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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왜 장 씨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었나? 장애인에 대해 지자체와 정부는 왜 관리와 지원을 못 해주는가? 우리는 이 부분에 왜 관심을 두지 못했나? 한 개인의 처벌이 아닌 사회 공동의 책임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됐습니다.” (원주귀래사랑의집사건해결을위한공동대책위 이현귀 공동집행위원장)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사건 인권침해 당사자 증언대회가 7일 늦은 2시 여의도 이룸센터 누리홀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번 자리는 단순히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기 위함이 아니라 이 사건에 대한 ‘연대책임’을 묻기 위한 자리였다.
사랑의 집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지 1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사랑의 집에 있던 장애인 네 명이 장 씨에게서 분리조치 되었으며 그 중 한 명은 지난 1월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장 씨에 대한 공판은 현재 9차까지 진행되었고 오는 13일 10차 공판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사랑의 집 피해자들이 새로 나타나 진술함으로써 장 씨 혐의에 힘을 싣고 있다. 그러나 범죄 대부분이 공소시효가 지났다.
장 씨 한 개인의 처벌로 이번 사건은 끝나는가? 원주대책위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사랑의 집 사건은 한 개인의 잘못과 그에 따른 처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방관, 무관심으로 이 사건의 공모자이기도 했던 이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시절, 가족들은 왜 장 씨에게 어린 장애아동을 보낼 수밖에 없었나? 너무 가난했고 사회와 정부는 그 가난을 오로지 개인의 몫으로 돌렸다. 장애아동을 가족의 품으로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사회복지 따윈 없었다. 가족도 버린 장애아동 스무여 명을 한 사람이 제대로 보살필 리 없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은 그를 ‘천사 아버지’로 소개했고 그가 사는 곳에는 ‘사랑의 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사회가 외면한 그들은 굶어 죽고 맞아 죽고 소리소문없이 사회에서 삭제됐다.
이에 대해 원주대책위 이현귀 공동집행위원장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한 질문과 고민으로 앞으로의 활동을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 증언대회 개최의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장 씨, 바늘로 눈 찌르고 손톱 뽑고… “직접 아이 죽이기도 해”
의자에 앉아 수화로 말하던 그는 동작이 커지더니 기어이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허벅지를 가리키며 굵은 쇠막대기로 맞는 시늉을 한다. 손동작은 양쪽으로 점점 커진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이들은 책상을 옆으로 빼내어 그가 말할 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을 내어준다.
당사자 발언 첫 번째로 나선 이는 사랑의 집 생존자 임지훈 씨였다. 임 씨는 수화와 몸동작으로 지난 시간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의 언어를 수화통역사가 말로 전했다.
현재 마흔한 살인 임 씨는 농아인으로 9살 때 사랑의 집에 맡겨졌다. 9살의 어린아이는 15살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총 5번의 탈출을 시도했고, 마침내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임 씨는 사랑의 집에서 아이들 돌보는 일을 주로 맡았다. 사랑의 집 장아무개 씨와 그의 아내는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의 돌봄을 임 씨에게 모두 떠맡겼다. 임 씨는 새벽 5, 6시쯤에 일어나 집 앞 화단에 물을 주고 8시경 아이들 밥을 먹인 뒤 양치하고 씻기며 머리를 감겼다. 9시께에는 집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 닦기, 먼지제거, 창문에 광내기, 빨래 등 집안일은 온종일 계속됐다. 손님이 오면 대접하고 떠나면 뒷정리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점심은 먹지 못했다. 아침, 저녁만 먹었으며 그마저도 양이 무척 적어 늘 배고팠다. 반찬은 없고 밥과 물이 전부였다. 손님이 귤을 많이 가져오는 날엔 귤을 조금 먹을 수 있었다.
허기만큼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은 장 씨 부부의 폭행이었다. 맞는 일이 일과였다. 임 씨를 비롯해 사랑의 집에 사는 아이들은 늘 맞아서 온몸이 부어 있었다. 그의 가슴, 머리, 어깨 등에는 그때의 흉터가 여전히 남아 있다.
장 씨는 임 씨가 10살 되던 해의 초봄 그의 팔에 문신을 새겼다. ‘장성대’라는 이름과 ‘환자’라는 글자, 그리고 장 씨의 전화번호를 바늘에 먹물을 찍어 직접 새겼다. 그 문신은 족쇄였다. 임 씨가 사랑의 집을 탈출해도 그의 팔에 새겨진 문신을 본 사람들이 장 씨에게 연락했고, 임 씨는 번번이 잡혀 들어왔다. 그리고 잡혀 들어올 때마다 장 씨 부부는 임 씨에게 극심한 구타와 폭력을 가했다.
임 씨는 팔다리를 묶인 채 물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두 번째 탈출했다가 잡혀 왔을 때는 장 씨 부부에게 대바늘로 오른쪽 눈을 찔렸다. 그 때문에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그리고는 장 씨 부부는 임 씨의 치아를 망치로 내리치고 장도리로 뽑았다. 네 번째 잡혀 왔을 때는 펜치로 손톱을 뽑았다.
장 씨에게서 쇠파이프로 허벅지를 맞던 그 어느 날엔 너무 아파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허벅지를 감쌌다. 그러나 쇠파이프는 그대로 날아들었고 임 씨의 손등을 가격했다. 뼈는 부서졌다. 임 씨의 손등에서 손가락으로 이어지는 관절 부분은 아직도 움푹 함몰되어 있다.
그렇게 6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6년을 지내는 동안 그와 함께 그곳에 있던 아이들은 차차 죽어나갔다. 아이들 대부분은 밥을 잘 먹지 못했고 시름시름 앓았다. 아이들은 장 씨 부부의 매질을 피하지도 못하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고스란히 맞았다.
