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빈 여러분, 베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 지형이 양 팔을 벌리며 환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손님을 청해 놓고 이런데 숨어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반가움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승은.
짐짓 심통스런 말투로 투덜댄다.
“여러분, 자기부상 열차에 탑승하신 소감부터 한 마디씩.
베링 해협을 향해 뱅쿠버를 출발하는 열차에 승차한
소년단 동기들 앞에서 익살스런 표정을 짓는 지형도 이제 40대 후반이다.
독신으로 지난 탓인지 여전히 날씬한 그녀
앤디와 파이잘의 시선에는 평생을 함께 해온 벗을 만나는 반가움과 함께
세기의 대역사를 마무리 지은 친구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넘치고 있었다.
“알루, 마담 하. 축하해요.
사방에서 하 지형을 향한 축하 인사가 건네졌다.
그들의 축하는 두 가지 의미였다.
무려 한 세대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성공한 베링철도 개통을 축하하 는 인사였지만 동시에 그녀의 베링자치주 수반 취임 축하인사이기도 했다.
15년 전의 사고로 전임 사업단장이 사망한 뒤,
베링 자치주는 자치주와 극동 연구소 간부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관리해왔다.
유일한 후계자인 하 지형이 30대 초반의 풋내기였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40대 후반이 된 그녀가 원래의 자리를 찾은 것이었다.
그 동안의 직함은 자치주 고문이었지만 위원들이 그녀를 사실상의 자치주 수반으로 대해왔기 때문에 공식 명칭이 바뀐 것일 뿐 실제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웬 마담?
난 여전히 마드무와젤 이야!”
지형이 친구들을 향해 코에 주름을 잡으며 짐짓 위협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우리들의 영원한 파티마지.
맞장구치는 앤디의 음성에는 그리운 울림이 들어 있 다.
얼마나 연모해온 세월이었던가!
미 국무성 소속 유엔 대사인 앤디는 이번 모임을 위해 일 년 전부터 일정을 조정했었다. 그건 앤디 만이 아니라 두바이 국왕 파이잘을 포함해 이미 사회적으로 비중 있는 위치에 있는 대부분의 동기들이 비슷한 입장이었다.
“병아리처럼 귀엽고 발랄하던 친구들이
이젠 다 늙어빠진 못난이가 되어버렸네--!
지형이 탄식했다.
“그래도 마담은 그대로야. 오히려 원숙해져서 더 멋있어.
파이잘의 대꾸에 야유가 쏟아졌다.
“존경하는 국왕 폐하의 콩 꺼풀은 여전하시군.
“한번 로미오는 영원히 로미오니까.
승은이 나섰다.
주미 한국대사관 직원인 그녀는 한국 정부와 베링 자치주의
대화 채널로 한 몫하고 있었다.
“지금 말한 친구는 우리 하 수반이 이젠 늙어서
별 볼일 없어 보인다 이거지?”
야유가 뚝 그친다.
앤디가 서둘러 중재했다.
“그건 마담 하 얘기가 아냐. 승은아.
일국의 국왕이라는 작자가 주제도 모르고 여전히 청춘인 줄 아는 게 우스워 그랬지. 그렇잖 아?“
앤디가 동의를 구하자 친구들은 모두 끄덕였다.
그러나 세월의 흔적이 지형만을 비켜갔을 리가 없었다.
청맥처럼 풋풋하던 생기 대신에 중년의 원숙함이 들어선 그녀의 모습은
학창시절을 기억하는 동기들에게 세월의 무상함을 돌아보게 했다.
어느새 페어뱅크스를 통과한 열차는 황태자 곶을 향해 소리 없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이윽고 미국 구간 터널로 진입한 열차 는 몇 분 되지 않아 다이오미드 섬으로 빠져나와 베링교로 들어섰다.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 위를 날아가듯 달리는 자기 부상열차의 창밖으로 흘러가는 유빙들이 점점이 보인다.
“문명의 4대 발상지라는 말 바꾸어야겠어. 5대 발상지로.”
창밖 경치에 넋 놓고 시선을 주던 앤디가 중얼거렸다.
“맞아. 이건 새로운 역사야.
베링 철도 덕분에 중동은 교통 중심지로 변했어.
유럽 아프리카 물량 태반이 중동을 거치니까.
게다가 관광산업도... 몽골리안 벨트는 앞으로 성지순례 못지않은 인기코스로 관광객들이 몰릴 거야.
파이잘이 감회어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4대 문명의 발상지로 옮겨가고 있었다.
“소위 4대 문명 발상지라는 지역들은 모두 강을 끼고 있는 농경지였어. 먹거리가 쉽게 해결되고 교통이 편리한 곳.
반면에 4대 종교의 발상지는 어떻지?
먹거리를 얻기 힘들고 교통도 불편한 지역이었어.
