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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올람토라 온라인 성도방에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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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를 회복하여 예슈아를 닮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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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을 얻을수 있을지 두려워하라
여호와께서 태초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을 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기에 모자를 수도 있다. 거기까지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영어로는 short를 쓰고 있다. 즉 장성하게 tall해야 하지만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도 자라지도 못한 상태를 말한다. 헬라어의 뜻은 '늦게 되다, 열등하다, 부족하다, 궁핍하다' 등으로 모자라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충분히 익어야 하고 넉넉히 이겨야 하며 성숙해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복음을 들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우리 안에서 자라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듣기만 하고 정작 믿지 않는다면(못한다면) 그 복음은 결코 우리를 유익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즉 복음이 우리 마음밭에 심겨져 순종의 열매를 30배 60배 100배로 내지 못할 것이다. 결국 복음을 못들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히4:1-3).
어떤 사람은 우리의 구원이 태초부터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안식의 언약이 우리에게 있을지라도 결국 구원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즉 우리의 책임이다. 물론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마음밭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3절 말씀에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구원의 일이 이루어졌다'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원래 헬라어 원문에는 접속사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뜻인 '카이토이'가 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이미 그 일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라고 번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개역개정 성경은 번역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뜻은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이미 여호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셨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노하시며 불순종하는 자들이 그분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지금도 정하여진 것이 없다. 언약이 있을 뿐 언약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순종에 달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히4:1-3)
2 아버지의 안식에 들어가는 방법
여호와께서는 안식일(샤밧)에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떨어져 안식의 시간을 가지셨다. 우리가 하는 일로부터 떨어지는 것은 때로는 굉장히 즐거운 일이다. 여행하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그곳에서 조차 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다. 물론 요즘은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며 일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일로부터 떨어진다. 여호와께 안식일(샤밧)은 그런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를 위해 그런 여행과 같은 샤밧을 창조하신 것이다. 모든 일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그러므로 번잡하고 분주한 생각에서도 떨어질 수 있는 시간이다.
6일동안의 일이 거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샤밧에 쉬었기 때문이다. 만약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샤밧에도 열심히 일한다면 6일의 일이 부정해질까? 답은 '그렇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쉼이 없이 어떤 일을 하면 끝내 병이 날 것이고 뜻하지 않게 병원비가 나갈 것이며 모든 일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샤밧을 거룩하게 보내는 것은 나머지 6일도 축복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일한 보상이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 것도 축복이기 때문이다.
우린 일하는 6일도 좋아하지만 공휴일인 쉬는 날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일중독자를 빼고는 말이다.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거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실 여호와의 안식의 그림자는 이 땅에서의 안식일(샤밧)이다. 이 땅은 하늘의 그림자이다. 그중 안식일은 안식의 나라의 그림자이다. 샤밧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날인가? 그렇지 않다.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샤밧의 시간안에 들어올 수 없다. 다시 말해 여호와께서 못들어오게 하시기 이전에 우리가 들어가기를 거절한 것이다. 즉 순종하지 않고는 샤밧에 들어가지 못하고 궁극적으로는 안식(샤밧)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순종'의 헬라어 뜻은 '불순종, 불신' 두가지 모두 가지고 있다. 즉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그 명령을 주신 여호와를 믿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언약을 지키지 않으므로 계약이 깨져버린 것이다.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계약이 깨진 것처럼, 예슈아가 메시아로 오셔서 희생하셨음에도 우리가 불순종한다면 그 죄가 얼마나 크겠는가?(히4:4-6).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히4:4-6)
3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지 않았다
다윗은 어떤 특정한 오늘을 예언했다. 그냥 오늘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오늘을 말한다. 그 날은 물론 예슈아께서 오신 초림을 말한다. 수많은 유대인은 그날을 기다렸다. 메시아께서 오시는 날을 학수고대했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키지 못했다.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땅에 들어갔지만 아직 진정한 안식을 얻지 못했다. 그 뜻은 우리에게 아직도 안식을 이룰 때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진정한 안식의 나라, 언약의 땅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정차 다시 오실 예슈아께서 왕으로서 언약의 땅 안식의 나라에 오셔서 여호와의 법도대로 통치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히4:7-11).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4:7-11)
이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힘쓰고 애써야 한다. '힘쓰다'의 헬라어 뜻은 '서둘러 ~하다, 노력하다, 열심히 하다, 공부하다, 부지런히 하다' 등이다. 즉 열심을 내서 공부하고 준행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며 부지런히 옳은 행실을 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처음부터(태초) 선한 일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엡2:10). 우린 6일 동안 우리의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샤밧에는 구원을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한다. 우린 샤밧에 얼마나 하나님을 공부하고 선행을 위해 노력하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선행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4 순종의 본 vs 불순종의 본
성경은 우리에게 두가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본'의 헬라어 뜻은 '견본, 예시' 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순종의 본, 불신의 본을 보여주었다면, 예슈아께서는 순종의 본,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다. 이스라엘 전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 불순종하는 자들의 삶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다면 그들처럼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함이 없이 그분을 볼 자가 없다(히12:14).
