대 사물 표상의 원칙, 응축과 전치)을 길거리 해몽가의 방식이 아닌 과학적 방법으로 구성해내는 일이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했다고 할 때의 그 '발견'의 정확한 의미와 중요성은 그가 무의식의 존재를 처음 발견했다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의 존재 가능성은 이미 그 이전부터 논의되고 있었다) 무의식 과정을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그 과정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구성해냈다는 데 있다.
흔히 간과되기 쉬운 질문 하나가 여기서 제기된다. 꿈, 실수, 농담, 망각, 실언 등등이 무의식의 언어라는 사실의 발견은 무엇 때문에 중요한가? 무의식을 '읽어내는' 일은 도대체 중요한 것인가? 기독교 구약 {다니엘서}와 {출애굽기}는 해몽가의 재능이 생명보전과 영달에 연결됨을 보여주는 오래된 문헌이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청년 다니엘은 그 곳 왕 네브갓네살의 머리를 어지럽힌 '밤의 비전'을 풀어주어 그의 재상이 되고, 이집트에서 고생하던 요셉 역시 파라오의 이상한 꿈 텍스트를 풀어 7년 가뭄에 대비하게 함으로써 그의 신임을 획득한다. 그러나 비엔나의 심리학자가 왕상의 꿈도 아닌 보통 사람들의 '개꿈'을 풀어내느라 평생을 바치고 그의 해몽요결이 세계 지성사의 획기적 업적으로 평가받게 된 것은 무슨 소동인가?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대답은 인간의 꿈(무의식의 무대)이 개꿈이 아니라 그의 현재과 과거(그러므로 미래까지도), 그리고 그의 행복과 불행을 쥐고 흔드는 '역동적 욕망'의 비밀을 숨겨놓고 있는 텍스트라는 것이다. 욕망은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이 추동력의 전개, 억압, 변모의 제양상과 과정은 인간의 삶 전체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 무의식의 세계가 이처럼 욕망의 역동성에 관계되고 그 욕망의 비밀을 숨겨둔 장소라면 그것은 무시해도 될 미미하고 수동적인 정신심리의 영역이 아니다. 무의식 세계의 비밀을 간과한다면 인간의 의식세계, 의식적 행위와 지각의 세계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무의식의 이 '역동적 힘'에 주목한 것이 프로이트의 중요한 공로이다. 그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그 법칙들을 찾아냈을 뿐 아니라 무의식 영역의 힘을 처음으로 강조하고 이론화한 것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과 욕망, 또는 무의식의 욕망을 통합적 심리지형도에 담게 되는 것은 이드와 무의식을 접목하는 후기 이론에 와서이다. 의식/무의식의 이분체계를 발전시켰던 그의 전기 이론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각각 '자질의 차이'를 지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드/자아/초자아의 지형학을 완성하게 되는 후기 이론에서는 무의식과 이드가 하나로 통합되고 자아와 전의식이 통합된다. 이 통합체계는 의식/무의식의 변별적 자질을 유지시키면서 이드, 자아, 초자아 사이의 관계를 단순한 질적 차이 아닌 '힘의 역학관계'로 기술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지형도를 제시한다. 이 지형도는 상호 자율성을 지닌 정신심리 과정들의 정적 분류표가 아니라 욕망의 요구와 조정, 그것의 억압과 허용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를 보여주는 역동적 갈등의 무대이다. 이드는 쾌락원칙에 지배되는 '무의식적 이드'이며 개체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는 충동적 욕망의 덩어리이고, 초자아는 '아버지의 권위'(거세위협과 공포)를 내화한 심리 내부의 금제자이다. 자아는 이 두 개의 내부 세력들 사이에서 양자의 요구를 협상, 조정한다. 그러므로 이드, 자아, 초자아의 3자 관계는 절대적*질적 관계가 아니라 어느 쪽의 힘이 더 강한가에 따라 각 과정의 소속 자체가 달라질 수 있는 역학적 관계이다. 이 역학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힘의 양적 분포라는 에너지의 경제학이며, 따라서 3자는 프로이트 자신의 표현대로 경제적 갈등관계에 있다. 자 를 파산시킬 수 있는 것은 이드와 초자아 모두이다. 자아는 자신의 정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현실에 매달리지만 이드와 초자아로의 강한 압력 때문에 그 자율성과 조직이 붕괴될 때 외부세계의 현실로부터 유리되고, 그 결과가 바로 정신병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당면 관심사는 이드, 자아, 초자아의 역관계라기보다는 무의식 이드 자체의 욕망과 그 억압의 결과에서 발생하는 역동성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무의식의 욕망은 자아와 의식에 의해 억압당한 욕망이며 성취와 충족의 기회를 놓친 욕망이다. 그러므로 억압된 욕망이 '흔적'을 남기는 곳은 무의식 이드이다. 이 점에서 보면 무의식은 '억압된 욕망, 억압되었으나 죽지 않고 흔적으로 남아 언제건 치밀고 나올 수 있는 항구하고 무시간적인 욕망의 잠복 장소'이다. 억압된 욕망은 부단히 성취의 기회를 엿보고, 자아와 의식의 전복 지점을 탐색한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것의 회귀'(return of the repressed)이다. 