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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성격상 경어체는 생략합니다.
- 별 재미는 없겠지만 기억을 더듬어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로 가보자. 아직도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 이해찬 교육부 장관은 당시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가게 해주겠삼"이라는 단군 이래 최대의 거짓말로 우리 기수에게 단군 이래 최저학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셨다. 4시만 되면 야자대신 삼삼오오 PC방에 모였던 때고, 실제 학교와는 멀어지니 가끔씩 시비가 붙곤도 했던 시절이다. 그런데 전학생 한 놈의 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짱 질서'에 정면으로 대항한 이 전학생은, 실제 끝판 보스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주먹으로 학교에서 싸움 좀 한다는 애들을 모조리 굴복시켰다.
한 가지 재밌었던 기억은 이 전학생이 주먹을 휘두르는 만큼 그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일진'들은 싸움을 거는 데 있어 좀 더 신중해 졌고, 어떻게 하면 '뜨거운 맛'을 보여줄 수 있을까 내심 머리를 굴리더란 말이다. 좀 시간이 흐르니깐 대놓고 일기토를 신청하는 녀석도 사라졌고, 좀 더 조직적으로 행동하며 꼬리를 내렸다는 비아냥까지 받으면서도 그 전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신중해 졌던 기억이 난다.
- 갑자기 별 관심도 없는 skullboy의 과거사에다, 그것도 3류 저질 액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스토리를 서두부터 지껄이는 것은 그 전학생이 요즘의 호펜하임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어디 붙어있는지조차 관심을 얻지 못했던 이 뉴비는 올 시즌 분데스리가 최대의 화두로 떠오르며 터줏대감들을 긴장 타게 하고 있다. 확실히 호펜하임의 성과는 예사롭지 않다. 승격팀이 1부 리그에서 이 정도 경기력과 그에 상응하는 승점을 챙겨간다는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임은 모두가 다 안다. 2부에 이어 1부까지 집어삼킨 90년대 후반의 카이저스라우턴이 떠오르긴 하지만, 당시 카이저스라우턴은 완성된 선수가 즐비한 팀으로 지금의 호펜하임과 직접적으로 비교하긴 무리가 따른다. 더군다나 승격팀이 수비가 아닌 공격으로 전통의 명문들과 일합을 뜨고 있다는 모습은 그야말로 놀라울 따름이다.
- 사실 올 시즌 필자는 호펜하임의 예상성적을 두고 윈도우보다 더 심한 오류를 거듭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시즌이 시작하기 전 필자가 예상한 이 팀의 예상성적은 강등권과 잔류권을 오고가며 똥줄타는 줄타기를 벌이는 수준이었다. 시즌 초반 다섯 경기를 봤을 때도 이 예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전반기에만 승점 35점을 벌어들이며 헤어프스트마이스터에 등극한 이 팀은 이제 대충대충 뛴다고 하더라도 필자의 예상 순위에 뒷통수를 후려 갈길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버뜨, 돌풍에 관대하지 못한 필자는 여전히 호펜하임이 현재의 순위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라 또 한 번 옹고집을 부려본다. 전학생이 견제와 회피때문에 자신의 주먹을 시험해 볼 기회를 상실했듯, 호펜하임 역시 상대의 견제가 자신들의 스타일을 십분 발휘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 전반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리그 내에서는 호펜하임을 '승점 자판기'로 여기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당연히 골을 넣기 위해 전진했고, 의외로 높은 수비벽에 좌절하다 순간적인 역습 한 방에 뒷공간을 털린 팀이 한둘이 아니었지 않나.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각 팀들은 호펜하임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고 좀 더 신중하게 경기를 운영하고 있으며, 더 이상 신입생이라고 깔보거나 방심하지도 않는다. 즉 반드시 승점 3점을 착취해야 할 대상에서 리그 정상급 클럽의 '예우'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도르트문트와의 이번 경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소풍 가는 기분으로 진하임 원정길에 나섰다가 네 골을 얻어 맞고 떡실신 당했던 기억이 있는 도르트문트는 홈임에도 불구하고 수비에 중점을 두는 경기운영을 선보였다. 파트릭 오보모옐라와 마르첼 슈멜처라는 양 윙백들의 공격가담을 최대한 자제시키고 상대의 측면을 봉쇄한 것이 대표적인 모습이다. 