반면 예슈아께서 보이신 순종의 본으로 진정으로 토라를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그분의 삶을 본받는 제자라면, 우리도 예슈아께서 걸어가신 길을 걸을 것이고 마음(생각)을 다해 뜻(감정)을 다해 힘(생명)을 다해 여호와의 명령을 준행할 것이다(신6:5).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잃어 버리게 하는 것일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면 개의치 않을 것이다. 무엇이 더 소중한 지, 무엇이 영원한지 알기 때문이다. 그때 예슈아를 부활시키신 여호와께서 우리 안에 살아있는 예슈아를 보고 우리도 부활시키실 것이다. 오직 예슈아의 몸된 교회는 오직 순종의 본, 믿음의 본을 따르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5:4,5)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12:14)
5 말씀은 모든 어둠을 드러내신다
어둠은 우리 몸을 그들의 거주지로 삼아 관절과 골수와 혼과 영에 그들의 집을 짓고 산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린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만약 우리의 혼에 악한 것이 있다면 영에 어둠이 있다면 관절에 불순종이 있고 골수에 불법이 있다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모두 찌르고 쪼갤 것이다. 우리 몸에 할례를 행하듯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부정한 부분, 부패한 부분을 잘라내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의 어떠함과 숨은 의도까지 드러내시고 회개시킬 것이다. 따라서 우린 축사를 걱정할 필요도 어둠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찾아내지 못해서 회개하지 못할까봐 염려할 필요도 없다. 오직 그것은 말씀께서 하신다. 우린 지식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을 안다(사53:11).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만 있으면 된다. 우리가 말씀을 바르게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는 자에게 보이실 거라 약속하셨다. 렘29:13) 말씀이 살아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것이고 우린 거룩한 자가 되어 그날에 예슈아께서 영광받으실 때 함께 영광에 참여하며 기뻐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4:12,13)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사53:11)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29:12,13)
6 예슈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우리는 구원 받기를 소망한다. 마침내 죄와 싸워 사망을 이기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이다. 우린 할 수 있을까? 여호와께서는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당신의 아들 예슈아를 사람으로 보내셨고, 그분은 모든 시험을 겪고 통과하고 이기심으로 우리를 시험에서 도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린 각자 십자가를 가지고 있다. 누구는 더 쉬운 십자가같고 누구는 더 어려운 십자가 같으나,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험은 감당할만해서 주신 것이다. 또한 피할 길을 주시는 공평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우린 믿는다(고전10:13). 다시 말하지만 우린 감당할 시험만 당하고 있다.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누가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느냐고 말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죄가 없으신 예슈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할 수 있다고 그리고 힘겨울 때 담대히 하늘 대제사장에게 은혜를 구하라고. 그러면 예슈아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능히 시험을 이기고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자신이 이기신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이고 아름다움이고 기적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예슈아의 삶을 우린 안다. 그분은 죽도록 순종하셨고 마지막은 영생을 얻으셨다. 그러므로 우린 아버지께 가는 길을 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다. 그 길을 혼자 걷게 하지 않으신다. 대제사장이신 예슈아께서 함께 걸어주신다. 아버지께 가는 길을 아는 우리가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린 할 수 있다. 죄를 이길 수 있다. 불순종을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이신 예슈아께서 승리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이다(엡1:22,23). 지체는 머리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우린 거룩하신 여호와를 섬기는 교회로서 순종하는 백성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4-16)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1:22,23)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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