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삼성에 맞서 소중한 승리를 거두다
“우리가 삼성의 무노조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87.5퍼센트 찬성으로 가결됐습니다” 하는 말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끈질긴 투쟁 끝에 첫 임단협을 체결하는 순간이었다. 노동조합을 결성한 지 3백50일, 삼성 본관 앞 농성과 전면 파업 41일 만이었다.
노동자들은 “해냈다” 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한 노동자는 삼성 본관을 향해 주먹을 치켜올리며 “우리가 이겼다” 하고 소리쳤다. 노동자들은 ‘승리하는 그 날, 화장해 이 곳[정동진]에 뿌려주세요’라고 한 동료의 유언을 지키고, 이제 정동진으로 간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이윤선
협력업체 직원일 뿐 자신들과 상관없다고 발뺌하던 삼성전자서비스 원청은 6월 28일 고(故) 염호석 열사에 대해 “애도와 유감”을 표하고, “원청 기업으로서의 역할에 더욱 충실하겠다”고 발표해야만 했다.
이번 타결로 노동자들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했다. 건당 수수료 체계에서 1백20만 원의 고정급이 생겼고, 60건을 초과하는 수리 건수에 대해서는 성과급이 지급된다. 여기에 식대 10만 원, 가족수당 최대 6만 원이 신설됐다. 기름값ㆍ통신비 등 실비도 사측 부담으로 명시됐다. 편차는 있지만 고정 수당을 포함하면 상당수 노동자들의 임금이 인상됐다.
점심시간도 생겼다. 그동안 노동자들은 고객이 있으면 밥도 못 먹으면서 일했다.
폐업센터 노동자들은 ‘2개월 이내 고용 승계’를 약속 받았다. 그동안 사측이 ‘노조 활동하면 해고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이려고 폐업센터 노동자들의 고용승계 문제는 교섭에서 아예 다루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폐업센터 문제도 상당한 성과다.
무엇보다 최종범ㆍ염호석 열사의 염원이었던 ‘노동조합 활동 보장’은 노동자들의 요구가 거의 다 관철됐다. 사측은 노조 사무실을 지원(1억 원)하고, 노조 전임자 9명도 인정하기로 했다.
투사가 된 노동자들
물론 이번 임단협으로 노동자들의 바람이 모두 충족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이룬 전진은 상당하다.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6월 17일 노조가 사측에 제시한 안이 대체로 관철됐다. ‘더는 양보가 없다’던 사측이 결국 노동자들에게 밀린 것이다.
△"종범아, 호석아 너의 꿈 우리가 이룰게" ⓒ이미진
무엇보다 이번 투쟁으로 노동자들의 조직과 의식이 성장했다. 극심한 생활고와 힘든 노숙 농성 중에서도 파업 대오와 조합원 수는 줄지 않았고, 더 단단해졌다. 이번 전면 파업 기간에 도봉센터와 일산센터 노동자들이 집단 가입했다. 노동자들은 41일간 파업 농성을 하며 삼성과 경찰에 맞서 싸우면서 투사가 됐다.
“그동안 임금 받아서 먹고사는 것밖에 몰랐어요. 노조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힐끗 보게 된 거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소망 하나 붙잡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교조, 언론노조 등 많은 다른 노동자들을 보게 됐어요. ‘노동자는 이런 거구나’, ‘모여서 싸우는 게 중요하구나’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전의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생사고락을 같이 했어요. 힘들고 지쳐도 서로 보듬고 아껴주는 동지가 됐습니다. 이제 두 번의 언덕을 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동지들이 있어서 앞으로도 걱정 없습니다.”
단호한 투쟁으로 삼성을 물러서게 하다
삼성은 노동자들에게 굴복하면 노조(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성장하고 다른 삼성계열사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줄까 봐 쉽사리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측은 ‘삼성 본관 앞 분향소를 철거해야 교섭할 수 있다’고 노동자들을 협박하고, 형편없는 안을 던지며 ‘더는 양보할 수 없다’고 시간을 끌었다. 투쟁 과정에서 위영일 지회장과 라두식 수석부지회장이 구속됐다.
△6월 20일 전국노동자대회수천 명의 노동자가 강남대로를 행진하고 있다. ⓒ노동과 세계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파업과 농성을 굳건히 이어갔다. 확대쟁대위는 “우리가 다 죽어도 분향소를 옮길 수 없다”며 사측의 굴욕적인 조건을 거부했다. 노동자들은 “삼성보다 우리가 더 독한 놈들이라는 걸 보여주자”, “우리 모두가 지도부다” 하며 투지를 다졌다.
‘5월이 지나면’, ‘6월10일 월급날이 지나면’, ‘한 달이 지나면’ 파업 대오가 흔들릴 거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매주 월요일마다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삼성 본관 앞으로 모였다.
