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신화
인간이 농업을 시작한 것은 약 1만년 전이라고 한다. 사냥처럼 농업도 신성한 일이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마다. 수확을 거둘 때마다 신성함의 표현으로 정화의식을 가졌다. 씨앗은 땅속이라는 어둠의 세계에서 생명을 얻어 땅을 가르고 솟아올랐다. 기적적인 힘이 작용하였다고 보았다. 이런 기적을 보고, 농민들은 ‘대지는 마치 살아있는 자궁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유지시켜 준다.’라고 믿었다.
대지가 힘을 잃어서 자궁처럼 생명을 키워내지 못한다면 인간을 죽음을 맞아야 할 것이며,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인간들은 대지의 힘이 고갈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대지에 힘을 보충하기 위해서 의식을 만들었다. 수확 때 씨앗을 조금 남겨두는 것을 생각해냈다. 수확않고 남겨두는 것을 제물로 생각했다. 씨앗 뿐 아니고, 사람을 제물로 바친 일도 있었다. 현대인은 일상에서 신성한 힘을 믿지 않고, 저 너머에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고대인은 신선함이란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와 함께 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자면, 생명이 태어나는 에너지가 디는 인간의 성도 땅을 비옥하게 하는 신성한 힘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로 농민들이 씨앗을 뿌릴 때 신성한 성교의식을 가졌다. ‘신성한 결혼’이라고 말했다.
하늘의 비가 땅에 스며드는 것도 신성한 결혼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신성한 성기를 상징하는 괭이나 쟁기가 땅을 헤집는 것도 자궁으로 파고 들어가서 씨앗을 뿌리는 행위라고 보았다.
우선 신석기 시대의 농업은 어떠하였을까?
농업 생산은 자연에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였다. 농업은 자연과 끝도 없이 벌리는 싸움이었다. 가뭄, 불모의 땅, 자연읜 난무하는 힘, 굶주림과 벌리는 치열한 투쟁이었다. 농경민의 투쟁에는 하느님으로부터 쫓겨난 인간이 운명적으로 겪어야 하는 전쟁이었다. 이처럼 농경민의 초기 신화를 보면 먹이를 얻는다는 것은 오로지 죽음과 파괴를 통하여 얻어질 수 있은 신성한 힘에 의하여서 였다. 이것을 가장 보여주는 것이 레반토 지역의 바알 신화이다.
바알과 아나트는 부부이다. 바알은 폭풍의 신으로서, 비를 몰고 오는 농경신이다. 바알에게 가뭄과 죽음이 신인 ‘못’이 시시때때로 싸움을 걸어왔다. 못이 공격해오자 바알은 두려움에 떨다가 항복해 버렸다. 못은 바알을 한 입에 삼켜 버렸다. 바알의 죽음으로 비가 내리지 않는 대지는 매마르고, 식물은 말라 죽었다.
바알의 부인인 아나타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 하늘의 신에게 도움도 요청하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하늘의 신을 도움으로 바알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우선은 바알을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루어 주었다. 그리고는 못을 찾아 다녔다. 드디어 못을 찾아낸 아나트는 낫으로 못을 두 동강 내고, 잘게잘게 썰어서 살점을 들판에 뿌렸다. 신화에서 못을 살점을 들판에 뿌렸다는 것은 농부가 씨앗을 땅에 뿌리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신화의 내용은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수확을 하고, 씨앗을 다시 땅에 뿌리는 행위를 나타낸 것이다.
못을 제거하자 대지는 다시 촉촉하게 물기에 젖고, 씨앗이 싹을 튀우면서 새싹이 대지를 뚫고 땅 위로 솟아올랐다.
그러나 바알도, 못도 영원히 제거할 수 없는 신적 존재이다. 불사의 존재이다. 다시금 살아나는 부활 또는 재생을 하는 존재이다. 이런 이유는 그들은 영원히 투쟁하면서 살아가야 할 숙명을 지닌 존재이다. 다만 그들이 생명을 되찾기 위해서는 제사의례라는 의식을 치루어야 한다.
계속되는 신화의 이야기를 더 소개하자면 생명을 되찾은 바알과 아나트는 신성한 육체의 접합을 한다고 하였다. 지역의 봄 축제 때마다 바알과 아나트의 신성한 결혼은 재현된다.