이상하지? 문명과 종교 발생은 요건이 서로 대칭되는 것 같지 않으냔 말이지.
지형이 친구들을 둘러보며 의견을 구했다.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살기 힘들면 종교에 의지한다는 뜻 일까?
승은이가 받았다.
“살기 힘든 지역이라고 모두 큰 종교가 탄생했던 건 아냐. 중동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네팔의 불교와 힌두교, 이렇게 4대 종교가 나타났는데 사막 아니면 고산 지대였지. 그런 식이라면 추운 지방 에서도 큰 종교가 나타났어야 하는데 에스키모나 몽골의 샤마니즘 은 세계적 종교로 자라지 못했지.
파이잘의 말에 지형이 대꾸한다.
“자연조건 외에도 무슨 다른 게 있나봐.”
파이잘이 끄덕였다.
“글쎄, 아마 종교 창시자들의 사회적 배경이 있을 거야. 유대인 들은 역사의식이 강했고 인도 네팔지역의 초고대 문명설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지. 우리 아랍의 배경은 잘 모르겠어. 다만 이브라힘까지의 역사를 꾸란과 구약이 공유하는 점으로 미루어 그 지역을 일관하는 역사와 문화가 있었고 그것이 배경이 되었다고 만 짐작돼.
듣고 있던 앤디가 지적했다.
“재미있는 건 말이지,
그렇게 척박한 지역에서 탄생한 종교가 풍요로운 발상지에서 성장한 문명사회를 압도하고 있다는 거야. 문명 발상지보다는 종교 발상지가 인류에게 더 의미 있는 장소 였다고 할 수 있지.
“나는 베링 자치주가 영악한 문명보다는 순박함으로 넘치는 땅이 되었으면 해.
이 땅의 2세들은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순수 하며 인정이 두터운 인간으로 자라나길 바래.
친구들의 시선이 지형에게 모아졌다.
독신으로 살아온 그녀 입에서 2세라는 단어가 나오자
앤디와 파이잘은 무의식중에 시선을 맞추었다. 똑같이 슬픈 시선이었다.
“실크로드 갔을 때야.
사막을 지나는데 우리 앞으로 낙타 떼 한 무리가 지나갔어,
주인도 없고 고삐 맨 흔적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야생 낙타인 듯했는데 우리 차들이 서자, 길을 건너려다 겁을 먹고 제 자리에 서 버리더라구. 그런데 한 무리의 낙타 떼가 지나가자 저 멀리서 또 다른 낙타 떼가 다가오더니 역시 건너오지 못하고 아예 서버리는 거야.
꼼짝 않고 서있는 순한 그 모습에 묘한 감동이 밀려오더라고,
무례하고 오만한 모습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어.“
그녀가 말하려는 순박함의 의미가 가슴에 와 닿은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세상에 그런 순박함이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앤디가 회의적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문명의 폐단을 어떻게 소화 시키느냐 의 문제겠지.
비슷한 경우지만 정 반대되는 일도 있었어.
영국 북부지방에서 시골 길을 드라이브 할 때였어.
도로가 꾸불꾸불해 천천히 달리고 있었어. 하지만 길이 똑바르다 해도 빨리 달리고 싶지 않을 만큼 경치 좋고 쾌적한 날씨였지.
목장이 많았어.
양 떼들이 몇 마리씩 뭉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더군.
눈처럼 하얀 양 떼라고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 아마 양 을 보지 못한 사람일거야.
양들은 회색이었어.
원래의 회색하고는 다른, 하얀색이 때에 절어 꾀죄죄해진 회색 있잖아?
노숙자가 걸친 넝마처럼 몹시 지저분해서 껴안는 건 상상만으로 역겨울 만큼 더러웠어.
그런 녀석들이 도로를 가로 질러가는 거야.
건널 때 좌우를 보는 예의쯤은 보일만도 한데 이 녀석들한테는 그런 게 전혀 없었어.
차가 오거나 말거나 무작정 건너.
그러니 이 지역에서는 수시로 도로가 막혀. 양 떼가 다 건널 때 까지
대책 없이 기다려야 되는데 차들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기다리더군.
차에 겁먹고 지나가지 못하는 사막의 야생 낙타 떼하고 영국의 시골 양 떼들
참 대조적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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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차카의 원주민들은 자기 땅을 빼앗겼다는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치주 이민자가 늘면서 어업이 번창하고 일 자리도 늘었으며 관광 수입까지 생겨
베링 자치주와 그 주변 일대는 특수경기로 흥청거렸다.
흘러들어오는 이민자의 물결과 베링 철도가 빨아들이는 재화로 자치주는 풍요로워져 갔지만
원주민과 토착 러시아인들은 점점 소외감을 느꼈다.
부의 핵심은 모두 이민자들의 차지였고 자기들은 겉돌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들이 더 이상 이 땅 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충격받은 원주민들은 술렁이기 시작 했다.
