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사랑 둘째 사랑
고린도전서 13:8-13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설 연휴가 끝났다. 참 아쉽다. 명절에 부모님께 효도는 잘하고, 가족과 행복하게 지내셨는가?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은 동서고금이 공통적이다. 예수님도 육신의 아버지가 그리우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다가 하루는 육신의 아버지가 그리웠다. 누구? 그래서 잠시 땅에 오셔서 아버지 요셉을 수소문하였다. 어떻게 늙으셨을까 상상이 안가더라. 그러던 중에, 아버지를 닮은 노인을 만났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예전에 직업이 목수셨나요? (나직히) 그렇다오.
아들이 이상한 방법으로 출생하지 않았나요? (흠씬 놀라면서) 그렇다오.
생전에 아들 때문에 속을 많이 썩으셨지요? (멈칫하며) 아니 그걸 어떻게..
(예수님도 왈칵 울음을 참으며) 아버지.. 저예요.
그랬더니 깜짝 놀라며 노인이 말씀하신다.
“아니.. 그럼 네가 피노키오란 말이냐?”
주현절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절기이다. 무엇보다 사랑의 주님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일과가 고린도전서 13장인 배경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따지면 아마 사랑의 정의는 요즘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 계층의 문제이기도 하다. 돈 있는 사람과 돈 없는 남자가 다르다. 실은 노인과 젊은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가 다 다를 것이다. 어쩌면 사람마다 자기 입장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성경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을 ‘사랑의 율법’이라고 부르며, 또 요한서신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과연 나는 사랑을 제대로 아는 그리스도인인가?
1)
사랑을 이해하려면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규정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유명한 사랑장이다.
성경은 사랑을 똑 부러지게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든, 사람 간의 사랑이든 경험하는 과정, 배우고 깨닫는 과정, 변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결론이 아니라, 과정의 문제이다.
과연 사랑 없이 이 세상이란 시스템이 온전할까? 사랑은 마치 공기나 물과 같아서, 늘 사랑 타령을 하면서도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말로만, 노래로만, 결과로만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통일원에 등록된 북한을 돕겠다는 명분으로 설립된 구호관련 단체가 1천 개가 넘지만, 우리 사회는 북한에 대해 언제나 적대적이다.
사랑은 홍수처럼 넘쳐난다. 사랑은 누구나 가장 많이 말하면서도, 사람에게 가장 결핍한 그것이다. 마치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는 속담처럼 가슴에 와 닿는 사랑을 찾아보기가 정말 쉽지 않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3장은 별명이 ‘사랑장’이다. 가장 고상한 사랑장이 왜 고린도전서에 담겨 있을까?
초대교회 여러 교회들 중에서도 고린도교회는 문제와 갈등이 많은 곳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겸손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가장 아름다운 사랑장을 말씀한 것은 뜻밖의 일이다. 사랑은 거룩한 땅이 아닌 죄, 다툼, 증오로 얼룩진 곳에서 피어난다는 의미가 아닐까?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여러 가지 은사들, 곧 하나님의 선물들에 대해 말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가장 큰 은사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은사 중의 은사는 무엇일까? 사랑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그리고 결론적으로 바울 사도는 말한다. 사랑장의 결론은 보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의 선생님으로, 성경을 사랑학 교과서로, 교회와 세상을 사랑의 배움터로 여기고 살아간다. 우리는 사랑을 배우는 학생이고 제자다. 과연 실감하는가?
바울 사도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들으면 마음이 더 불편해지고, 더 평안해진다. 사랑은 다른 은사들, 다른 좋은 것들과 나란히 놓여 있는, 비교할 또 하나의 것이 아니다.
2)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의 여러 가지 언어와 심지어 천사의 말과 같은 황홀경조차 사랑이 없으면 귀에 거슬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 능력, 지식, 믿음을 자랑하지 말라. 구제하는 일이든, 자기 몸을 불사르는 순교적 희생이든 사랑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사랑이 있음으로만 의미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랑을 가리켜 하나님의 판단기준임을 지적한다.
금과옥조처럼 중요시하는 고린도교회의 모든 은사들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바울이 사랑을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임을 증거 하려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8).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언이나 방언, 지식 등 다른 방편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을 구해야 한다.
어린아이는 전체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자기가 경험한 것이 전부인 세상에 산다. 우리는 이런 어린이에 대해 잘 안다. 심리학, 철학, 생물학적 관찰 때문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다. 이 자리에는 아직 어린 꼬마가 있고, 여전히 어린이가 있고, 어른이지만 아직도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어른도 있다. 사실 누구나 그런 어린이의 자유,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어린 왕자>를 지은 생떽쥐베리와 같은 작가가 사랑을 받는 모양이다.