이슈타르 여신
이슈타르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나오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여신으로서 미와 연애, 풍요와 다산, 전쟁, 금성을 상징한다. 수메르인에게는 인안나(lnanna, 하늘의 여왕), 페니키아의 셈족에게는 아스타르테(Astarte)로 통하였다. 신, 혹은 천신 아누의 딸이며, 니네베와 아벨라(에르빌)에서 특히 숭배되었다.
성적인 요소가 강한 여신으로서 이슈타르는 신들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천사이기도 하였으며, 그녀와 연관되어 있는 성스러운 도시 에릭은 천사의 도시라 불렸다. 많은 남신과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보았듯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슈타르는 사랑과 전쟁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를 함께 가져오는 신으로서, 이슈타르의 성격이 규정된다. 그러나 신화학에서 보면 이슈타르는 위대한 어머니 여신 즉 지모신의 면모를 가지고 있으므로 아주 오래된 신이다.
지모신은 생명과 풍요를 배푸는 자비로운 신인 동시에 잔인한 파괴를 일삼는 신이다. 이중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은 이슈타르가 가장 원시적이고, 강력한 신이라는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오는 이슈타르는 이슈타르의 사랑을 받는 인간은 그 가혹한 정열과 질투로 인해 짐승과 같은 운명을 겪는다는 의미였다. 신들에게 있어서도 이슈타르의 사랑은 치명적이었는데, 길가메시에 의하면 추수의 신 탐무즈도 그녀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었다 한다.
길가메시의 말에 화가 난 이슈타르는 그를 저주하여, 천신 아누에게 부탁하여 하늘의 황소 풀어 복수하고자 한다. 하지만 길가메시가 황소를 죽임으로써 복수는 허사로 돌아간다.
길가메쉬 서사에서 이슈타르는 신적인 기능을 많이 상실하였음을 보여준다. 길가메쉬 서사시가 등장하는 시기는 모신에서 남신으로 권력 이양이 일어난 시기라는 뜻이다.
바빌로니아의 서사시에 ‘인안나의 저승 여행’이 있다.
이 서사시에 의하면 인안나가 저승으로 내려가자 지상의 곡물이 모두 말라버린다. 그는 지상으로 올라오는 조건으로 양치기인 남편 탐무즈를 지하로 내려보낸다.
이런 내용은 이슈타르가 농경과 관계 있는 여신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슈타르 숭배는 메소포타미아의 주변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이웃 종족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면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지역이 바뀌고, 또 후대로 오면서 신앙의 성격이 많이 바뀌어진다.
기독교 시대에 오면 구약에서는(에레미아) ‘하늘의 여신’이라고도 불렸다. 신약에서는 ‘큰 바빌론’ ‘창녀의 어머니’로 격하된다.
아도니스 신화
지역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른 아도니스 신화가 있다.
아도니스와 아프로디테, 지하신 하데스의 부인인 페르세포네(콜레) 간의 삼각관계를 다루었다. 이야기에서 삼각관계는 재미를 준다. 그러나 신화적 해석은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다룬 농경신화이다.
아도니스 신화는 원래 페니키아 신화이다. 그리스인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도록 가공하여 농경신화로 만들었다.(아프로디테를 사랑한 아레스 신이 질투가 나서 멧돼지로 변하여 사냥군 청년 아도니스를 죽였다. 라는 신화가 원본이었다.)
어린 아도니스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아프로디테는 상장에 담아서 절대로 뚜껑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 지하신 하데스의 부인 페르세포네에게 맡겼다. 호기심이 난 페르세포네가 뚜껑을 열어보니 너무나 귀여운 남자 아기가 아닌가. 그는 약속을 어기고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제우스가 중재에 나셨다. 일변의 반은 아프로디테가, 나머지 반은 페르세포네가 데리고 있기로 했다.
이것은 땅에 씨를 뿌려서 자라나는 시기와, 수확을 하여 땅 위에성 보내는 반 년을 상징하는 농경신화라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이런 신화를 왜 농경신화라고 해석을 할까.
농경을 시작할 때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를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사제가 농경의례를 올리면서 부르는 찬가(우리로서는 무가에 해당)가 바로 신화가 된다. 아도니스 신화도 풍요로운 수확을 바라는 찬가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농경신화에서 씨앗 역할을 하는 희생제물은 어린 소녀이다. 그러나 아도니스는 어린 소년이다. 소년을 제물로 바친 시기는 소녀를 바친 시기보다 앞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