소외감은 차츰 불만으로 변질되어 갔고
이민자들과 러시아 원주민 사이는 불편해져 갔다.
소소한 폭력사태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처럼
불법 무기 암거래가 늘어갔다.
카멘스코예 중심가에서는 조직적인 파괴가 빈번히 벌어졌다.
관광지 치안을 맡고 있는 무슬림 순찰대가 범인을 잡고 보면 대부분이
추코치 족을 포함한 원주민과 러시아인들이었다.
처음에는 온건하게 훈방으로 대응하던 치안 담당자들도 테러 가 반복되면서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어느 날 유흥가에서 잡힌 상습범에게 빅 죠지의 부하들이 본때 를 보여준다며
순찰대에 인계하기 전에 린치를 가해 버렸다.
얼굴이 붓도록 두들겨 맞아 핏자국이 낭자한 원주민 사진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가자 베링 자치주의 내무국은 당황했다.
린치당한 자의 가족을 찾아가 사죄했지만 이미 그들의 태도는 냉랭했다.
캄차카의 베링 지역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원주민들의 적의로 팽팽하게 긴장해가고 있었다.
2036년 5월, 베링 하이웨이 개통 11주년 기념식이 있던 날에 원주민들의
대규모 공격이 캄차카의 모든 공공건물과 공단에 가해졌다.
이 날의 공격은 몽둥이를 휘두르는 순박한 형태가 아니었다.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폭도들은 트럭에 나누어 타고
무슬림 지역과 탈북자 지역을 휩쓸었다.
졸지에 당한 주민들은 대항할 엄두조차 못 내고 폭도들을 피해 이리저리 쫓겨 다녔다.
공중으로 난사하는 자동소총 소리가 콩 볶듯 계속되고 이따금씩 터지는 폭음으로
요란한 시가지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 지는 전장의 한 복판이었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폐허가 된 연수원에 대책 본부를 차린 정 지문
내무국장은 상황을 파악하자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 많은 무기들이 어디서 나왔지? 엽총이야 수렵용이니 그럴 수도 있지만
수류탄이며 트럭들은 어떻게 된 거지?
사태의 뒤처리에만 넋이 빠져있던 사람들도 그제야 뭔가 이상 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중상자는 있었지만
사망자는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비상식적 이었다.
누군가가 무기를 대주고 치밀하게 작전을 짜 주었다는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이 지역에서 수천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를 공급할만한 조직이라면
러시아 당국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주민들의 소요사태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협을 의미 했다.
추측은 바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이스크라를 포함한 전국의 신문과 TV는 소요 사태의 책임이
베링 자치주의 방약무인한 횡포에서 비릇 되었다는 식으로
일치된 내용의 기사를 보도 했다.
러시아 정부 조사단이 현지 실사를 나왔는데 안내를 맡았던 사업단 측은
그들이 실제 있었던 일은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파괴와 약탈은 박해받은 민중들이 일어선 정의로운 봉기로,
베링 주민들의 자기 방어는 악랄한 공격으로 규정했다.
그들은 이미 써놓은 시나리오를 사업단 측에 들이대고 자백을 받으러 온 자들이었다.
대책 본부에는 암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크나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음을 보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답답한 분위기가
대책 본부를 휩쓸고 있었다.
폐허가 된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구슬픈 가락의 빽 파이프를 연주하고 있다.
아일랜드계 이민들은 모든 행사에 빽 파이프를 동원한다.
아마도 이번 사태로 부상한 사람들 중의 누군가가 죽은 장례식에서 연주하는
진혼곡일 것이었다.
러시아 정부가 성명을 발표했다.
“베링 사업단은 주위에 피해를 끼치지 않고 조차지를 선의의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협약을 위반했다.
따라서 인민의 피해를 좌시할 수 없는 러시아 정부로서는 조차지의
조기 반환을 요구 할 수밖에 없다. 이 사태는 베링 자치주측이 야기한 것으로
모든 결과 역시 전적으로 베링 자치주 측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이번 조치는 비상사태에 따라 부득이하게 취해지는 조치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번과 같은 사태가 끊임없이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 운운“
베링 자치주는 캄차카에 비상 대책본부를 설치하고
서울과 뉴욕에 지원사무소를 열었다.
사업단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미국과 한국 정부를 포함한 APEC 회원국에
사태의 진상을 알리고 이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의 여론을 무마하는 일도 계속해야 했다.
원주 민들은 린치를 한 죠지의 부하를 처벌하라는 요구를 강경하게 해왔다.
사태의 근본 원인이 폭력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은 피차간에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우선은 원주민들의 명분을 살 려주어야 했다.
베링 자치주에 형사 처벌권이 없음을 핑계로 이들을 자치주 밖으로
추방하는 선에서 원주민들을 달랬다.
