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경이
박은정
너와 내가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우리 빼고는 다 알았다
내가 훔친 운동화를
네가 신고 다닌다는 소문
훔친 운동화는 모르는 길도
처음 보는 가게도 거침없이 돌아다닌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담배꽁초를 비벼 끄며
더위에 숨을 헐떡이는 개
시소 위에 놓인 돌멩이 하나
가끔은 모든 것이 전람회에 걸린 그림 같다
지루한 자신을 훔쳐 갈 도둑을 기다리듯
태풍의 전야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만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일들은 많아진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점성과 농도로만 이루어져 있을 때
세계에 가닿을 손끝을 예감했던 것처럼
손목과 발목이 서로 엉킨 채로
두려움이, 또 두려움 없는 마음이* 동시에
서로를 한 몸처럼 먹고 마시며
어떤 사랑은 사랑이 되기 위해
자신이 아끼던 마음을 죽이기도 하니까
빗줄기가 들이치기 전에
창문을 닫고 가만히 누워 봐
떠오르는 것들을 계속해서 그려 봐
따듯한 두 뺨
물집 잡힌 뒤꿈치
겨드랑이 아래 돋아나는 통증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목숨만 같아
가로수들이 휘청이고
사람들의 우산이 뒤집어진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창틀에 고이고
매미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투명하게 창문을 관통하는 울음
이것은 우리만 아는 울음이었다
섣불리 훔친 불행이었다
너의 운동화는 새것처럼 하얗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꿈꾸듯
우리는 그것을 구겨 신고
버스를 타고 서쪽 끝으로 떠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선한 눈을 하고
서로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신이 가지고 놀다 버린
작은 경이를 훔친다
*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에서 인용.
박은정
부산 출생. 2011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밤과 꿈의 뉘앙스』 『아사코의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