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희/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 졸업. 前 [씨네21] 기자.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한국 영화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강의도 하고 있다. [씨네 21] 제 5회 영화 평론상을 수상했다.
그 정체성이라는 것을 새롭게 형성하기 위해서 낯선 경험들에 도전해보자는 의욕에 사로잡혀 맹렬히 내닫는가 하면, 새로운 족적이 평론가의 정체성을 위반하고 해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평론가의 글이 사담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면 내적인 에너지가 균형을 잃었다는 징후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난에 무엇을 쓸 것인지 생각하는 동안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 이외에 다른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개인적 징후일 뿐만 아니라 영화평론가 집단의 정체성과 관련된 질문인지도 모른다는 말로 당혹스러움에 대한 변명을 대신하고 싶다.
상념들은 이렇다. 나는 최근 영화에 20자 평과 별점을 매기는 대열에 합류했다. 평론가의 별점과 관객의 선택 사이에 일정한 갭이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영화를 평가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생각보다 큰 고심거리였다. 나의 취향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인문적 교양이나 정치적 입장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인가, 혹은 미학적 숙련도와 독창성인가. 대중의 애호도는 무시되어야 하는가? 어떤 기준을 택하느냐에 따라 별의 개수는 다섯 개 만점에 두 개쯤은 너끈히 달라진다.
만약 내가 특정한 기준에 따라 일관되게 별점을 매긴다면, 관객들은 나의 판단에 설득되기보다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준을 바탕으로 나의 생각을 비교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반복하는 것이 지루하다면, 관객들이 얼마만큼 극장가로 움직일 것인지 추측하고 별을 매기는 흥행점술사가 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해 치밀한 답변을 준비해두지 못했던 나는 매번 헷갈리고 있다. 어느 날은 유독 정치적 분별이 앞서고 어떤 날은 그런 것에 삐딱하게 어깃장을 놓는가 하면 때로는 감상주의가 득세한다. 도대체 별점 매기기를 통해서 나는 무엇을 말하면 좋을까.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은 누구와 함께 어떤 삶의 목표를 추구하도록 되어 있는 것인가?
나의 혼란은 작품과 비평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도 연계된다. 현대의 모든 비평 활동은 작품의 최종 의미가 비평적인 기능 안에서 완성된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술의 역사는 사실상 비평의 역사를 기록한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반면 모든 비평은 작품 안에 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은 작품이 포함하는 다양한 의미망과 목소리 가운데 특정한 감각과 지성을 강조함으로써 작가와 작품, 대중 사이에 특수한 소통의 고리를 만들어내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영화사가인 고 이영일 선생이 말년의 강의를 통해, 유력한 비평이론들을 바탕으로 일관되게 작품을 평하는 것은 “틀리다”고 단언하면서 어떠한 예술품도 일관된 징후를 통해 구성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된다.
진정한 비평이란 작품의 내부에 있는 것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할까. 양식 있는 시민으로서 정치적 분별을 유지하는 것과, 특정 개념에 대한 완고한 집착을 비평이라고 바꿔치는 일은 어디쯤에서 서로 갈라지는 것일까.
이런 문제 외에도 좀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볼 때, 한국영화계에서 평론의 위상은 지극히 모호하며 심지어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 영화잡지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미디어에서도 영화 담당자들이 일종의 전문기자로 활동하게 되면서, 평론가와 저널리스트의 구별이 줄어들고 영화평론의 영역도 좁아졌다. 또한 고급 관객층이 확대됨에 따라 최근에 활동을 시작한 평론가들로서는 바로 앞세대 평론가들이 지녔던 권위와 아우라를 회복하는 일이 지난한 숙제가 될 것 같다.
제작 현장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평론가 집단이야말로 영화라는 시스템과 생산물에 대해 무지하며 특히 최근에 벌어지는 한국 영화산업의 변화를 따라잡거나 이해하지 못한 채 가장 뒤쳐져 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제작 현장을 어깨너머로 들여다보면서 절감하게 된 또다른 사실은, 평론가란 자신의 의지가 무엇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영화산업 종사자들이 기획하는 마케팅 체계에 흡수되어 주류 산업을 위해 복무하는 구실을 하는 고리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내 경우에는 나를 둘러싼 여러 가지 관계들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적도 없지 않았다. 또한 근년에 인터넷을 무대로 생산자들이 직접 관객을 찾아나서는 온라인 마케팅이 확산되면서 전문 필자들의 값어치도 반감되는 형편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내 이름 끝에 달려있는 ‘영화평론가’라는 꼬리표는 무엇을 지시하며 요구하는가. 여러 가지 질문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평론가라는 정체성을 사랑하는 것 같다.
그 정체성이라는 것을 새롭게 형성하기 위해서 낯선 경험들에 도전해보자는 의욕에 사로잡혀 맹렬히 내닫는가 하면, 새로운 족적이 평론가의 정체성을 위반하고 해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영락없는 조울증 증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