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슴 / 채호기 새벽 숲에서 검은 사슴과 마주쳤을 때 검은 사슴은 몸을 정면으로 돌려 몇 그루 나무의 검은 수피를 지나, 떨리는 가지와 잎을 지나, 똑바로 인간의 눈을 응시했다. 그 짧은 시간 꾹 다문 입 위 촉촉한 검은 코와 콧김. 유선형의 얼굴 양쪽에 큰 나뭇잎처럼 펼쳐져 잎맥이 도드라진 실핏줄 선명한 두 귀, 이마 위 활활 타오르는 불의 기세를 꺾어다 붙인 빛나는 두 뿔. 무엇보다 바닥 모를 깊은 수심의 검은 눈동자가 인간의 두 발을 꼼짝 못하게 멈춤 속에 붙잡아 두었다. 주위의 모든 나무들이 그를 옹립하며 수직으로 서 있었다. 검거나 회색인 나무줄기에 번져가는 녹색 잎들의 부드러움이 그의 마음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렌즈가 나뭇가지들을 헤집을 때 쓰러져 있던 한 나무가 일어서듯 갑자기 또 다른 사슴이 일어섰고 둘은 화들짝 산 아래로 사라졌다. (해칠까 무서워 도망간 거라고? 그건 인간의 터무니없는 상상)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새벽의 영역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겠다. 저녁에 다시 인간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걸 허락하겠다. ― 계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24년 봄호 -----------------------
* 채호기 시인 1957년 대구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및 대전대 국문과 졸업 1988년 《창작과비평》 등단 시집 『수련』 『손가락이 뜨겁다』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줄무늬 비닐커튼』 등 산문 『주고, 받다』(공저). 2002년 김수영문학상, 2007년 현대시작품상 및 올해의출판인상 수상 현재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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