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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만 둘 있는 맞벌이 여성 K(38)씨는 현재 만삭. 9월 중순 셋째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부른 배만큼이나 무겁다.
"맏며느리잖니, 제발 한 번만~"이라는 시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에 못 이겨 남편과 함께 충북 보은의 A한약방을 찾아간 때가 지난해 여름. A한약방은 '아들 낳게 해주는' 처방으로 전국에 소문난 곳이다. 여든 가까워 보이는 할아버지 원장은 K씨는 물론 남편의 맥까지 꼼꼼히 짚었다. 진맥뿐 아니다. 부부의 생년월일을 가지고 사주를 본 원장은 "태어날 아들이 중국 한나라 시대 어느 재상의 사주와 같다"고도 했다. 합궁일도 몇날 몇시까지 상세히 정해줬다. 한약은 하루 세번 K씨만 먹었다. 남편은 담배와 술을 피하라고만 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임신이 됐다. K씨의 시댁은 일찌감치 아들 기대에 들떴다. K씨는 "입덧도 없이 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아들임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4개월 뒤 성별 검사를 한 병원측에서 이렇게 말했다. "딸입니다."
"한동안 초상집이었죠 뭐. 남편이 한약방에 전화해 소송하겠다며 펄펄 뛰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만 되풀이하더니 '95%는 성공한다, 아마 5%에 든 것 같다'며 미안해하더라고요. 지금은 마음을 좀 정리한 상태이지만, 생각할수록 얼마나 어리석었나 싶어요. 합궁 일시가 새벽이라 애들 재워놓고 교외 러브호텔에도 갔었잖아요.(웃음) 중국 황실을 연상케 하는 그 집 이름이 '흐르는 강물처럼'인가 '강물이 흐르는 집'인가였는데 남편이 우스갯소리로 그래요. '아들 씨가 강물에 흘러가버렸나?'"
호주제가 폐지됐고 '딸이 더 좋다'는 주장이 대세지만, '그래도 아들 하나 있어야지' 하는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출산 횟수가 거듭되면 남아의 출생성비는 급격히 높아진다. 24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9년 출생 통계결과'에 따르면 전체 출생성비는 여아 100명당 남아 106.4명으로 정상 수준(100:103~107)이지만, 셋째 아이는 114명으로 여전히 남아 선호가 높다. '아들 낳게 해주는 비방이 있다'며 선전하는 전국의 유명 한약방들이 2대, 3대를 이어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인터넷 육아 커뮤니티들에는 이들 한약방에 대한 질의와 응답, 품평이 올라와 있다. '정말 용하다' '효험을 봤다'는 답글도 보인다. 실제로 비방이 있긴 한 걸까? '아들 비방'으로 유명한 한약방 두 곳에 다녀왔다.
딸이 더 좋다고? 아들 낳으려고 목을 매지요
21일 충북 제천 인근의 B한약방.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약방 주인이 대뜸 "손 주세요" 한다. "왜 왔냐" "어디가 안 좋아서 왔냐"는 질문은 없다. 그리고 묻는다. "머리가 많이 아프죠?" "아프지는 않고, 간혹 어지러워요." "그렇지! 목 뒤가 많이 아프지요?" "어~, 목은 괜찮은데…" "그럴 리가, 많이 뻐근할 텐데… 허리도 아프지요?" "(미안해서) 그냥 조금." "흠흠! 손발이 차고 헛배가 부르지요?" "예. 배에 가스가 간혹." "그렇지! 피로가 쉽게 오지요? 얼굴이 붓고." "예. 아무래도 일을 하니깐." 손바닥만한 수첩에 한약방 주인이 볼펜으로 뭔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간다.
진맥이 끝난 눈치라 용기를 내어 묻는다. "실은 아들 하나 낳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원장이 묻는다. "올해 몇이에요?" "우리 나이로 마흔하나요." "흐음~" "나이가 너무 많은가요?" "마흔넷까지 (아들 낳게) 해봤어요. 그 이상은 어렵고." "확률은 어느 정도 될까요?" "80%. 우선 첫 약을 열흘 동안 먹고 다시 오세요." "어떤 약인가요?" "아들 나오게 터를 다지는 약." "어떤 약재가 들어가나요?" "……" "저처럼 나이 든 여자들도 많이 오나요?" 환자 이름, 주소가 깨알같이 적혀 있는 수첩을 보여주며 말한다. "보세요. 이분은 남원에서 왔어요. 뿐인가요?" "요즘 같은 세상에도 아들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봐요." "목을 매지요, 목을 매!"
