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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장점 또는 단점이라면 나의 주관적 견해로 다른 사람들보다 진솔하고 말로 하는 표현력이 크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말로 내 얘기를 들어줄 상대가 없을 때 일기를 쓰면서 정말 많은 위로와 사물을 달리
보는 신비한 힘을 경험하기도 했다. 오늘... 나는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 이런 걸 어떤 심정이라고 해야할까?
약간의 실패감과 좌절감 그리고 컸던 기대에 대한 푹꺼진 느낌....
그래서 엊그제 나는 이 일정을 잡았다.
위로차 나 자신의 시간을 의미있게 즐기겠다는 각오가 그 동기였다.
결혼하고 10년 이상을 경제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는데 우연히 길을 가다 내가 활동하기 딱 좋은 시간대의
3시간 아르바이트 자리를 발견했다. 전화하고 가서 일을 했는데 그날 받은 일당에 완전 대견하고 감격해하며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정말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일을 하고 돈을 번다는 나의 생산성에
행복해했는데 바로 엊그제 주인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이유는 내가 일하는 속도가 느리다는 것....
나는 빨리 한다고 했는데......미안해하는 사장님께 더 미안해하며 나오면서 나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래서 가게 된 '걷다 보니 서울 여행'
<그림 생략>
여기는 효창공원.. 함께 동행한 분들이고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곳은 서울시 청년 기업이라고 한다.
여기 계신 분 중에 우리가 간 청파동에 어린 시절 사셨던 분이 계셔서 어린시절 그 지역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투어를 하는 목적은 서울을 더욱 이야기가 풍성한 곳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한다.
여기가 효창공원 내에 있는 삼의사의 묘이다. 독립운동가이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선생님의 묘가 있고 나머지 한
가묘는 안중근의 묘라고 한다. 아직 유골을 찾지 못해 가묘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을 추진한 분은 김구 선생님이시다.
김구 선생님은 풍수지리와 관상을 공부했는데 독립 운동했던 이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다 자신이
가장 잘 하는 풍수지리를 보고 가장 풍수가 좋은 이 곳을 잡아 묘지를 잡았다고 한다. 가이드 분이 김구, 안중근 선생님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처음에 두 분은 몇 번 만나도 가까와 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김구는 동학농민운동을 지지했고 안중근은 그 반대편에 섰던 경력 때문이라고 한다.그리고 어떤 계기로 가까와 진
이야기를 했다. 김구 선생은 어렸을 때 몹시 개구졌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개구진 아이들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효창공원 삼의사 묘 가는길.....
효창공원에 대한 역사를 들었는데 한 때 (아마도 박정희 정권 때) 이 공원을 골프장으로 만들자고 추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아름답고 역사적인 공원을 골프장으로 만들 생각을 하다니 깜짝 놀랐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여 이 공원은 지금과
같이 남을 수 있었다는 말을 하며 가이드는 그래서 우리 역사, 문화에 대한 인식이 현재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데 중요한
것이라는 말이고 그것을 자신의 회사에서 추진한다고 한다.
효창원은 원래 정조 대왕의 아들인 문효세자가 5살의 어린 나이에 돌아가시자 이 곳에 묻히셨다고 한다.
그 어머니도 6개월 뒤에 돌아가셨는데 정조는 아픔이 컸던 만큼 가까운 데 묘지를 정하고 자주 왔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지금의 서삼릉에 국권이 약해져 강제 이전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서삼릉 투어도 간 적이 있는데
다시 가면 문효세자와 정조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될 것 같다.
우리 동네 북한산 아래에도 순례길이라 하여 여러 애국지사분들의 묘역이 있는데 우리 후손들은 이 분들의 헌신과 말로
다할 수 없는 민족을 사랑하고 미래를 위해 힘썼던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애국지사 선생님들.....
시간이 많이 허락지못해 효창공원을 다 돌아보지 못했으나 습지가 조성되어 있고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있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처음 가는 공원이고 가고 싶었던 곳인데 이렇게 가게 되어서 정말 반가왔다. 금년이 가기 전에 아이들과
다시 찾아야겠다.
