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뛰어난 인사정책의 비법-2/개방주의의 수석과 성장위주의 총리 대칭적 기용으로 경제위기 탈출
개방주의의 수석과 성장위주의 총리 대칭적 기용
총리선정에 경제수석과의 소통도 신중 고려
전문언론,전문기업인과도 소통과 자문받아
청와대 비서실의 경제팀은 쉽게 구성했지만 내각의 경우는 숙고가 필요했다.
특히 국무총리와 경제총수인 경제기획원장관 인선에 고심을 했다. 내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한 김재익 박사가 안정,자율,개방주의자여서 이러한 정책 방향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인물을 골라야 했다.
그래서 내각의 경제팀장인 경제기획원장관에는 신병현 상공부 장관을 기용했다. 신병현 장관은 한국은행총재까지 지낸 금융전문가여서 보수적 안정적인 경제운용으로 김재익 수석과 호흡이 맞을 것으로 생각했다. 김재익 수석은 미국에 유학하기 전 잠시 한국은행에서 일한 적이 있어 신병현 장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국무총리는 고심 끝에 남덕우 전 부총리를 임명했다. 남덕우 전 부총리는 1969년 경제과학심의위원으로 박 대통령 정부에 참여한 이래 재무부장관,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대통령 경제특보등을 역임하며 박대통령 시절 내내 수출 드라이브와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주도해온 분이었다. 그런 만큼 종전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성과 일대 정책 전환이 요구되는 시대적 상황과는 맞지 않았다. 더욱이 남 총리는 고도성장 위주의 정책이 한계를 드러내게 됨에 따라 10.26 전해인 1978년 안정론자인 신현확씨에게 경제기획원장관 자리를 물려주고 대통령 특보로 후퇴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남덕우 전 부총리를 총리로 기용한 것은 ’결자해지‘하라는 뜻과 아울러 파탄 직전의 경제적 위기를 돌파해나가는 데 과거의 경험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전문언론인,민간기업인과도 별도로 소통
정치나 사회문제들에 관한 내용들은 특별히 전문지식이 없어도 이해 못할 내용이 없었다. 그런데 경제정보들은 더러 잘 모르는 대목들이 있었다. 물가,금리,환율,저축률,경기변동등 거시경제지표들에 관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보안사령관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경제문제도 어느 수준까지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해 전부터 알고 지내던 장덕진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에게 경제 가정교사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추천받은 박봉환 국장과 함께 경제공부를 했는데 박 국장이 재무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직 사표를 내고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원으로 가기로 한 김재익 박사를 소개해줬다.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경제수석으로 기용한 김재익 박사는 경제정책에 관한 보좌관이었지만 한편으로 나의 경제학 선생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얘기만 듣다보면 경제에 관해 내가 얻게 되는 지식과 정보와 의견이 한쪽으로 편향될 수 있었다. 내가 편식을 피하자는 생각에서 다른 경제 전문가들의 얘기도 들어보기로 했다.
김재익 수석이 천거한 김기환박사 외에도 사공일 부원장,차수명 상공부국장,유갑수 국민대 교수와 실물경제를 잘 알만한 경제전문 언론인,민간기업인들과도 따로따로 만나 모르는 것은 묻고 내 생각을 밝히며 토론을 하고는 했다.
취임 초 경제 이외의 분야에 관해서도 학습을 하기 위해 이상주 교육문화수석비서관에게 내가 만날 학자와 전문가들을 선정해주도록 부탁했다.
학자와 전문가와의 소통은 인재 발굴의 중요한 통로
집무실 옆 소접견실에서 준비된 교재로 1대 1 강습
나의 국정 학습은 첫째 각 분야별 전문지식을 배우고 시대적 흐름과 당면 현안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고, 둘째 각 분야의 대표적 학자,전문가인 이들에게 나의 국정철학과 정책과제에 대한 이해를 구하며, 셋째 지금까지 접촉이 없었던 학자,지식인들과의 면담을 통해 나의 국정수행에 동참할 수 있는 인물을 발탁한다는 방침 아래 진행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침을 주었다, 이석주 수석은, 나의 국정학습은 고려조에 시작되고 조선조 때 크게 활성화했던 ’경연(經筵)‘이 5공화국에서 부활한 셈이라면서 나의 지침대로 진행이 되면 국정 최고책임자와 전문가 그룹사이의 소통과 언로를 확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학자와 전문가들을 두루 면담함으로써 인재 발굴의 중요한 통로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나의 국정학습은 취임 초에는 일과가 시작되기 전인 아침 7시부터 집무실 옆의 소접견실에서 1대 1로 마주 앉아 준비해온 교재를 갖고 진행했다. 그 시절 나의 일과는 말하자면 ’조강(朝講)‘으로 시작되었다. 매주 한번씩 정기적으로 진행된 강의는 주제를 정해놓고는 했는데 수석비서관실과 사전 협의를 통해 시의에 맞는 내용을 택했던 것 같다. 어느 날은 꼼꼼히 읽으면서 예습을 했다, 몇몇 학자는 해외에서 발행된 최신 도서를 요약헤 가져오기도 했다.