인력난에 시달리던 베링 자치주가 원주민을 활용할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교육으로 기능공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수차례에 걸친 시도해보던 연수원 측은 몇 차례의 안전사고를 치르고 나서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러나 막노동 자리일지라도 이들에게 문호를 개방해 취업할 길을 열어주는 것
외에는 불만을 잠재울 방법이 없다는 판단 아래
환경 문화국은 이들에게 식당에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08년에 발족했던 정보국은 이제 30년 가까운 연륜을 쌓으며
500명이 넘는 요원을 거느린 조직이 되어
20개 이상의 국가들과 연계를 맺고 있었다.
캄차카 본부의 상황실에 자리잡은 정 지문도 이제는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오데 싸 주재 정보원이 보내온 암호 프린트의
이면에 휘갈긴 메모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 러시아 전략 => 시간을 최대한 끈다.?
1.. 국제 여론 : 남 북한, 아랍 연맹과 몽골리안 벨트 국가들
베링 소년단
2. 수비 : 대한민국과의 안전보장 조약 ?
철도 경비병력 파견 ?
3. 공격 : 곡물 수송선 장악,
곡물 메이저 봉쇄 via Dubai
암호문들은 하나같이 우크라이나의 한발을 보고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이르쿠츠크에 이르는 곡창 지대는 러시아 소맥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생산한다.
그러나 매 20년에서 25년 주기로 한발이 이 지역을 습격했고
그 주기는 예로부터 유목민족의 유럽 침공주기와 맞아 떨어지곤 했었다.
내년, 즉 2037년에는 40년내 최대 규모의 한발이 이 지역을 덮칠 것으로
추정되는 보고들이 우크라이나에서 페테르부르그, 이 르쿠츠크에 이르는
황금 3각지대 전역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어차피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자치주로서는 최선의 기회였다.
자치주를 침공할 경우 엄청난 희생을 치를 것임을 명백히 한 다음
식량 무기로 제압한다는 전략.
베링철도 폭파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이미 떨어져 있었다.
생각조차도 하기 싫은 방법이지만 무력 침공할 경우 러시아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리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정보팀은 한국의 종합상사를 내세워 런던, 뉴욕, 도꾜의 용선 시장에서
곡물 수송선의 2037년도 선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6만톤 이상 규모인 파나맥스 급 대형선은 물론
대양항해가 가능한 2만톤 급 이상 곡물용 벌크 케리어들의 나용선 선물들이
일제히 시장에서 사라져갔다.
석유 가격이 배럴당 1백 불을 넘어서면서 세계경제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비싼 제조비 때문에 외면 당해오던 옥수수에서 추출하는 바이오 에너지의
경제성에 설득력이 생기면서 바이오 연료를 추출하는
옥수수 등 사료작물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석유위기가 곡물위기로 연결되면서 세계 곡물시장에 큰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와중에 호황을 누리는 국가들은 중동 사막 지대의 이슬람 국가들이었다.
인공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조성된 사막의 농업 생산성은
타 지역의 같은 면적 수확량보다 세 배를 웃돌았다.
자체 수요를 채우고 남는 잉여곡물은 연간 7백만톤 규모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관개면적이 해마다 늘어가기 때문에
수출규모가 조만간 1천만 톤을 상회하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세계의 밀과 옥수수 생산량은 년간 12억 톤 이상이지만 대부분
자국에서 소비되기 때문에 교역량은 생산량의 10% 내외에 불과했다.
따라서 중동의 잉여곡물은 년간 거래량의 7%에 달하는 비중 있는 물량이었고
당연히 국제 곡물가에도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곡물 시장에서 70%의 점유율을 자랑하는 미국의 곡물 메이저 카길과 ADM사의
시카고 본사를 중동의 빈객이 방문한 것은 2037년 2월이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이슬람권의 리더로 부상한 두바이의 수장 파이잘 왕자가
이끄는 사절단이 시카고 곡물거래소를 방문하면서 카길과 ADM을 잇달아 방문한 것이다.
베링 철도를 통한 곡물수송을 협의한 두바이 사절단은
곡물 거래소 에 무척 좋은 인상을 남기고 떠났다.
Fair한 거래가 무엇인지 그 진수를 보여 주었다는 호평이 자자했다.
러시아 정부는 공식 성명을 발표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조차지 반환을 위한 협의를 하러 베링 자치주 지도부가 모스코바로 오라고 거만하게 통보해왔다.
베링 사업단이 단독으로 러시아와 마주 앉는다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할 것이 뻔했다.
자치주는 또 다른 베링철도 통과국인 미국을 협상 당사자로 끌어 들이는 교섭을
진행하면서 협상 장소부터 재조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해 시간을 끌었다.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해 현 단계에서 베링 자치주가 할 수 있는 일은
협상을 끌면서 원주민을 무마시키는 정도가 고작으로 보였다.
