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121년 전인 1885년 여름 불모의 땅 서울에 도착, 정동에다 배재고등학교(培材高等學校)를 창설한 과정을 더듬어보면 한편의 극적인 다큐멘터리 기록영화를 보는 것 같다.
먼저 당시 미국에서 한국은 ‘은둔국’ 또는 ‘말라리아와 모기의 땅’으로서 미개국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한국에 간다는 것은 이런 무서운 병과 무지, 미신 등과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어서 여간한 용기와 모험심이 있지 않으면 한국에 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공포 때문에 아펜젤러의 친구 왓 워드가 선교사 임명까지 받고도 한국행을 포기했다. 이에 유달리 의협심이 강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던 성정의 아펜젤러가 자진해 가기로 결심했다.
아펜젤러는 1884년 12월 17일 약혼자 닫즈(Ella J. Dodge)와 결혼했고, 동시에 한국 선교사 임명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졸업생들이 안정된 국내 목회를 하는데 유독 자기 아들만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미지의 땅을 찾아가기 때문에 부모들의 반대는 극심했다. 부모들은 자기 아들이 자꾸 물에 빠져 죽는 꿈만 꾸었다는 것이다. 결국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11일 목포로 가다 배에서 충돌해 숨지고 말았다.
그래도 아펜젤러는 한국행을 강행, 1885년 1월 드루( Drew)신학교를 졸업하고 2월 3일 스크랜톤 가족(1886년 이화여고 설립)과 함께 태평양 우편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2월 27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4월 5일 부활절을 맞아 제물포항에 기착했고, 연세대를 창설한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나란히 우리 땅을 밟았다.
아펜젤러, 친구가 목숨 위험느껴 한국행 포기 대신 선교파송 자임
고종황제가 하사한 배재학당 액자 |
그러나 아펜젤러 부부는 서울에 들어가지 못하고 일주일 만인 4월 13일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가 6월 20일 다시 제물포에 도착, 7월 19일 학수고대했던 서울에 들어왔다.
이들 부부는 고종 황제로부터 교육 사업을 허락받고 곧 바로 이 땅의 신교육에 착수했다. 8월 3일 학생 두 명으로 배재학당을 창설,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효시가 됐다. 이로써 아펜젤러의 꿈은 이루어졌다.
아펜젤러의 교육 사업에 만족을 표시한 고종황제는 이듬해인 1886년 6월 8일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유용한 인재를 배양하는 배움의 집”이란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하며 격려해 주었다.
배재학당은 이름에 걸맞게 처음부터 민족교육을 통해 이 민족을 위한 수많은 유용한 인재들을 배출했다. 구한말에는 개화운동을 위한 많은 민족선각자들을 길러냈고, 일제 암흑기에는 반일 독립운동가와 민족지도자들을 많이 길러냈다.
아펜젤러는 처음부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서의 구절에 따라 진리 안에서 ‘참 자유자’를 길러내는데 평생사명으로 내걸었다. 그의 교육 목적에 따라 12만 명의 ‘자유 하는 배재인’을 개교 121년이 지난 오늘에 까지 우리 민족에게 배출하고 있다고 김현수(金賢洙) 교장 선생은 설명했다.
아펜젤러는 ‘도덕적 정신적 자유인’은 이 민족을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태복음 20장 26, 27, 28절)”을 통해 배재의 교훈인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이 탄생했다.
7월19일 서울도착 하자마자 8월3일 배재학당 창설, 교육사업 시작
①우리나라 최초의 벽돌 학교건물, ②배재고 학생회가 발행한 협성회보, ③이승만 흉상, ④아펜젤러 동상 (시계방향) |
이것이 바로 배재인의 정신이요 혼이다. 배재가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 아래서 이 민족에게 소망을 주고 그 갈 길을 비추었던 힘의 원동력이었고, 수많은 배재인들이 이처럼 훈련받고 어두운 시대 민족지도자로 나섰던 것이다.
아펜젤러는 민족교육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해 1887년 우리나라 최초의 르네상스식 붉은 벽돌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 1층에는 교실, 지하 1층에는 한글, 한문, 영어의 삼문출판사와 인쇄소가 차려져 우리 민족의 개화운동을 위해 성경과 신문, 월간지들을 발간하는 등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 우리나라 신문화의 요람지이자 효시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예배시간과 성경시간에 가르쳤고, 애국심과 자유사상은 교실과 운동장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양반이든 평민이든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배울 수 있도록 본격적으로 민주교육을 실시했다. 그야말로 민주교육의 효시요, 국민교육의 원년을 장식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주교육과 민주주의 훈련은 지금까지 줄기차게 내려온 배재의 학풍이요 자랑이다. 이러한 배재의 자유와 민주주의 사상의 학풍에는 해방의 개념을 담고 있기 때문에 혁명성을 요구한다. 과격한 정신적, 사상적 변혁을 동반했고, 이에 준한 행동이 뒤따랐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로 1896년에 조직된 협성회(協成會)라는 배재고학생회였다. 이곳은 학생들에게 토론장이자 민주주의 훈련장이었다. 부패 무능한 정부를 공격하고 자주독립과 부국자강을 불태우자 정부는 협성회보를 폐간시켰다. 이에 협성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해 가장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민중계몽과 민중의 정치적 각성을 계속 촉구했다.
