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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 완전한 믿음. 등 )
*** 05:18,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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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3.09.06 05:12
- 완전한 믿음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때면 늘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사실 악마를 믿는다면 모를까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내게 믿음은 있지만 사랑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취지의 얘기를 지난주 테살로티카서를 묵상하며 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이웃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믿음이 거짓이거나 불완전하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 신자들이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고,
이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천국의 희망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모범이라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과 저세상을 아우르는 참신앙이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신앙이 아예 없는 사람도 있고 사랑이 뭐냐며 사는 사람도 있으며,
신앙과 사랑이 있더라도 이 세상용 믿음과 사랑만 있거나
저세상용 믿음과 사랑만 있는 사람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있지만 이웃 사랑은 없으며
하느님을 믿는 것도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복을 주시기만을 바라며 믿기에
매우 이기적이고 현세 구복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복은커녕 화가 미친다고 생각되면 그 신앙마저 그만두는 사람도 꽤 있지요.
물론 천국의 행복만을 바라며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포기하고,
가족도 포기하고 재물도 사이비 교주에게 갖다 바치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저세상에서도 불행한 신앙인도 꽤 많습니다.
신앙은 있는데 정신이 병이 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의 믿음은 희망에 터하고 사랑과 행복으로 증명되는
완전한 믿음을 살아야 하는데 이것을 콜로새 신자들에게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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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신 다음, “시몬의 집”(루카 4,38)에 가시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때와 뒤 장면에서 소리치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와 같이, 열을 “꾸짖으시어” 마치 마귀에게 하듯이 열을 몰아내십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은 마귀가 붙어서 병이 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 “해질 무렵에”(루카 4,40), 곧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주실 때는 “손을 얹으시고”(루카 4,40), 마귀를 쫓아내실 때는 “꾸짖으셨다”(루카 4,41)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병자들에게는 측은히 여기시지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루카 4,41)이라고 소리 지르는 마귀들은 꾸짖으시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막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루카 4,41)
우리는 여기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니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알기에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됩니다. 곧 그 아는 바를 믿고, 그 믿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날이 새자”(루카 4,42), 곧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당신이 파견되어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임을 밝히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사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1고린 9,16) 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주님!
제가 태어난 이유,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오늘, 제 뼈 속에 새긴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뜻을 증거 하는 일, 그 일을 하도록 제가 파견된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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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떠날 때를 안다는 것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옛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떤 것에 연연해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때야말로 떠나야 할 때임을 잊지 맙시다. 칭찬받을 때, 그때가 떠나야 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카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33). 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인기에 매몰되지 않고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 주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됩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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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8년 여름입니다. 보좌신부에게 여름 행사는 연중 가장 큰 행사입니다. 초등부, 중고등부, 청년 여름 캠프는 준비만 6개월 이상 걸리는 행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입니다. 거리는 2시간 내외이면 좋습니다. 다음은 시설입니다. 숙소는 깨끗한지, 수영장은 안전한지, 음식은 적당한지를 살피게 됩니다. 답사를 3번 정도 가면서 꼼꼼하게 프로그램을 챙깁니다. 당시만 해도 아직 학생들이 많을 때이고, 교사들도 열정이 많았습니다. 공고를 내면 학생들은 신청하였고, 사목회를 비롯해서 어른들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트럭에 물품을 가득 실고 캠프장으로 떠나려 할 때입니다. 비가 오고 있었고, 태풍 소식도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비가 올 때를 대비한 프로그램도 있고, 캠프장은 높은 지대에 있어서 비가 온다고 해도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꼭 가야 하는지, 캠프장은 안전한지 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캠프장은 안전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안전하게 잘 다녀오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걱정하는 눈빛으로 저를 보셨지만 잘 다녀오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저를 믿고 여름 캠프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신부님께 지금도 감사드립니다.