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시 40편
- 제목 : 나는 파편이지만 넌 이단인데
◇ 기도
아버지의 긍휼과 은혜를 오늘도 바랍니다. 일하는 날은 일할 수 있어서, 쉴 때는 쉴 수 있어서. 숨 쉬고 듣고 보는 모든 것들에 감사합니 다. 말씀을 펴며 마음 속 지성소의 열린 문으로 들어가 성령님과 교제하기 원합니다. 아버지여 의롭다 여겨주신 자녀를 오늘도 만나주시고 인도하옵소서.
◇ 본문살핌
40편은 시인의 기도(구원요청)가 응답된 기쁨을 노래한다. 하나님은 마침내 그의 오랜 간구에 응답하셨다(40:1). 그는 거짓과 악을 일삼는 자들과 손잡고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하나님만 의지하였고, 그 결과 마침내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 같던 문제에서 건지셔서 반석 위에 서게 하셨다고 고백한다(40:1-4).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와 계획, 하신 일들은 이루 셀 수 없다(40:5).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말씀하시 길(청종하는 그에게) 나는 제사와 예물,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고 요구하지 않는다 하셨노라 했다. 이에 시인은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기 책(성경)에 있나이다"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법이 중심에 있고 그분의 뜻 행하기를 즐기며 많은 무리 가운데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으며, 그 일을 쉬지 않았다(40:5-9).
본편 5절-11절은 메시야를 예언하는 듯한 대목이다. 특히 7절의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함은 누가복음 24:44절에서 예수님 입을 통해 인용된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 24:44).
시 40:12-17은 이미 구원받았음을 선포한 1-2절과 다르게 "속히 도우시길" 바라는 구원의 요청으로 되돌아간다. 원수들의 공격과 압제, 모욕과 조롱에서 건지시며 그들의 악이 그들에게 돌아가길 바라는 부르짖음이 간절히 표현되어 있다.
◇ 묵상
하나의 이어진 글이라 보기엔 맥락이 중구난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가 한편으로 인정되어 오늘까지 이른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시를 하나의 노래로 이어서 불렀던 오랜 관습에 따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은 구원받은 감격을 노래하다가, 메시야를 드러내는 예언시가 되었다가(저자는 몰랐을지라도) 다시 구원의 손길을 갈구하는 부르짖음으로 마쳐진다. 주석들도 정확한 설명은 피하거나 함구한다.
나도 별 수없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남겨둘 수 밖에.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올 수도 있겠지. 이처럼 맥락을 이어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본문의 글들이 하나하나 하나님께 드린 진실한 기도의 파편들임엔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성경으로 오늘까지 보전될 수 있었겠지. 최근 읽고 있는 책의 서두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율법서와 예언서, 시편들은 성경의 권위를 가진 책들로 인정되고 있었다 한다(눅 24:44을 근거로 - 모세오경 강의/양진일). 유대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직접계시인 토라(율법서들), 간접계시인 예언서들(선지서), 그리 고 영감에 의해 하나님께 고백하는 시편 및 하나님과의 일들이 기록된 역사서들(성문서) 순으로 중요도를 매겨 배열했다고 안내한다. 유대인의 성경은 우리 것과는 다르게 서사가 아닌 중요도 순으로 책들을 배열했다는 것이다. 시편도 이미 예수님 시대에 성경의 일부로써 간주되었음이 눅24:44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근거로써 제시한다.
요즘 새삼스레 "역사적 예수" 논쟁이 뜨거운 모양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현현하심. 그리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셨던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기독교의 근간이며, 기독교 신앙은 이 고백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부정함과 다름이 없다. 부활이 없은 즉 소망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현설을 주장하며 그런 예수를 신앙하겠다는 오래된 이단과 별 다를게 없어 보인다. 자기들이 믿음의 근간을 흐트려 놓고는 믿기는 계속 믿겠다는 기괴한 태도라 생각된다.
그러한 이들을 생각하니 오늘 본문은 난해한 축에도 못 든다. 세 단락 정도로 끊어 읽기만 해도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그리스도 되신 결정적 사건, 완전한 죽음과 완전한 부활에 대한 부정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신화나 비유, 조작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성령님과 관계가 없다. 성령님은 그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이 하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후 대신 내려오신, 또다른 보혜사 '임마누엘'의 약속을 실현, 실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메시야의 죽음도 없고 부활도 없다면 성령이 다 무엇인가? 그분의 오심은 근거를 마련하기 어렵다. 사도행전 이후는 삭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과 하나의 국가에서 살 수는 있어도 하나된 교회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서로 다른 종교의 자유와 생각의 자유를 인정하여 타종교인으로 살아갈 수는 있겠다. 스파게티교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도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이니.
이성적으로 믿을 수 없으니 그 부분은 빼고서 믿겠다는 생각이 어리석다. 심장을, 뇌를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쓰네 마네하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기독교의 본질적 근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그 일들(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이라 믿어진 이들의 모임이며, 그것을 믿기에 소망으로 살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주하시는 하나님, 성령의 존재를 믿고 느끼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회합이기도 하다.
나는 파편처럼 홀로 떨어져 있는 가나안 성도지만, 여전히 그 믿음의 파편이며 그 소망의 조각이다. 오늘도 나는 성령의 도우심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주어진 구원의 결과 - 하나님과의 교제,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누리는 현재를 영위한다. 부활이 없이, 죽으심이 없이, 오늘의 나와 오늘의 내 신앙은 없다.
◇ 기도
아버지, 옛 것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만, 근간이 되는 것은 지켜야 존재의 본질을 지킬 수 있겠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제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신 그날로부터 십자가의 죽으심 외엔 소망이 없으며 주의 부활하심 외엔 어떤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구주의 무덤과 부활의 복음을 더 깊이 알아가기 원하니, 어두워지는 세상에서 제게 빛을 더하여 주십시오. 더 배우고 깨닫고 누리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첫댓글 아멘!
성령의 증거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알수록
새로운 존재의 부요함도 더할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