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어령과 김정주가 남긴 꿈의 실행력과 사명의 씨앗
한국 사회에서 ‘천재’로 불렸던 두 명이 지난달 말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떴다. 각각 88세와 54세로 생을 마감한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과 김정주 넥슨 창업주다. 둘은 2010년대 초반 처음 만났다. 이 자리를 함께했던 지인에 따르면, 당시 이 장관은 김 창업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정주는 만주 벌판을 달리는 21세기 칭기즈칸이다. 디지털 유목민을 이끄는 리더다.” 세 시간이 넘도록 둘은 미래 세대에게 희망이 되는 사업을 얘기했다고 한다.
삶의 궤적은 달랐지만 둘에게는 의외로 공통점이 있다. 우선 ‘호기심 천국’인 얼리 어답터였다. 이 장관은 1980년대 후반부터 워드프로세서와 XT급 랩톱 컴퓨터를 사용했다. 1989년 ‘아래아 한글’을 개발한 국내 벤처 1세대 이찬진(현재 포티스 대표)을 알아보고 밀어준 것도 그였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인 김 창업주는 1988년 일본항공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에서 컴퓨터 게임산업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봤다.
둘은 예술을 사랑했다. 국내 최초의 종합예술학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이 장관의 문화부 임기 마지막 날 설치령이 통과돼 1993년 개교했다. 초등학교 때 이화경향 콩쿠르에서 바이올린 1위로 입상한 뒤 미 줄리아드 예비학교를 다녔던 김 창업주는 경영활동을 하면서도 한예종에서 예술경영 전문사 논문을 마쳤다. 지인들과 ‘313 아트 프로젝트’ 갤러리를 설립해 다니엘 뷔렌 등 유명 작가들을 소개하며 국내 미술계 수준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질문하고 꿈꾸고 실행한 힘도 공통점이다. 어릴 때부터 ‘질문 대장’이었던 이 장관은 “물음표가 있기 때문에 느낌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한계를 두지 않고 꿈을 품었기에 다들 “안 된다”고 하는 걸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다. 김 창업주의 꿈은 ‘한국이 세계를 이끄는 기업가의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선문답 같은 얘기를 했지만 그는 상상력 너머의 세계를 꿈꾸고 자신의 ‘날아다니는’ 생각을 붙들어 사업으로 옮겨냈다.
두 사람이 남긴 것은 사명의 씨앗이다. 해외에서 사업을 해왔던 한 40대 사업가는 6년 전 이 장관을 만난 뒤 삶의 목적이 바뀌었다. 이 장관이 강조한 디지로그(digilog·생명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두 개의 스타트업을 차렸다. 이 장관이 “금빛 학이 군무를 추는 것 같다”며 이름 지어준 한국의 난초 종자(‘금학’)와 김치에너지드링크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에서 빛난다는 생각은 김 창업주도 같았다. 될성부른 K콘텐츠라면 스타트업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몇 년 전 이 장관을 만났을 때 그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과학시간에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는 학생과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학생이 있어요. 물이 된다는 아이들만 사회 요직을 차지하는 교육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감히 생각해 본다. 이 장관과 김 창업주는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고 했던 외로운 천재들이 아니었을까. 압축 성장을 하느라 여유가 없던 한국 사회가 이제는 천재들을 훨훨 날게 할 수 있는가.
김선미 산업1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