협성회는 배재고 교사였던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탄생되는 진원지가 되었다.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최병헌, 양홍묵, 전덕기 등 배재고 교사들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이끌어갔다.
특히 1898년 8월 28일부터 12월25일까지 열린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는 1789년 프랑스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쳐부수고 공화정을 성공시켰던 ‘프랑스 대혁명’에 비유할 만한 우리 민중들의 엄청난 민족구국운동이었다.
배재고 중심,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이끌며 민족구국운동 전개
정동에서 옮겨온 서관건물 |
비록 조병식 등 보부상들이 중심이 된 황국협회의 끈질긴 방해로 만민공동회가 성공하지 못했지만 가히 우리 민중들의 위대한 혁명적 투쟁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준 자주독립운동의 꽃이자 ‘한국판 대혁명’이라고 부를만했다. 이 만민공동회의 중심에 미국으로 강제 출국당한 서재필을 대신해 윤치호 회장과 이승만 등 배재고 출신들이 중심에 서 있었다.
서재필의 발상으로 시작된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약 1만 명에 가까운 민중들이 모여들어 처음부터 대성황을 이뤘다. 여기서는 국권수호와 자주독립을 고수하려는 구국운동으로서 러시아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화 정책을 사전에 좌절시킨 투쟁이었는데 이는 성공했다.
1만 명의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자주독립과 주권 및 이권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의를 보여준 만민공동회는 당시 정부 뿐 아니라 서울 각국 외교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3월 12일에는 수만 명의 자발적 만민공동회가 열려 큰 성공을 거두었다. 러시아의 식민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1898년 4월 러일은 로젠-니시협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완전독립을 확인하고 내정간섭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한반도는 열강의 세력균형으로 완전히 진공상태였고, 확실한 독립을 이룰 절호의 기회였다. 만민공동회가 이를 간파해 파고들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실패의 원인으로 서재필을 꼽았고 러시아의 공작으로 그는 5월 14일 미국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그러나 서재필이 없어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만민공동회는 윤치호에 의해 더욱 강력하게, 더 과격하게 진행되었고, 그 중심에는 항상 배재협성회가 앞장섰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벌인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의 절정은 1898년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열렸던 종로에서의 관민공동회였다. 민중들은 국정개혁을 위한 헌의6조(獻議 六條)를 결의하고 황제의 재가를 얻는데 성공했다. 부국강병을 위한 내정개혁은 약속받았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세력이 농간을 부려 실패했다.
이 헌의 6조는 우리 민족역사상 민중의 손으로 만든 최초의 국정개혁안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정부는 중추원 구성을 위해 독립협회가 의원의 절반인 25명을 선출해 달라고 했다. 독립협회는 11월 5일 최초의 국회의원 선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수구파, 고종에 폐위 익명서 보고, 최초 국회의원 선출 무산시켜
고덕동 교정 |
하지만 수구파인 조병식, 유기환, 이기동 등이 모의, ‘이씨 조선은 쇠망할 것이고 만민공동회는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게 될 것이며 정부와 서민들은 승복할 것’ ‘국체도 공화정으로 바꾸려한다’는 익명서를 11월 4일 밤 고종에게 보고했다.
고종은 자신을 폐위시키려 한다는 보고에 분노, 윤치호 이상재 등 독립협회 간부 20명을 체포하도록 했다. 실로 청천병력이었다. 이러한 고종의 배신은 민중들의 엄청난 저항을 받았다. 그 저항의 중심에 배재고가 섰다. 협성회 초대회장이었던 양홍묵과 이승만이었다.
이들이 주동이 되어 학생 40~50명이 경무청 문 앞에서 독립협회 간부 17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독립협회 회원 서민, 다른 학교 학생들이 몰려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만민공동회 4일째인 11월 8일부터는 초겨울비가 내렸다. 수만 명의 민중들은 비를 맞으며 재판소 앞으로 장소를 옮겨 철야농성을 했다. 그리고 11월 10일 17명의 지도자들은 석방됐다. 황국협회 거두인 조병식을 재판에 회부하고, 홍종우, 길영수 등 보부상 두목들을 유배시키며 황국협회를 해산시켰다.
