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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 빛의 자녀로 살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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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빛의 자녀로 살기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빛이나 낮의 자녀는 어떤 사람이고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리고 밤이나 어둠에 속했다는데 밤이나 어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절망의 상태 그러니까 희망이 전혀 없어 앞이 캄캄한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만약 이런 뜻이라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은
절망에 빠진 사람이 되겠습니다.
옛날에 ‘어둠의 자식들’이란 소설이 인기를 끌었고 그래서 영화화되기도 했지요.
여기서 어둠의 자식들이란 윤락과 온갖 범죄가 들끓는 뒷골목사람들을 일컫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어둠도 이렇듯 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 뜻이 없지 않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어둠의 자식이란
빛 속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고,
빛이란 빛이신 그리스도를 일컫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과 연결하면 주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악령과 같은 존재입니다.
어제도 봤듯이 주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분인데
악령은 주님을 구원자가 아니라 멸망시키러 오신 분으로 여기고
그래서 자기와 아무 상관하지 말고 떠나가달라고 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진짜 어둠은 빛이신 주님 안에 있지 않음입니다.
절망이나 죄의 어둠도 실은 빛이신 주님 안에 있지 않은 결과입니다.
주님 안에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되고,
주님 안에서 살지 않을 때 우리는 죄의 자식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거부하는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그리고 어둠에 털버덕 주저앉아있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고픈 뜨거운 열망이 있어야겠지요.
그런 열망에서 저는 오늘 화답송의 시편을 사랑하고
이 시편 가사에 곡을 붙이기도 했는데
저나 여러분 모두 시편이 노래하는 그런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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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
“희년선포”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이 전하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는 어촌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 일컬어지는 시작부분입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성전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었는데, 루가복음에 나오는 21개의 이적 중에 첫 번째의 이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르침’과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은 이미 앞에서 ‘예수님 탄생예고 장면’(1,32.35)과 ‘세례방면’(3,22)에서 선포되었는데, 여기서는 마귀들의 입을 통해 선포됩니다(4,34.41).
그런데 목격자들이 놀란 것은 구마치유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곧 그분의 말씀의 권위였습니다. 권위 있는 한 마디 “말씀”, 곧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라는 말씀에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 내동댕이쳤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습니다.”(루카 4,35).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고,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인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치유’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곧 희년선포와 마찬가지로 원죄 이전의 에덴으로의 복귀를 보여줍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은 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단지 악마를 쫓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몹시 놀랐던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이 나가지 않는가?”(루카 4,36)
“권위”(exusia)란 ‘힘’이란 뜻으로, 발설된 말씀이 말씀한대로 이루어지는 힘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됨을 말합니다. 그러니, “말씀”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 곧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구마자들과는 달리,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의 “말씀”으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힘으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루카 4,34)
주님!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으로 새로 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소서.
하여,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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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어느 날 방이 어둡다고 느껴졌습니다. 왜 이렇게 어둡지? 안 그랬는데…그리고는 그만이었습니다. 전구 두 개가 켜져야 하는데 한 개가 켜지지 않았습니다. 전구가 하나였다면 어둠이 짙어서 금방 전구를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켤 수 있었으니 곧 잊어버렸습니다. 뒤늦게 전구를 바꾸니 너무도 환하게 빛났습니다.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 문제입니다. 물론 희미한 빛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주 큰 어둠이라면 빨리 손을 쓸 텐데 희미한 빛이 기회를 놓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어두울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복음 10장 17절 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잘 관리하고 지키고 키워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합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마귀는 세상 끝날까지 영적인 능력이 더 우월한 상태에서 인간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이 기도하면서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마귀의 행동을 보십시오. 쫓겨 나가면서도 ‘사람을 내동댕이치고’ 갑니다. 더러운 놈은 끝까지 더러운 짓을 합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5,5-6).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빛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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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백범 김구 선생님은 한평생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나의 소원’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소원(所願)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大韓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自主獨立)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武力)으로 정복(征服)하거나 경제력(經濟力)으로 지배(支配)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檀君)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다시 읽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명문입니다.