이 역동성은 좌절된 욕망이 그 좌절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프로이트에게 '억압된 욕망'이란 주로 유년기의 좌절된 '성적 욕구'이지만, 후일 프로이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Thanatos)의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생명, 쾌락, 사랑을 추구하는 에로스의 힘(리비도)을 문명(현실원칙)에 억압당하는 욕망으로 규정함으로써 개인사적 욕망을 사회적*우주적 차원으로 확대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역사의 과정에서 억압되고 좌절된, 그러나 죽지 않고 부단히 그 성취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정치적 무의식'(the political unconscious)으로 명명하고 이를 '필연에서 자유로 나아가려는' 집단서사(역사)의 추동력으로 이론화한 것은 프로이트적 욕망의 리비도를 정치적*역사적 층위로 확대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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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무의식'을 염두에 두고 미리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일단 짚고 넘어갈 것은 프로이트가 의식적 지각의 불완전성을 지적하고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해서 그게 곧 '의식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부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인 1938년 [정신분석 개요], [정신분석의 기본적 가르침] 등 자기 이론과 실천을 최종 점검하는 일련의 글들에서 의식의 중요성을 부단히 강조한다. 정신분석이 무의식의 특징과 법칙을 찾아낸 것이 "인간에게 있어 의식의 중요성이 상실됐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식은 여전히 우리의 길을 밝혀주고 정신생활의 해명되지 않은 어두운 부분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하나의 등불이다***정신분석에서 우리가 수행한 과학적 작업은 무의식의 과정들을 의식적 과정들로 번역해내고 그럼으로써 의식적 지각에 나있는 구멍들을 메우는 데 있다." 이 발언은 정신분석의 목적이 인간의 정신생활을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어넣자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과정들의 의식적 해명을 통해 의식적 지각 자체의 불완전성을 메우자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정신장애에 대한 치료술로서의 정신분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신장애란 본능적*무의식적 욕망의 기제인 이드와, 이 이드의 요구를 억압하는 초자아, 그리고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양자의 요구/금지를 조정, 협상하는 자아 등 세 개의 세력권 사이에 '힘의 불균등'이 있을 때 발생하는 '내란'과 균형상실의 결과이다. 이 균형상실은 종의 보존과 개체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자아의 약화를 가져온다. 약화된 자아란 외부세계로부터의 자극에 대한 적응력과 대응력을 상실한 자아이며, 내부적으로는 무의식 이드의 충동적 요구에 대해서 또는 초자아의 명령 앞에서 조정력과 저항력을 잃어버린 자아이고 이것의 구체적 표현이 신경증("신경증은 자아에 발생한 교란이고 혼란이다"), 정신병, 분열증 같은 정신장애이다. 약화된 자아는 균형회복의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를 돕기 위해서는 외부 세력의 지원이 불가피하고, 이 외부 세력이 정신분석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의 치료적 과제는 마치 트로이전쟁 때 올림푸스 신들이 개입하듯 치료자(분석의)가 내란에 개입하여 환자로부터의 권위의 이전(이른바 '전이')을 받아 약화된 자아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자 의 약화는 무엇보다도 '의식과정의 약화'이다. 따라서 자아의 균형회복은 의식의 파괴나 교란이 아닌 의식의 균형성 회복이 된다. 이 때 의식의 균형성이란 '막강한 자아'를 의미하지 않는다. {문명과 그 불만}에서 프로이트가 강조하듯 막강한 자아에의 욕망은 막강한 이드, 막강한 초자아에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반문명적'이며 그 자체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이 논평은 (역시 라캉을 염두에 두고) 무의식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입장 해명을 불가피하게 한다. {꿈의 해석}이 지닌 놀라운 통찰의 하나는 분명 무의식의 언어적 성질에 관한 프로이트의 암시이다. 그는 꿈이 무한히 많은 '언어적 상징물'(현대 용어로는 '기호')들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이 상징물들이 지니는 이중의미("상징물 A는 동시에 B를 의미한다")와 모순의미("A는 그 반대인 B이다")가 고대어와 현대어에서 발견되는 언어적 현상과 일치한다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고대 이집트어에서 강/약, 밝음/어둠, 높음/낮음 등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어휘들이 애초에는 분화되지 않은 동일어간에서 출발했고, 의미분화의 정도가 높은 라틴어에서도 '높이'(altus)가 동시에 '깊이'의 뜻을, '신성한'(sacer)이 동시에 '저주받은'의 의미를 갖는다. 데 다등이 주목한 이후 유명해진 프로이트의 에세이 [괴이한 것](The Uncanny)은 현대 독일어 어휘 '하임리히'(heimlich)가 내포하는 이중의미의 관찰에서 출발하여 상당한 시학적 통찰을 내놓고 있는 흥미로운 글이다. (데리다등이 이를테면 희랍어 '파르마코스'(pharmakos)에 '약'과 '독'이라는 반대의미가 결합되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언어의 비동일성과 차연을 얘기하게 되는 것은 이런 통찰의 원용이다.) 프로이트의 관심은 'A가 A를 말하지 않고' 또 'A를 말하면서 B를 의미'하는 이런 언어현상이 꿈의 상징물(꿈재료)들에서 보는 모순성과 비동일성(예컨대 꿈 속의 양말은 양말이 아니라 여자, 어머니, 여성성기일 수 있다)의 원칙을 해명함에 있어 퍽 유용한 자료가 된다는 데 있었다. 