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64
4월18일[부활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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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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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QcXutIS9q8
(김규동 요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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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랫쪽 삶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삶!>
어떤 분들 보며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길 없습니다. 외양은 특 A급입니다. 연세가 지긋하신데도, 건강 관리를 잘 하셔서 그런지 활기와 젊음이 느껴집니다. 얼굴 빛깔도 좋고 뱃살도 없습니다. 나이든 사람도 저렇게 중후하고 기품있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고 말을 시작하는데...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외양에 비해 그의 언어나 사고방식은 천박 그 자체입니다. 대화의 주된 주제는 지극히 아랫쪽 주제였습니다. 그저 잘 먹고 잘 노는 것, 부동산 가격, 주식 투자, 맛집, 골프장, 건강 관리...
그에 비해 하느님이나 신앙은 철저히 뒷전이었습니다. 돈 좀 가진 사람으로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이나 시대의 아픔에 대한 고민은 단 1도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철저하게도 아랫쪽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이요 그분의 손길로 빚어진 창조물인 인간으로서, 저 위에 것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동물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니 하느님께서 크게 슬퍼하실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세례를 통해 위로부터 다시 한번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서든 동물적 삶에서 탈피하여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적인 삶, 다시 말해서 참 삶, 거룩한 삶, 복음적인 삶을 추구해야겠습니다.
그 삶은 생각없이 사는 삶이 아니라 깊이 성찰하고 숙고하는 삶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성찰,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성찰, 시대의 아픔과 고통에 대한 성찰을 멈추지 않는 삶이야말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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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Ty2bBwYCrZ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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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를 이해함이 왜 심판의 기준이 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새로 남’에 대해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바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비유입니다.
뱀은 무엇입니까?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여 죄에 빠뜨린 장본인입니다. 그 뱀을 예수님 자신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뱀에게 물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 구리뱀을 보면 치유되었습니다. 이는 누구나 다 자기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분과 함께 묻히고 새로운 뱀인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는다면 구원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혀서 그리스도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 같이 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가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면서 한탄하시듯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세상일이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곧 하늘 일의 비유를 말합니다. 비유는 쉽게 이해하라고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서 자신들, 곧 선택된 이들만을 구원하시려고 한다는 사이비들의 말은 하느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영혼도 잃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니 쉬워지라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쉬운 비유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천상 구원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 한 연세 지긋하신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학벌도 좋으시고 세상에서도 승승장구하시던 분이십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너무나 집에 악재가 겹쳐서 커다란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이 때문에 한 친구가 종교를 가져보라고 권유하였고 이분은 목사님 친구분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가톨릭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올 1월부터 통신교리로 세례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이분의 친구분 중의 한 분이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저에게 상담해보라고 추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매우 영광스러웠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그 친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찾아오신 분의 질문은 왜, 혹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그 문제는 이미 친구분을 통해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친구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네 어머니가 너의 친어머니인 것이 확실하냐? DNA 검사를 해서 믿느냐? 안 믿으면 안 되니까,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을 보고 믿지 않느냐? 하느님도 어머니처럼 가진 것을 다 내어주시며 당신이 부모라고 하신다. 어머니를 믿지 않는 것이 지옥이듯, 하느님을 믿는 것도 선택이다. 어린이가 부모를 믿는 게 당연하듯, 우리가 하느님이 계심을 믿고 사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
뭐 누가 봐도 그 친구분은 저의 글이나 동영상을 보신 분이십니다. 제가 어머니를 믿어가던 과정을 분명 들으신 것입니다. 친구분의 이 말씀으로 저를 찾아오신 분도 하느님을 창조주로 이미 믿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비유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실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전엔 왜 믿지 못하셨을까요? 아직 자기 생각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이 지상의 비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이해하기 쉽게 하시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며 비유를 이해하지 못함이 곧 심판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
