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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틈틈이 본 아홉 권
풀잎이야기 추천 0 조회 44 09.02.02 16:2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사노라믄 벼라별 꼬락서니와 어처구니 없는 수모, 학살 참사 기막힌 죽임도 속수무책 '강 건너 불구경

허듯' 멀거니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처지일 때 가슴앓이 울화통 터져나와 "홧병 정신병"이 도지는가 보

다. 지금이 어느 땐데 사람이 불에 타 죽어야 하는가? 2009년 1월20일 대한大寒 추위에..


지난 연말부터 미뤄오든 '좋은책나눔 일깜'도 괜스리 오늘 내일(차일피일) 미루다가 설 쉐구 며칠 지

나서야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던 말이 떠오르고 제아무리 세상이 뒤죽박죽에 울

화병 솟구치는 '아더메치 나라 꼴'이어도 틈틈이 참선 명상속에 끌어넣고 부채질해 볼 셈이다.


살맛나는 사람끼리, 반갑고 기분좋은 이들끼리 오손도손 함께 베풀고 나누고 얼싸안으며 더불어 먹고

마시며 믿고 기대믄서 살아가는 멋과 맛이 있어야 본디 인간성인 기쁨, 너그러움, 열정도 샘물 솟아나

듯 넘칠텐데.. 정나미 떨어지는 '나쁜뇬눔 세상' 탓인지 책 쌓아놓고도 영 내키지않는 요즘이지먼..

   
약속은 아직도 효력이 남아있으므로 "검정숯 같은 죽음"이 열흘 넘도록 우리 가슴을 서글프고 답답갑

갑허게 쥐어짜듯 고통스럽게 해도 끈임없이 <촛불을 밝히는 민중> 있어 희망과 평화를 다시 추스리는

마음 챙겨가며, 이제서야 틈틈이 읽어 본 아홉권 중 나름대로 추려 띄워 보낸다.

 

* 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산문집/ 녹색평론사 2002.7.31 제9쇄 발행


<쥐주둥이 찧는 날>

올해 병자년 첫 쥐날上子日은 정월 초사흘이다. 옛날 이곳 안동지방 농촌에서는 해마다 이날이 되면

아침 일찍 여인들이 빈 디딜방아를 가볍게 찧으면서 "쥐주둥이를 찧자, 쥐주둥이를 찧자..."하고 노래

부르듯이 외운다. 이렇게 하고 나면 그해 일년 동안은 쥐들이 주둥이가 아파 아무데나 아무것이나 함

부로 갉아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한 해를 살아가는 건 참으로 지혜로운 발상이

다. 농촌에서 쥐는 그야말로 큰 골치거리이다 그것들은 인정사정없이 닥치는 대로 곡식이 담긴 것이면

뒤주문이건 봉태기건 바가지건 구멍을 뚫어놓는다. 그런데도 쥐에 대해서 그다지 미운 감정을 가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미워해 봤댔자 그 많은 쥐들을 모조리 잡아 없애지 못할 테니 아예 체념을

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말썽꾸러기 쥐지만 할 수 없이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식구처

럼 생각하게 된 모양이다.

병아리를 채가는 소리개나 까마귀를 ?기 위해서는 해마다 깊이 감춰뒀던 삐쩍 마른 죽은 새를 꺼내어

장대끝에 걸어놓는다. 참새떼를 ?기 위해서는 나락논에 허수아비를 세운다. 이렇듯 쥐를 몰아내는 방

법으로는 빈 디딜방아지만 꽝꽝 찧으면서 으름장을 놓는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것도 몸뚱이 전부를

찧는 게 아니라 겨우 주둥이만 아프게 해놓으면 된다. 굳이 죽일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비록 소중한 곡식을 축내고 살림그릇을 갉아 못쓰게 만들어도 이런 사소한 피해는 더불어 살아가는 자

연의 섭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농촌에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에도 쥐를 미워하기보다 쥐를

사랑하고 보호하자는 생각이 담긴 것이 대부분이다.
 
