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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감사] 1946년, 대구 10·1 폭동 사건’
1946년, 대구 10·1 폭동 사건
(1) 대구 10·1폭동 사건의 전개
10·1폭동이 있기 전부터 우리나라 식량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당시에는 미군정이 쌀을 모아 균등하게 배급하는 ‘쌀 배급제’가 실시되었는데,
쌀값의 폭등으로 인해 백성들의 반미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남로당은 수많은 민중들을 선동하여 반미 시위를 일으키며 박헌영의 위조지폐 사건을 덮으려 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역에 수천명의 노동자가 모여 반미 시위를 벌였다.
경찰 150여 명이 경계만 서고 있는 상태에서
대구역 조선노동조합 대구지역평의회 사무실 2층에서 갑자기 “경찰 저놈들 죽여라”는 고함과 함께 경찰에게 돌을 사정없이 던졌다.
깜짝 놀란 경찰은 2층의 노동자들을 향하여 사격했고,
당시 연탄 공장에서 근무하던 황말용이 경찰의 사격으로 죽었다.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대구 전역으로 퍼졌고,
이 일로 좌파 간부들은 10월 2일 노동자들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10월 2일 오전 9시, 대구의과 대학생 네 명의 학생들이 병원에서 콜레라로 죽은 시체 4구에 시트를 덮고,
‘어제 대구역에서 경찰에 의해 죽은 시체’라는 거짓말로 학생들을 선동했고, 오전 10시 반경 대구경찰서에 도착했다.
공산당 도당 책임자 장적우가 경찰이 먼저 무장해제 하면 군중을 해산시키겠다고 대구 경찰서장 이성옥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 말을 믿은 이성옥 서장은 경찰들에게 무장해제를 명했으나, 시위대들은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여 대구 경찰서를 장악했다.
(2) 경북·경남·전남 지역 등 전국으로 폭동 확산
조선공산당 시위대들은 50~100여 명씩 조를 짜서 탈취한 자동차로 경북 22개 군청과 경찰서로 출발하여 점령했다.
대구 시내는 폭도로 변한 군중이 경찰의 몸을 칼과 도끼로 난자하며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
대구에서의 10·1폭동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은 각 지방당부에 ‘호응 투쟁’을 전개하라는 지령을 내려,
폭동은 남한 전역의 73개 시군에 파급되어 갖은 난동과 만행이 저질러졌다.
(3) 대구 10·1 폭동 사건의 결과
대구 10·1폭동 사건으로 경찰 38명, 공무원 163명, 민간인 73명이 사망하였고, 부상 1천명, 776동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대구 10·1폭동은 겨우 진압되었지만, 시위 주동자들은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우리나라 빨치산의 시작인 ‘야산대’를 만들었다.
1946년 8월 28일 이북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조선노동당(약칭: 북로당)의 창립대회가 열렸다.
남한에서도 1946년 11월 23일 박헌영을 중심으로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이 출범했다.
남과 북에 두 개의 공산당이 창당된 것이다.
김일성은 1948년 2월 6일 ‘북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헌법을 채택하고 지폐를 발행하며,
사실상 북한쪽에서 단독 정부를 먼저 수립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 바로 알기 ③ 제주 4.3 폭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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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동, 성남FC, 백현동, 정자동, 법인카드, 변호사비 대납, 대북송금, 위증교사, 돈봉투, 불법코인, 태양광 사건도 주범을 꼭 잡아야 합니다.
[국민감사] 1946년, 대구 10·1 폭동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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