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레인지로버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지.” 이보크에 대한 흔한 반응이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막내 모델이 겪는 숙명이랄까. 랜드로버 레인지로버를 가장 저렴하게(?) 경험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상위 모델과 비교는 피할 수 없다. 6개월 전, 이보크 D180 모델을 시승했다. 실내외 디자인과 편의장비에 레인지로버 특유의 프리미엄 감성을 아낌없이 담았기 때문에 주행감각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쉬웠다. 디젤 특유의 거친 감각이 능숙하게 걸러지지 않았다. 가솔린 모델이라면 확실히 다를까?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이보크 P250 SE를 타고 봄비 내리는 도로를 가로질렀다. 경부고속도로에서 1시간 30분을 보낼 생각에 출발부터 피곤했다. 실제로 막히는 도로 위에서 50분 동안 교통체증을 겪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골목길에 도착했다. 어느 정도 지쳤을 법도 한데, 오히려 피로가 풀린 기분이었다. 조용하고 편안한 방 안에서 호젓한 시간을 보낸 듯한 감각이었다. 비결은 여유로운 힘과 매끄러운 승차감.
이보크 P250에는 2.0L 인제니움 터보 엔진이 실렸다. 최고출력 249마력, 최대토크 37.2kg·m로 일상에서 여유로운 힘을 즐길 수 있다. 가속감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이 전혀 없다. 승차감은 노면을 부드럽고 가볍게 스치는 봄바람 같다. 노면을 묵직하게 누르며 지나는 큰형 레인지로버와는 사뭇 다르다. 레인지로버 승차감이 목화솜 이불이라면, 이보크는 보드라운 솜을 촘촘히 품은 차렵이불이다. 앞 맥퍼슨 스트럿, 뒤에는 멀티링크 서스펜션을 적용했다.
노면 소음은 조금 올라오는 편이지만, 풍절음이나 엔진소음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인테리어 디자인은 다른 레인지로버 모델과 마찬가지로 간결하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변속기 조작부. 다이얼 방식에서 레버로 바뀌었다. 재규어·랜드로버는 스포티한 조작을 위해 레버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 일상 영역에서도 레버로 조작하는 편이 더 직관적이다. 변속기 밑으로는 컵홀더 두 개를 마련했다.
운전자 팔꿈치 쪽에 위치해 컵을 꺼내고 넣기가 불편하다. 센터페시아에는 두 개의 10인치 모니터가 자리한다. 모니터 디자인이 예술이다. 옹골진 모습의 상단 모니터는 클러치 백을 연상시킨다. 크기로만 승부하는 요즘 자동차의 그것과는 다른 감각이다. 대부분의 기능을 터치스크린에 담았다. 재규어·랜드로버 모델에서 계속 본 터라 새롭진 않다. 다만 타 브랜드의 터치스크린과 비교해 이보크의 터치스크린 조작감이 어떤지 궁금했다.
스크린을 채우는 그래픽 디자인은 심플하고 깔끔하다. 복잡하지 않아 사용하기 편하다. 터치 반응도 꽤 빠른 편이다. 기능 위치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의외로 기능을 찾고 설정하기 쉬웠다. 그러나 풍량조절은 쉽지 않다. 바람개비 아이콘을 누른 뒤, 오른쪽 다이얼을 돌려서 바람세기를 설정해야 한다. 빈번하게 사용하는 기능인만큼 두 번 일하지 않고 간단히 조작하면 좋았을 텐데. 스티어링휠 림은 가늘다. 스티어링휠 리모트컨트롤 버튼은 정전식 터치스크린인데, 사용 중인 기능에 따라 버튼의 그래픽이 변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를테면 하얀색 수화기 그래픽은 전화 중엔 초록색, 빨간색 수화기 둘로 나뉜다. 이렇듯 리모트컨트롤 버튼은 센터페시아 하단의 두 개 다이얼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조작부 역할을 착실히 해내면서도, 터치스크린의 장점까지 아우른다.
운전 중에 자꾸만 손이 가는 곳이 있다. 와이퍼 조작 레버 끝단이다. 움푹 들어가 있는데 만듦새가 매끄러워서 자꾸만 만지작거리게 된다. 방향지시등과 비상등이 깜빡이는 소리는 생명체가 내는 소리 같다. 듣기 좋아서 계속 듣고만 싶었다. 고정식 파노라믹 글래스 루프는 속 시원할 정도로 드넓었다. 겉모습만 보면 레인지로버 벨라의 미니 버전이다. 앞모습은 하나의 면처럼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옆모습은 벨라보다 뒤쪽 오버행이 짧아서 균형감이 더 좋다. 보닛으로 이어지는 헤드램프 라인이 휠아치와 함께 둥근 라인을 그리며 앞바퀴 주변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이보크만의 매력 포인트다. A필러부터 D필러까지 검은색으로 칠한 플로팅 루프 디자인은 언제 봐도 멋지다. 테일램프를 채우는 그래픽은 정교하고 입체적이다.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부암동 골목길은 대부분 일방통행이었다. 경사도 가파르다. 목적지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는 길에 반대편으로 향하는 차를 만나기 일쑤였다.
후진할 땐 클리어 사이트 룸미러 기능이 도왔다. 외부 카메라 영상을 룸미러에 띄우는 시스템이다. 거울로 볼 때보다 더 넓은 시야를 보여준다. 골목길에서 차를 돌려야 하는 상황도 많았다. 차체가 길지 않아 골목길에서도 거뜬하게 돌아나갔다. 보기보다 작은 차체가 주는 편리함을 자주 경험할 수 있었다. 다른 어떤 차도 아닌, 이보크여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