하지만 수천 명의 황국협회는 해산은커녕 방해를 계속해 고종은 수만 명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12월 25일 강제해산시켰다. 이 운동은 우리 민족독립운동사에 찬란한 금자탑으로 남아 있고, 민중들을 최초로 민족의식과 민주정치의식으로 무장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운동은 배재학생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교실에서 배운 민족, 민주, 정의의 개념을 실제 민족의 현장에서 직접 보고 배우며 행동에 옮기게 했다.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배재고 전통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때부터 길러왔다.
이러한 전통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해 18명이 검거되었고, 1929년 광주학생의거 1주년을 맞아 학생들이 학교 교실에서 모두 만세를 부르는 등 계속 이어졌다.
배재주축, 만민공동회 활동 민족고난 동참, 민족 민주 정의 실천
김현수(金賢洙)교장선생님 |
우리 민족의 정신과 혼을 지키려는 노력은 당연히 우리글인 한글 사랑과 지키기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 중심인물이 바로 주시경이었다. 그는 6년간 배재학당을 다니며 우리글의 과학적 연구 길이 트였고, 우리말본 교육과 한글 보급에 헌신하게 되었다.
자기 글이 없는 민족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주시경은 자주적 한글문화의 정립과 수호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는 국권을 지키고 우리의 고유 문화전통과 유산을 지키는 길은 우선 우리말과 글의 연구와 보급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우리말을 사랑하라고 가르쳤고, 우리 문화를 존중하고 자랑하도록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배재고는 한글연구와 그 학문적 체계형성의 산실이었고, 우리말 보급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다.
배재고는 1900명의 재학생들이 선배들의 빛나는 민족독립운동 정신과 전통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해 학교 본관에 들어서면 이승만, 주시경, 윤치호, 지청천, 신봉조, 신흥우, 김진호 등 13명의 얼굴과 업적을 기록해 놓았다.
“여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본교 출신 애국선열의 얼굴이 있다. 우리는 그분들의 애국충절을 선양함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모교에 대한 자부심과 나라사랑의 마음을 갖게 하노라”
김현수 교장 선생은 이러한 선배들의 애국애족정신을 오롯이 간직하며 3대 배재정신을 강조했다.
“첫째는 기독교정신입니다. 저희 배재고는 매일 아침 기도회를 통해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의 갈 길을 찾으며, 새로운 민족문화와 얼을 창조해 갑니다. 희생과 봉사를 통해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비추는 등불이 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배재고 3대 정신 “기독교 정신, 선구자 정신, 호랑이 정신”
배재고 본관 건물입구에 있는 학교출신 항일인사 |
“둘째는 선구자 정신입니다. 저희 배재고 교훈에서 볼 수 있듯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섬김의 리더십으로 선구자적 개척 정신을 기르는 것입니다. 민주시민으로서 진취적 사고방식은 물론 우리 민족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미래지향적 사고를 지닌 지도자를 육성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호랑이 정신입니다. 호랑이는 저희 학교의 상징동물입니다.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과 늠름한 기상을 통해 불굴의 민족정신을 기르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학교 운동부는 기계체조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최초인 운동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우리 배재고의 투지와 강건함을 과시합니다.”
김 교장 선생은 “지난 121년의 역사 하나하나가 배재고의 인성교육 현장이고, 리더십 교육의 산 증거이다”며 “배재고 재학생들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 기도와 채플시간을 통해 민족정신과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체득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장선생은 배재고의 자랑으로 첫째, 우리 민족을 이끌어감에 있어 선배들의 위대한 업적을 들었다.
이승만(李承萬) 초대 대통령은 비록 말년에 독재자라는 오명을 남기긴 했지만 그는 분명 걸출한 민족지도자 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젊었을 때 1896년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와 배재고학생회인 협성회와 독립협회를 조직하자 이에 적극 가담, 개화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승만은 만민공동회를 개최, 부패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오늘날 국회격인 중추원 설치를 주장하다가 황국협회의 무고로 투옥되었다. 그는 민영환의 주선으로 풀려나 미국에 가서 36년간 독립운동을 했고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다.
이승만은 김구(金九)의 남북협상을 거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 1948년 제헌국회의장에 선출되고 그해 7월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서재필(徐載弼)은 배재고 교사로서 협성회와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문을 세웠으며,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만민공동회를 개최, 민중자각과 독립운동에 큰 업적을 남겼다.
역사에 빛나는 민족 선각자인 선배들 업적 기리고 본받아
김소월 시집 및 성적표와 주시경 선생 얼굴사진 및 자필이력서 |
주시경(周時經)은 우리말과 한글 지키기 운동을 통해 일제침략에 항거한 국어학자로서 "우리말과 글을 잃으면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을 잃는다"고 강조했다.
