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나 스페인으로 가게 됐어. 갑자기 결정된 일이야. 숨기거나 그럴 여유도 없었어. 미안해. 내인생이 늘 그렇지 뭐야. 가서 아주 좋다싶으면 부를께. 너만 원한다면 함께 가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큰 모험이니까.'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내게 그녀가 뜬금없이 정말 뜬금없이 이야기를 했다. 아직 몽롱한 상태이고 유선방송에서는 신파극의 드라마를 재방송하고 있었고 어젯밤에 위속으로 쳐들어간 삼겹살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리고 나는 어젯밤꿈속에서 죽어버렸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게 소용돌이 쳤다.
'아.. 그래.. 잘 되겠지. 소영언니가 초청했나? 웬수같이 으르렁거려도 오래토록 만나는군. 그럼 이 집은 어떡하지?'
어쩜 그렇게 덤덤하게 답할 수 있었나... 나는 이제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담이 커져버렸나.. 아니면 내 주변의 모든 것에 애정이나 의욕같은. 욕구란 욕구의 일종은 다 잃어버렸나...
'넌.. 어쩔거야? 넌 아직 나보다 젊고 예쁘고 영어도 잘 하니까.. 나.. 별로 걱정 안해도 되겠지? 아직 한달도 넘게 남았으니까.. 우리 시간은 대개 더디게 흐르니까.. 아직 우리 사이에 시간은 많은 것 같아.. 안그래?
'그래.. 시간이 너무 많아서.. 어쩔 도리를 모르겠어. 나는 언니가 참 좋아. 그러니까....'
우리의 대화는 어느 시점에선가 끊어졌다.
방안의 공기는 미묘하게 어긋나있었고 어색해져있었고 숨이 막힐 것처럼 미지근했다.
그녀가 지구반바퀴를 돌아서 저멀리 스페인으로 점이 되어 사라지고 나면, 나는 이 거대하고 외로운 도시에 홀로 남는다. 남는다남는다남는다...그녀가 지겹고 거추장스럽고 짜증스러울 때도 많았다. 그동안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정작 일년이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조만간 나는 더 슬퍼질 것이고 그런류의 슬픔은 어느누구로 하여금 위로받을 수도 없어질 것이다.
햇빛도 싫고 바람도 싫고 구름도 싫고 살가운 땅바닥도 싫어서 나는 줄곧 하루종일 아파트안에서 덩그러니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하루키와(연인은 늘 또 하루키야? 또 그책이야?하고 질리듯이 물었었다) 지루한 대화를 나누고 Chris Isaak's Wicked Game을 수십번 듣고 밤이 오길 기다리고 스페인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