이 지상의 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겸손해져야 합니다. 아무리 쉬운 비유를 말하더라도 마음이 교만하여 자기 생각에 쌓여있으면 그 비유를 통해 말하려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므로 쉬운 비유조차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구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역사로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로마 비블리꿈 조교수가 성경은 있는 그대로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해석해야지 그렇게 상징적인 눈으로 보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집트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마구 죽이셨는데 그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시고 이집트 백성은 미워하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도 사제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러면 자기주장이 꺾이는 것이기 때문에 비유를 인정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의도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라고 하시며 어떻게 우리가 하늘에 오를 수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어떤 누구도 하늘에서 새로 나지 않으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의 시를 쓰신 심순덕 시인처럼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보니 어머니의 마음을 알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심순덕 시인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그렇게 고생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여겼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자신도 결혼해서 어머니가 되어보니 그런 일은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순덕 시인은 어머니의 피 흘림을 통해 또 누군가를 위해 피 흘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 피를 흘립니다. 장대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여 묻힘은 곧 부활로, 자녀들의 공경으로 들어 높여집니다. 하늘에서 와서 자신을 새 생명을 주기 위해 못 박아 죽이지 않으면 다시 들어 높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신비는 우리 일상에 숨어있습니다. 하지만 땅의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나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으니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받아들이려고 하는 ‘겸손함’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결국 그분은 나의 교만, 곧 뱀을 죽이러 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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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봄을 맞이해서 대청소를 하였습니다. 주방 일을 도와주시던 자매님이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쉬는 동안에 몇몇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청소하였습니다. 창고에는 버려야 할 물건들이 많았습니다. 유효기간이 지난 것들입니다. 정리하니 창고가 깨끗하고 넓어졌습니다. 늘 사용하는 분은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하지만 청소하는 분들의 눈에는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이 보였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은 워낙 검소하셔서 쉽게 버리지 못하셨습니다. 주방의 자매님도 검소한 성격이라서 이것저것 많이 모아 놓으셨습니다. 이번 청소를 계기로 모두 정리를 했더니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했습니다. 청소하면서 가구의 위치를 바꾸었습니다. 책상은 밝은 곳으로 옮기고, 침대는 창가 옆으로 옮겼습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가구를 옮기는 것만으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습니다. 사실 저는 관심이 없기도 하고, 가구 배치에 대한 식견도 없어서 그냥 지냈습니다. 이번 대청소를 통해서 신문사에도 봄이 왔습니다. 시간을 내서 청소를 하시면 방에도, 사무실에도 봄이 찾아 올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복음에서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니코데모는 관습과 율법의 ‘틀’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스승으로 존경도 받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니코데모에게 삶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계명들은 창고에 쌓인 오래된 물건처럼, 유효기간이 지난 물건처럼 니코데모가 영적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계명을 지키면서 재물을 모으고, 자녀들을 잘 키우면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애벌레가 땅을 기어 다니지만 누에고치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는 니코데모에게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율법과 계명의 틀을 초월하는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감정의 굴레에 갇히는 것이 아닌, 생각의 틀에 갇히는 것이 아닌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소중한 것은 재물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공동체는 바로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과 공동체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함께 나누었고, 함께 소유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삶은 세상의 빛이 되었고 어둠 속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 빛으로 모여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창고와 방을 청소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세상의 것들로 가득 채워진 내 마음의 창고를 정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새로워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채우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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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7-15: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절)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태어남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당신과 함께 머무를 자녀들을 낳으신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말씀과 성사로 태어났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보고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성령을 보지 못한다. 어떻게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편 노래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고 복음 선포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성령의 소리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8절)고 하신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9절)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듯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이’라는 말은 그분의 기원이 성령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분은 말씀으로서는 하늘에 계시며 육으로는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 육의 기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성령께 있다. 그래서 육이 되신 말씀은 비록 육이시지만 결코 말씀이 아닌 적이 없으시다. 그분이 내려오신 것은 우리가 올라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땅에 속한 인간이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될 때, 영적 탄생이 이루어진다. 즉 그리스도께 결합할 때, 그분과 함께 올라간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14절) 뱀은 세상의 모든 인간을 집어삼키던 죄를 의미한다. 그 뱀을 들어 올린 표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분을 통하여 그 뱀에게 죽음이 선고되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저주를 받게 된 자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5절) 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영원한 생명의 원인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신 분이 죽음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믿는 이들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어찌 멸망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께서 더 확실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신앙인들은 그분이 입으신 영광을 향하는 삶을 갖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닮는 것, 즉 우리도 우리가 지고 가는 나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영광을 입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바로 나 자신의 인간완성을 이루어주며, 하느님께 또한 영광을 드리며, 구원에 이르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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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1-15)
1)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최고의회가 사도들을 위협한 일이 있습니다.(사도 4,18).