자치주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자 새로 공단에 입주하려던 업체들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자치주의 성장세가 제자리 걸음을 했다.
일본의 방해로 야기되었던 난관을 나름 잘 넘겨왔던 자치주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불안한 세월이 벌써 6개월째 계속 되고 있었다.
대책 본부는 베링 자치주가 살아남기 위해서 미국을 업고
정공법으로 대항하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횡포를 UN에서 국제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뉴욕에 도착한
하 지형 사업단장 일행을 맞은 뉴욕의 지원사무소 직원들은
불과 6개월 사이에 거의 백발로 변한 그녀를 보고 숙연해졌다.
UN의 베링지역 담당관은 토마스 이래 이미 5대째로 넘어와 있었다.
지금의 담당자는 베링 소년단에서 하 지형, 파이잘과 함께 지냈던 앤디였는데
백발의 하 지형을 보자 어깨를 안고 위로했다.
UN에서의 연설은 지역분쟁 위원회에서 있을 예정이었는데 그때까지
막후 조정을 해놓아야 했다. 미국 대표와 앤디, 그리고 하 지형 일행이
대책을 세우는데 허용된 시간은 불과 일 주일 뿐이었다.
지역분쟁 위원회가 열리는 날 UN에 출두한 하 지형의 뒤에는 유 이근을 비릇한
베링 자치주의 각료들과 몽골리안 벨트 국가의 대사 들이 배석했다.
청중석의 미국 대사와 남북한 대사들도 응원의 눈길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녀는 연설을 통해 러시아의 횡포를 호소하고 UN의 현지 조사단 파견을 요청했다.
그리고 베링 철도가 특정 국가의 지배 하에 들어갈 경우 발생하는
비효율과 위험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반응은 덤덤했다.
말은 없었지만 그저 딱하다는 표정이 고작이었다.
그것이 힘이 지배하는 냉정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었다.
의장석에서 다음 발언자를 호명하고 있었다. 한국 대사였다.
"대한민국의 UN대사 차 수명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자국 영토가 베링 철도의 통과 지역인 미국과 러시아,
두 나라가 있습니다. 물론 최우선적인 이해 당사국이죠.
그러나 베링 철도의 2차 공사를 협의 중인 우리 한국과 북 조선도
약간의 발언권은 있다고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접적 이해 로는 이 자리에 계신 환태평양 지역국가들은
물론이고 몽골리 안 벨트의 아랍연맹 국가들도 무관한 문제는 아닙니다.
특정 철 도, 그리고 그 통과 지역의 주권이 이렇게 광범하게 걸리는 것 은
국제관계에서 그리 흔치않은 일입니다.
바로 이점이 베링 자 치주의 특수성과 중요성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황무지였던 지역이 첨단 산업과 활기찬 도시를 가진
새로운 경제 공동체로 탄생하는 대단히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국제 사회의 일원으 로 대접받을만한 당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무엇이 역사상 흔치않은 이런 기적을 나타나게 했을까요?
오늘 우리는 그런 기적을 만드는데 주역을 맡아온 사람들의 호소를 들었습니다.
우리 남북한은 그들의 호소가 국제 정의에 입각한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들의 호소가 무시 되고 오직 힘만이 정의가 된다면 UN은 의미를 잃고 맙니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베링 자치주의 붕괴와 토막난 철도,
그리고 미주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의 재분리가 될 것입니다.
러시아가 베링 철도를 운영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베링 철도의 중단 이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살지 못하던 불모의 툰드라에
오늘의 베링 지역과 철도를 건설한 것이 누구였습니 까?
그들보다 이 지역과 철도를 더 잘 운영할 집단을 달리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더욱이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대목은
베링 자치주가 정치적 중립지역이었기에 지금까지의 효율성이
나타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만일 이것이 어떤 지역의 운하처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수시로 폐쇄된다면
누가 이것을 신뢰하고 수송을 맡기 겠습니까?
베링 자치주는 지금 그대로의 체제로 유지되어야 합 니다.
사소한 소요사태가 있었다 해서 하나의 준 국가 공동체를
이렇게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만의 의견 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도
이미 합의한 한반도 전체의 공동 의견 입니다.“
연설이 끝나자 하 지형의 연설 때와는 달리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남북한이 한 가지 공동의견에 합의해 대외적으로 내세웠다는데 대한
경탄의 표시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팔짱만 끼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공감대가 조성된 남북한이 2차 베링 철도가 부설될 지역의 당사국임을 내세워
베링 자치주를 공동으로 지지하고 나선 것이었다.
비록 남북한과 아랍 연맹의 지지는 있었지만 러시아와의 정면대결을 피하려는
미국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소득은 없었다.