프로이트가 주목한 언어현상은 말할 것도 없이 언어의 수사적 성질과 조직법을 대표하는 은유와 환유의 기제이다. {꿈의 해석}에서 꿈이 만들어지는 두 개의 대표적 기제로 제시된 응축(condensation)과 전치(displacement)도 은유/환유와 반드시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언어구조적 성질을 갖고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꿈이 어째서 그 자료의 조직에 언어적 기술을 동원하는가에 대한 프로이트의 설명은 검열과 왜곡에 관한 것 외에는 없다. 다만 그는 꿈이 이드로부터 만들어지지만 자아로부터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관찰을 남기고 있는데, 이로부터 유추한다면 그는 자아의 의식적 언어규칙이 이완된 상태로 꿈의 조직에 개입하는 것으로 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언어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 모든 관심을 충분히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언어는 무의식이 아니며 무의식이 '언어적 구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앞서 '엄격히 통제된 의미에서'라는 단서를 붙여 설명의 편의상 '무의식의 언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이는 프로이트 자신의 표현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무의식은 정확히 말해 언어적 로고스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이다. 무의식의 욕망이나 충동이 비논리성, 무시간성, 모순성을 배제하여 논리성과 일관성을 획득하는 것은 전의식과 의식의 개입에 의해서이다. 논리와 일관성의 책임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는 그 무의식의 영역이 의식영역을 상대로 욕망을 제기하는 과정을 프로이트는 '일차과정'이라 부르고 무의식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의식화'되는 과정을 '이차과정'이라 명명했는데, 일차과정은 언어 이전이며 이차과정만이 언어화가 가능해지는 과정이다. 무의식이 '말하지 않는' 것은 무의식의 요구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의식주체가 허용할 수 있는 이성적 언어의 형태로 그 요구가 제기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더 간단히 말하면, 언어로 표현된 욕망은 이미 의식화된 욕망이며, 의식화된 요구와 욕망은 무의식의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무의식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이는 언어가 무의식과 무관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언어가 무의식과 관계 없다면 무의식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무의식의 흔적을 지닌 의식적 행위라는 입장은 언어가 곧 무의식이고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주장과는 같지 않다. 프로이트의 관점을 연장해볼 때 언어 곧 무의식이라는 주장이 수용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 경우 무의식을 판별할 길이 없게 된다는 데 있다. 무의식을 판별할 수 없다면 무의식의 이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 이론에서 욕망은 언어의 산물이 아니다. 무의식 이드를 구성하는 욕망의 명세는 생물학적 욕구(need), 본능적 충동(instinct), 쾌락원칙, 비본능적 추동(impulse/drive/Trieb), 소망(wish), 유전적 잠재소망 등이다. 이 명세는 프로이트의 '욕망'이 생물학적 본능과 생래적 욕구, 문화적 후천적 충동과 추동, 소망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본능'(Instinkt)과 '추동'(또는 충동, Trieb)을 어떤 때는 유사한 의미로, 어떤 때는 구별되는 용어로 사용했는데, 이 구분은 그의 체계에서 이론적 일관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가 욕망 속에 본능적 욕구를 포함한 것은 종의 보존, 개체의 생존, 자극과 반응 등등의 생물학적 모형을 자신의 이론에 도입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적 욕망'이 그의 욕망론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에로스와 타나토스, 죽음충동(death drive) 등의 개념도 생물학적 욕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욕망론을 종과 개체의 보전이라는 점에서 보면 생물학적 본능에 가장 가까운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은 이드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이다. 왜냐면 죽음의 위험을 인지하지 않은 채 충동적 요구를 내놓는 것은 이드이고 이 요구를 개체의 안전성 여부에 연결시켜 허용 또는 억압하는 것은 자아이기 때문이다. 이는 프로이트의 자아개념이 라캉적 주체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자아의 분열'이라는 것도 현실적응을 위한 정신병리적 형태의 하나이다. 현실에 대한 두 개의 모순된 지각내용을 지니면서도, 그리고 그 상반된 내용을 명확한 언어적 진술로 표현하면서도 모순의 인지를 거부하는 것이 자아분열의 전형적 증상이다. 프로이트는 자아가 이드의 요구와 초자아의 명령을 중재하지 못하고 양쪽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 주어야 할 때 이런 분열이 발생하며, 그 분열을 인지하는 것은 자아의 위기가 되기 때문에 자아는 모순의 인식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러므로 분열된 자아는 그 분열을 통해 자기를 보존한다. 