연대도 이어졌다. 금속노조는 수차례 결의대회를 열었고, 수천만 원의 투쟁기금을 모아 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원했다. 민주노총은 SK, LG, 케이블방송, 현대차 비정규직 등 간접고용 노동자 집회를 열었고, 6월 20일 전국노동자대회도 열었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염호석 열사의 영정 사진을 들고 강남대로를 행진했다.
‘공정사회파괴 노동인권유린 삼성바로잡기 운동본부’를 비롯해 수많은 노동ㆍ시민사회ㆍ문화예술ㆍ종교계 단체 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물심양면 지원했다. 국제적 연대도 있었다.
이렇듯 노동자들 자신의 굳건한 투쟁과 연대는 삼성을 압박했다. 3대 경영권 세습을 마무리해야 하는 삼성으로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지속되면서 삼성 그룹의 문제가 쟁점화 되는 것이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삼성 본관에 앞은 염호석 열사의 집이자, 노동자들의 집이요, 투쟁의 거점이 됐다 ⓒ이윤선
투쟁 막바지에 새정치민주연합이 중재에 나서고, 삼성전자 사장 이인용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과한 것은 이런 압력의 산물이었다.
정치 정세도 노동자들에게 불리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고, 거듭된 ‘인사참사’에서 드러나듯 박근혜와 여당은 정치적 곤경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조직노동자들의 투쟁도 벌어졌다. KBS 노동자들의 파업과 승리,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 의료민영화에 맞선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파업, 법외노조화에 맞선 전교조 교사들의 항의 투쟁이 이어졌다. 민주노총은 7월에 ‘시기 집중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저들도 시간을 더 끌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끝난 게 아닙니다”
삼성에 맞서 “첫 승리”를 쟁취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투쟁이 끝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이제 시작입니다. 센터로 돌아가면 그동안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빼앗긴 것을 다 원상회복 해야 해요. 여기서 힘을 얻어 가니까, 더 당차게 투쟁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다음 임금협상까지 1년이 있잖아요. 저들도 가만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도 단단히 준비해야 해요. 무엇보다 조합원을 늘려야 해요. 특히 내근직 조합원을 늘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함께 싸우면 더 바꿀 수 있다고 설득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노동조합을 지키고 민주노조를 삼성에 제대로 뿌리 내리는 게 우리의 소임입니다. 그 길에 우리 동지들이 끝까지 함께할 것을 믿습니다.”
노동자들의 말처럼 이번 임단협 체결 이후에도 과제가 남아 있다. 당장 이번에 체결된 기준협약을 센터별로 체결하는 과정부터 힘 겨루기가 있을 것이다. 또, 임단협이 실제로 지켜지고, 모호하게 처리된 문구들을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려면 현장에 돌아가서도 투쟁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은 투쟁 속에서 의식과 조직을 성장시켜 왔다. 이번 투쟁과 승리를 디딤돌 삼아 향후 이어질 투쟁에서도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 갈 길을 보여주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투쟁은 간접고용의 문제점을 널리 드러냈다.
현재 전체 노동자 8명 중 1명이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다. ‘IMF 위기’ 이후 기업들이 노동비용을 절감해 이윤을 높이려고 간접고용을 대폭 늘렸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을 쥐어짜 이윤을 쌓아온 원청들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노동자들을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투쟁은 또한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단지 약자가 아니라 단결해 싸우면 열악한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삼성은 위장도급 논란을 피하기 위해 전면에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노동자들은 사실상 원청의 양보를 얻어냈다. 사측은 경총을 내세우거나 비밀교섭을 고집했지만, 이는 결국 원청의 사용자성을 다시금 입증했을 뿐이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투쟁은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들을 크게 고무했다. 올해 3월 SK와 LG에서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승리를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투쟁과 승리는 수많은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갈 길을 보여준 것이다.
삼성에 맞서는 진정한 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삼성에 맞선 투쟁에서 의미 있는 전진을 이뤘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황상기 씨는 “삼성에 노조가 있었더라면 내 딸이 이렇게 죽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당당히 “75년 무조노 경영” 삼성과 단협을 맺는 “역사적 쾌거”를 이룬 것이다.
이번 투쟁은 삼성의 노동자들이야말로 삼성 재벌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세력임을 보여줬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ㆍ시민운동을 고무해 삼성에 맞선 상설연대체를 건설하는 직접적인 동력이 됐다.
삼성계열사의 다른 많은 노동자들도 이번 투쟁을 주의 깊게 지켜봤을 것이다.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삼성에서 노조가 결성되고 승리한 것은 전체 노동운동에도 뜻깊은 일이고 전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