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오늘도 우리는 부단히 건너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 부재 상태에서 주님 현존 상태로!
갈릴래아 호수 동편에는 이방인들 가운데 게라사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던 돼지를 떼로 키우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더러운 영을 추방하는 능력을 발휘하셨는데,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주님 부재와 현존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습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다 보니 공동묘지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그에게 붙은 악령은 한둘이 아니라 수백, 수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악령의 이름이 특별하게도 군대였습니다. 한 사람 안에 수많은 악령이 들어있다 보니, 수시로 발작이 일어났습니다,
너무 폭력적이다 보니 발에 족쇄를 채우고, 손은 쇠사슬로 묶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답답하고 괴로웠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밤낮으로 무덤과 산으로 돌아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는 자해행위뿐이었습니다. 한 인간 존재가 주님 부재 시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공동체가 주님 부재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중심에 계셔도 부족한 판인데, 다양한 우상들, 이런저런 악령들이 떡 하니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부재하실 때, 즉시 그 자리에는 악한 영이 자리를 은근슬쩍 자리를 잡습니다. 그 순간 우리의 현실, 우리 공동체의 현실은 얼마나 음산하고 비참한지 모릅니다. 마치도 칙칙한 무덤 분위기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다 보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차하면 소리소리 지르고 으르렁댑니다. 별것 아닌 일에 핏대를 올리고 폭력이 난무합니다. 도저히 통제가 안 되는 경우에는 사슬이나 족쇄가 필요합니다. 극한 분열과 대립으로 하루하루가 지옥입니다.
은혜롭게도 군대라는 악령이 들린 사람은 죽기 일보 직전에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 악령 들린 사람을 가엾이 여기시어, 말씀 한 마디로 그에게서 더러운 영들을 쫓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니,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화되었습니다. 음산하고 칙칙한 죽음의 분위기에서 화사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로 즉시 반전되었습니다.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오늘도 우리는 부단히 건너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 부재 상태에서 주님 현존 상태로!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코 5,1-20
하느님은 돼지들에게는 마귀가 들어가도록 허락하신다
영화 ‘거짓말’(2015)은 허언증 환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가난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불행한 가정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어 밖에서는 거짓말만 하고 다닙니다.
자신은 그런 가정에 어울리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피부관리사로 직장에서 일을 하고는 있지만 일을 마치면 고급 집을 살 것처럼 둘러보기도 하고 비싼 차와 전자제품을 산다고 했다가 마지막에 핑계를 대며 다음에 오겠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도 매우 부잣집 딸이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일부러 없는 돈으로 비싼 차를 타며 거짓말에 거짓말을 덧붙입니다.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정신없는 사이에 냉장고가 배달되어 돈을 날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직장에서는 그녀의 거짓말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한바탕 싸움을 하고는 쫓겨납니다.
홧김에 남자친구의 어머니에게 자신은 간호사가 아니라 여드름 짜는 일이나 한다며 솔직하게 말했다가 모든 게 끝장나고 맙니다.
모든 것과 단절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런 지옥으로 이끌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허영심 하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욕심’이 어떻게 본성을 타락시키고 어둠으로 끌어내리는지 보여주십니다.
이미 마귀들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덤’에서 살았고 누구도 그를 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귀가 사람을 끌고 들어가는 ‘무덤’은 우리로서는 ‘지옥’의 상징으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원인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 마귀들을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돼지는 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의 대명사입니다.
어떤 이들은 돼지고기를 먹느니 죽음을 택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욕심’과 여러 다른 욕망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돼지는 욕심에 찌든 인간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엔 지옥까지 끌고 가는 마귀를 불러들입니다.
돼지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떠나 주십사고 정중히 말한 것 같지만 그것은 그러한 이적을 일으키는 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인 이천 마리의 돼지를 몰살해버린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욕심’을 죽이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욕심이 좋고 허영심이 좋으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욕심이 죽기를 싫어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늘 마귀가 하는 말과 같이 그분께 말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이는 “예수님, 돈의 욕심을 버리라,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냥 저를 편안하게 살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의지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돼지와 같은 인간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돼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제 허영심 대신 당신을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봉헌부터 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봉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내 자신의 욕심과 싸우겠다는 의지표명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귀가 좋아하는 돼지가 되지 않게 욕심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5,1-2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께서는 게라사로 가셨다. 이 지방의 본이름은 게르게사인데 성경을 필사하면서 잘못 옮긴 이름이다. 게르게사는 쫓아낸 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사람을 만나신다. 그 사람은 썩은 시체로 악취를 풍기는 무덤에서 산다. 세상의 영광을 약속받았던 자가 그곳에 살고 있다. 이러한 곳에서 악령 들린 사람은 무덤에 거처하면서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여 있으면서 밤이나 낮이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했다는 것은 그가 더는 비참해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마귀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본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7절). 예수께서는 악령 들린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8절) 하시자, 마귀들은 그에게서 나와 돼지 떼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물에 빠져 죽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귀들이 사람들에게 똑같은 짓을 해서 바다에 빠져 죽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주님께서는 마귀들을 막으셨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마귀들이 인간들에게도 저지를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마귀들이 돼지들을 소유할 힘이 있었다면 인간을 소유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은 성한 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 마귀들의 군대가 자기에게서 쫓겨난 것을 알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주님의 발치에서 마냥 쉬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의 뜻과는 달리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19절).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에서 어떠한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이 변화는 나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못 알아들을 때, 우리도 그 주민들처럼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의 희생이 따를 때, 그 희생을 꺼려 예수님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고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마르 5, 19)
주님께서는
가장 소중한
자비를 우리에게
언제나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그 어떤 것도
막지 않으시며
다 맞아들이십니다.