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내리는 비는 결코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리는 비도 한 여름밤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뉴욕에 살면서도 한국의 뉴스를 보곤 합니다. 한 군인의 기자회견을 보았습니다. 실종자 수색작업 중에 해병대 병사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엄정하게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수사단장은 해병대 병사의 영정 앞에 철저한 수사를 다짐했다고 합니다. 군에서 발생한 사망사고는 군에서 조사를 하지만 수사는 경찰이 하도록 법이 개정되었다고 합니다. 군 자체만의 수사는 때로 은폐와 조작 그리고 축소가 있었고, 이로 인해 억울한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수사단장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보고서를 작성했고, 결재를 받아서 경찰에 서류를 인계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종결되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사단장은 인계하는 과정에서 외압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철저하고, 엄정하게 수사했던 수사단장은 ‘항명’ 죄가 적용되어서 보직 해임되었고, 오히려 군 검찰에 의해서 수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사단장은 기자회견에서 군 검찰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제3의 기관에서 수사를 받게 해 달라고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청원하였습니다. 만일 수사단장이 상부의 의견을 들어서 수사기록을 수정했다면, 경찰에 인계하지 않았다면 수사단장에게는 보직해임이라는 불이익은 없었을 것입니다. 군 검찰에 항명이라는 죄명으로 수사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사단장은 왜 상부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수사에 의해서 밝혀질 것입니다.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억울한 군인이 없도록 공정한 수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번 뉴스를 보면서 문득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 그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비록 사람의 일이라고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그 결과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구심점을 잃어버린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박해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반석위에 세운 교회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저는 수사단장도 충분히 결과를 예상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이라는 거대한 조직에 맞서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군을 명예롭지 않게 떠나야 할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항명이라는 죄가 확정되면 감옥에서 지내야 하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홀로 있었던 예수님처럼 인간관계도 단절되고 고독하게 지내야 하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가족들에게도 큰 시련이 닥칠 것 또한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군인들이 사람의 일을 선택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에게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저 역시도 사람의 일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사람의 일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박해가 있을지라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지라도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이며,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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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결혼 후 남편이 돈을 벌어오기는커녕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사람들과 밀려다닌다면 이러한 행동이 이혼 사유가 될까요? 되겠지요? 이러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자기 딸을 살아있는 과부로 만든 베드로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를 데리고 다니는 젊은 스승인 주님에게도 마찬가지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라는 사람이 바로 집 옆의 회당에 왔다고 하니 아마도 열병이 나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쓰러져 있는 그녀에게 주님이 다가가십니다. 그리고는 머리에 손을 얹어 놓으시고 열을 꾸짖으십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열을 꾸짖었다는 복음의 내용으로는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주님으로 인해 열은 없어지고 마음의 변화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변화가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는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나는 그 일을 하러 왔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직접 그곳에 가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바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병이 나았고, 예수님 때문에 인생이 바뀌는 것, 이것이 바고 복음의 힘이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나타나는 기적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오늘이 주님 때문에 바뀌기를 바랍니다. 조금씩 조금씩 하늘나라를 향한 발걸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시면 건강해집니다.
언제부터인가
물을 많이 마셔야 건강하다는 말을
이곳저곳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갖게 된 습관
탄산수 마시기입니다.
이제 제 주변에는 늘 탄산수가 있습니다.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것들이 좋아졌습니다.
이제 영적 건강도 챙겨볼까 합니다.
무엇을 많이 마셔야 영혼도 건강해질까요?
혹시
성경이라는
탄산수 들어보셨을까요?
마시면 마실수록 영적 건강을 지켜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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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남을 도우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르기 위한 것일까요? 함께 사는 세상 안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일까요? 언젠가 어느 신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다른 본당에서 어렵다고 모금을 나와도 절대 도와주지 않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성당에서 성당 건축을 위해 모금을 와서 우리 본당도 어렵지만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아서 공동체가 함께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 본당에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본당은 낡은 오르간인데, 그 본당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더라고요.”