대소변을 보지 못해 배가 불룩 나와 있던 여자아이도 죽었고, 장 씨 부부가 목을 잡고 몸 뒤로 꺾어 죽인 아이도 있었다. 어떤 아이는 아침에 깨우려고 보니 맥이 뛰지 않았다. 임 씨가 장 씨 부인에게 이야기하니 장 씨가 비닐봉지에 아이를 담아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장 씨는 아이 없이 홀로 돌아왔다.
임 씨는 그곳에서 여섯 명의 아이가 죽은 것을 직접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임 씨 어머니, 수차례 장 씨 찾아갔으나 아들 보여주지 않아
“자식 잃어버린 사람이 아닌 사람은 이 심정 알 수가 없어요. 사람이 모래알처럼 많은 곳에 가면 저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내 자식은 어디 있을까. 주말에 남이섬에 같이 갔는데 그 많은 사람 속에 내 아들이 이제 곁에 있구나…”
임지훈 씨 어머니 안금자 씨는 가난 때문에 임 씨를 사랑의 집에 보내야 했다. 당시 언론을 통해 사랑의 집 장 씨는 부모도 버린 장애아를 거둬들여 키운다며 ‘천사 아버지’로 소개됐을 때였다. 방송을 본 임 씨 이모가 “딱 1년만 맡긴 뒤 데리고 오자”라고 했다.
안 씨는 임 씨를 사랑의 집에 맡긴 후 두세 달에 한 번씩 음식을 해서 사랑의 집으로 찾아갔다. 당시 사랑의 집은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에 있었다. 안 씨가 찾아가자 장 씨는 “아무 걱정하지 마라. 열심히 벌어서 몇 년 후 자식 돌려주면 되지 않느냐. 지훈이도 성인이 되면 당연히 어머니 집에 찾아가지 않겠느냐”라고 웃으며 임 씨를 안 씨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안 씨가 두세 달에 한 번씩 찾아가 아들을 보려 하자 장 씨의 태도는 차차 변했다. 안 씨는 “장 씨가 악마의 기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라며 “왜 음식만 가지고 오느냐, 음식밖에 가져올 게 없느냐고 했다. 그 말을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돈 가져오라’는 말이 아니었을까.”라며 당시를 설명했다.
그 후에도 계속 그곳을 찾아가던 어느 날, 사랑의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텐트 2개만이 세워져 있었다. 장 씨는 구속되고 아이들 없이 장 씨 부인(현재는 사망한 첫 번째 부인)만이 홀로 텐트 안에 있었다. 장 씨 부인은 아이들이 흩어진 시설 이름을 가르쳐 주며 그곳에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시설 어디에도 아들 임 씨는 없었다. 사실 그때 이미 임 씨는 사랑의 집을 도망친 후였다. 장 씨 부인은 이를 알았으나 안 씨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생사를 모른 채 30년을 살았다. 그러다 지난 SBS 궁금한 이야기Y에 보도된 ‘사랑의 집’ 방송을 보고 임 씨가 방송국에 연락했다. 그 후 임 씨는 어머니 안 씨를 만났고 30년 동안 잃어버렸던 ‘임지훈’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뿌리를 찾았다. 그동안 임 씨는 사랑의 집에서 사용했던 ‘장성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에 버려도 되는 목숨은 단 한 명도 없다
증언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고 이광동 씨의 동생 이미화 씨는 극심한 심리적 고통으로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일어섰다.
고 이광동 씨는 사랑의 집에 살았던 장애인 중 한 명으로 극심한 기아 상태에서 장이 꼬여 장기가 서로 붙은 상태로 사망했다. 그러나 사망한 지 12년이 흘렀음에도 장 씨는 장례를 치르지 않고 의료과실을 주장하며 원주의료원 영안실에 시신을 방치해두고 있었다. 그런데 충주의료원에도 장 씨를 보호자로 둔 시신이 10년째 영안실에 방치되어 있음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 있다.
고 이광동 씨는 유족이 나타나면서 지난해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충주의료원에 있는 고 장성희 씨의 경우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유족이 나타나지 않아 여전히 보호자가 장 씨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도 고 장성희 씨의 시신은 여전히 영안실에 방치되어 있다.
이미화 씨가 준비해온 발표문은 원주대책위 이현귀 공동집행위원장이 대독했다.
이 씨는 발표문에서 “사람은 실수를 한다. 그러나 실수로 사람을 여러 명 죽이지는 않는다. 30~40년 동안 사회 약자만을 골라 노리개로 삼아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더러운 손짓에 이제 그 책임을 물어야 할 때 아닌가.”라며 “그러나 아무런 대책도 없어 보이며 법까지 악용하는 그 수법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 씨는 “세상에 버려도 되는 목숨은 단 한 명도 없는데 이 나라에서는 아닌가 보다”라며 “장애는 불편함이지, 격리되어야 할 존재도 아니며 동정의 대상도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생각이 그 틀을 벗어나 한없이 더러운 곳으로 흘러가는데도 모른 척하는 국가도 참 우스꽝스럽다.”라고 비판했다.
이날 증언대회를 마치며 원주대책위 이현귀 공동집행위원장은 “재판에서 장 씨의 형량이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다”라며 “비록 공소시효는 지났으나 혐의에 대한 증거가 분명히 있음에도 죄의 대가를 명확히 받을 수 없다면 이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 생각한다”라면서 ‘연대책임’에 대해 다시 한 번 무게를 실었다.
이날 증언대회는 두 시간가량 진행되었으며, 장 씨에 대한 10차 공판은 오는 13일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