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1 주의 봉헌축일
말라 3:1-5 / 히브 2:11-18 / 루가 2:22-40
두 노인과 한 아기
성공회 기도서에는 ‘성무일과(聖務日課)’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Divine Office’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신성한 직무’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무일과는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밤기도 등 하루에 여러 번 나누어 바칩니다. 성무일과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기도형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원은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번 기도했던 관습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도의 중심으로 두었습니다. 성무일과가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추게 된 것은 수도원의 영향이 컸습니다. 특별히, 베네딕트 성인(St. Benedict)은 ‘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모토 하에, 기도를 ‘하느님의 일(Opus Dei)’라고 부르면서 일상생활을 받치는 중심축으로 삼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성무일과는 수도자뿐만 아니라 저와 같은 교구사제들에게까지 보급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이 기도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해야 하는 신성한 직무, 즉 성무일도, 혹은 성무일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공회는 종교개혁 때 ‘성공회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만들면서,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하는 복잡한 성무일도를 대폭 단순화하여 평신도들도 기도할 수 있도록 편집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공회는 이 기도를 성직자와 수도자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성경말씀을 근거로 한 아름다운 기도문들이 많은데,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 있는 ‘시므온 송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시므온 송가는 흔히 라틴어 성경의 첫 단어를 따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이제는 떠나가가게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기도는 성모 마리아 송가, 즈가리야 송가와 더불어 루가 복음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 나오는 매우 아름다운 노래로, 원래는 세상을 떠날 때 바쳤던 기도라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동방정교회에서는 저녁기도 때, 그리고 서방교회에서는 밤기도 때 이 노래를 바치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동방과 서방교회 전통을 모두 수용해서 시므온 송가를 저녁기도 때는 마리아 송가 대신할 수도 있고, 밤기도 때는 반드시 시므온 송가로 바치고 있습니다.
저는 시므온 송가를 바칠 때면 종종 젊었을 적 신학교와 수도원의 수련기 때 느꼈던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오후 8시가 되면 모든 학생들이 성당에 모여 밤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밤기도가 끝나면, 그 다음날 아침기도 때 입에 십자성호를 그으며 “주여, 우리 입을 열어 주소서. 우리가 주님을 찬미하리이다”라는 기도문을 소리 낼 때까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 기간 동안 침묵 속에서 조용히 공부하던가, 아니면 다음날 전례독서를 미리 읽고 묵상하다가 잠이 듭니다. 그래서 시므온 송가에 나오는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라는 기도문을 바칠 때, 저는 가끔씩 고요한 밤, 침묵, 그리고 그것이 가져오는 내적인 안정과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평안을 누리는 것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한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노인이 처한 상황을 함께 놓고 볼 때, 이 노래는 그저 마냥 고요하고 평온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하에서 민족과 종교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경제적인 수탈로 고통받았던 그 당시 사람들의 힘든 상황을 보아야 하고, 동시에 육체적으로는 점점 노쇠해 가는 개인의 무기력함이라는 현실 속에서 주님의 구원이라는 징표를 찾고자 몸부림쳤던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노인을 함께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시므온이 오늘 복음에서 성전에 봉헌하기 위해 온 부모로부터 아기 예수를 두 팔에 받아 안았다는 걸로 미뤄보아, 아마도 그는 성전에서 봉직하는 늙은 사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겼다는 안나는 신실한 신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사제와 신자로 대표되는 시므온과 안나를 통해 이스라엘의 신실한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기다려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루가 복음 저자는 이제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이 갈망하고 기다려 온 그 구원, 그 영광이 단지 이스라엘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만민으로까지 확장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시므온 송가를 통해 루가 복음 저자는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요, 이스라엘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기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놀라고 감격스러워했습니다. 특별히, 어머니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성령의 임재로 아기를 가질 거라는 놀라운 소식을 회상하면서 이제 천사로부터 시작된 이 계시가 성전의 노(老)사제의 입에서도 흘러나오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노 사제는 엄마 마리아에게 영광과 동시에 아픔도 예언합니다. 그것은 봉헌된 아기가 하느님의 구원을 가져올 때, 주변으로부터 극심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며,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어머니가 겪을 아픔의 강도가 마치 예리한 칼에 찔리는 것 같을 거라는 겁니다. 저는 시므온이 예언한 이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은 어떤 면에선 오랜 세월 노 사제가 겪었을 쓰디쓴 인생의 고뇌도 담겨있다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시므온과 안나는 주님의 빛을 갈망했지만,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깊은 어둠 속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에 놓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은 민족의 굴욕이요, 하느님의 욕됨 만을 맛봐야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면서 누가 이러한 비참한 현실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지 좌절했던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불행 속에서 희망의 징표를 찾기 위해 하느님께 끊임없이 매달렸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긴 인생과 신앙 여정 안에 조금씩 희망의 징표를 볼 수 있는 영적감각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한 아기를 만났습니다. 하느님은 그 안에 심어 주신 영적감각을 일깨워 주시어 인생의 끝에서 그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자 시므온은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루가 2:29)라고 기도합니다. 늙은 사제 시므온은 죽기 전에 아기 예수를 통해 구원의 가능성, 희망의 빛을 봤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제 편히 죽을 수 있게 되었다라고 인생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장엄한 기도를 바쳤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젊었을 때, 신학교에서 그리고 수도원에서 시므온 송가를 바칠 때마다, 저는 전례적 분위기와 밤이라는 시간이 주는 고요함 속에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므온처럼 저도 늙어가는 사제로 변하면서 점점 그가 겪었을 인생과 신앙 속의 여정에서 갈망했던 그 염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교회에 다수를 차지하고 계신 안나 와도 같은 어르신 교우분들과 함께 이 기도를 바치면서 오늘날 우리사회와 교회가 겪고 있는 현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하고 찾아야 할 구원의 빛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늙어가는 사회, 늙어가는 교회, 늙어가는 우리 각자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성전에 봉헌하기 위해 들어오는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그들이 안고 있는 아기 예수를 기다립니다. 그 젊음, 그 생명 그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희망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요한 2:40)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볼 그 희망이 성장해서 마침내 하느님의 구원 사명을 감당해 낼 주님의 증인들로 자라나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봉헌 축일! 우리는 새 양초를 축복하며 우리 자신도 봉헌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늙어가고 있는 이 사회와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늙음은 단지 생물학적으로 늙어감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으로 젊은 사람도 정신적으로 희망을 상실했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생물학적으로 늙었다 하더라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므온와 안나 노인처럼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 희망을 위해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면, 그들은 여전히 봉헌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 다수가 나이가 들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희망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명으로 부름 받은 봉헌된 자들입니다. 그러한 기도와 노력 속에 마침내 우리는 그 사명을 이을 또다른 봉헌된 자들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회와 교회는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져 갈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 안에 계속 생명력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 봉헌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