그때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20)
예수님에 관한 사도들의 증언은, 그들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증언입니다. 지어낸 것도 아니고, 상상한 것도 아니고,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이론도 아닙니다. 요한 사도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1요한 1,1-2ㄴ)
<신앙인은 자신의 믿음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나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라고 증언하는 것은, 그 일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는 ‘사랑’이기 때문이고, 그 ‘나눔’이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1요한 1,4)>
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여기서 ‘세상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 가운데에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 그래서 인간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일을 뜻합니다.
‘하늘 일’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 또는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을 뜻합니다. 이 말씀을,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을 이해하려면 우선 먼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들부터 믿어라.”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구원 의지’를 깨달았고 믿었습니다.
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이 말씀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바로 그분,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여기서 ‘하늘로 올라가다.’ 라는 말은, ‘승천’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서 “하늘 일을 계시하다.”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하느님과 ‘하늘 일’을 알려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만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구원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만일에 여기서 ‘하늘로 올라가다.’를 ‘승천’으로 해석한다면,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라는 말씀은, 엘리야 예언자가 승천했다는 열왕기 하권 2장의 기록과 모순되고, 성모님께서 승천하셨다고 믿는 우리 교회의 믿음과도 모순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승천’으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뒤의 12장을 보면,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2,32)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하늘 일’을 알려 주신다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신앙인은 십자가를 “삶 안으로 받아들여서 사는” 사람입니다. <바라보기만 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살아야 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그러나 금방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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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니코데모를 위하여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 3장 13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일’을 권위 있게 증언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사람의 아들로서 유일하게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의 서문이 앞서 증언하였듯이, 외아들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1,18 참조). 여기에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증언을 듣고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유일한 계시자로 확증하였다면, 3장 14절에서는 어떻게 그 계시가 일어날 것인지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려 주시고자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짐을 뱀이 들어 올려짐과 비교하십니다. 여기서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표현은 물리적 의미와 함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암시하는 신학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이는 높이 들린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 시기를 보내는 우리는 니코데모처럼 예수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아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알려 주시면서 당신만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십니다. 잠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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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믿음으로 하나가 된 초대교회 공동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교회는 각자가 자신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공동체가 필요로 할 때에 내어놓고 공동으로 사용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능력인 동시에 하느님 은총의 결과였다. 교회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여 거룩한 친교를 나누게 되면 자연히 신자들도 서로 사랑의 친교를 나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며, 유다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아’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산헤드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파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렸다. 그리하여 신도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신분과 지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사도들은 신도들이 내어놓은 재물을 구성원의 필요에 따라 분배해주었다. 그 결과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빈곤한 자가 결코 없을 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약속(신명기 15장 4절)이 초대교회 내에서 실현되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인 요셉은 사도들로부터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 공동체에 아낌없이 내어 놓음으로써 뛰어난 믿음의 행위를 보였고,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사도행전 11장 24절), 믿음을 갖게 된 첫 레위 사람으로서 복음에 대해 유대인이 가진 편견을 허물어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모두 바쳤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초대교회 신도들에게 커다란 기쁨과 평화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였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함으로써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요한 복음 17장 11절)라는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서로 일치된 이들에게는 더 이상 자신만의 것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에 형제의 아픔과 굶주림은 나의 아픔과 굶주림이며, 형제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소유도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이 가진 재산은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팔아야 할 필요를 느끼기 전까지만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믿음이 자라났다.