우리는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부릅니다. 그가 우리의 외교권, 군사권, 행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일에 주도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완용이 처음부터 매국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받던 관리였습니다. 지금의 문화체육부 장관, 외교 통상부 장관, 행정 자치부 장관을 하였습니다. 그는 교육이 우리나라를 근대화 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독립협회’를 주도적으로 만들었고, 독립협회의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고종의 방침에 따라서 미국으로 가서 미국과 협력하였습니다. 고종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미국과 일본이 밀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고, 일본은 조선을 차지한다는 역사적인 현실을 보았습니다.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일본에게 외교권을 내주고, 일본에게 군대를 내주고, 일본에게 나라를 내주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일본에 협력한 대가로 그는 엄청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고, 일본으로부터 ‘후작’의 작위도 받았습니다. 당시 국제정세를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이완용은 독립운동은 하지 않고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역사는 그를 ‘매국노’라고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귀도 하느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온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마귀는 나름대로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함께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데 마귀의 능력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을 유혹한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마귀는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미끼로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기쁜 소식’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계명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비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존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식은 때로 십자가를 외면합니다. 지식은 때로 악의 세력과 타협합니다. 실천은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실천은 박해를 받아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교회의 제도와 직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실천할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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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이런 비유가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린아이가 놀고 있습니다. 동네 길바닥 움푹 파인 곳에서 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물이 고여 있기 때문입니다. 꼬마 아이는 그 물이 더러운 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마냥 신나서 그 안에서 첨벙거립니다.
엄마는 꼬마 아이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그 물구덩이에서 꺼냅니다. 아이는 울어버립니다. 아이는 그곳이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마는 알고 있습니다. 그곳이 절대로 아이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내려달라며 다시 놀게 해 달라며 울고만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꼬마도 알게 되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꼬마도 이해하게 되겠지요?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나를 아끼십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느님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모든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꼬마 아이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십니다. 우리 인생에, 우리 영혼에 무엇이 해가 되고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 말입니다. 그것이 설사 고통이고 아픔이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것이 하느님을 알게 하는 길이라면 그것을 선물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고통 중에 은총이 있다고 성인들은 말합니다. 어둠 속에 밝은 빛이 더욱 빛나듯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것이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빕니다.
늘 향기로워야 하는 것
매운탕을 끓이려 합니다.
여러 가지 신선한 재료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요리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
다진 마늘도 냉동실에서 꺼내 봅니다.
사실 저는 그때그때 통마늘을 다져서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하면 마늘의 향이 더 진하게 올라옵니다.
물론 마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파도 그렇고 양파도 그렇습니다.
보관이 어려워서, 귀찮아서
한 큰술씩 냉동실에 보관합니다.
마늘은 그래도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늘 신선하고, 늘 새롭고, 늘 향기 나야 합니다.
이는 바로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입니다.
감사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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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람이 아무런 도구 없이도 할 수 있는 순수 맨몸 운동으로, 상체와 가슴 근육 더불어 전신의 핵심 근육들을 균형감 있게 단련시켜 주는 운동은 무엇일까요? 아마 딱 생각나실 것입니다. 팔굽혀펴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팔굽혀펴기의 숫자를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꾸준히 팔굽혀펴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숫자가 늘어났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팔굽혀펴기를 정상적으로 하기에 힘이 부족하다면서 무릎을 땅에 대고 팔굽혀펴기를 해도 되냐고 묻습니다. 이 역시 효과가 있으며, 힘들다고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편하게 하다 보면 잘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렵고 힘들어도 또 지루하더라도 정상적으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것이 제일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운동도, 공부도, 기도도…. 어쩌면 기본에 충실할 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쉽고 편한 방법만을 생각하지요.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 주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멈추지 않고 기도, 묵상을 하면서,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이 소리는 사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베드로가 말했던 고백과 거의 일치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베드로에게 했던 칭찬이 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와 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권위는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까지도 고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참된 권위를 배워서 세상의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기도로 가능할까요? 또 주님과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도 단 한 번의 선행과 자선만으로도 충분할까요? 아닙니다. 단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편법이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우직하게 주님의 뜻을 따르는 성실함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있을까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주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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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위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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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권위의 사람이 됩시다
-예닮의 여정-
세상이 좋아지기는커녕 왜 이리 나빠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권위가, 참으로 참 권위를 지닌 어른이, 스승이, 정치지도자가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이런 참 권위의 참 사람들 찾아 보기도, 만나보기도 참 힘든 세상입니다. 지옥은 텅 비었고 악마들이 활개치는 세상이라고 말들하는데 공감합니다. 참 총체적 난국, 비상 시국입니다.