의식을 모순인지의 능력이라 할 때 분열된 자아는 더 이상 의식의 중심부가 아니다. 또 그는 상반된 언어적 진술을 내놓고도 모순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경우 언어가 의식적 활동이라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 자체의 무의식적 언어이며, 정신분석의 치료는 이 언어의 모순을 인지하게 하여 정상성을 회복하게 하는 일이 된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자아분열은 분열된 언어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분열된 언어는 자아가 '도피'를 통해 자기를 보전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의 결과이고 도피의 수단이다.
그러나 이 논의는 동시에 프로이트의 욕망론을 일관성있게 수습하기가 지난한 작업임을 보여준다. 그 난점은 무엇보다도 프로이트가 생물학적 욕구와 충동을 비생래적 문화적 욕망이나 추동으로부터 명확히 갈라놓지 않은 데 연유한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욕망의 성질과 생성과정에 대한 의문을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 분열자아의 경우에서 보듯 자아 자체가 무의식에 빠질 수 있다면 무의식은 이드만의 것이 아니라 자아의 것일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초자아의 상당부분까지도 무의식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러나 그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이 이드/자아/초자아라는 프로이트 자신의 지형도를 위협하면서 많은 부분을 해명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둔다. 일단 욕망론의 관점에서 보면, 라캉은 프로이트 이론에 나타나는 이런 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시도를 해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라캉이 욕구, 요구, 욕망 사이에 분계선을 긋고 욕구(need)는 '생물학적 욕구'로, 요구(demand)는 '사랑의 요구'로, 욕망(desire)은 '타자의 욕망'으로 각각 규정한 것은 그런 시도의 일부이다. 그러나 '일부'이긴 하지만 이 시도는 실상 프로이트와 라캉의 체계 사이에 발생하는 결정적 차이, 이탈, 확대의 실마리를 쥐고 있다. 예컨대 그것은 라캉이 프로이트의 다분히 생물학적인 분석체계를 구조론적 체계로 이행시키게 되는 이론적 요청을 설명할 뿐 아니라 그가 왜 이드/자아/초자아라는 프로이트의 지형학을 사실상 내던지게 되는가, 언어와 무의식, 언어와 욕망이 왜 라캉에게 정신분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으로 보이게 되는가 등등의 핵심적 문제에 연결된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주체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경계 자체가 모호해지는 이른바 '주체의 현상학'에 대한 프로이트의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라캉적 의미의 '언어적 주체' 개념은 그에게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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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인간을 '욕망하는 주체'로 규정했을 때 그가 말한 '욕망'은 자연존재로서의 인간이 정글의 여타 사촌들과 공유하고 있는 생물학적 욕망과는 관계 없다. 인간은 동물과 다른 자의식의 주체이다. '나'가 자의식의 주체이듯 타자도 자의식의 주체이다. 자의식 주체 '나'는 또다른 자의식의 주체인 타자와 대면하고 타자의 인정을 받음으로써만 '나'를 확인한다. 그러므로 자의식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인정'을 받아 '나'를 확인하려는 욕망이며, 이는 모든 자의식 주체들의 욕망이므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이 된다. 욕망의 대상은 타자가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이 갖는 특성이다. 동물은 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지만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 대상으로 한다. 자연대상이나 물건을 향한 욕망(소비와 개체보전을 위한)은 특별히 인간적 욕망이랄 수 없다. 생존을 위한 대상 소비의 수준을 벗어나 타자에게 주체로 인정되는 순간에만 인간은 자연존재의 차원을 넘어 자의식적 존재(인간)의 차원에 올라선다. 따라서 주체로서의 그의 존재는 다른 자의식 주체인 타자의 인정을 받지 않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인간은 '인정받기 위한 사투'에 돌입하고 이 투쟁의 결과 승리자는 주인이 되고 패배자는 종이 되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생겨난다. 승리한 주인은 종으로부터 인정받지만, 종은 주인에게서 타자로 인정되지 않는다. 패배한 종은 이미 인간으로서의 위신을 상실한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주인'에게는 운명의 역전이 발생한다. 승리의 결과 그는 타자를 노예(물건)의 위치로 끌어내리게 되고, 따라서 그는 인간 아닌 '물건'으로부터 자기가 주체임을 인정받아야 하는 기묘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그의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그는 욕망하는 주체이기를 정지당한다. 이 순간부터 인정을 위한 투쟁에서 주인은 제외되고 종이 그 변증법적 서사의 주인이 된다.