사랑하는 사람들... 좋은 사람들과 이 효창공원 길을 걸으면 흑흑흑..얼마전 어이없게 사기를 당해 속상하고 아직도 분노를 품고 있는 내 마음도 조금씩 엷어지지 않을까하는 마음........... 당해보지 않으면 그 감정들을 헤어릴 수 없을텐데
나는 한 달 전에 생전 처음 해괴한 일을 당했다. 구태여 그것의 긍정적인 점을 말하라면 내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안목을
가져 조금 더 넓게 인간을 이해했다고 해야하나? 나는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품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아르바이트가 필요했고 그 아르바이트에서 해고당해 이 곳에 온 것이다.
공원의 나무와 풀들이 말없이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다음 주부터 새로운 아르바이트 장소에 가는데 에고...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가득.
여기가 청파동의 한 골목이었다. 가이드 말대로 골목에도 무수한 이야기들이 담겨있고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어야겠다.
여기 이용원은 3대가 운영하는 곳으로 옛건물 그대로고 서울시에서 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라고 한다.
현재도 영업하고 있고 이 곳에서 머리를 자르려고 멀리 부산에서도 60년 째 오신다고 한다.
이곳의 물건들도 다 오래된 것인데 그 중 가장 최신인 것이 선풍기로 40년 되었다고 한다. 깜짝..
린스대신 식초를 사용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우리가 올라갔을 때는 이용원 안에 사람이 붐며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이용원이 호황일 때는 1960년대로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도 불황일 때는 1970년대 비틀즈가 유명세를 탈 때 였다는 재미있
는 말을 들었다. 또 교도소 같은 곳에서 사회에서 직업을 가지라고 이미용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도 불황의 원인이었는데
일부 퇴폐이용원이나 미장원이 생기면서 인식이 바뀌어 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에 정. 재계의 유명인사들이 많이 다녀갔
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건희 회장이라고 한다.
여기 위에가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장소에 등장하는 곳이라고 한다. 나도향은 26살 때 물레방아, 뽕, 벙어리삼룡이를
다 썼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일찍 돌아가셨는데 다른 문인들도 그 시대에는 왜 그리 빨리 돌아가셨는지 이런 사실로도
나라의 힘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쪽 아래 쪽에 박지만길이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 동생인 박지만 씨가 다닌 배문중학교가 있는데 길이 질척거려 힐을 신고 어머니가 오실 수 없으셔서
시멘트로 깔아 박지만 길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가 신상옥 감독이 제일 처음 세운 영화관인데 주변에 만리시장이 있어 조폭이 많았다고 한다.
조폭들이 씨끄럽게 하면 이미자를 불러서 동백아가씨와 같은 노래 부르게 하면 한 동안 잠잠했다고 한다.
당시 조폭들이 이미자의 노래를 좋아했나보다. 별명을 장독대라 부르면서 불러 오라고 했다고....
최근 신문에 나온 김정일의 육성을 녹음한 것과 신상옥, 최은희에 관한 북한 관련 일을 들려 주었다.
영화관으로 쓰일 당시 많은 배우들이 이 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그 때는 통행 금지가 있어 밤 늦게 음식을 배달이 어려웠는
데 발빠른 어린이들이 몰래 배달하였고 그들을 토끼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게 적산가옥인데 적국의 재산이라는 뜻이고 이 주변에 러인전쟁 후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일본인 정원사의 집이었
다고 한다. 적산가옥을 알아보는 포인트를 몇 개 설명해 주었는데 우리나라의 암, 수키와와는 다른 기왓장 배열, 돌출된 창문, 목조로 된 환기창, 마름모형 돌 등이라고 한다.
이 개미슈퍼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한데 이 골목 위 쪽으로 게스트 하우스가있는데 외국인인 길을 찾기 어려워
이 곳 사장님이 친절히 알려주다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외국인들을 배려해 1인이 먹을 수 있는 상품을 판매하기도 한단다.
이 곳의 주인장은 40년 전 이 골목을 뛰어 놀던 어린이였다고 한다.무수한 사진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고마운 마음에 찍은
위는 파란 색 지붕인 이 장소는 현재는 아래 사진처럼 빨간색 지붕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국립극단으로 사용되지만 이전에는 기무사 수송대였다고 한다.