내 생각에 아기는 천사가 이 땅에 내려온 것이란 의구심이 든다. 은재나, 시온이, 율이를 보면 확증이 든다. 적어도 하늬나 찬결이를 봐도 그렇다. 옆에 있는 분의 얼굴을 보라. 천사라는 확신이 드는가? 의심이 드는가?
집에 가면 자기 어깨를 보라. 어려서 맞았다는 예방주사의 우두 자국이 있다. 실은 그것이 아기 천사의 날개를 접어 넣은 구멍을 메운 것이란 믿거나 말거나 정보가 있다. 적어도 나도 천사, 내 주변의 수호천사를 의식하며 산다면 얼마나 우리 가정이, 또 우리 세상이 사랑스러울까?
실은 어른이 되어서도 알 수 없는 것이 참 많다. 다만 희미하게 알아갈 뿐이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거울을 예로 들었다. 고대의 금속 거울은 질이 나빠서 얼굴이 뿌옇게 보였다. 그렇다고 내 얼굴이 본래 희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
그런 거울처럼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알지 못해도, 장차 종말의 완성 때에는 마치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보았듯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이 앞서 설명한 사랑의 특성 15가지를 보라.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린이 단계에서 불가능하다. 어린 아이가 오래 참을 수 있을까? 어린이가 절제할 수 있을까? 어린이가 질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린이가 자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C.S 루이스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에로스 사랑(연애)에 의하여 태어나고, 스토르게 사랑(모성애)에 의하여 양육되고, 필로스 사랑(우애, 우정)에 의하여 성숙하고, 아가페 사랑(하나님 사랑)으로 완성된다.”
모든 단계마다 반드시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은 사람의 성장에서 모든 출발점이고, 백그라운드이고, 전부이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특성들은 성숙한 사람의 인격에서 나타나는 행동이다. 신앙의 장성한 모습은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참된 의미에서 장성한 인격은 이기심을 극복하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아가페적 사랑의 본질은 이기심을 극복한 이타적 행동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을 가리켜 비로소 ‘온전한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그렇다. 바로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3)
헨리 나웬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사랑을 첫째 사랑과 둘째 사랑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첫째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자신이 아무 조건이나 제한 없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첫째 사랑은 공기나 물처럼 그 가치가 엄청나기 때문에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둘째 사랑’은 부모와 스승, 배우자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받는 인정이나 애정, 연민, 격려와 지원 등이다. 이 사랑은 한계가 있고 깨어지기도 쉽다.
둘째 사랑의 이면에는 항상 오해, 거절, 거짓, 폭력, 심지어 증오심까지도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우정과 결혼, 그리고 공동체에서 나누는 둘째 사랑에는 긴장과 스트레스가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 간의 둘째 사랑은 하나님이 주시는 첫째 사랑의 깨어진 모습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첫째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은 정말 기쁜 소식이다.
고린도인들이 그렇게 중요시하던 모든 은사들은 아직 불완전하다. 그것은 언젠가 그칠 것이다. 믿음과 소망도 온전한 것이 아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
사랑은 믿음을 뜨겁게 하는 불이다. 사랑은 소망을 확실히 밝히는 빛이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출발점이고, 마침이며, 전부이다.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영원한 본질을 쏟아 주신다. 그러므로 사랑이 으뜸이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을 가르치라. 어디든 사랑을 가르쳐주는 학원은 없다. 무엇이든 돈으로 배우고, 돈으로 구할 수 있지만 사랑은 예외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교회에서는 사랑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 사랑함으로써...
신앙을 가르칠 수 있다. 사랑함으로써...
요즘 참 편리한 세상이다. 그러나 평안을 주지 않는다. 요즘 재미있는 것이 참 많다. 그러나 기쁨을 주지 못한다. 요즘 너무 풍성하다. 그러나 만족을 주는 것은 없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방식에 있어서 어린 아이의 세계를 벗어나라고 말한다. 이제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른스런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무엇보다 사랑이 우선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로 나타나는 사랑이어야 한다. 내가 나 자신의 사랑으로 남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빌렸을 뿐이다.
떼제 찬송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통해 하나님 경험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생각, 가치, 의식, 행동, 삶은 뒤집어진다. 인생관이 달라지는 것이다. 사랑은 나더러 변화하라고 말한다. 사랑의 마음, 사랑의 인생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사랑은 얼굴과 얼굴을 맞댐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은 친밀하신 얼굴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눈 맞춤 하라. 그 사랑과 얼굴을 맞대라.
하나님의 친밀하신 사랑이 올해에도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