자신의 소유는 모두 하느님의 것이며, 따라서 이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믿음이 초대교회 신도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공동체가 재물을 필요로 할 때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아까운 줄 몰랐다.
이처럼 신앙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형제들과의 친교와 나눔을 가져온다. 그럼으로써 신앙은 모두 하나 되게 한다. 그러나 불신은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아 적이 되게 하고 사람과 하느님과의 사이도 갈라놓는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느님을 불신했기 때문에 하느님과도 멀어졌고, 그들 사이도 서로 갈라졌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기 2장 23절)라고 외쳤던 아담이 하와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게 되었다고 자신의 잘못과 죄를 하와에게 전가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 안에서는 부부도, 부자나 모녀 사이도 서로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사회에는 분열과 불화만이 있을 따름이다.
신앙은 그 자체가 축복이며 은총이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복음 20장 29절)라고 말씀하셨다. 신앙 안에서 신앙으로 살 때,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 되고, 이웃과 하나가 된다.
이러한 속에서만 우리는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주님과 하나 되고, 이웃과 하나가 됨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의 삶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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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우리에게 소중한 재물이 좋기는 하면서도 그것은 우리 주위를 맴돌며 온갖 욕심을 갖게 해줍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려라!’ 또는 ‘마음을 비웠다.’라는 말이 있는가 봅니다. 그러기는 쉽지 않아도 모든 분쟁과 분노, 증오 등이 바로 이 욕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지요.
초대 교회에서는 이변이 생겼습니다. 특히 구약의 사고에는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 척도인데 그것을 비우고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것은 사실 새로움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부활에 참여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 사람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그들이 이 세상의 재물과 이기적인 욕심에서 자유롭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의 생활을 함께 하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사도행전 4장 32절-33절)
역사적으로 이러한 삶을 비교적 현실로 지속한 것은 하느님께 봉헌된 수도 공동체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 사도들은 활력을 얻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교우들 중에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저마다 그것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놓고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아쓰며 복음정신대로 살아 있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세속에 뿌리를 둔 사이비 종교가 빠지기 쉬운 오류는 조직적이며 강제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가정과 개인의 삶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입니다.
종교가 가정을 보호하고 한 삶의 행복을 지켜주어야 하는 본분을 망각하는 것이지요. 그 만큼 재물은 좋으면서도 그것이 욕심이라는 테두리에 갇히게 되면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병들고 맙니다.
마태오나 마르코 그리고 루카 복음보다 조금 후대에 집필된 요한복음이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당시는 이미 교회의 신학이 깊어졌고 또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상황에서 표현도 거기에 맞게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는 다른 유대인들의 눈이 있어서 밤에 스승이신 주님을 찾아뵙고 대화를 나눕니다.1)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표징들을 보며 그분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복음 3장 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이 첫 대화부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 복음 3장 4절)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깨닫지 못하는 그를 나무라면서도 하나하나 설명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복음 3장 10절-15절)
여기서 ‘너희’라고 하시는 것은 니코데모가 아니라 구약에 속한 유대인들 전체를 가리키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위로부터’라는 말이 있다면 또 ‘아래’라는 차원의 말이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일을 아래로 표현 하신다면 ‘하늘의 세계’는 ‘위에서’라고 표현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높이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십자가에 올리실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신비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 위로부터에서 오는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구약의 배경에 젖어 있던 니코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구약성경을 비추어서 니코데모에게 광야에서 모세에게 높이 올려 졌던 구리뱀과 당신 자신을 연결시켜 설명 하십니다. 뱀이라고 하면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정서가 짙은데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서슴없이 광야의 구리 뱀에 당신을 겹쳐 놓으십니다.2)
주님의 이 말씀의 배경은 구약, 민수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산을 떠나 갈대 바다로 가는 길에서 백성들의 불평과 하느님의 응징이 있었던 것입니다.