맞아들임은
대화의 기장 큰
본질이 됩니다.
치유와 정화는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대화를
나누십니다.
더러운 영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은
점점 죽음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더러운 영을
추방한 후
제정신이 된 그를
가족들에게 돌려
보내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저버리지 않으시는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자비를 먹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자비없이는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더러운 영은
결국 끝이 있지만
자비는 영원합니다.
자비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선택하는
예수님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끝없는 자비로
다시 일어서는
자비의 날 되십시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요즘에는 듣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늦은 밤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찹쌀떡~~ 메밀묵”입니다. 간단한 리듬이 담긴 이 소리를 아마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추운 겨울, 사람이 많이 오가는 전철역 근처에서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며 파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길거리 음식인데도 많은 사람이 거부감없이 이를 구매하신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히 찹쌀떡, 메밀묵을 좋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찹쌀떡, 메밀묵’이라는 고유 장단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합니다. 외국인에게 이 장단에 맞춰서 “찹쌀떡, 메밀묵”을 외쳐보라고 하면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6글자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만의 고유 장단이기에 따라 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고유함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 머무는 이는 사랑 실천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행복해하며 남의 행복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리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주님의 고유함이 자기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실천에 주저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사랑 실천하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고, 사람들에게 바보 멍청이 소리를 들을 것만 같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것이 먼저라서 다른 사람의 행복에 오히려 배 아파합니다.
사랑이라는 주님의 고유함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유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나온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났습니다. 그 더러운 영을 아무도 휘어잡을 수가 없었지요. 그 안에는 군대라고 불릴 정도로 그 수가 많았지요. 이 마귀를 쫓아내시지요. 그런데 그 더러운 영들이 사람들이 산에서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에 들어간 것입니다. 마귀들이 들어갔던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더러운 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이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기뻐하고 축하할 일입니다. 하지만 고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자기들의 손해를 생각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또 생겨 손해를 볼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안에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고유함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다정함이란 진통제이자 치료제, 비타민이자 영양제이다(정재승).
6)이병우 루카 신부님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5,8)
오늘 복음(마르5,1-20)은 '마귀들과 돼지 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가셨을 때, 그곳에서 수가 많은 군대라는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군대 마귀!'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를 죽일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던 마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게라사에서 이 군대 마귀를 쫓아내시는 치유 기적을 행하십니다.
오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떠한 악의 세력보다도 더 큰 힘을 지닌 분으로서, 군대 마귀처럼 아무리 강력한 악의 세력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복음 환호송)
그러니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우리도 어떠한 악의 세례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힘으로, 성령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매순간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더러운 영아, 나에게서 나가라."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5,8)
더러운 영인 악령(마귀)은 베드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내 주위를 맴돌며 호시탐탐 내 안으로 들어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더러운 영인 악마는 우리를 분열시키고, 싸우게 하고, 탐욕을 부리게 하고, 시기질투하게 하고, 나쁜 생각을 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게으르게 합니다.
이처럼 악마는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끕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러운 영(악마)을 몰아내야 합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내 힘이 아닌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름)으로.
오늘도 악과 싸워 승리하는 자 됩시다!
7)조규식 신부님(출처 : 굿뉴스-우리들의 묵상)
우리 마음이 연약한 것은
사랑에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이 허술한 것은
믿음에 구멍이 났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은
허약한 사랑을 뚫고,
허술한 믿음을 매섭게 공략합니다.
그럴 때,
곁에 계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주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주님을 깨닫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기도야말로
믿음인이 가진 가장 큰 용기이며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8)김재덕 베드로 신부님(출처 : 굿뉴스-우리들의 묵상)
“돼지는 굽은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도 안 되고, 그 주검에 몸이 닿아서도 안 된다”(신명 14,8).
이 말씀처럼 율법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규정합니다.
특히 마카베오기 하권은 돼지고기 때문에 순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6,18-7,42 참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돼지가 얼마나 불결하게 인식되었는지 잘 보여 주는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군대”라는 더러운 영은 예수님 앞에서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기를 청합니다.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마귀 들린 돼지들은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습니다.
악은 이처럼 예수님 앞에서 더 더러운 것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더 악하고, 더 부정하며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어둠을 더 선택하는 것이 바로 악의 방식입니다.
돼지들이 죽게 된 것처럼, 악이 이끄는 종착지는 바로 죽음입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한 말을 눈여겨봅시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악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살고 싶은 마음을 우리 안에 심어 놓습니다.
한번 우리 안에서 허락된 이 마음은 우리의 생각을 점점 지배하기 시작하고, 우리를 더욱 악한 곳으로 이끕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순간이 가장 괴로운 순간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도 사라져 버리게 만들고, 우리의 믿음도 힘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고해성사는 오늘 복음이 고백하는 예수님을 만나게 하여 주는 은총의 성사입니다.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선포하는 이로 새롭게 변화되었듯,
고해성사는 우리가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우리를 빛으로 나아가는 삶으로 이끌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잃어버렸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가야 할 곳은 바로 고해소입니다.
첫댓글 복음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마르코5,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