헤겔의 이 인간학적 욕망론은 르네 지라르('욕망의 삼각형')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라캉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그 중요성은 라캉이 욕망론을 발전시키면서 헤겔의 이 대목을 원용하고, 특히 {정신현상학}을 탁월하게 읽어낸 알렉산드르 코제브에게 빚진 바가 많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 겔 원용에도 불구하고 라캉의 '타자'는 헤겔의 '타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헤겔의 것이 동일성을 향한 타자라면 라캉의 경우는 '차이'로서의 타자이다.) 헤겔이 말한 '인정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는 라캉이 욕구, 요구, 욕망을 각각 구분하여 주체탄생과 욕망생성을 이론화하기까지의 과정을 해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설명 수단을 제공한다. '욕구'(need)는 자연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생물학적 대상소비의 필요성이다. 그러므로 욕구의 경우에는 그것이 추구하는 '물적'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의 획득과 소비를 통한 즉각적 '충족'이 가능하다. 그러나 '요구'(demand)는 물적 대상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헤겔의 '인정의 욕망'은 물질 대상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타자로부터의 '인정'(recognition)을 획득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생물학적 욕구의 대상이 갖는 물질성이나 물적 충족의 가능성을 초월한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요구'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인정 욕망은 라캉의 '인정에 대한 요구'로 옮겨놓을 수 있다. 이 요구는 대상으로부터 물질성을 박탈하고 물적 욕구충족의 공여 가능성을 빼앗음으로써 그 대상을 '타자로 구성'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인정'이라는 '선물'(gift)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는 이 선물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면 그 역시 그 선물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인정받기 위한 사투'란 인정이라는 선물을 획득하기 위한 싸움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요구는 선물을 쟁취하려는 '욕망에의 길'을 열어놓는다. 그것은 주체로 하여금 선물을 획득하려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함으로써 그를 욕망의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싸움의 결과는 어찌 되는가? 타자를 복속시키는 순간 주체는 욕망하는 타자를 상실한다. 이 상실은 곧 욕망하는 주체 자신의 욕망이 그 욕망 대상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그의 욕망은 좌절되고 충족불능의 것이 된다.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욕구는 충족대상을 추구하고 요구는 욕구의 충족대상을 타자로 만들어 욕망에의 길을 열지만 그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이 헤겔적 우회로를 통해 우리는 라캉의 언어적 주체와 무의식적 욕망의 비밀에 한결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이 접근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대상(사물과 객체의 두 의미에서)의 사물성이 언어기호의 기표(signifier)로 바뀐다"는 점에 주목하는 일이다. 언어(기표)는 사물의 사라짐(구조-기호론자들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는 '사물의 죽음')을 전제한다. '욕구'의 충족 대상은 구체적 물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표적 존재와 다르고, 따라서 욕구는 언어 이전의 문제이다. 라캉이 욕구를 언어 이전의 유아기적 욕망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유아는 분명한 언어로 자신의 원하는 바를 표현하지 못한다. 분명치 않은 울음과 보챔이 그의 욕구 표현방식이다. 그러나 욕구와 달리 '요구'는 "나는 원한다" 식의 분명한 언어(articulation)로 표현된다. "나는 원한다"에서 주목할 것은 '나'의 탄생이며 '원한다'라는 요구동사의 구사이다. 요구를 표현하는 언어는 요구의 주체와 술부를 명확히 드러내고, 이것이 욕구와 요구를 갈라놓는 중요한 차이이다.
