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강원도 - 세조의 자취가 남은 김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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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7. 01:15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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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자취가 남은 김화군
김화군(金化君)은 강원도 남부에 있는 군으로 동부는 창도군, 서부는 평강군, 북부는 회양군과 세포군, 남부는 철원군과 접한다. 고구려 때는 부여군(夫如郡), 신라 때는 부평군(富平郡)이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에 김화로 개칭하면서 동주(東州)에 속하게 되었다. 태종 13년(1413)에 김화현이 되어 오래 계속되다가 조선 말기에 군이 되고 1914년에 김성군과 통합됐으며 1952년 개편 때 창도군으로 흡수됐다가 1954년 다시 갈라져 나와 오늘의 김화군이 되었다. 1945년까지 김화군의 행정구역은 1개 읍, 11개 면이었다. 이곳은 38선 이북의 북한 지역이었으나 1953년 휴전 이후 근남면 김화읍 서면 등이 남한 땅에 들었고, 현재는 9개 면과 90리가 북한에 속한다.
백역산ㆍ백운산ㆍ정암산ㆍ남미봉ㆍ오성산ㆍ대성산 등이 솟아 있고, 군의 남동부 지역을 북한강과 그 지류인 금성천이 흐르며 중앙부에는 남대천, 서남부 지역에는 한탄강이 임진강으로 흘러들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형승」조에 실린 강희백의 시에 “산협은 큰 강을 얽어서 험하며 막힌 곳을 만들었고, 백성은 메마른 땅에 의존하여 가난함을 참는다”라고 하였고, 성석린은 “산천이 담담하게 막혀서 평탄한 땅이 없구나. 뽕나무ㆍ산뽕나무 쓸쓸한 사이에 몇 집이 있는가. 태수는 스스로 수령 된 기쁨을 말하기를, 아전과 백성은 비록 적으나 오는 손은 많다네”라고 노래하였다. 우승범은 “작은 뜰에 잎이 떨어지니 사람의 발자취 없고, 한밤중에 달 밝으니 학의 소리 듣노라”라고 하였다.
이곳 김화에 조선의 제7대 임금인 세조의 자취가 여러 곳 남아 있다. 그중의 하나가 관아의 동쪽 7리에 있던 주필봉(駐驆峯)이다. 세조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가던 길에 이 봉우리에 올라 들판에서 사냥을 했다고 한다. 그 뒤부터 ‘임금의 행차가 머물렀다’는 뜻으로 ‘주필’이라고 했는데, 이곳의 지명은 삼이현(三伊峴)이다. 관아의 남쪽 5리에 있던 어수정(御水井)은 세조가 이 고을에 머무르며 사냥할 때 물의 성질이 무거운지 가벼운지를 시험해본 곳이다. 이곳 물의 성질이 가장 무거워 가져다가 수라를 만드는 데 사용했으며, 그런 연유로 그 우물의 이름을 ‘임금에게 올리는 물’이라는 뜻으로 ‘어수정’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진흙과 모래에 덮여버렸다.
하늘만 바라보며 사는 땅이지만 상례와 장례에 삼가고 조심한다. 사리에 어두워 교화를 따르지 않으니 어리석음을 면하지 못한다. 성품이 꽤 꾸밈없고 순박하며, 생업은 농사와 장사에 부지런하다. 지난 옛날을 살펴보면 무예를 모두 숭상하여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많았다.
『여지도서』「풍속」조에서 위와 같이 평한 김화군에서 함경도로 가는 길목에 여파령(餘破嶺)이 있었다. 산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나 골짜기가 좁고 길이 험해 소나 말이 나란히 통행할 수 없으므로 요충지 중의 한 곳이었다. 또한 이곳 김화군 근남면 마현리에서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가 말고개라고도 부르는 마현령(馬峴嶺)이다. 적근산(1073미터)과 대성산(1175미터) 사이에 있는 이 고개도 높은 편은 아니지만 절벽을 따라 난 길 하나가 수없이 꺾이고 돌아 나가므로 화천과 춘천으로 가는 요충지였다. 적근산은 철원, 김화, 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를 낸 곳으로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 중의 한 곳이었다.
온정리 © 유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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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자취가 남은 김화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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