어쩌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만 돕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본당보다 더 멋진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도움을 꼭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만 주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도움받은 본당 사람들도 자기들이 받은 도움을 기억하면서, 다른 이에게 많은 나눔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함께 사는 멋진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또 도움을 주는 것은 상대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아일랜드 리머믹 대학교 크리벤 박사 연구팀이 봉사활동과 정신 건강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 설문 조사를 시행했습니다. 2만 7천 301명을 대상으로 평소 봉사활동을 자주 하는지와 우울증을 겪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봉사활동을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우울 증상이 적게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건강을 위해서라도 도움 주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봉사활동은 곧 나를 위한 영양제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 이유를 들어 영양제를 먹지 않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십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이 가시자마자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중을 들었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이 장면을 묵상해 봅니다. 사실 사위가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밖으로만 돌아다니는 모습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병‘이 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치유를 받게 되지요. 정신적인 치유인지, 육체적인 치유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던 상태에서 해방됩니다. 그 이후 장모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곧바로 일어나 시중을 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되거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처음에 감사했던 마음을 곧바로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도 간절히 기도했다가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새하얗게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곧바로 행동했다는 것이지요.
사랑의 실천은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만 돕겠다는 생각도 아니고,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섬기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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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실패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다(장 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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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길을, 희망을, 빛을, 진리를, 중심을 잃은 병든 사회”
-답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뿐이다-
한 밤중 기상하여 수도원 자비의 집 숙소를 나서면서 우선 바라보는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입니다. 그리고 집무실 안에 들어서면 십자고상과 그 바로 아래 태극기를 바라보며 성호경과 영광송을 바친후 만세오창, 기도를 합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속히 안정되어 만세오창도 그만뒀으면 좋겠지만 전망할 수 없는 암울한 현실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하늘과 산을 바라볼 때 마다, 주님과의 관계가 날로 깊어지기를 바라며 읊는 제가 아끼는 대표적 자작시 “하늘과 산”입니다. 늘 인용해도 언제나 새롭습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인간 무지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나라입니까?” 현수막 글씨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나라대신 무엇을 다 넣어도 통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것이 가정입니까? 이것이 교회입니까? 이것이 사회입니까? 이것이 학교입니까? 이것이 수도원입니까? 이것이 사람입니까? 정의롭지 못한, 공정하지 못한, 평화롭지 못한 현실을, 공동체를, 개인을 암시한, 참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마디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괴물같은 사람도 곳곳에 넘칩니다. 주님을 떠나면 바로 그 자리가 지옥이요 괴물의 출현입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시작전 자신의 사명을 만천하에 선언한 장엄한 출사표같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이 말씀의 실현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시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을 만날 때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해방이요 희년의 실현이자 자유인으로서 참삶의 실현입니다. 비단 예수님뿐 아니라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또 하나의 예수님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마음 깊이에서는 예외없이 길을 찾는, 빛을 찾는, 희망을 찾는, 진리를 찾는, 중심을 찾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길을 잃은, 빛을 잃은, 희망을 잃은, 진리를 잃은, 중심을 잃은 병든 사람, 병든 사회, 병든 세상, 병든 지구입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지구든 곳곳에서 병든 징후가 드러납니다. 어제 소개된 신문에서 읽은 에세이집, “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란 말마디가 충격이었습니다.
“돈과 물질을 숭배하는 풍조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서울 강남은 명실상부 ‘욕망1번지’다. 거리에는 집 한 채 값에 달하는 외제차가 즐비하고, 자정이 넘어서도 클럽과 유흥주점의 네온사인이 불을 밝힌다. 대치동 학원가에는 ‘내 새끼는 명문대에 가야 한다’는 부모들의 맹목적인 신념으로 지친 아이들이 ‘학원 순례길을 걷는다.”