국내외, 특히 국내 상황은 온전한 곳이 없습니다. 이러다가 대한민국호가 침몰하지는 않을지 위기의식도 듭니다. 참으로 심기일전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인데 도대체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 걱정에 밤 12시 일어나 대략 이런저런 뉴스를 확인하고 쓰는 강론입니다. 아침 산책시 동요부르기를 멈추고 침묵기도에 돌입한지 이미 오래입니다. 어제 큰 뉴스는 국회대로에서 열린, 5만명이 모인 서이초 사망 교사의 49재 추모집회였습니다.
“선생님, 오늘은 무사하십니까?”
20년차 초등교사 A씨가 ‘안녕’ 대신 ‘무사’를 물으며 인사를 건네자 검은 옷의 교사들은 울부짖듯 소리를 높여 답합니다.
“아니오.”
아, 제가 초등학교 교사로 8년 동안 근무하던 때는 박정희 대통령 때의 엄혹하던 시절이었지만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자살 교사는 하나도 없었고 대부분 순수한 열정에 불타던 교사들이었고, 이렇게 갑질의 천박한 학부모도 없었고, 아이들의 빈부의 차이도 거의 없어 평화로웠고, 동요도 끊이지 않았으며, 사교육으로 학원에 가는 아이들도 전무했으며, 학교 운동장에는 방과후 뛰노는 아이들로 가득한 참 역동적 살아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스승의 날에는 ‘스승의 은혜’ 노래도 울려 퍼졌으며 이때의 6학년때 제자들은 나이 60에 가까워지지만 해마다 스승의 날 전후에는 수도원을 방문하여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주곤 합니다. 하두 세상이 어수선하고 추락한 교육 현실이 너무 참담하여 46년전 누렇게 바랜 옛 일기장을 펼쳐 봤습니다. 그날 일기중 일부만 나눕니다.
“1977.3.9. 수요일
내 마음은 기쁨에 떨렸다. 6학년6반, 흥분된 가슴을 억제하고 교실에 가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 했으나 아이들의 소란으로, 또 새아이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곧 웃음으로 변하다. 새로 배정받은 반에서 애써 부드러운 표정, 말씨 보이려 노력하다. 얼마나 사랑스런 아이들인가. 꾸짖지 않고, 때리지 않고, 벌하지 않고, 좋은 점만 찾아 칭찬하고 꾸준히 어려운자, 열등아, 사랑에 굶주린 아이를 찾아 사랑하고 격려해주자. 일생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기억을 만들어 주자. 퇴근하여 이름 모두 외우고 교재연구하고 원지 긁고 나니 밤 1시가 넘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아이들한테 할 이야기를 정리하자.
1977.3.10. 목요일
일찍 출근하여 아이들 파악하기에 분주했다. 90여명에 달하는 출석번호 이름을 다 외웠다. 1,2교시 내내 내 교육관 이야기하고, 3교시 하고 싶은 말 다 써서 내게 하고, 4,5,6교시 열심히 수업하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기대를 대하면 두려운 생각도 든다. 참 바쁜 일과였다. 그러나 희망과 기쁨에 가슴이 뛴다. 정말 정도대로, 교육의 본질대로 열과 성으로서 힘을 다할 뿐이다. 여타 말에 구애될 필요없다.