옛날 어느 부잣집 곳간에 쥐가 들끓어 하인들이 곡식만 대강 꺼내고 불을 질러버리자고 했다. 그러자

주인 대감님이 말하기를 "아니다. 그것들도 새끼를 낳고 식구들를 거느리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불을

질러 없애겠느냐? 곡식이 좀 축이 나더라고 그냥 두어라" 하는 것이었다.   이래서 쥐들은 계속 그 부

잣집 곳간에서 살게 되었는데, 어느날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곳간 쥐들이 모두 주인집 마당에 나와

한 줄로 줄을 서서 대감님 방쪽을 향해 자꾸 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대감님은 집밖으로

나와 이만치 걸어오는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집이 무너져내렸다.

쥐들은 이렇게 자신들을 살려준 대감님께 은혜를 갚은 것이다. 요즘 과학자들은 쥐나 돼지 같은 짐승

들이 기상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데, 옛이야기에도 이런 것이 전해지고 있으니 우

리도 주변에 살고 있는 생명에 대해 피해만 준다는 생각을 버렸으면 한다.  만일 누구 말대로 "뭇생명

가운데 사람만이 가장 귀하다"고 해서 다른 목숨을 함부로 취급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짓은 없을 것

이다. 이 땅위의 생명들은 수십억년을 거치면서 새로 태어나기도 하고 멸종해 사라지기도 하면서 현재

와 같이 균형잡힌 모둠살이를 이루게 되었다. 어느 하나가 피해만 끼치고 어느 하나가 이롭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조금씩 희생을 하면서 함께 살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런 균형잡힌 모둠살이를 인간이 깨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쥐를 잡기 위해 쥐약

을 놓고보니 쥐만 죽는 게 아니라 능구렁이와 족제비도 따라 죽었다. 잡초를 없앤다고 제초제를 쓰고,

벌레를 잡기 위해 살충제를 뿌리고 나니 땅속 미생물까지 죽고 강물이 오염되어 물고기마저 사라졌다.
잘 쌓아올린 아름다운 탑에서 받침돌 하나만 빼버려도 균형을 잃고 전체가 무너져내린다. 이 세상 목

숨은 그 어떤 것도 소중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사람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은 인간에게 편리를 가져다주고 무지에서 눈뜨게 했다. 하지만 과학의 남용은 인류를 파멸로 몰아

갈 것이다. 빈 디딜방아를 찧으면서 쥐주둥이에 상처를 준다고 믿는 것은 절대 미신도 아니고 무지도

아니다. 오히려 정신적 삶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가장 과학적인 생활방식일지 모른다. 함께 살아가는데

는 조금씩 속아주는 지혜도 필요한 것이다. 굳이 디딜방아가 아니더라도 작은 절구공이나마 쥐주둥이

찧기는 이어졌으면 싶다.              156-158쪽

 

* 티베트 사자의 서/ 파드마삼바바/ 장훙스 풀어씀/ 장순용 옮김/ 김영사 2008.11.17


<의식> : 인간은 깨어 있든 깊은 잠에 빠져 있든 의식의 활동이 정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임종에

서 사망에 이를 때까지도 의식은 사라지지 않으며, 이 의식은 육체를 이탈하면 사후의 중음 세계에 들

어가서 중음中陰(중유中有) 세계의 주인공이 된다.

의식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임종에서 사망에 이를 때까지 네 단계를 거친다.