베링지역 분쟁을 위원회의 정식의제로 채택하려던 시도 역시 실패했다.
아랍 연맹은 환태평양 지역위원회의 멤버가 아니었고
일본, 호주, 인도네시아 등 섬나라들의 비우호적 태도 때문이었다.
의제로 채택되지 않은 이상 러시아에 UN이 압력을 행사하기는 불가능 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딸 것 아닌가?
물론 남북한의 공동 지지도 작은 소득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의 사태를 호전시키는 힘이 되지 못하는 이상 큰 의미는 없었다.
지역 위원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짐을 꾸리는 베링 대표단을 방문한
차 대사는 본국 정부와 다시 협의해 도움이 될 방법을 찾겠다며 위로했다.
지난 1년 동안 베링 자치주는 APEC 회원국들의 공동지원을 얻어내려고
공을 들였지만 성과는 없었다.
중국은 베링 자치주를 한국의 연합세력으로 간주해 견제하는 입장이었고
일본이나 호주 등의 섬나라들은 당연히 적대적이었다.
희망은 오직 남북한과 몽골리안 벨트 국가들이었는데
이들이 러시아를 견제할 수단은 석유밖에 없었다.
그들은 OPEC를 통해 석유 무기화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지만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리비아, 오만 등의 반대로 행동 통일이 쉽지 않았다.
먼 곳의 물로는 가까운 불을 끌 수 없는 법이었다.
남은 것은 남북한이 어떤 식으로든 지원해주는 길밖에 없었다.
베링 철도건설을 위한 2차 협상이 순탄하게 풀려가고 있던 와중에
이번 사태를 맞은 한국과 북한에게 베링 철도는 단순한 철도 건설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한 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철도를 건설한다는 공동 목표는
그 동안 단절되었던 그들 간의 대화 창구를 열어주는 역할까지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처음부터 베링 자치주가 남이 아닌,
한반도와 연계된 지역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신뢰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베링 자치주는 이미 5년 전부터 서울의 극동 연구소를 통해
이들과의 상호 안전보장에 관한 협의를 비밀리에 진행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친근감에도 한계가 있었던지, 군사력도 없는 일개 자치주와
상호 안전보장조약이란 이상하지 않은가?
라는 이유로 결실 없이 시간만 끌어오고 있던 상태였다.
거대한 곰, 러시아와 벌써 1년이 넘게 정면 대결하고 있는
한 줌도 안 되는 베링 자치주를 보다 못한 미국이 중재를 시도했지만
러시아는 완강했다.
안 그래도 남북한의 공동 성명에 자극되어 있던 러시아는
미국의 움직임에 대한 답변으로 베링 자치주의 경계선 근처로
병력을 이동시켜 위협 수위를 높였다.
흥분한 베링 자치주의 탈북자들은 기본권을 부르짖으며
의용대를 편성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무슬림 순찰대와 경비사관학교는 이들과 동조해
병력을 증가시키기 시작했고 아랍연맹에 무기 지원을 호소하는 활동까지 벌였다.
자치주 지도부는 자중할 것을 호소했지만 이들은 자치주가 해체될 경우
유격대 활동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러시아의 악몽에 시달리는 베링 자치주에 한국 정부로부터 지도부의
공식 방문을 초청하는 연락이 왔다.
지난 1년간 서울의 극동 연구소를 통해 꾸준히 추진해온 교섭의 성과였다.
잘되면 이번 사태의 해결방안이 될 수도 있는 서울의 초청을 놓고
자치주 각료들은 숙의를 거듭했다.
미국과 유엔, 그리고 몽골리안 벨트 국가들의 지원을 총동원해
이번 방문에서 성과를 얻어야한다는 데에 의견 일치를 본 지도부는
관련국들에게 지원 요청을 보내기 시작했다.
남북한과 관련된 일체의 관계를 동원해 자치주를 지원토록 후원해달라는 요지였다.
자치주가 보유한 첨단기술 지원과 자원개발 참여에 우선권을 준다 는
선심성 거래부터 베링 소년단의 유대를 동원하는 모든 수단이 동원되었다.
두바이 왕실이 모든 요청의 후원자로 Witness Sign까지 하며
적극 동참했고 UN 사무국의 앤디가 파이잘과 함께 베링 소년단의 인맥에
동원령을 내렸다.
그들의 노력으로 유럽 국가들과 미국 정가에 베링 자치주에 대한 동정 여론이
차츰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아직 정부를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서울방문 날짜가 다가오면서 자치주의 로비는 극에 달해 갔다.
이번 사태의 대응태도에 따라 몽골리안 벨트 국가들을 포함한 이슬람권 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다는 긴장감이 한국 정부 내에 조성되고 있었다.
미국의 상하원 의원들이 한국과 북한으로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비공식 채널을 통한 다양한 만남이 이어졌다.