얼마나 깊이 병든 사회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대로 지옥도의 풍경 묘사같습니다. 이래서 거대한 정신병동이라 하는 겁니다. 아니 강남만 그렇습니까? 정도의 차이일뿐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며칠전 몽골 사목 방문후 기내 회견중 교황은 교회내 세상내 이념들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영어 말마디 이데올르기가 이념입니다. 이념전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우리의 현실에 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88세 노령의 교황의 총명함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그들의 이념들을 주입하고 싶어하는 것이 제국주의다. 문화가 증류될 때 이념들이 될 때, 그것은 독이다. 문화는 소비되고 이념으로 증류된다. 우리는 어떤 철학자들이나 정치가들에서 나타나는 이념들로부터 사람들의 문화를 구별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나 교회에게나 말한다. 교회내에도 종종 뿌리로부터, 위로부터 분리시키는 이념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를 성령의 영향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념은 육화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이념일뿐이다. 이념이 자배하고 정책이 될 때, 그것은 독재가 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대화에, 문화들로 나가는데 무능력하게 된다. 제국주의가 이것을 한다. 제국주의는 언제나 이념으로부터 출발하여 굳혀버린다.
우리 역시 교회내에서 이념으로부터 교의를 구별해야 한다. 참된 교의는 결코, 결코 이념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들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대신 이념은 실재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이탈시킨다. 답이 됐는지 모르겠다.”
이념의 우상에 미치면 광신狂信에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답이 없습니다. 이념의 악령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념을 믿는게 아니라 복음의 예수님을 믿습니다. 온갖 악령들이 발호하는 시절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예수님 하나 뿐입니다.
길이요 희망이요 빛이요 중심이요 진리이신 주님을 잃었기에 병든 개인, 병든 세상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참삶의 실현이요 전존재의 힐링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어제의 마귀 축출에 이어 주님은 오늘은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시고, 병을 앓는 많은 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장면이 있습니다. 치유받은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합니다. 치유와 동시에 주님 중심의 공동체에서 섬김의 활동이 뒤따라야 함을 배웁니다. 참으로 영육의 온전한 치유와 건강에 섬김과 나눔의 사랑이 제일임을 깨닫습니다.
마귀들 역시 주님을 고백하며 달아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영혼치유와 건강에, 정신치유와 건강에 주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장면이 우리에게는 참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날이 새자 외딴곳으로 가셔서 아버지와의 깊은 내적 친교 시간을 갖는 주님이십니다. 이어 주님은 집착하는 제자들을 단호히 내치시며 복음 선포에 전념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런 복음 선포와 더불어 영육의 전인적 치유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바오로가 감사기도를 드리는 제1독서의 콜로새 교회 신자들입니다. 참으로 영육의 건강에 신망애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배웁니다. 콜로새 신자들의 우리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에 감사하는 바오로입니다. 이어 바오로는 이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진리의 말씀 복음을 통하여 들은 희망에 근거함을 밝힙니다. 그러니 하느님 희망에 뿌리내린 믿음과 사랑의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 복음이 우리 안에 열매를 맺으며 끊임없이 성장할 때 참 자유롭고 건강한 복음적 삶의 실현입니다. 복음의 성장! 얼마나 멋진 말마디인지요. 길이자 희망이자 진리이자 빛이자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부단한 만남과 더불어 치유되는 영혼들에 복음의 성장이요 충만한 신망애 삶의 실현입니다. 그대로 날마다 외딴곳에서 거행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길을, 희망을, 빛을, 진리를, 중심을 잃은 병든 사회에 유일한 치유의 힐링은 예수님뿐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뿐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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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금 내 곁의 그대>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루카 4,40)
지금
내 곁의 그대
있어도 좋고
없으면 그만인
사람이 아니랍니다
주님께서
지금 내 곁에
그대를 두셨으니까요
지금
내 곁의 그대
다른 누가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주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지으신
그대는 오직 하나이니까요
지금
내 곁의 그대
바로 지금 오직 내가
뜨겁게 사랑해야 할
사람이랍니다
지금 아니면 다른 때
내가 아니면 누군가
사랑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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