그러므로 헤겔적 인정의 욕망을 라캉적 '인정에의 요구'로 읽었을 때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욕구의 주인이자 대상일 수 있는 자연존재가 '요구'에 의해 그 사물성을 잃으면서 언어 기표적 존재로 바뀐다는 점이다. 육체를 가지고 현실에 실존하는 인간의 생물학적 구체성은 '나'로 표기되었을 때의 기표 '나'(I)와 같지 않다. (라캉은 언어적 주체 아닌 욕구의 주인과 언어로 자기를 선언하는 요구주체를 구별하기 위해 불어의 '므와'(moi=욕구의 주인)와 '저'(je=요구주체)를 활용한다.) 요구가 제기되는 순간 인간 존재는 자연의 세계를 떠나 언어적 주체(헤겔의 자의식 주체)로 올라서는데, 이것은 그의 육체성이 순수 기표인 '나'로 전환하는 시점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연적 사물성의 질서 속에서 인간인 것이 아니라 언어기표의 성질을 획득할 때에만 인간(주체)이 된다. 요구는 기표적 주체만을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기표적 존재로 전환시킨다. 사물질서가 '사라지는 순간'에 언어적 상징질서가 대두하고 주체와 타자는 함께 언어질서 속에 들어옴으로써 양자 모두 언어라는 기표의 사슬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들은 다시는 그 사슬의 바깥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또 헤겔적 인정의 요구에서 주체가 요구("나는 원한다")하는 것은 구체적 물질대상(예컨대 상대의 육체)이 아니라 타자의 '인정'이며 이 인정 역시 사물 아닌 언어적 선물의 형태로만 주어질 수 있다. 이 인정을 '사랑'으로 바꾸면 요구를 '사랑에 대한 요구'(demande d'amour)라고 말하는 라캉의 규정은 쉽게 이해된다. 사랑의 요구가 추구하는 것은 사랑의 '약속'(라캉의 표현으로는 '사랑의 증거'(en preuve d'amour)이며 인정과 마찬가지로 약속도 언어적 선물로만 주어진다. ( 성행위란 없다"라는 라캉의 과격한 발언도 이 문맥의 것이다.) 그러나 인정이라는 선물이 타자의 것이 아니듯이 사랑의 약속도 타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타자 역시 그 약속이라는 선물을 원하고, '원한다'는 그가 그것을 '갖고 있지 않다'라는 결핍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 선물도 이미 기표의 사슬 속에서 기표의 형태로만 주어진다. 이것은 요구의 대상 자체가 이미 기표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요구의 주체, 타자, 요구대상(선물)은 모두 기표적 존재로 전환한다.
이 설명은 요구가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고 언어적 보상을 요구'한다라거나 욕망은 요구에 의해서만 언어적 표현(articulation)을 얻고 그러므로 "요구가 욕망에의 길을 연다"는 라캉의 부적 같은 언명들을 비교적 손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같은 언명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욕망이 언어에 의해 만들어지고 언어 속에서 추구되며 언어 속에서 좌절한다는 주장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요구가 욕망에의 길을 연다는 주장을 라캉은 "요구에서 욕구를 제(soustraction/subtraction)했을 때의 차이가 욕망이다"라는 말로 공식화하기도 하는데, 이 충족을 추구하는 욕구가 언어적 요구로 표현되는 순간 그 욕구는 이미 충족의 가능성을 상실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욕구와 요구 사이의 차이이자 양자의 분열(Spaltung)이다. 라캉의 이 부분 이론화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프로이트에서와 마찬가지로 라캉에게도 '어머니'는 유아의 원초적 갈구 대상인데, 두 사람의 관점을 갈라놓는 지점은 어머니가 프로이트 이론에서는 '욕망'의 대상이고 라캉의 이론에서는 '욕구'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프로이트의 경우 어머니에 대한 유아의 '욕망'은 이디푸스적 단계에서 유아가 근친상간의 금제를 명령하는 아버지의 법에 묶이고 그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동일화의 순간부터 억압되어 무의식의 욕망으로 내려가는 반면, 라캉의 이론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욕구'가 언어적 요구로 표현되는 순간에 '욕망'이 발생한다. 언어적 표현인 요구는 "나는 어머니를 원한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유아의 욕구 대상은 어머니지만, 그의 언어적 요구는 이 대상을 직접 지시하지 못하고 반드시 '어머니를 뺀' 형태로 표현된다. 이 이 '요구에서 욕구를 뺀다'는 것의 의미이고 요구와 욕구 사이의 차이이며, 이 차이가 욕망이다. 더 쉽게 말하면 욕구가 언어적 요구에 의해 '부정'되고 욕구대상이 환유로 전환할 때 욕망이 발생한다. 이 부정과 환유는 언어의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언어의 산물이다.
