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미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지? 1980년대에 지금의 아이유 같은 이미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가수다. 그 시절... 체계적인 보컬 트레이닝이나 기획사의 연습생 프로그램이 없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단단한 음색과 폭넓은 표현력은 감탄할 만하다. 그는 80년대 최고의 인기 음료 오란씨와 화장품 피어리스의 광고 모델로 발탁되었고, 데뷔 음반으로 1984년 ‘한국방송(KBS) 가요대상’ 여자 신인 가수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무려 이선희와 경쟁해 상을 놓치긴 했지만, 당시 이경미의 인기와 실력을 가늠해볼 만하다. 이쯤 되면 인기 가수로서 승승장구 스토리가 이어져야 정상인데 그는 돌연 행방을 감췄다. 실종 뉴스까지 나간 뒤 그가 발견된 곳은 안국동의 어느 암자. 그 뒤로도 연예계에서 활동하다 사찰로 피신하기를 여러차례 반복했다. 훗날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그 시절을 회상했는데 내용이 충격적이다. 군부정권에 불려 다니며 노리개 취급을 당하다 못해 도망쳤다는 것이다. 비단 이경미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궁정동 안가는 군부정권이 여성들을 불러들여 술 시중을 들게 하고 성접대를 강요한 장소로 유명했다. 기자 출신으로 방송통신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김충식의 저서 <남산의 부장들>을 보면, 궁정동 안가로 끌려온 여성이 100여명에 이르고 임신에 낙태까지 한 사람도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민주화의 햇살이 비추지 않았던 그 옛날 대한민국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천만의 말씀.
(...)이경미 역시 권력자들의 성희롱에 시달리다가 결국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속세를 떠났다. 법도 총칼에 짓밟히던 그 시절엔 지금처럼 연대하고 힘이 돼주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기댈 곳은 종교밖에 없었겠지. 보현스님이라는 법명으로 불가에 귀의한 뒤에도 그는 노래하는 스님으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속세의 삶은 포기해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 정도로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그가 여성성을 거세해서라도 권력자들의 성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파르라니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야 했던 순간이 눈앞에 떠오른다. 오죽하면! 얼마나 무섭고 억울했을까? 내 머리 가죽이 서늘해진다. 쓸쓸한 노래를 속세에 남겨두고, 불가에서는 행복한 삶을 꾸리고 계신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 이재익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
첫댓글 감사합니다.
추운밤
감기조심 하시고
좋은 꿈 꾸세요~!
참말
그런일이 있었다니 ~~
속세를 떠나서 스님이 되셨군요
노래는 어디서라도
부를수 있으니
마음편안하게 부르시기를 빕니다
그 시절에는 그런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슬픈 한 시절이죠.
언젠가 tv에서 본 듯도 합니다.
조조님 수고하셨습니다.
건강하세요.
보현스님 노래를 즐겨 듣고 있습니다.
특별히 '가야지' 는 내가 저승 갈 때 듣고 싶은 곡입니다.
미리 자녀들에게 유언이라도 해 두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