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겸손의 사람들 (미가 6:6-8, 마 11:28-30, 벧전 5:5-6)
1. 적과 싸워 이기려면 먼저 적이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강한 적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죄입니다.
세상에 죄가 처음 들어왔을 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교만한 마음을 품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던 것입니다. 욕망이 생기기 시작했지요.
인간의 욕망의 뿌리가 교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의 사촌으로는 거만함이 있고, 오만함이 있고, 자만함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제일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 교만이 자리를 잡고 있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항상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 교만을 꺾을 수가 있을까요?
오직 하나, 겸손함입니다. 겸손의 편에 서고자 할 때에 교만은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겸손히 살고자 할 때에 교만은 기운이 빠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누구인가요? 기독교인은 늘 겸손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2. 얼마 전에 하버드 대학교 교수이며, 미국 당뇨협회 대표인 로버트 래트너 박사의 인터뷰기사를 보았습니다. 현재 당뇨환자가 3억 7천만명이나 된답니다. 미국 전체 의료비의 1/10이 당뇨치료에 사용이 된답니다.
기자가 래트너 박사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뇨병과 식단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당뇨병을 식이요법으로 조절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러자 래트너 박사는 “음식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뇨병을 고치기 위해 식이요법을 해야 한다는 말을 자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당뇨협회 대표가 음식 조절에 관하여 말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 논문에 의하면 가공육류를 하루에 한번만 섭취를 해도 당뇨 위험이 51%나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육류 섭취와 당뇨병의 관계는 밀접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뇨협회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이런 정보가 하나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가공육류를 이용한 요리법을 소개하고 있답니다. 심장협회 홈페이지도 마찬가지이고, 암협회 홈페이지도 마찬가지랍니다.
그래서 기자가 심장협회와 암협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붉은 육류와 심장마비가 밀접한 연관이 있지 않느냐?” “유제품이 전립선 암을 34%나 증가시키고 유방암을 49%나 증가시키지 않느냐? 왜 그런 음식을 요리법으로 홈페이지에 올렸느냐?”
모두가 대답을 회피하였습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미국 심장협회에서 소고기를 권장하고, 암학회는 가공육류를 권장하고, 유제품에는 유방암 퇴치의 핑크 리본이 달려 나오고, 당뇨협회는 베이컨말이 새우를 권장하는 것은 그들 모두가 협회의 스폰서들이기 때문입니다.
당뇨협회의 스폰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요거트 생산기업이고요, 햄과 치즈 제조회사인 크라프드이고요, 캔 육류 제조 회사인 범블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로부터 돈을 받기에 당뇨를 위한 식이요법을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후원금을 내는 회사의 제품을 올리는 것입니다.
암학회의 스폰서는 세계 최대의 축산 기업인 타이슨과 피자헛, KFC, 타코벨의 모회사인 염브랜드인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받기 때문에 암학회 홈페이지에 그들의 제품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미국 심장협회의 스폰서가 미국 축산협회인 것입니다. 축산업계와 낙동업계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받고 있습니다. 붉은 고기를 먹으면 심장병에 걸리기 쉬운데, 축산협회에서 후원금을 받기에 심장협회에서 붉은 고기를 먹으라고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입니다.
3. 그렇기에 래트너 박사는 음식과 당뇨의 관계에 대하여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학회와 연구실과 숱한 의사와 과학자와 테크니션들이 스폰서를 통하여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밝혀서 후원금이 끊기에 되면, 모든 것이 올스톱이 되고, 숱한 실업자들이 생기게 되고, 사회질서가 혼돈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인터뷰 내용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먹는 당뇨약은 당뇨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뇨병을 현상유지를 하게 하므로 계속하여 약을 먹게 하는 것이지 않을까?”
약을 먹어서 당뇨병을 고칠 것 같으면 약 장사들은 손해를 보지요. 약을 개발하고 제조하는 회사는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동기관총으로 난사를 하였답니다. 권총 정도가 아니라 기관총이라 하니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왜 그런 총을 팔게 하는 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총기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어도 총기 규제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총기업자들이 엄청난 정치자금을 의원들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총기 반대를 하면 정치자금이 끊어지고, 자금이 없으면 정치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니, 반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강대국들이 세계 곳곳에 전쟁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무기를 팔아먹는 것과 같은 꼴입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돈입니다. 돈을 위한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4.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2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이미 이 세계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도 돈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돈을 위해서는 전쟁도 할 수 있고 사람도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라는 말은 자본이 주인이라는 말이지 않습니까?
