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알려면 과학도 필요하지만 진정 삶을 포용하는 건 시적인 인식/한떨기 들꽃도 내면을 일깨우고 시인은 꽃과 하나되어 내게로 온다.20세기 영국의 시인 루이스(1904∼72)는 ‘시는 유용한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수선화를 예로 들어 세상의 사물을 이해하는 두가지 방식,즉 과학적 방식과 시적인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과학적 방식이 수선화가 어떻게 분류되고 어떤 화학적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기술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면,
시적인 방식은 수선화가 다른 사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그 둘레 환경과 어떻게 얽혀 있는가를 보여준다.
루이스는 시적 묘사의 대표적인 예로 수선화를 노래한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하고 있는데,이 시 첫번째 연은 수선화가 둘레 환경과 맺고 있는 관계를 섬세하게 노래한다.
나는 구름처럼 홀로 정처없이 걷고 있었네 골짜기와 언덕 위를 떠다니는 구름처럼, 갑자기 멈춰 서서 나는 보았네 무엇인가 빽빽이 모여 있는 것을, 금빛 수선화 한 무더기를 나무 밑,호숫가의 잔잔한 미풍 속에서 하늘거리며 춤추는 수선화 한 무더기.
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수선화가 나무,구름,호수,미풍,시인의 외로운 마음 등 다양한 주변 요소들과 얼기설기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게 된다.여기에서 수선화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자연의 숨결에 따라 상호작용하며 움직이고 있는 둘레 환경 속의 한 생명체다.
특히 미풍에 산들거리며 춤추는 ‘한무더기의 금빛 수선화’는 시인의 내면의 눈을 뜨게 하고,고적했던 시인의 마음을 덩실덩실 춤추게 만든다.산에서 듣는 바람소리가 귓전만을 스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을 정결하게 가라앉혀 주듯 바람결에 휘날리는 수선화를 바라보면서 외로운 시인의 마음은 안온해진다.
게다가 수선화는 시인과 함께 있었던 순간뿐만 아니라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집으로 돌아와 명상에 잠긴 시인에게도 가슴 가득 메우는 기쁨을 가져다 준다.
정처없이 떠도는 구름,청정한 나무,맑은 호수,잔잔한 미풍과 기묘하게 어울려 있는 고즈넉한 수선화 한 무더기를 회상하는 시인은 여느 때와 달리 홀로 있음에서 맑은 기쁨을 누린다.이제 그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고 정다운 자연의 이웃에 둘러싸여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인과 수선화는 각기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서로가 말없이 주고받는 눈길을 통해 존재의 잔잔한 기쁨을 나누는 우주공동체의 일부다.
대체로 서양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과학적인 접근법을 취해 왔다.르네상스 이래 서양은 ‘도대체 물질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또는 ‘물질이 인간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 의학 공학 등 각종 과학을 발달시켜왔다.
한편 동양은 워즈워스가 노래한 바와 같은 시적 접근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다.동양은 시인 워즈워스처럼 사물의 구성 원소가 무엇인지,사물이 인간에게 어떤 특정한 소득을 가져다 줄 것인지 묻지 않았다.대신 우주, 자연, 인체, 마음에 한결같이 흐르는 기의 순환을 발견하였고 온갖 학문의 핵심을 이룬 것은 바로 이 기의 흐름에 기초한 순환구조였다.
최근 서양은 자신들의 과학적 이해 양식에 점차 회의를 느끼고 시적인 동양의 인식 방법에 눈을 돌리고 있다.그중에서도 요즘 대두되고 있는 생태론 및 환경보호운동은 바로 사물을 우주 자연 인체 마음의 순환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그 관계간의 평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시적 사고, 즉 워즈워스가 수선화 한 무더기를 보면서 발견했던 관계적 인식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물론 우리는 서양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자연과 환경에 대한 지식을 확장해 왔으며,그것의 기술적 이용을 통해 다양한 삶의 분야에서 인간의 물질적 조건을 끊임없이 향상시켜 왔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과학과 문명의 연장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또한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주변 환경과 사물을 정복하고 이용해 왔다.산업찌꺼기로 오염된 강물과 피폐된 산천,지식과 정보와 오락에 탐닉하는 찌든 인간,취직하고 출세하는데만 몰입하는 병든 인간,도시의 소음과 혼잡에 잔뜩 중독된 인간.
이 모든 것이 시적인 인식 방법으로 세계와 사물을 다시한번 살펴볼 때가 왔음을 고한다.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서로 밀접한 관계로 이뤄졌음을 고요히 노래하는 워즈워스의 소박한 시 한 편이 우리에게 심금을 울리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나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닌 이 세상.산과 강,구름과 별,새들과 뭍짐승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이 세상.우리가 함께 살아 남으려면 이 세상에서 생명이 이어져가는 바탕,즉 자연의 흐름을 파악하고 생태계의 상호의존 원리에 따라 삶을 꾸려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각 분야에서 직면한 문제를 과학적으로 극복해 나갈 뿐만 아니라 각 현상의 구성요소 하나하나보다 그것들이 서로 얽혀 생기는 과정에 관심을 두고 삶의 전체적인 조화를 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