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묘지간(鳩猫之間)
골목 한쪽이 부산하다. 버려진 음식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비둘기와 고양이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이다. 비둘기는 고양이의 눈과 발톱 앞에 잡힐듯하다가 날고, 동작을 멈추면 다시 하강하여 쟁탈전이 벌어진다. 다투면서도 취할 건 다 취하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둘의 행동을 바라본다.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동물들이었다. 이젠 거리의 폭도일 뿐이다. 비둘기는 곳곳에 녀석들의 분비물로 칠갑하고 심지어 파종한 씨앗까지 빼먹는다. 아이들이 던져 준 과자부스러기로 비대해져 어제의 날렵하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고양이는 어떤가. 새벽이면 종족 번식을 위한 포효가 어김없이 들린다. 미상불 자기들의 세계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공원 모래판을 배설물로 묻어놓는다. 낮에는 누가 침범할까 숨어서 지켜본다. 아이들의 놀이터는 기생충으로 오염되어 그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비둘기 한 마리, 새벽을 게우고 있다
여기 힐끗, 저기 기웃
세상의 눈 피해 취한 것들
삭이지 못하고
구토하는 사르트르처럼
저 거부의 몸짓
비둘기의 철학은
허기 앞에 백기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며
인도 블록 사이 낀 알곡 하나 집으려다 부리가 깨지고
불어 터진 면발, 경쟁하다 고양이와 다툰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이다.’* 외치며
꽁지 털을 입속에 넣더니 토하고 또 토해낸다
소화되지 않은 자존심 덩어리
사르트르 비둘기, 속 비우고 나면
철학의 뜰에 꽃송이 다시 피어날까
* 사르트르의 문장 중 - B(birth), D(death), C(choice)
- 졸시 ‘어떤 구토’ 중
상생(相生)’이란 단어가 있다. ‘쇠는 물을, 물은 나무를, 나무는 불을, 불은 흙으로, 흙은 다시 쇠로 환원됨’을 일컫는 말이다. 요즘 정치 일각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들은 국민과 나라를 살리기 위해 힘을 합치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부터 살자는 의미로 쓰는가 보다. 툭하면, 타인의 의사는 무시한 채 싸우다 호응이 낮으면 본래의 의미와는 상반된 단어를 종종 사용한다.
볼테르는 ‘나는 당신 견해에 반대한다. 하지만 그 생각을 당신이 간직할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라고 했다. 합일점을 찾아내기 위해 밤을 새우며 설전을 벌이는 토론의 광장을 떠올린다. 결론을 도출해 내곤 악수하며, 서로의 의견을 존경해 주는 모습은 요원한 일일까.
공생(共生)도 있다. 모심기가 끝난 들에 나가 논배미를 바라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물과 햇볕과 농부의 땀으로만 벼들이 자라려니 했다. 나의 관념은 완전히 빗나갔다. 논바닥엔 수많은 공생 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다. 올챙이들은 벼에 붙은 찌꺼기들을, 우렁이는 불필요한 이끼를, 미꾸라지는 모기 유충을 잡아먹으며 수정작업(水淨作業)을 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실지렁이는 말미잘이 촉수를 흔들 듯 춤을 추며 흙의 호흡을 돕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라. 자기들 주장에만 눈이 어둡다 보니 타인의 고충은 숫제 백안시하는 현실이 되어버린 듯하다. 이 사람만큼은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겠구나 싶은 자들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한때의 사랑 받던 기억들은 멀리 한 채 오늘도 먹이만을 위해 싸우고 있는 저 비둘기, 고양이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더듬더듬, 눈먼 거리에 나선다. 몇 발 걷지 못해 장애물에 부딪힌다. 기겁한 여론은 곧 무채색의 세상이 돌아올 것이라며 꼬리에 꼬리를 물며 예언한다. 행인들 천천히 벽을 더듬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감각으로 형체를 구분하는 건 잔인한 일이다. 껍데기 하나 덮어쓴다고 속이 바뀌지 않는다.
한바탕 싸움이 끝나자 둘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은 이후로도 늘 배가 고프다고 할 것이며, 음식물을 두고 서로 차지하려고 싸울 것이다. 찬란했던 그들의 명성이 다시 찾아왔으면 얼마나 좋으랴. 비둘기와 고양이가 서로 좋은 관계에 쓰일 ‘구묘지간(鳩猫之間)’이라고 회자할 날이 기다려진다.
첫댓글 구묘지간이라.
저는 고양이와 까치가 먹이 다툼하는 걸 보고 수필을 쓴 적이 있어요. 까치와 고양이는 작묘지간이라고 해야 할것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