뱀에 물린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나듯이 죽음과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십자가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다. 치욕의 십자가형의 나무에 매달리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죄로 물들고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당신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복음 3장 14절-15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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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은 예수님과 니코데모(요한 복음 3장)과 사마리아 여인(요한 복음 4장)과의 대화를 소개한다. 여기에 나오는 두 인물은 서로 사는 지역도 다르고 신분도 차이가 있다.
니코데모는 유대인들 중에 명예로 따지면 내 놓으라고 할 수 있는 랍비이고 최고의회 위원인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도 대기도 싫은 거쳐 간 남편도 다섯이나 되고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정식이 아니니 그녀의 과거는 내세우기보다 감추고 싶은 것이 더 많고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인이다.
이 두 인물이 다르면서도 예수님께서 하나하나 설명하신다. 이들은 구원으로 초대받은 것이다. 이들은 구약의 세계에서 신약의 세계로 나오는 데에는 난제들이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단계를 올리며 차근차근 설명하시어 그들이 구원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신다. 그 배경에는 그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배어 있는 것이다.
2)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 땅을 돌아가려고 호르산을 떠나 갈대 바다로 가는 중에 하느님께서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불뱀들(한네하심 핫세라핌 han·nə·ḥā·šîm haś·śə·rā·p̄îm)’을 보내시어 사람들을 물어 죽게 하십니다.
백성들이 잘못을 뉘우치며 호소하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뱀(사랍 śā·rāp̄,)을 만들어 장대에 걸어놓게 하신다. 모세는 구리뱀(너학쉬 너혹쉩 nə·ḥaš nə·ḥō·šeṯ)을 만들어 장대에 걸어 놓는다.(민수 21,9) 뱀에 물린 사람은 장대에 걸어놓은 구리뱀을 보면 살아납니다.(민수 21,6-9)
유다 왕 히즈키야(기원전 745-717년)는 그의 종교 개혁을 하면서 700년 이상 성전에 ‘너후쉬탄 (nə·ḥuš·tān)’이라고 불리는 구리뱀(너학쉬 하너혹쉩 nə·ḥaš han·nə·ḥō·šeṯ)을 부순다.(2열왕 18,4)
종교개혁을 감행하던 히즈키야 왕은 산당들, 기념기둥, 아세라 목상을 없애면서 구리뱀 형상도 큰 결심을 하고 다 부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리뱀을 오랫동안 모셨지만 결단을 내려 없앴던 것이다.
3) 유대인이며 랍비인 니코데모가 잘 알고 있는 구약의 구리뱀 사건을 들어 예수님께서 뱀과 당신을 비교하며 단순한 방법으로 설명하신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카토스 모위세스 휘포센 톤 오핀 καθὼς Μωϋσῆς ὕψωσεν τὸν ὄφιν)’, ‘그렇게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후토스 휘포테나이 데이 톤 휘온 투 안트로푸 οὕτως ὑψωθῆναι δεῖ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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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동하는 믿음>
성당 주변의 철쭉, 연산홍, 꽃잔디, 민들레 꽃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소나무 솔잎 꽃도 너무도 이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핀 꽃이지만 얼마 안 가서 다음을 준비하며 시들해질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자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기의 색깔을 드러내는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느티나무의 연두색 나뭇잎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우리도 누구의 시선과 인정에 개의치 않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만한 영양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속이 튼튼하지 못하면 생기가 없습니다. 밑거름이 충분하면 필요할 때마다 알맞은 영양분을 흡수하면서 스스로 성장을 조절합니다.
그런데 밑거름이 부족하고 웃거름만 넘치면 일시적인 효과에 웃자라고 튼실하지 못합니다. 웃거름은 겉만 다스리고 속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속이 부실하여 쉽게 명을 다하게 됩니다. 웃거름은 뿌리를 깊게 내리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밑거름이 소중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는 꾸준합니다. 그러나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효과를 찾아 헤맵니다.