의사가 환자를 돌보지만, 의사들은 보험회사의 눈치를 봅니다. 보험회사에서 환자에게 돈이 많이 들어갈 것 같으면 약 처방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돈이 없으면 고칠 수 있는 병도 고치지 않게 되는 세상인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하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 목사인 나는, 기독교인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참된 신앙을 갖고자 하여도 인정 받지 못합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통하여 나 하나 편하고자 할 뿐입니다.
5. 어찌해야 하나요?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세상은 점점 더 바벨탑을 높이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하나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여기면서 하나님도 무시하고 다른 사람도 무시합니다. 교만한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사람이 체세포를 양육하여 사람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컴퓨터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을 만들어 사람보다 더 똑똑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의사의 처방보다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의 처방에 따라 약을 먹겠다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해 보겠다고 하는 것이 비닐 우산을 가지고 토네이도를 막아보겠다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아무 것도 안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6. 실마리가 있습니다. 한 가닥의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적은 돈일 수 있고, 구조적인 악일 수 있고, 힘을 가진 자들의 갑질적인 횡포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밑바닥에 있는 공통점은 교만함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교만함입니다. 그리고 교만함을 이기는 답은 우리가 노력하는 겸손함입니다. 내 작은 겸손한 신앙이 저 엄청난 교만을 이기는 무기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 자신부터 시작하여 내 주변을 겸손이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주변의 교만한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부터 더욱 겸손으로 무장을 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교만을 보면서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겸손이 교만을 이기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더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 곁에 더 극성스러운 교만을 두시는 것은 아닐까요?
감기가 좋지 않지만 감기를 이기고 나면 면역력이 생겨서 감기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몇 번 이기노라면 우리는 교만을 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나 약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나 하나 겸손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나부터 시작한 겸손은 점점 더 전파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많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사는 한 교만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7.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시대마다 겸손으로 교만을 이겼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잠언서에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라고 하였습니다. 교만은 망하는 길이고 겸손은 존귀하게 되는 길인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의 겸손함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 겸손함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여기서 높이신다는 말은 존귀하게 한다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겸손한 자가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8. 겸손하게 사는 것이 말은 좋지만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저도 압니다. 그런데 어렵다고 못한다고 하면 정말 못하게 됩니다.
그래도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알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엇인가 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래도 겸손하게 살아야지” 하는 것입니다.
이 길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고, 교만을 물리치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살고픈 사람이 해야 하는 말 4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첫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먼저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기에 틀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기에 지나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기에 교만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경우에도 주장하기보다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을 너무 강하게 하면 약한 사람 기죽게 할 수 있습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면 말하지 않는 사람을 힘들게 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시하면 능력이 없는 사람은 쓸쓸해 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도 죄인임을 깨닫고 “미안합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가수가 노래를 부르러 나와서 “미안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어쩌다가 TV에 나와서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아직 그런 기회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동료들이 너무도 많음을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미안합니다”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지요?
(2) 둘째는 인생이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죽어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고개를 숙이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겸손함을 간직하는 좋은 방편입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교만의 기세가 꺾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모두가 평등함을 알게 됩니다.
미국 처음 왔을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도 도움을 받은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는 말인지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을 주노라면, 상대방이 미안해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죽을 때에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요”하면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도 마음이 든든하고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깨달음이 있는 것이지요.
(3) 셋째는 기도할 때마다 “겸손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말을 하므로 인생이 만들어집니다. 내 입술에 겸손이라는 단어가 있음으로 겸손을 생각하게 되고 겸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이 없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어떤 마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도할 때마다 겸손함을 기도하므로 교만을 이기는 믿음인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힘든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자가 믿음의 승리자가 됩니다.
겸손이 어렵지만 그래도 겸손하고자 함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어렵더라도 겸손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임을 믿고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이 주님을 만날 수 없듯이 겸손함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받을 가장 큰 상급입니다.
기독교인은 누구인가요? 겸손의 사람들입니다. 겸손함으로 교만을 이기는 능력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