23일 청주시 인근의 C한약방. 역시 아들 처방 잘한다는 소문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린다. 전화 예약은 평일은 1주일 뒤, 주말은 한 달 뒤에나 가능하다. 곁에 문하생들까지 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오른팔부터 진맥한다. "어어~ 체력이 막 떨어지네. 왜 이리 안 먹어? 밥을 먹어야지. 빵, 밀가루 말고…. 겨울에 추위 많이 타지요? 손발이 차갑고…." 이제 왼팔을 가져간다. "어어~ 안 좋아. 이러면 피부에 노화가 빨리 와요. '밤일'도 하기 싫지?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야지, 안 그래요?"
몇몇 대학에 강의도 나간다는 이 '명의'에게 본격적인 질문을 한다. "맏며느리인데 딸만 둘이라 아들 낳고 싶어 왔습니다.(실제로 기자는 아들 하나, 딸 하나다)" 그러자 원장은 물론 문하생들까지 빙그레 웃는다. "그러니까 몸이 튼튼해야지. 무슨 띠야?" "개띠요." "흐음~ 개띠는 음력 2월, 5월, 8월 중 홀수날에 합궁해야 아들인데, 어이쿠, 시간(8월)이 얼마 안 남았네. 바짝 먹고 한번 해봅시다!" "그럼 제가 여태 아들 못 낳은 게 제 체질이나 합궁일 때문인가요?" "남자 탓이기도 하지." 그러더니 문하생을 시켜 합궁날의 비방을 또 상세히 일러준다. 듣기 민망한 표현까지 써가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베개 밑에 도끼는 못 둘까
일선의 한의사, 한약사들은 '불임 처방'은 있어도 '아들 비방'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동의보감 등 몇몇 문헌에 '전여위남(轉女爲男)'이라 하여 태중의 여아를 남아로 바꾸는 처방이 언급된다고 하지만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한다. 한의사 유후정씨는 "질의 산도를 낮춰주는 약을 먹으면 남아를 생산할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 수태할 무렵 먹게 하는데, '베개 밑에 도끼를 두고 자야 아들을 낳는다'는 식으로 신화적, 전설적인 이야기들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한약사 한승우(오디한약국)씨는 "간혹 아들 낳는 약재를 지어달라고 오는 분들 계신데 그냥 돌려보낸다"면서 "아랫배가 차갑고, 기순환이 약하고, 어혈이 많아 불임인 경우 이를 풀어주고 기순환을 활발하게 해 임신을 돕는 처방은 널리 통용되고 있지만, 콕 집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비방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꽃마을한방병원 강명자 원장도 "합궁일 혹은 체위에 따라 아들 낳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말은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아들 딸이 아니라 건강한 아기를 낳을 수 있게 돕는 처방이라면 몰라도요." 유명한 약방들에서 지어주는 '아들 터 다지기' 약도 무슨 비법이 있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몸의 기운을 보해주고 어혈을 풀어 자궁벽을 튼튼히 해주는 일반 불임 처방약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K씨에게 결국 '딸 처방'을 한 셈이 된 보은의 A한약방은 며칠째 전화를 받지 않았다. 관리 당국인 보은군 보건소에 문의하자 "할아버지가 얼마 전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보건소 관계자는 "우리는 한약재 유효기간이나 부적합 약재가 아닌지 검사할 뿐 그분들의 처방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순 없다"면서 "솔직히 그런 걸 믿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상식이 문제 아닌가" 하고 반문했다.
제천 B한약방 근처에서 찐빵집을 하는 여주인은 "하도 유명해서 나도 몇 번 지어 먹어봤는데 솔직히 효험은 못 봤다"면서 "그냥 위안 삼아 보는 거지 믿을 건 없다"고 말했다. 인터넷 육아 커뮤니티들에 올라온 한약방 품평을 보아도 '효험 있다' '없다'가 반반 수준이다. 아들 아니면 딸이니 당연한 결과!
하지만 상식을 가진 사람도 주위의 거센 아들 압력에 부닥치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터. C한약방 원장은 "요즘 같은 세상에 아들 낳으려고 오는 사람들이 있나요?" 하는 물음에 혀를 찼다. "어리숙하기는. 내가 한약방 한 지 40년이오. (아들에 관한 한) 줄을 이어요, 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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