각계의 지도층 인사인 이들에게 나의 국정철학과 정부시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물가를 잡고 국제수지를 개선해 안정적인 경제 성장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88서울올림픽이 갖는 역사적,세계사적 의미등이었다.
경제분야에서는 서상철 고려대 교수, 안충영 중앙대 교수, 임동승 삼성경제연구소장등을, 정치사회학 분야에는 정종욱 서울대교수,황성모 서울대교수,김종휘 국방대학원 교수,황인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이영호 이화여대 교수, 역사 철학부문에서는 천관우 전 동아일보 주필, 유승국 성균관대 교수, 최영희 고려대 교수, 이성무 국민대 교수,박영식 건국대 교수,김여수 서울대 교수등이다.
물리학자인 김정흠 고려대 교수, 그리고 미술사학자 안위준 서울대 교수,국악 전공의 한만영 서울대 교수등으로부터 평소 내가 접하지 못했던 분야에 관한 강의를 흥미롭게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전두환대통령에게 강의한 인물만 100명도 넘어
과학기술자들에게 이윤배당 할 수 있는 방안마련
나에게 국정 각 분야에 관해 강의를 해줬던 분이,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00명보다 훨씬 많았던 것 같다. 나는 국정 수행 능력과 의지가 있다고 본 몇 분을 발탁해서 정부 요직에 기용하기도 했다, 사공일 재무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이영호 체육부 장관, 김기환 상공부 차관, 유승국 정신문화연구원장, 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등이다,
특별히 생각나는 분은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천관우 씨다. 10.26 이전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통치에 저항한 ’꼿꼿한 언론인‘민족주의 사학자였던 그분은 내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과 국정자문회의 위원을 맡은 이외에 정부 내의 특별한 요직을 맡지 않았는데 다른 관직은 그분이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소 학계와 언론계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그분은 5공화국에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오해와 모함에 시달렸다고 한다.
과학기술인의 사기를 진작하고 연구개발 의욕과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일에도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나는 과학기술처,상공부,재무부등에 지시해 과학기술자들에게 이윤배당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시행하도록 했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서 상품화했을 때 그 제품을 연구개발한 과학기술자들에 주식 배당하듯이 일정비율의 이익을 주도록 한 것이다. 과학기술 창달과 진흥에 기여한 공이 뚜렷한 인사에게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등을 주어 포상했다. 과학기술발전에 헌신적으로 공헌한 원로과학기술자들의 노후생활을 지원하게 했다. 과학기술발전에 공이 큰 정년퇴임 과학기술자 또는 원로과학기술자 등이었다.
노벨상 수상자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던 이태규박사는 정년퇴임으로 관사를 비워줘야 해서 살 집이 없다는 기사를 보고 비서실에 대책을 찾아보고 지원해드리도록 했다.
허화평 수석비서관을 비롯해 당시 개혁 작업을 주도한 나의 참모들은 젊은 시절 군에서 교육을 받고 군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었으나 당시 민간 출신 관료들에 비해 개혁적 마인드가 더 투철했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도 확고했던 것 같다, 그 까닭은 미국웨스트포인트의 교육과정을 그대로 활용한 육군사관학교에서의 교육을 통해 미국적 자유민주주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체질화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서울대학교 이재열 교수는 2014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5공화국 시절에 대해 ’모두가 중산층이고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문화’가 넘친 1980년대라고 썼다. 1983년 여론조사에서 중산층이라고 답변한 사람이 63%(한국일보),,85년 조선일보 조사에서는 70%,1986년 동아일보 조사에서는 77%로 나타났다.)
전두환 대통령 군인시절의 인사관리
연대장 안전이 중요하면 소총수 생명도
전두환 중령이 제 1공수특정단 단장 재직시 부대원들에 대한 정신교육의 하나로 국사학을 강의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읽으면 저절로 충성심이 우러난다고 고백했다. 월남전 백마부대 제 9사단의 29연대인 통칭 ‘박쥐부대’ 연대장으로 지휘할 당시에는 ”나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연대장의 안전이 중요하다면 소총수의 생명은 더 중요하다,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라며 병들과 함께 적진 깊숙이 침투했다.
군인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제 1사단장이 되어 맨 먼저 한 일은 사단 모든 장병들의 일체감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우선 전 사단 1만 장병에게 모두 표창을 주고 악수를 해 주리라는 결심이었다. 어느 병사에게는 경례만 잘 한 것으로 표창장을 수여하기도 했으며 1주일 특별휴가도 보내줬다. 열심히 하다가 낸 사고는 벌을 줄 수 없다며 오히려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총기 간수에 태만한 장교에게는 군법회의에 붙였다.
사단장으로 재임한 1년 2개월 동안 4천여 명의 장병들과 악수를 나누고 표창장 수여와 특별휴가를 보냈다.
”나는 부하에게 1백 퍼센트 충성을 바친다, 그리고 나는 그 부하로부터 50퍼센트만큼의 충성을 기대한다.“ 측근 참모에게 입버릇처럼 들려준 말이다.
(환경경영신문www.ionestop.kr 서정원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