세상에 떠도는 유명한 곳을 찾아 돌아다니고 정작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단체활동 등 생색나는 일에는 열심히 하면서도 미사에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큰 믿음을 지니려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기도생활로 밑거름을 줘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가장 완벽한 기도는 미사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당신의 살과 피로 영양을 주십니다. 영성체는 최고의 영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들린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증거되는 것입니다.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미래에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이 깊은 만큼 그분을 알고 그분과 일치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 관계는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믿음의 삶이 중요합니다. 알프레드 디수자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안에서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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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중학생 때, 저는 아주 이기적이었습니다. 제가 제일 중요했고, 다른 사람은 저의 이익을 위해 또 필요로 인해 함께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공부에 있어서는 친구들이 모두 경쟁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시험을 보면 늘 등수가 매겨지니, 제가 최고 윗자리에 다른 친구는 모두 제 아랫자리에 있기를 바랐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옆 반 친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수험 시간에 사용해야 할 참고서를 깜빡 잊고 가져오지 않았다면서 1시간만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빌려줄 수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 다음 시간에는 필요한 참고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도 경쟁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 나도 안 가져왔는데?”라고 말하면서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다음 시간, 문제가 생겼습니다. 참고서를 가지고 왔지만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참고서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제 말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저의 이기적인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없는 척했습니다.
결국 참고서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선생님께 혼났습니다. 수업에 꼭 필요한 준비물도 챙겨오지 못한 사람은 공부할 자격도 없다면서, 교실 뒤에서 한 시간 동안 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가방에 참고서가 있음에도 저는 한 시간 동안 교실 뒤에서 그냥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은 결코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에게도 큰 상처를 줍니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남이 안 되길 바라는 마음처럼 어리석은 모습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데 생각보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겸손의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가장 커다란 겸손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일을 말하는 당신의 말을 듣고 믿으라고 하시지요. 이것이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보려면 육에서 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육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만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에 집착하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키우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태어나는 삶, 영적인 것에 중심을 두는 삶은 그런 세상의 것에서 벗어나 주님을 체험하면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부활의 체험 후에 신자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공동체도 이 모습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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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아>
요한 3,7ㄱ.8-15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아>
하늘에서 내려와
하늘로 오를
그대 사람아
땅을 보듬되
땅에 갇히지 말고
그대 사람아
땅에서도
하늘을 이루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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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우리 공동체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오늘 주님께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해서 바람이 불고 싶은 곳이 따로 있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다는 뜻으로 오늘 말씀을 알아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뜻으로 알아들어야 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뜻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 만일 저더러 자기 집에 안 오면 삐질 거라고 하거나 누구네 집이 부잣집이니 그 집은 꼭 들려야 한다고 하면 저는 그때 나는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갈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비슷한 뜻으로 말씀하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 그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운 분이시잖아요? 또 그러기에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존재에게 가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초월과 자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초월하지 않으면 자유롭지 않다.”
이런 뜻에서 저는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다음 바로 이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라고 덧붙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초월해야지만 위로 올라가고, 위로 올라가야지만 이 세상 것에서 자유로워지며,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야만 자유로우신 성령을 만난다는 얘깁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고 하나만 초월하지 못해도,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만 하나에라도 매여 있으면 그 하나가 나를 하늘로 오르지 못하게 하고 성령을 못 만나게 합니다. 풍선이 하늘로 오르고자 하나 가는 실 하나에 매여 못 오르듯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풍선은 실 하나로도 위로 오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실에 매여 있는 풍선은 어떻게 그것을 끊고 오를 수 있으며 수없이 많이 소유한 것들과 그것을 소유케 한 그 많은 소유욕에 칭칭 감기고 매여 있는 우리는 어떻게 위로 오를 수 있겠습니까?
