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도리를 뜨다가
박송이
동계 장날은 처음이에요 새끼 고양이를 산 것도 처음이에요 새끼 고양이를 묻은 것도 처음이에요 무덤은 처음이에요 폐교에 간 것도 처음이에요 교회 오빠 손을 잡은 것도 처음이에요 발바닥에 못이 박힌 것도 처음이에요 미나리를 싫어한 것도 처음이에요88오토바이를 탄 것도 처음이에요 다슬기를 잡은 것도 처음이에요 계곡물에 빠져 물 밖으로 끌려 나온 것도 처음이에요 하숙집 두부조림도 처음이에요 목욕탕도 처음이에요 알몸을 맡긴 것도 처음이에요 죽은 닭을 만진 것도 처음이에요 중환자실도 처음이에요 휴학도 처음이에요 드라이아이스도 처음이에요 갈팡질팡했다지만 사랑도 폭력도 다 처음이에요 흘러내리는 빙하는 언제가 처음일까요 매미가 울다 울음을 그치는 것도 여름이 왔다 겨울이 가는 것도 처음이에요 마른 가지가 새순을 틔우는 것도 처음이에요 아이를 때린 것도 처음이에요 완벽한 고통도 처음이에요 한 땀 한 땀 코바늘 뜨개질을 했어요 우는 딸에게 말했어요 설아,변명 같겠지만 나는 네가 처음이란다 정말이란다 이 손도 뜨개질이 처음이란다
---애지, 2024년 겨울호에서
처음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건과 일이 맨 처음 일어난 것이 처음일 것이고,이 처음은 모든 사건과 일의 신기원이기 때문에 가장 의미가 깊고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처음이란 하늘이 열린 날일 수도 있고, 첫 아이의 탄생일일 수도 있다. 남편과 아내가 맨 처음 만난 날일 수도 있고, 새집으로 이사한 날일 수도 있다.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뀐 날일 수도 있고, 아메리카 합중국이 탄생한 날일 수도 있다.세종대왕에 의하여 한글이 창제된 날일 수도 있고, 우리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날일 수도 있다.
처음은 두려움이고 설레임이며, 모든 일의 첫걸음이다.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고, 어느 누구도 마주하지 않은 사건과 사고를 혼자서 해결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러나 산다는 것은 목숨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고, 그 목숨이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시작하고 그 과실을 따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꽃은 상처이고, 열매는 그 상처의 아픔으로 익는다. “마른 가지가 새순을 틔우는 것도 처음이”고, “아이를 때린 것도 처음”이다. “완벽한 고통도 처음”이고, 박송이 시인이[목도리를 뜨다가]이처럼 시를 쓰는 것도 처음이다. 날이면 날마다 딸과 엄마가 만나고 싸우는 것도 처음이고, 날이면 날마다 똑같은 해와 똑같은 달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처음이다.
첫은 시작이고 기원이며, 첫은 만물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다. 처음으로 해와 달이 뜨고, 처음으로 진리와 생명이 싹튼다. 처음 이외의 날들은 부차적이며, 한낱 기호와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학문 연구와 진리 탐구는 이 처음의 문을 여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인, 사상가, 황제, 건국의 아버지 등은 처음으로 하늘의 문을 연 사람들이며, 언제, 어느 때나 새로운 이름으로 시작을 알리는 ‘진리의 소유자’라고 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