1997.3.12. 토요일
아침 일찍 출근하여 가정학습 확인해주며 칭찬하다. 수업시간도 아연 활기를 띤다...24시간 항상 교육적인 것만 생각해도 무궁무진이다. 개척되지 않은 신천지도 무궁무진이며, 창조력과 개성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분야로 가장 보람있는 축복된 분야가 교사직이다. 오직 순수와 진실과 열정과 헌신과 사랑의 토양하에서! 오후 목욕후 또 학교에 가서 일을 하다. 할 일은 많고 그래서 살 의욕은 왕성해지고... 그런데 무사안일, 무능력자들은 통일과 평준화, 획일화를 기하려 하니 좌절될 때의 심정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가능한 최선의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장황하게 옛 일기장을 보며 인용했습니다. 과거가, 기억이, 역사가 없는 자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바로 이런 과거의 기억이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 됨을 깨닫습니다. 정말 이때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에게 존경과 사랑, 신뢰를 받는 참 권위의 선생님이 되는 것이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이때 매일 일기를 썻듯이 지금은 그 습관대로 매일 강론을 씁니다. 총체적, 비상한 시국에는 비상한 대책이 필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 하나만 치유해주는데 오늘날은 하나가 아니라 도처에 참 많습니다. 정신이, 마음이, 영혼이 아픈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극한의 이념들의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이, 분열과 증오, 혐오, 중독, 차별등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이 참 많습니다. 이래서 광야 인생, 제대로 미치면 참권위를 지닌 참사람의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된다고 참 자주 강조합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합니다. 제대로 미쳐야 제대로 미쳐 참 권위를 지닌 성인입니다. 답은 단 하나 예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첫째, 예수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늘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 삶의 목표이자 삶의 방향입니다. 바로 마귀도 주님을 고백하며 도주할 준비를 합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런 주님을 모실 때 천하무적이요, 영적전쟁에 백전백승의 승리입니다. 이래서 제가 즐겨 바치는 “예닮기도”중 한연입니다. 다음처럼 이렇게 기도할 때 온갖 악령들은 저절로 퇴치될뿐 아니라 가까이 범접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평화,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둘째, 말씀 사랑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의 권위, 말씀의 승리입니다. 참으로 말씀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닮아 섬김의 삶에 올인합니다. 말씀의 권위는 자연스럽게 섬김의 권위로 전환됩니다. 우선 말씀의 권위에 주목해야 합니다. 참으로 말씀 공부와 말씀 실천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으니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런 권위는 말씀을 사랑하여 실천함으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쟁취하는 권위가 아니라 한결같은 말씀사랑과 말씀실천으로 예수님을 닮아갈 때, 주님으로부터 선사되는 선물로서의 권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혼비백산 도주하는 마귀들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귀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가자, 사람들은 이구동성 탄성을 발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유비무환이 지혜입니다. 처방보다는 예방이 백배낫습니다. 평상시 항구한 말씀 사랑과 공부로 주님과의 일치를 깊이함으로 영혼을, 정신을, 마음을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영혼 최고의 식(食)이자 약(藥)이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온유와 겸손, 섬김과 나눔, 돌봄과 살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랑할 때 주님으로부터 선사되는 위 덕목들의 훈련과 습관이 우리를 참 권위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셋째, 늘 깨어 있는 삶에 대한 사랑입니다.
총체적 비상한 시국에는 정말 늘 깨어 있어야, 깨어 살아야 합니다. 깨어 있음의 영성훈련과 습관에도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인생항해 여정중인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라는 배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깨어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합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200주년 성서).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기에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상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머지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립시다.”
‘정신을 차립시다.’ 원문의 본뜻은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 곧 과음도 과식도 하지 않고 정신이 맑은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정말 맑게 깨어 살며 매사 최선을 다할 때 주님으로부터 선사되는 분별의 지혜로 분열과 대립을 부추기는 이념의 마귀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참 권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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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5.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과 함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
이 더러운 것들아
사람을
아프게 하지 마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그래
나도 똑같이 아프니까
썩 물러나라
사람 곁에
다신 얼씬거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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