전반기 상대 클럽의 '방심'을 120% 활용하며 신바람을 냈던 호펜하임이지만, 이런 경기에서는 아무래도 그들이 자랑하는 공격 재능들의 유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호펜하임이 후반기 남은 경기 내내 이런 견제에 시달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 호펜하임의 후반기 첫 스타트가 경쾌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물론 전반기 내내 골이라는 단어와 결혼한 베다드 이비세비치의 시즌-아웃도 큰 타격이긴 하다. 그러나 이비세비치가 호펜하임 공격진을 '정의'하는 활약상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그는 치네두 오바시와 뎀바 바, 그리고 카를로스 에두아르두와 세야드 살리호비치가 차려준 밥상을 꾸역꾸역 소화시킨 것에 불과하다(물론 이 자체가 위대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베르더 브레멘처럼, 현재의 호펜하임은 어떤 공격수가 들어가도 능히 자신의 역량을 살릴 수 있는 구성이 되어 있는 팀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최종순위와는 관계없이 호펜하임의 매력적인 공격축구가 남은 일정에도 꾸준히 이어질 것이라 전망한다. 공격축구의 신봉자인 랄프 랑닉 감독의 성향도 성향이지만, 어차피 이 팀은 이기기 위해서는 공격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팀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마르빈 콤페어와 안드레아스 벡이 가슴에 독수리 문양을 달았다고 해서 이들을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하면 곤란하다. 마티아스 야이슬레와 이삭 보르샤, 그리고 페어 닐손은 타 팀이라면 주전으로 뛸 수 있을지도 의문인 친구들이다. 이처럼 호펜하임의 수비진은 전체적으로 잔실수도 많고 개개인의 역량도 높은 편이 아니다. 이제 와서 수비를 강화한다고 분주해 봐야 재미를 볼 수 있는 성격의 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호펜하임이 철저히 자신들을 분석하고 대비하는 상대팀들의 방패를 어떤 식으로 뚫어낼 것이느냐로 귀결된다.
- 사실 호펜하임이 후반기 들어 공격적으로 다소 부진한 이유는 선수들이 못해서가 아니다. 바로 상대팀들이 신중하게 경기 운영을 하면서 찬스 자체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바카 사노고는 이비세비치와 같이 전형적인 박스 스트라이커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스타일 자체는 사뭇 다른 선수다. 그러나 전반기와 비슷한 호펜하임의 공격 전술은 사노고를 특화시키지 못하고 있고, 이는 바의 과부하로 연결돼 전체적인 공격력의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이는 결국 랑닉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원래 잘나갈수록 끊임없는 변화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나. 랑닉이 돌풍을 일으키다가도 궁극적으로 한 클럽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여기에 안주하면 호펜하임의 다음 시즌은 결코 좋은 성적을 보장할 수 없다.
- 자, 다시 한 번 호펜하임의 최종순위에 대해 예상을 해보자. 매번 틀리지만 다시 한 번 베팅을 한다면 필자는 호펜하임이 4~5위권에서 시즌을 마칠 것이라 전망한다. 한 시즌을 치르면서 올라올 팀은 결국 올라오고, 내려갈 팀은 돌풍을 일으키다가도 결국 내려가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기다. 호펜하임의 선수층은 누구나 다 알다시피 두텁지가 못하다. 당장 중원에서 항상 독박을 쓰는 루이스 구스타보가 경고를 10장 채워 다음 경기에 나서지 못한다. 선수 하나가 쓰러지면 곧바로 팀 전력이 타격을 받는 구조로 이뤄진 이 팀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막판까지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다면 다음 시즌 UEFA컵이나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꿈꾸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당장의 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면 시즌 최종전에 5위 밑으로 내려가 있는 호펜하임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펜하임이 이 위기 상황을 얼마나 현명하게 헤쳐나가는지는 후반기 최고의 이슈 중 하나로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 22경기 중 무려 12경기에서나 무승부를 기록하며 '허정무배 무승부 대회' 챔피언 자리를 노리고 있는 도르트문트는 평가하기가 참 골때리는 클럽 중 하나다. 확실히 크리스티안 뵈른스와 로베르트 코바치라는 리그의 대표 노친네들을 데리고 경기를 하던 때보다는 수비가 좋아졌다. 네벤 수보티치와 펠리페 산타나, 그리고 마츠 훔멜스로 이어지는 젊고 재능 있는 수비수들은 로만 바이덴펠러의 선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상대의 빠른 공격에는 약점을 보이지만 그럭저럭 버틸만한 수준은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공격이 안 된다. 좀 이상하지 않나. 감독이 그 유명한 위르겐 클롭인데 말이다.