언어의 산물로서의 욕망은 충족될 수 있는가? 요구는 "나는 어머니를 원한다"의 '어머니'가 상실되고 난 빈 칸("나는 ______을 원한다")에 어머니를 대신할 환유적(metonymic) 대체물을 넣는다. 그 빈 칸에 들어갈 수 있는 환유는 무한수이다. 그러나 이 무한수의 환유들은 이미 대체물(substitutions)들이며 반드시 기표의 형태로 주어지고 표현되므로 그것들이 욕구의 충족 대상인 어머니와 일치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욕망은 요구로 표현되는 한 충족되지 않고, 또 반드시 요구로 표현되어야 하므로 충족되지 않는다. 요구는 어머니를 뺀 자리(데리다의 '지우기'와 유사)에 하나의 환유를 집어 넣지만 기표로서의 이 환유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현존(presence)이 아니라 부재(absence)이며 이 부재의 공간에 들어오는 또다른 기표(어머니를 대신하는 언어적 선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불일치의 순간에 발생하는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 환유적 기표의 사슬 위를 영원히 떠돌게 된다. 하나의 환유적 대체에 만족하지 못한 욕망은 또다른 대체기표를 욕망하게 되지만 그 욕망은 끊임없이 좌절하고, 이 좌절 때문에 욕망은 계속된다. 욕망은 환유라는 기표의 형태를 떠나 존재하지 않으므로 '욕망은 곧 환유'이다. 환유는 기표이고 하나의 기표는 다른 기표와의 차이에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욕망은 정확히 언어기표와 기표 사이의 차이이자 그 차이의 산물이다. 차이란 동일화의 불가능성이므로 차이로서의 욕망은 충족(동일성의 획득)의 불가능성이 된다.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욕망의 충족은 '영원히 연기'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비언어적 형태로 존재하는 프로이트적 무의식의 욕망이 라캉에 와서 어떻게 언어적 욕망으로 바뀌는가를 보게 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욕망은 이드의 어둠 속에 이름표 없는 충동의 형태로 잠복해 있으면서 끊임없이 의식적 언어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라캉의 욕망은 처음부터 이름표(환유기표)를 달고 언어기표의 사슬 위로 나와 있다. 언어가 라캉에게 무의식이 되는 이유는 이것이다. 프로이트적 무의식 과정은 꿈의 이미지에서 보듯 사물표상(thing-representations)의 법칙을 따르고, 이 사물표상이 언어표상(word-representations)으로 전환되는 이차과정은 무의식 아닌 의식의 법칙을 따른다. 그러므로 무의식과 의식은 각기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일차과정의 사물표상에 등장하는 이미지들 자체가 이미 언어적 기표이다. 언어적 기표이므로 그것들은 언어를 조직하는 것과 동일한 은유적 선택과 환유적 배열의 원칙에 따라 조직된다. 무의식은 언어와 다른 어떤 구조원칙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이는 무의식을 구조화하는 것은 곧 언어라는 말과 같다. 라캉이 보기로는 프로이트가 무의식 과정의 조직원칙으로 제시한 응축과 전치란 이미 은유적 선택과 환유적 배열이라는 언어 구조화의 원칙들이며, 라서 무의식의 언어적 구조를 말하는 것은 프로이트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다. 무의식이 언어적 구조를 갖고 있다면 무의식의 구조와 언어구조는 동일한 것이고, 이 규정은 교환법칙상 '언어는 곧 무의식'이라는 주장으로 귀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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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충족불능성에 대한 라캉의 이론은 헤겔의 욕망론 중에서 '동일성의 확보'라는 변증법의 최후 순간만을 제외한다면 인간에게 과해진 '저주'로서의 욕망을 말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 그러나 양자의 경우 유사성보다는 차이가 더 중요하다. 말하자면 변증법적 최종 통합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욕망론을 전개하려는 것이 라캉의 기획이며, 이것은 닫힌 체계에 대한 거부가 그의 이론적 충동이었음을 말해준다. 그가 이 충동을 이론적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편으로는 구조언어학의 모형에 입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모형을 과감히 수정한 탈구조론적 노력의 결과이다. 기호를 기의/기표로 분리한 소쉬르 언어학은 라캉에 와서 기호의 '분열'이론이 되고, 이 분열은 기표가 '영원히' 기의와 만날 수 없을 뿐더러 기의 자체의 영원한 상실론, 다시 말해 기의란 또다른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론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라캉이 데리다와 공유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보았듯 라캉의 언어학은 '기표 중심'의 언어론이고 그의 욕망론은 전적으로 이 기표중심이론에 입각해 있다. 욕망이 이미 기표라면 욕망의 주체인 인간도 기표의 주체, 곧 기표이다. 기표의 성질이 기의로부터의 분열인 것과 마찬가지로 주체의 성질도 '자아'로부터의 분열이다. '나'라는 것이 기표적 존재인 한 발화주체인 '나'는 발화된 것으로서의 기의적 '나'로부터 분열되어 있다. 주체가 기표적 주체인 한 그는 기의로서의 '나'를 만날 수 없고, 이 조우 또는 통합의 불가능성이야말로 바로 기표로서의 주체의 존재 가능성이다. 마찬가지로 욕망의 충족불능성이 바로 욕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통합불능성과 충족불능성은 인간의 저주가 아니라 주체를 존재하게 하고 욕망을 있게 하는 언어의 선물--언어의 축복이 된다. 라캉에게 언어는 저주이자 축복이다.