자치주의 저력을 실감한 남북한 정부는 베링 자치주 지도부와의 서울 회동에서
최선의 방안을 강구하고자 숙의를 거듭했다.
한국은 국가 원수급 의전으로 자치주 지도부를 맞이했다.
백발의 한국 대통령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던 하 지형의 눈이 축축해지고 있었다.
베링 자치주에 저런 정예 병력이 있었다면 지금 같은 수모 는 당하지 않았으리라...
70세가 된다는 백발의 대통령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자상하게 끄덕여 보였다.
그날 저녁 호텔을 방문한 차 수명 대사는 대통령의 보통 아닌 결심을 전했다.
내일 회의에서 대통령은 한국군의 협력을 제안할 예정 이라는 전갈이었다.
한국과의 상호안전보장을 바라고 온 자치주로서는 기대 이상의 제안이다.
자칫하면 전쟁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그 제안은 실로 파격적 이었다.
각료들은 당연히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서울의 분위기는 그녀를 잔다크로 보고 있으며
자치주는 한국과 형제국이라는 여론이기 때문에
이면의 저의 따위는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란 결론이었다.
끊임없는 강행군에 지친 지형은 영빈관의 거실에서 잠시 회상에 잠겨 있었다.
그토록 파이잘을 사랑하면서도 청혼을 거절하고 독신을 지켜온 것은
바로 이런 날에 대비한 것이었다.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부친은 지형의 국제결혼으로 베링 자치주의 정체성이
흐려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한국인의 사랑을 받으려면 국제결혼은 안돼,
자치주를 한국의 형제국으로 만드는데 결정적 방해 요소야.’
그녀가 원한다면 밤 하늘의 달이라도 따오려 했을 연구소의 원로들마저
한결 같이 강조한 말이었다.
그녀는 이미 개인이 아니라 베링 자치주의 상징이며 한반도와의 연결고리였다.
그녀의 뇌리에 그리운 극동연구소의 할아버지들과 부친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파이잘, 미안해. 난 베링 자치주가 소중해.’
. .
청와대로 가는 리무진 속의 하 지형은 검소한 색깔의 한복 차림이었다.
엷은 화장에 단정한 짧은 머리를 곁들인 한복 차림은
활기 넘치는 투사형이었던 그녀를 청순가련형으로 연출하는 효과가 있었다.
베링 소년단 동기들이 본다면 놀라 자빠질 변신이었다.
영빈관 앞까지 나와서 기다리던 백발의 대통령은 한복 차림의 그녀를 보자
친정에 온 딸을 반기듯 얼굴이 환해졌다.
대통령은 자리에 앉기 전에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국방장관과 국정원장을 포함한
몇몇 각료들을 소개했다.
소개해 가던 대통령은 강골로 보이는 노신사의 차례가 되자 자랑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하 수반께서 특히 반가워하실 만한 분들을 소개하지요.
이 두 분은 조선 인민공화국의 정치국과 인민 무력부에서 와주신 선생님들입니다.
충격을 받은 하 지형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5년 전부터 상호 안전보장에 관한 협의를 진행해왔지만
군사력도 없는 일개 자치주와 상호 안전보장조약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시간만 끌어오던 한국이다.
그런데 북한까지 끌어와 상견례를 마련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혹시 잘못 들었나 의심하며 두 사람과 시선을 맞추며 정지해있던
하 지형은 이윽고 정신을 차린 듯 악수 대신 허리를 나붓이 숙이며 깊숙한 절을 했다.
야속하게만 생각되던 조국과 민족에의 신뢰가 순식간에 되살아 나면서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그 무엇인가가 솟구치고 있었다.
깊이 숙인 허리는 한 순간 정지해 있다가 천천히 세워졌고
바로 선 그녀의 얼굴은 젖어 있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베링 자치주의 이름으로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려가는 한 민족은
오 장수 상장을 비릇한 북한 지도부 인사들에게도 긍지를 느끼게 했다.
뿐만 아니라 환태평양 경제의 중심으로 한반도를 밀어올리는
베링 철도의 가능성은 통일 이후의 비전까지 화려하게 제시해주고 있었다.
끈질긴 저력으로 수십 년간 불모의 북극권에 새로운 삶터를 일구어 오던 그들이
이제 지치고 궁지에 몰려 부모의 나라에 도움을 호소 하고 있는 것이다.
오 상장의 눈에 비친 하 지형은 어려웠던 과거 역사 속에서
침략자들의 온갖 핍박을 당하면서도 꿋꿋했던 조선의 어머니 상, 그 자체였다.
도우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수치였다.
백발을 마주 숙여 정중하게 답례하는 인민무력부 상장의 눈에도
번쩍이는 것이 괴여가고 있었다.
각각 다른 땅에서 일구어 져오던 세 갈래 한 민족의 만남이었다.
