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 senior]정신의 근육 키우기
고독이란 …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마음의‘비타민E’
※인간은 45세를 정점으로 사회관계가 꺾인다고 하지 않던가. 잃는 사람 수가 많아지는 네트워크의 변곡점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혼자된다. 어떤 조직이든 끝까지 챙겨주지는 못한다. 홀로 있는 연습을 충분히 해둬야 한다.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캘린더의 여백을 두려워한다면 자유인의 자세가 아니다.
“아, 백수가 과로사할 지경이야. 자유인으로 지내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냥 놔두지를 않네.”
그 마음 누구보다 공감한다. 어깨를 짓누르던 책임감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과 밀려오는 약속으로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서너 달이 훅 지나간다. 퇴직을 실감하기 어려울 때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죽음과 같은 적막감이 찾아온다. 하루 종일 전화 한 통 없고 문자와 카톡조차 쥐죽은 듯 고요하다. ‘전화기가 고장 났나’ 하고 여기저기 만져보지만 멀쩡하다. 오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비로소 실감하게 될 것이다. 새벽형 인간들에게 그 고통은 두 배다. 그때부터 안절부절,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보지만 상대방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
“어, 어떻게 하죠. 요즘 바쁩니다.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제야 깨닫는다. 조만간 연락하겠다는 것은 곧 만나고 싶지 않다는 우회적 표현이라는 것을.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차가운 거절이다. 드디어 그 순간이 온 것이다. 어금니를 꽉 물지만 치아만 아플 뿐이다.
회사 그만 둔 뒤 절실하게 느낀 ‘쓰리 걸’
하지만 되돌아보면 나 역시 수없이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터다. “바쁜데요”라는 단 한 마디로 말이다. 물밀듯 후회가 몰려온다. 실패를 통해서 사람은 많이 배운다고 했던가.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쓰리 걸’이 쓰라리게 그리워졌다. 선배들에게 좀 더 잘해드릴 걸, 직장 후배들에게 말 한마디 잘해 줄 걸, 그리고 무엇보다 내 시간을 조금 더 가질 걸. 그 ‘쓰리 걸’ 가운데 어떤 걸이 가장 아쉬웠느냐고 누군가 내게 물어본다면, ‘내시걸’이라고 답하고 싶다. “내 시간을 가질 걸.”
CEO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 때는 내가 조직을 리드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정표와 조직에 끌려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가지고서야 무슨 창의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경영자와 리더는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다. 무형에서 유형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고 집단지성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하겠지만, 때로는 독창적인 리더십도 필요하다. 조직의 도그마, 고정관념, 지금까지 갇혀 있던 프레임을 깨지 않으면 새로운 성장 동력은 기대하기 힘드니까. 홀로 있는 시간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가 많다고 자랑할 일은 절대로 아니다. 직위 때문에 맺어진 인간관계는 휘발성이 너무 강해서,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 금방 생명력이 증발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인간관계를 챙기는 열정의 10분의 1 정도라도 빈 공간으로 남겨놓으면 좋겠다. 구조조정 해야 할 것은 조직만이 아니다. 리더의 일정표부터 과감히 다이어트 해야 한다. 멋진 아이디어를 낸 젊은 친구들에게 점심 사주고 싶어도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면 무슨 창조적인 리더십이 가능하겠는가. 경영도 타이밍의 예술인데, 김 빠진 맥주가 되지 않을까. 비어 있어야 생각이 고이고, 생각이 고여야 새로움이 생긴다. 여백 없이 새로운 리더십은 생기지 않는다. 단지 리더놀이, CEO 흉내만 하다 갈 뿐이다.
‘자유롭지만 그러나 고독하게 … ’
음악가들에게 브람스의 인생은 F.A.E.로 유명하다. F.A.E란 ‘Frei aber Einsam’(프라이 아버 아인잠)의 줄임말이다. 독일어로 ‘자유롭지만 그러나 고독하게’란 뜻이다. 홀로 있는 시간은 그에게 위대한 작품이 되어 돌아왔다. 원래 브람스가 좋아했던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의 좌우명이었지만, 그를 위해 바이올린 소나타, 일명 ‘F.A.E’를 만든 까닭에 지금은 브람스가 자유인의 아이콘이 되어있다.
여백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를 ‘외로운 비타민 E’라 표현하고 싶다. 브람스의 작품 F.A.E가운데 E를 딴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가끔은 홀로 있어야 한다. 일정표의 중간을 비워두어야 한다. 원래 비타민 E는 흔히 젊음을 지켜주는 비타민이라 부른다. 노화를 방지하며 특히 여성들에게 효과가 좋다고 한다. 비타민은 몸 안에서 스스로 생기는 호르몬과 달라서 반드시 몸 바깥에서 섭취해야 한다. 제2의 인생에서 외로운 비타민 E 역시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종합비타민을 챙겨 먹듯, 외로운 비타민 E도 주기적으로 섭취해야 저항력이 생긴다.
인간은 물론 사회적 동물이다. 누군가 필요하고 모임도 당연히 나가야 한다. 그러나 잠시도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은 중독이다. 지나치면 ‘사회독(社會毒)’이 되어 돌아온다. 내 영혼과 인생을 해치는 독소가 된다는 뜻이다. 외로운 비타민 E는 그 독소를 줄이는 해독제가 될 것이다.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삶의 여백’은 필수
늘 일정표가 빡빡한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되기 힘들다. 모든 것이 꽉 차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는 10가지, 100가지 말할 수 있다. 시간을 내야 할 이유 역시 10가지, 100가지도 가능하다. 애인을 만들 때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지 않던가. 여백이 있어야 진정한 친구가 된다.
가끔 이런 사람들을 본다. 식사약속 해놓고, 당일이 되어서는 ‘우리 둘이서만 밥 먹는 거야? 부를 사람 누구 또 없나?’ 이렇게 황당하게 만들기도 한다. 1대 1 소통에 훈련되지 못한 탓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혼자 있는 시간을 더욱 두려워한다. 하지만 어차피 인간은 45세를 정점으로 사회관계가 꺾인다고 미국 의학저널에 발표되지 않았던가. 새로 사귀는 것보다 잃는 사람 수가 많아지는 네트워크의 변곡점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혼자된다. 어떤 조직이든 끝까지 챙겨주지는 못한다. 홀로 있는 연습을 충분히 해둬야 한다.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캘린더의 여백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인의 자세가 아니다. 헬스클럽에서 근육 키우듯 홀로 이겨낼 수 있는 정신 근육도 키워야 한다.
일정표가 비었더라도 외롭다고 투덜거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홀로 낯선 커피숍에 들어가 황금빛 거품으로 덮인 에스프레소 한잔 주문해보자. 강렬하고 매혹적인 쓴맛이 목안에 넘어올 것이다. 이어폰이 있다면 조용히 브람스의 현악 6중주 1번 2악장을 들어보자. 고독하면서도 자유로운,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브람스의 마음이 전달되어 오는가. 수퍼시니어는 외로움을 이겨내는 사람이다.
손광승∙세한대 교수(전imbc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