욕망론과 주체론에 국한한다면 라캉의 이론은 데리다, 푸코의 탈구조주의와 유사한 균열추구의 충동에 지배되고 있다. 이 충동은 이성과 의식이 지배하는 담론구조와는 다른 형태의 어떤 새로운 담론의 가능성, 새로운 형태의 이성성을 제시해보려는 열정이다. 그러나 이 종류의 열정이 궁극적으로 부딪히는 것은 뛰어넘을 수 없는 이성의 울타리이다. 만약 라캉식으로 언어가 무의식이 된다면, 여기서 희생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 그 자체이다. 왜냐면 인간의 이성성과 의식성을 대표하는 언어적 로고스 자체가 무의식이 될 경우 모든 것은 무의식이 되고, 모든 것이 무의식이 된 세계에는 따로 무의식이랄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세계는 '무의식의 왕국'이 된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추구했던 정신분석의 목표도 과제도 아니다. 프로이트의 기획은 분명 의식중심의 담론들에서 무시되어온 무의식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었지만 이 작업은 끝까지 의식/무의식의 분계선을 유지하는 틀 안의 것이었다. 그 분계선이 끊임없이 무너지고 위협받는다는 것을 지적하는 일(이는 서양문학 3천년이 해온 작업이다)은 분계선 자체의 완전한 소멸을 주장하는 일과 같지 않다.
이론적 관점에서 한 두 가지만 중요한 사항을 따지기로 한다면 구조언어학의 발견은 언어와 사물의 불일치('사물의 죽음')를 주장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차이의 체계'로 접근하는 방법의 유용성을 제시한 데 있다. 언어와 사물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2천 5백년 전 플라톤이 {고르기아스}에서 내놓은 주장이다. 구조론의 관점은 언어질서를 차이의 체계로 파악하자는 것이지 기의와 기표의 분열론에다 언어학의 토대를 두려는 것이 아니었다. 라캉이 무의식의 조직원칙으로 본 선택과 배열 가운데 선택의 원칙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표의 차이에 입각한 원칙이 아니라 기의의 차원에 연결된 원칙이다. 그러므로 라캉이 선택과 배열을 모두 차이로서의 기표조직의 원칙으로 파악하고 그 위에 욕망론을 세워놓고 있는 것은 중대한 방법론적 혼동이 된다. 또 그가 언어적 구조를 무의식의 문법으로 본 것은 '언어 사용자들에게 그 언어의 문법은 무의식적인 것'이라는 구조론자들의 언명을 구조언어학의 문맥을 훨씬 넘는 선에까지 확대한 극단화의 경우에 해당한다. 언어 사용자는 문법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구조론적 언명이 지닌 의미의 전부인데 이는 그러므로 문법이 곧 무의식이라는 관점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라캉은 말년에 자신의 정신분석 체계를 '과학적 헛소리'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헛소리'는 정신병의 징후이고 현상이다. 물론 라캉의 그 말은, 그의 모든 발언들이 그러하듯, 액면 그대로를 받아들이려는 자들을 '바보'로 만드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는 아폴로 신전의 여사제처럼 신탁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중성과 신탁성은 이 시대 서구 지식인의 발화법을 역사적으로 특징짓는 은유적 징후이다. 은유적 징후이므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의 징후인가를 다소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것을 논할 계제에 있지 않다. 다만, 한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라캉의 욕망론과 무의식 이론이 그 극단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문화분석과 이데올로기론의 전개에 매우 유용한 통찰들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그의 상징질서론은 알튀세르 등이 무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을 이론화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고, 페미니즘의 이론에도 상당히 공헌했다. 금지명령으로서의 프로이트적 초자아는 사실상 문화적 질서인 라캉적 상징계 이론으로 재편됨으로써 정신분석의 영역을 넘어 사회문화적 담론분석에 쓸모있는 개념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 점검은 다른 지면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