이 곳을 덩치 큰 사람들이 오갔고 간혹 비명 소리가 들리기도 하여 일반인은 그 기세에 눌려 눈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한다. 빨간색은 그러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국립극단에서 칠했다고 한다.
우리가 보는 저기 저 산은 예전에 봉제공장 등이 들어와 환경이 오염되기 전에는 재첩, 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아래로는 만추천이라는 개천이 흘렀는데 공장 폐수 때문에 냄새가 나면서 폐쇄하자는 주민의 의견을 받아들여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이 동네가 청파동인데 푸를청에 언덕파를 쓸만큰 살기 좋은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산업화가 되면서
변했다고 좀 아쉽기도 하다. 재개발 들어갈 때는 이 곳에서 구유가 많이 나왔는데 이유는 이 지역이 조선시대
역이 있던 곳으로 이동수단인 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끝나고 이 작품 전시회를 보고 싶었는데 급하게 일정이 또 있어 보지 못했다. 아... 보고 싶다.
서울역이 인터넷 예매가 되지 않았을 당시 명절 같은 때에 많은 사람이 몰리면 이와 같이 고향에 가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1960년대 목포로 가려는 사람들이 몰려 압사 사건이 일어나 이용객을 다 수용할 수 없다는 필요성으로 서부역이 생겨났고 KTX가 생기면서 몰려나는 인원이 분산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284는 사적번호라고 한다. 이 건물은 1925년 지어졌는데 당시 기와만 있던 때에 비잔틴과 르네상스 양식을 가진 이 건축물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일제는 근대국가로 발전시킨다는 교묘한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총독부 1년 예산의 절반을 지을만큼 공을 들였다고 하는데 같은 해 조선 신궁도 세웠다고 한다. 나쁜 놈들.....
우리는 우리의 생각들을 소중히 하고 우리의 역사, 문화, 삶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우리의 인식까지 파고들려는 교활한 속내를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당시 이 역은 경성역이었는데 2층짜리 건물이 없던 당시엔 엄청난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이상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남자가 이곳 이층 요리집에서 차를 마시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 그냥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당시에는 최신식의 요리를 비싼 가격에 판매한 곳이라고 한다.
서울역과 비슷한 외관의 이 사진은 스위스의 루체른 역인데 현재는 사라졌다고 한다.
같은 양식임을 보여주기 위해 가이드님이 펼쳐 들었다.
당시의 서울 모습... 저기 먼 곳에 있는 유일한 2층 건물은 어디일까요?
답은 숭례문이다.
강우규님의 이 동상은 국가에서 만든 것이 아닌 그 분의 후손들이 돈을 투자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 지역의 인재를 발굴하고 기념하는 일들을 지자체에서 많이 한다고 하는데 우리 구에서도 그런 의견이 나왔었다.
그런데 의견을 낸 사람이 의견은 좋았으나 신뢰할 만한 사람이 확실히 아니어서 다들 묵살하는 분위기였다.
특별하고 좋은 의견을 내는듯 보이지만 그 이후엔 개인의 잇권이 항상 개입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나라가 해 주기 전에 부유하게 사는 후손들이 먼저 관심을 갖는게 먼저라고 했다.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후손들이 적극적이지 않으면 성사되기 어려운 일이라고.....
사실 나는 나라가 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 동상이 그 가족들이 세웠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얼마나 비용이
들어갔는지 궁금했는데 정작 강우규 의사에 대해서 좀 더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게 먼저일 것이다.
이 장소에서 강우규 의사는 동상에 들려져 있는 것과 같이 폭탄을 던졌다고 한다. 당시 연세가 64세 였단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나이가 많으신 분도 독립 운동을 한다는데 자극받아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저기 고가 도로는 예전에 자동차가 이 곳에 많이 붐비자 자동차 이동통로였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바꿀 계획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바뀌게 되는 청사진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역 투어 즐거운 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알수록 더욱 재미있고 배우고 싶은 투어여서
알찬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모여 내 삶의 의미가 더 풍요롭게 변해가는 것 같다. 1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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