솟구치는 격정을 절제된 맞절로 표현하며 글썽이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도 어느새 모두 눈이 붉어져 있었다.
백발의 대통령은 감동되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모인 것은 ------,
이 땅의 현대사에 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런 자리가 있게 해준 자랑스러운 베링 자치주, 그리고 외로운 싸움을
잘 지탱해주신 하 지형 수반과 지도부에 만강의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대통령은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어서 모든 참석자들이 일어나 치는 요란한 박수소리가 실내를 휩쓸며 한 동안 이어졌다.
박수가 잦아들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첫 순서로 한국의 국정원장이 발언했다.
“우리는 베링 자치주로부터 어떠한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상호 안전보장조약을 맺을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실무적 인 사항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사실상 협의를
마친 단계이기 때문에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추진 일정에 대한 원칙만 거론하면 충분합니다.
그에 앞서 조선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의 오 장수 상장께서 하시는 말씀부터 듣기로 하겠습니다.
백발을 쓸어 넘기며 대통령을 향해 목례한 오 상장은
70대 노인 답지 않게 걸걸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초 베링 자치주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여러 가지로 의심했더랬디요.
한국, 미국이 구 쏘련 지역에 공작하는구나, 하고 말 입니다.
지금은 그런 문제가 일 없시요.
오히려 베링 철도르 우리 공화국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거이 걱정일 뿐이디요.
그런데 지금 러시아가 하자는 대로 시베리아 구간을 뺏기면
공화국이 베링 철도 구경하기는 다 글렀다 는 생각입네다.
이거는 대한민국이나 공화국이나 똑같은 입장이야요.
그래서 우리는 아까 한국의 국정원장께서 발언하신 것과 같은 제안을
베링 자치주에 하려고 이 자리에 나왔습네다.
오 상장은 숨이 차는지 잠시 말을 끊으며 주변을 쓰윽 훑어 보았다.
이미 알고 있던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참석자들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 얘기만 하려면 굳이 이 자리까지 올 필요는 없었갔디요.
공화국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러시아로부터 직접적 공격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디요.
우리는 이런 경우에 도움 받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필요합네다.
그 때문에 제가 여기에 나온 것입네다.”
오 상장의 발언 요지는 공화국은 베링 자치주는 물론 대한민국과도 실질적
상호안전보장조약을 원한다는 얘기였다.
이미 알고 있던 대통령과 국정원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충격과 환희가 엇갈리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았다.
침묵을 깨뜨린 것은 대통령이었다.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입니까?
해외에서 외롭게 고생하고 있는 베링 자치주를 우리 한국과 북 조선이
어깨를 나란히 해서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 상장께서 하신 제안은 이미 관계자들 에게 검토시키고 있습니다.
오늘은---,
오늘이야말로 우리가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 리고 또 기다렸던 기쁜 날입니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축제 무드로 바뀌었다.
일동은 화기애애하게 점심을 같이 나누며 내외신 기자들에게
발표할 내용을 협의하고 헤어졌다. 숨 가쁘게 돌아가던 베링 자치주의 대표단에게도
그날 저녁에 있을 만찬 시간까지 겨우 쉴 시간이 생겼다.
한국은 3개 연대로 구성된 1개 여단을 베링 자치주로 파견해 철도경비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일단 자치주 행정부가 있는 캄차카를 포함한 북부 베링 지역의 경비를 지원할 예정입니다.
자치주의 요청만 있으면 즉시 출동할 수 있도록 이미 부대편성까지 마친 상태입니다.
개괄적인 계획부터 브리핑하면,
한국군의 진입로는 다이오미드 섬의 현수교 근처가 됩니다. 그리고 ---,
병력 규모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자치주가 공격당하면 침략국과
즉시 교전상태로 들어간다는 한국과 북조선의 상호 안전보장 조약 이었다.
거기다 평시의 경비 병력까지 지원된다면 더할 나위없이 바람직한 일이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대표단 일행은 올 때와는 달리 희망에 부풀어 돌아갔다.
2037년 3월,
드디어 한국과 북한은 자치주와의 안전보장조약을 공표했다.
동시에 한국군 1개 연대가 1진으로 다이오미드 섬을 경유해 시베리아의
베링 자치주로 진입했고 바로 철도 경비에 투입되었다.
러시아의 반응은 히스테리 그 자체였다.
한국군이 이미 베링 자치주에 상륙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극단적 불쾌감을 드러내며 서슴치 않고 극언을 내뱉었다.
자치주 경계선에서는 러시아 군과 자치주 의용대 간에 충돌 직전의 상황이
빈번히 벌어졌다.
세계가 숨을 죽이며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치주에 동정적이었지만 러시아와 일전을 불사하면서까지 도우려는 국가는
한국과 북한 외에는 더 이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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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생의 눈에도 번쩍이는 게 고이는데, 보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