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14,19-28 요한 14,27-31ㄱ
평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미사에서 평화의 인사 전에 매일 듣는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작별인사입니다.
유다인들의 일상적인 만남과 작별의 인사인 ‘평화’라는 말을 사용해 제자들에게 인사하시며,
당신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는 단지 육신의 편안함뿐만 아니라 참된 행복과 자유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참된 행복의 원천은 이 세상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신부로 살든 수도자로 살든 그 부르심의 본성상 하느님과 멀어지면
그에게는 삶이 힘들어지게 마련입니다.
십여 년의 길지 않은 사제생활을 되돌아봐도 늘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신부, 수도자뿐이겠습니까?
사람 자체가 자신의 창조주의 목소리인 양심에 따라 살지 않으면 괴롭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웬만큼 마음이 무디어져 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원한다면 세상이 주는 거짓 평화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 부산교구 이정민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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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필종 도미니코 신부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14,19-28 요한 14,27-31ㄱ
예수님의 마지막 인사, 평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 말씀을 하십니다.
“내 평화를 여러분에게 줍니다”(요한 14,27).
평화의 인사는 보통 작별인사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고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도대체 왜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당신의 평화”는 다른 것입니까?
여전히 전쟁의 참상은 지구촌을 할퀴고 있으며, 힘센 나라는 주변의 약속 국가들을 그럴 듯한
외교적인 언사로써 요리하려 합니다. 한시도 이 지구상에 총성이 그친 적은 없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으로 참혹합니다.
전쟁의 당사자들이 제일 많이 쓰는 단어가 바로 ‘평화’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이스라엘의 고도(古都)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를 말하며,
그들이 주고 받는 매일의 인사는 “샬롬” 곧, 평화를 말합니다.
우리 말로는 “안녕하십니까?”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얼마나 평화가 부재한 체험이 가득하면 평화를 그토록 아침저녁으로 외쳐야 했겠습니까?
평화가 없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평화만큼 절실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이 단어만큼 그 의미가 퇴색하고 식상해버린 단어도 없다 싶습니다.
무의미해졌다는 말이 더 옳게 여겨집니다.
세상은 강자의 논리가 더 쉽게 적용되고 지배적인 듯이 보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이나 외쳐되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린 지 오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그게 그렇게 다르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그분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들여다 볼 때 비로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굳게 잠그고 있던 제자들에게 홀연히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여러분에게 평화!”(요한 20,20)라고 인사하십니다.
이 장면이 시사하는 바는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두려움이라는 벽으로 둘러싸인 그들의 그 벽을
없애주시는 모습입니다.그것을 성서 본문은 “문들이 잠겨 있었다”(요한 20,26)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바로 우리 안에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벽들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 벽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편견과 독선, 완고함과 아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와 이데올로기, 신념과 가치가 상충하면서 만들어 놓은 그 벽은 너무도 견고합니다.
우리는 그 안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결코 밖을 향해 자신의 열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성채 안에서 마치 왕이라도 된 양 거리낌 없이 살아갑니다.
그 선과 벽은 숱한 오해와 비판, 단견이라는 자식을 낳고,
그 선과 벽을 더욱더 굳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 가운데 서시며 “여러분에게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벽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 벽을 마치 있는 것처럼 생활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족 간의 벽, 친척들 간의 벽, 성당과 성당과의 벽, 교구와 교구 간의 벽, 종교와 종교 간의 벽,
지역과 지역 간의 벽 등등. 이런 것들을 너무도 당연시 하고, 그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벽이 없다 하시는데 우리는 자꾸만 그 벽을 높여갑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벽이 없다면 너무도 사는 것이
두렵게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느님만 믿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용기가 없는 우리들을 한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이어 나오는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일어나 여기서 떠나갑시다”(요한 14,31).
그렇습니다.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에 사로잡혀 웅크린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이는 용기를 상징합니다.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벽을 과거와의 단절로써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옛 것은 허물어지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 부산교구 정필종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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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마르코 신부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14,19-28 요한 14,27-31ㄱ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의 원천
어제 복음묵상에서 언급하였듯이 요한복음이 전하는 최후만찬 석상에서의 원초적인 고별사는
13-14장으로 끝난다. 오늘 복음이 바로 고별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늘 미사전례의 복음으로는 봉독되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자, 일어나 가자"(31b절)라는 마지막 말씀으로 고별사를 마감하시고, 자
신을 기다리고 있는 최후의 몇 시간을 향하여, 즉 유다의 배반과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신다. 제자들도 이 시간을 함께 지내도록 초대받는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언급된 '협조자이시며 진리의 성령에 관한 약속말씀'에
오늘 복음의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와 '예수의 다시 오심'이 연결된다.
예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27절)고 하지만
사실 세상은 자신이 줄 수 있는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은 오히려 불안과 걱정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상은 평화를 원하고 또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평화란 평온하고 화목한 것으로 전쟁이나 분쟁의 상대적 개념이다.
평화의 내용과 의미는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여왔다.
동양문화권에서의 정적·내향적·비정치적인 데 비해 서양문화권에서는 동적·외향적·정치적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근대에 들어 세계평화는 앞의 전자에 해당되는 듯한 반전주의나 이상주의의 한 기둥과,
후자에 해당되는 듯한 국제주의나 현실주의의 다른 기둥으로 도모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한 반전주의의 입장을 취하여 왔다.
오늘날 세계평화를 위한 노력은 UN의 정신이 주도하고 있으나,
그 입장은 서양문화권을 대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로마제국주의 시대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와 중세기 십자군원정과 흡사한 것으로서 제국 내에서는 통일과 질서를
구현하면서도 제국 밖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만약 세상이 평화를 준다면 그것은 하늘이 주는 것이며, 하늘이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한시적인 만족에 불과하다. 예수의 제자들도 불안과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온갖 악과 고통과 두려움, 믿어지지 않는 세상 사건에 대한 하느님의 기나긴 침묵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무는 자는
세상의 모든 걱정과 불안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은 '다시 오심'을 위한 것이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곧바로 이어질 사건이나, 어떤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질 재림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다시 오시기로 한 예수님이 기대한 시간 안에 오시지 않게 되자 세상의 마지막 시간에로
생각을 옮기게 된다. 이를 일컬어 초대교회가 경험한 '재림지체(再臨遲滯) 현상'이라고 한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은 불안과 걱정의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의
근거로 충분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온갖 불신의 요소를 제공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29절)
이제 마지막 시간이 목전에 다가왔고 세상의 권력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
세상의 권력자란 우선 사탄의 도구로 예수를 팔아 넘긴 유다(13,27)와
예수를 체포하러 오는 군대(18,3)를 구체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볼 때 이 권력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그래서 생명이 없고 죽음만 가지고 있는 세상의 권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상의 권력이 잠시나마 예수보다 더 우세하게 보인다.
그렇다고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30절) 즉
죽음이 생명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31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강요에 의해 생명을 바치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죽음에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유에서다.
결국 세상은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과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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