맨 것을 하나하나 푸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풀면 다른 욕심이 생기고 그래서 그것에 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예 아무것도 가지지 않기로 하지 않는 한 하나를 버리면 그 없는 것 대신 다른 것을 갖고자 할 것입니다. 앓던 이가 빠져도 허전한데 애지중지하던 것을 버리고 나면 빈자리가 허전하여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단칼에 모든 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쫓아온 부자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한 것이 바로 당신을 따르라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라고 하신 것처럼 다 팔고,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다 팔아 내놓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소유와 탐욕과 욕망을 정당화하고, 심지어 소유와 탐욕을 세뇌하고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못 가져서 불편하고, 불행하다고 우리를 착각하게 만듦으로써 소유와 탐욕과 욕망의 노예가 되게 만들고 불행케 만듭니다.
우리는 더 많이 가지려고 하다가 불행하게 되고, 더 좋은 것을 가지려다가 불행케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치심인데, 이 세상은 도리어 주님의 가르침이 잘못된 거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따르고 누구를 따를 것인가 심각하게 도전받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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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유로움에 대하여>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하시면서 바로 이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고 하시고, 그리고 또 이어서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영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영에서 태어나면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과 같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처럼 영의 존재가 되려면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씀도 되겠습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은 아래로부터 올라가는 것이고, 아래로부터 올라가는 것은 아래를 떠나는 것이기도 하고, 산 아래 마을을 떠나 산 위의 마을로 올라감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인기몰이’니 ‘바람몰이’니 하는 말도 있지요. 이런 바람은 산 아랫마을, 곧 세상에서 부는 바람으로서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성령의 바람이 아니라 인위적인 바람, 곧 인간에게서 비롯되고 특히 나에게서 비롯된 바람입니다.
그러면 산 아래에서 부는 바람, 세상에서 부는 인위적인 바람이 산 위로 올라가 성령의 바람이 될 수 있을까요? 상승기류가 있다는데 상승기류를 타면 인위적인 바람이 성령의 바람이 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안하지만 아니올시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에서 인기 끄는 사람이 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허나 그것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는데 세상에서 인기 끄는 사람을 하느님이 질투하여 그리 만드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인기 끌려는 사람이 스스로 세상에 매여 그리되는 것입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말이 딱 그 뜻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묶어 속박되는 것이지요.
세상 인기라는 것이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인기를 탐하면 사람에게 매여 하늘로 오를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그 인기라는 것도 영원치 않아 허무로 끝난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우리는 눈치를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눈치가 있거나 빨라야 한다고 하고 눈치코치 없으면 나무라기도 합니다.
눈치를 보는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고 매임, 속박이지만 눈치가 있는 것은 일종의 사랑이고 고려, 배려이지요. 눈치를 보는 것은 사랑을 받고자 함이요, 못 받을까 두려워함이지만 눈치가 있는 것은 남의 상태와 필요를 알아채는 사랑이요, 배려지요.
그런데 인기를 탐하는 것은 인간의 사랑을 받고자 함이고, 그래서 인간에게 매여 하느님께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인기란 사람 손에 잡혀있는 풍선과 같아서 사람에게서 놓이거나 풀려나지 않으면 하늘로 오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사랑이 인기처럼 사람 손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하늘로 오를 수 있도록 자유로워지려면 인기와 인간의 사랑에 매이지 말아야 하는데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면 그 종말은 허무입니다. 인기 연예인이 어느 날 자살을 하곤 하는데 이 허무의 결과입니다. 인기가 영원하지 않아서,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아 그렇기도 하지만 사랑이 아닌 욕망은 타고 나면 언제나 허무라는 재를 남기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사랑, 그것도 욕망이 죽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랑만이 자유로이 하늘과 땅을 넘나드는 바람처럼 자유로움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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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날마다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나는 삶>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공동체-
등잔밑이 어둡다고 늦게서야 깨달았습니다. 성서의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로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바로 내 가까이 수도원에서 잘 살아가는 형제들이, 또 세상 한 복판에서 잘 살아가는 내 잘 알고 있는 지내는 형제자매들이 바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임을, 교회의 살아있는 성인들임을 요즘 새롭게 깨닫습니다.