김소월(金素月)은 우리민족정서를 대변한 대표시인으로서 ‘진달래 꽃’이 있다. 그의 시에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이고 민족혼에 대한 색채가 강하게 부각됐다.
윤치호(尹致昊)는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주도했다. 서재필이 추방되자 독립협회 회장을 맡아 만민공동회를 개최, 자주국권 수호와 자유 민권보장, 근대적 자강체제 수립 등 자주적 근대화운동을 주도했다.
지청천(池靑天)은 임정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내다 광복후 대동청년단을 창설했으며 제헌국회의원, 초대 무임소장관을 역임했다.
오긍선(吳兢善)은 의학자이자 사회가업가로서 세브란스 첫 한국인 교수가 되었으며, 학장에도 취임했다.
둘째, 우리나라 신교육의 발상지이자 민족교육의 효시를 이뤘다는 점이다. 배재고는 항상 희생을 감수하며 역사의 물줄기에서 맨 앞에 서서 학교에서 가르친 자유 민주 민족교육을 실천에 옮겼다. 심지어 일제로부터 배재고는 만세학교로 불렸다.
셋째, 배재고는 12만 동문들이 사회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1900년부터 기독학생회를 비롯해 각종 학교 모임이 1백년 이상을 유지하며 학교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김 교장 선생은 설명했다.
기독학생들이 중심이 된 페마는 영국 등 세계 공연은 물론 아펜젤러 기도회를 매년 개최한다. 배재오케스트라도 3~4회 학교 공연 등을 통해 호평 받고 있으며 영화제작반 등 50개 동아리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
김홍일 권영세 등 국회의원 100명, 노주현, 권인하, 조인성, 송종국, 차두리 즐비
교훈탑 |
배재고 출신 인사들을 보면 의사, 목회자, 학계 등에 대거 포진해 있다. 민족지도자로는 여운형, 신흥우, 신봉조, 김진호 등이 있고, 정치인은 김석수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전의원,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 정덕구. 권영세 의원, 문창모 전의원 등 전현직 국회의원이 100여명에 달하며, 동훈 전 통일부장관 등 장관출신도 100여명에 이른다.
군 출신으로는 김진호 전합참의장, 남재준 전육참총장을 비롯, 김대현 소장 등이 있으며, 학계는 김병수 전 연세대총장(포천중문의대 총장), 정순훈 배재대 총장, 김정길 배화여대 총장, 김학수 서강대 언론대학원장, 배해영 인하대 정보통신대학원장, 유일상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장, 김창용 한성대 인문대학장 등 교수만 400명이 넘는다.
경제계는 박찬법 아시아나항공사장, 김완정 산업은행 부총재, 박상경 ING 생명보험 부사장, 허정범 현대해상화재보험 전무, 조사연 금호전기 고문, 최헌규 다우기술 대표이사, 정상용 대한항공 고문, 조남원 삼부토건 부회장, 이순동 삼성 전략기획실 부사장, 정천양 신성엔지니어링 사장, 김근수 울산화학 회장, 박문덕 하이트맥주 회장, 신현정 한솔제지 부사장, 박종수 현대자동차 부사장 등이 있다.
김소월 시비 |
언론계 인사로는 이몽룡 KBS 보도국장, 김필건 영상취재부장, 구영회 삼척문화방송사장, 박건칠 기술정책국장, 김원태 편집부장, 운군일 서울방송 제작국장, 이서영 문화부장, 정병덕 국민일보 편집부국장, 육정수 동아일보 부국장, 한종태 서울신문 국제부장, 정중헌 조선일보 논설위원, 성한용 한겨레신문 정치부장, 김시중 한국전문신문협회장 겸 총동창회장 등이 있다. 문화예술계는 소설가 나도향과 연극인 김동원,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가장 돋보이며 탤런트 노주현, 소설가 최진욱, 김필주 분당 심포니오케스트라 감독, 정성수 서울 씨빅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박헌수 영화감독, 강찬모 화가, 오태석 극단목화 대표, 가수 권인하, 구창모, 탤런트는 조인성, 천호신, 축구선수는 차두리, 송종국, 조원희 등이 체육인으로는 김용우.김종렬. 김희집 전체육회장, 김영기 농구협회장 등 즐비하다.
배재고는 1백년 정동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1백년 고덕동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2만평의 넓은 대지에 제2의 중흥을 꿈꾸고 있다
김 교장 선생은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21세기 세계화. 정보화시대를 주도할 실력을 배양하고, 자율과 책임을 중시하는 민주시민 리더십을 고양하며, 학생들의 경쟁력을 극대화시킬 것”이라며 “2009년에는 최고 명문사학으로 자리매김, 반드시 제2의 중흥을 이루어놓겠다”고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