도르트문트의 문제는 팀이 가진 '확실한' 색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랄프 랑닉처럼 '모 아니면 도'식으로 공격을 외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펠릭스 마가트처럼 신중하게 수비벽을 쌓고 땅따먹기식 축구를 구사하는 것도 아니다. 팬들은 클롭이 마인츠 시절의 정교하면서도 역동적인 공격축구를 도르트문트에 전수해 주길 바랐겠지만, 현실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축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아둔한 시각에서는 감독과 클럽이 지향하는 축구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90분 내내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작은 클럽인 마인츠를 이끌다가 도르트문트 감독직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면서 현실과 타협이라도 한 것이 아닌가 고민하게 될 정도다. 공수 양면에서 기복이 심한 것도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호펜하임의 수비력은 시즌 내내 롤러코스터지만, 이 팀은 공격이라는 확실한 색깔을 가지고 경기에 임한 결과 도르트문트보다 더 높은 순위에 있을 수 있었다. 헤르타 베를린의 루시앵 파브레는 그 반대였고 말이다.
- 타마스 하이날의 영입은 정말로 나이스한 영입이었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중원이든 측면이든 경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선수 자체가 없었던 팀 아닌가. 클롭이 하이날을 활용하는 방법 자체도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프리롤을 주면서 그의 공격적 역량을 극대화시키고, 나머지 세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하이날의 호위를 맡기는 현 시스템은 공수 밸런스 측면에서 바람직한 조합이다. 그러나 정작 골을 넣어야 하는 공격수들이 문제다. 사실 넬슨 헤이도 발데스와 모하메드 지단, 그리고 여전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알렉산더 프라이로는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에 한계가 있다. 측면으로 빠져나가는 성격이 강한 세 선수의 특성상, 2선 침투에 능한 믈라덴 페트리치의 이적은 확실히 아쉬운 부분이다. 페트리치가 흘러나오는 볼만 다 주어 먹었다고 하더라도, 도르트문트의 순위는 9위가 아닌 5위 이상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 어쨌든 클롭이 지향하는 축구는 시간이 갈수록 더 윤곽이 매끈하게 드러날 것이라 본다. 이 감독은 필자에게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리그 내의 몇 안 되는 감독이니 당장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깔 생각은 없다. 또한 이 팀은 현재 순위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할 수 있는 잠재적 포텐셜을 가진 팀이다. 그렇다면 클롭의 축구를 구현할 수 있게끔 구단의 지원이 필요하다. 도르트문트의 지난 여름 사이닝은 일단 문제가 시급했던 수비진의 구멍을 메워넣는 데 대부분 사용됐다. 그렇다면 돌아오는 여름은 공격적 재능을 수급하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 "소파를 사달라고 했더니 스탠드가 왔더라"라며 투덜댄 베니테즈는 클롭에 비하면 차라리 나은 편이다. 감독이 소파를 사달라고 졸랐으면 하다 못해 짝퉁 라꾸라꾸라도 사다주는 성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도르트문트가 현재의 순위 정도에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면 최악의 결과는 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클롭은 연착륙을 한 것이 될 게고, 자신이 구상하는 축구를 보여주기 위해 적극적인 구단의 지원을 요청할 것이 눈에 선하다. 구단의 재정악화라는 절대적인 면죄부를 남발했던 도르트문트로서도 능히 1,000~1,500만 유로 정도는 순순히 클롭의 손에 쥐어줄 공산이 높다고 본다. 아마도 클롭과 도르트문트의 색채는 다음 시즌이 되야 확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예상해 본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올 시즌은 이 이상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도 성립된다. 열광적인 보루센들은 한 시즌 정도 더 참고 인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비록 골은 터지지 않았지만 시종 일관 빠른 템포와 정교한 패싱으로 무장한 이 경기는 분명 수준 높은 경기였다. 한 가지 옥의 티는 세바스티안 켈과 토비아스 바이스의 동시 퇴장. 마르첼 슈멜처가 얄밉게 원인 제공을 했지만, 카드와 오심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실 양반인 헤어베르트 판델이 이날 주심이었음을 감안하면 자제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나이를 먹어 갈수록 판정에 대한 질이 더 떨어지는 판델은 분명히 리그 전체의 고민거리다.
* 내 맘대로 매기는 평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바이덴펠러(7.5) - 오보모옐라(6), 수보티치(8), 산타나(7.5), 슈멜처(6) - 켈(7) - 팅가(6.5), 사힌(7.5) - 하이날(7) - 발데스(6.5), 지단(6.5)
교체 : 프라이(6), 크링에(-), 쿨만(-)
TSG 호펜하임 : 하스(6) - 벡(6), 야이슬레(6.5), 보르샤(7), 이베르츠베르거(7) - 루이스 구스타보(7) - 테베르(5.5), 카를로스 에두아르두(6.5), 살리호비치(7) - 바(6.5), 사노고(5.5)
교체 : 바이스(5.5), 오바시(6), 웨우링톤(-)
Man of the Match : 네벤 수보티치
뎀바 바와 부바카 사노고가 난쟁이로 느껴진 것은 나 혼자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