제가 어제 예로 들었던 분들은 물론, 여기저기 세상 곳곳에서 살아가는 도반들이 바로 그분들임을 깨닫습니다. 엊그제 교황님의 주일 강론이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후반부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부활하신 분을 공동체에서 찾으십시오. 공동체 없이, 예수님을 발견하기는 힘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토마스에게 주어진 초대는 우리 모두에게도 타당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분을 어디서 찾습니까? 어떤 특별한 사건에서, 특별하고 놀라운 종교적 현상에서, 유일하게 감정적이고 감상적이 차원에서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공동체에서, 교회에서, 비록 완전치 않더라도 거기 머물면서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합니까?
우리의 한계들과 실패들, 즉 그 모든 한계들과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머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거기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우리에게 충격으로 와닿는 그분 사랑의 가장 큰 표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이름으로, 예수님 상처의 이름으로, 우리의 팔을 쾌히 벌려 삶에 상처받은 이들을 껴안고 있는지, 하느님의 자비로 어느 하나 배제하지 않고 모두를 환영하고 있는지 묻도록 합시다.
하느님이 모두를 환영하는 것처럼 한 형제, 한 자매로서 모든 이를 환영하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십니다(God welcomes everyone). 자비의 어머니인 마리아여!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모두를 환영하는 가정이 되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그렇습니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분을 만난 것은 그가 몸담고 있는 제자 공동체를 통해서 였습니다. 우리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크든 작든 내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내 공동체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교회 공동체의 롤모델이 제1독서 사도행전의 교회공동체입니다. 아마도 역사적 사실의 기술이기보다는 이상의 표현일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理想鄕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우리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부활하신 주님께, 성령님께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협조해드리는 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의 은총으로 날마다 새롭게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사도행전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대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내 몸담고 있는 작은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할 롤모델입니다. 늘 읽어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말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았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 공산주의 원리는 바로 여기서 착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이 꿈꾸는바, 지향하는 바는 자유와 평등이, 사랑과 정의가 조화롭게 실현된 자발적 사랑의 공산주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순전히 은총의 선물이자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날마다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나 주님을 닮아갈 때 가능한 하느님 나라 교회 공동체입니다. 정말 은총과 더불어 한결같은 분투의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는 물론 우리를 향해 다시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나야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을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같다.”
참으로 이런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처럼, 성령따라, 사랑따라 자유롭게 사는 이들이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이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날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를 이뤄주는 미사은총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새삼 우리 삶의 중심은, 늘 바라보고 일치를 지향해야 할 분은 다음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미사에 참석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위로부터, 영에서 새롭게 태어남으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살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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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3,7)
<역설의 삶을 살아 내자!>
오늘 복음(요한3,1-8)도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자신의 신원과 우리의 영원한 생명(구원)을 위해 돌아가신 당신의 십자가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3-15)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위로부터의 태어남'은 곧 '십자 나무를 통해 들어 올려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이라는 역설을 선포하십니다.
'세상과 나라와 공동체가 시끄러운 이유!'
'왜, 그럴까???'
역설이신 하느님,
역설이신 예수님,
역설이신 성령님의 부재(不在)가 그 결정적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4)
루카 사도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충만함의 모습'이며, '자기희생이라는 하느님의 역설이 가져다 준 은총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어제 근처 통영을 다녀왔습니다. 미륵산에서 '한산도 제승당'을 바라보면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정신', 곧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는 정신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세상과 나라와 공동체가 시끄러운 이유는 바로 이런 '이순신 장군의 역설이 부재(不在)'한 까닭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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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kGYI4Ba4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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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 8)
삶이 치열할수록
성령의 바람도
거셉니다.
그 어떤 것도
붙잡아둘 수 없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서로를
주저앉히지만
하느님의 영은
사랑으로
날아가도록
풀어주고
놓아줍니다.
깨어나야 할
시간입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서
회개와 복음이
시작됩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다양한
체험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베들레헴
갈릴래아
카나
예리코
십자가와 무덤
부활로 복음을
만드십니다.
열리고 흐르고
번지고 닿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바람처럼
우리의 삶 또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바람에
모든 것을
맡기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임을
뜨겁게 배우는
거듭남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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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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