<의식이 육신을 벗어나지 못했을 때> - 임종 중음의 첫 번째 빛이 나타날 때

죽음이 임박하면 죽음의 징후가 하나하나 나타나고 일종의 무의식 상태에 들어간다. 구역본에서는 혼

미 상태라고 했으며 '무상無想 상태'라고도 한다. 의식이 육신을 벗어나기 전 임종자는 첫 번째 빛을

볼 수 있다. 근기가 탁월한 요가 수행자라면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의식이 거의 육체를 벗어날 때> - 임종 중음의 두 번째 빛이 나타날 때

임종자의 호흡이 멈춰도 아직 완전한 사망은 아니다. 생명의 바람vital elements심장이 다시 뛰지 않

고 그칠 때까지 인체의 중맥中脈:중추신경에 남아 있다. 이때 의식이 갑자기 맑아지면서 주변을 볼 수

있지만, 자기가 죽었음은 알지 못한다. 이때의 죽은 영을 '정환신淨幻身:청정한 환영의 몸'이라 하는

데 두 번째 빛을 식별할 수 있어야 비로소 해탈할 수 있다.

<의식이 완전히 육체를 벗어날 때> - 실상 중음

두 번째 빛이 나타난 후 임종자는 다시 의식을 잃고 진정한 사망 상태에 들어간다. 3일 반에서 4일이

지나면 다시 깨어나며, 이때 의식은 이미 육신을 벗어났고 육신은 부패한다. 육체를 완전히 벗어난 상

태를 의식체意識體라 하며, 자기 죽음을 깨닫는다. 중음 세계를 떠돌면서 실상 중음의 환상을 거치다

가 투생 중음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의식이 새로운 육체에 들어갈 준비를 할 때> - 투생 중음

의식이 일단 투생 중음에 들어가면 해탈할 방도가 없고 다시 윤회의 고통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때 의식은 다른 새로운 육체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38쪽

<옮김이의 말> - 죽음을 이해해야 삶이 바로 선다

젊은 시절, 윤회전생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무아無我가 불법의 근본 진리라면, 도대체 '나

'가 없는데 무엇이 윤회전생한다는 말인가? 도 절에서 49재를 지낸다는 말을 듣고 왜 49일인지 궁굼하

게 여겼던 적도 있었다. 도중에 그것이 죽음의 과정이란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

는 알지 못했다.

이렇게 상식적이지만 본질적인 의문을 품은 사람들은 이 책 [티베트 사자의 서]를 보면 의문이 풀릴

것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서는 실체가 없는 우리의 식識이 윤회의 주체이고, 죽음의 과정은 그 식

이 임종의 순간부터 49일 동안 체험하는 경계란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또 [티베트 사자의 서]는 죽음

의 과정만이 아니라 해탈의 길까지 제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승불교의 근본 진리와 정확히 부합

하고 있다.

죽음은 기피해야 할 그 무언가가 아니라 냉정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현상이다. 죽음에 대한 이해

야말로 오히려 우리의 삶을 올바로 이끌어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를

보면 죽음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온갖 경계를 알 수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생전의 삶에서

몸, 입, 뜻의 삼업三業을 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다.

특히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죽음의 과정을 제대로 인도하는 문제는 더욱 중시되고 있다. 불교계에서도

예로부터 망자에 대한 제의祭儀를 집행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티베트 사자의 서]의 가르

침을 깨닫고 체득해서 실제적으로 망자를 인도하는 법사가 나오기를 바란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죽

음의 과정을 이토록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망자를 해탈로 인도하는 경전은 점후무후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티베트 사자의 서]의 가르침대로 망자를 인도해서 '죽음의 문화'가 정착된다면, 불

교의 사회적 공헌은 더 이상 클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할 것이다.   326쪽

 

* 다음 차원으로의 여행/ 클레멘스 쿠비/ 송명희 옮김/ 열음사 2008.10.24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내 영화의 끝 장면에서 무당 박희아는 "우베가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 그는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다. 어떤 면에서 죽었다는 표현은 옳다. 질병과 끊임없는 투쟁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죽어야

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진실이 담긴 주장이다. 치유란 결국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

쳐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과 질병 그리고 부상이 왜 좋은 일인지 질문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런 것들과 더불어 살아갈 새로

운 관점을 찾지 못한다. 정통의학으로 치유할 수 없는 환자들은 운명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며 이런

질문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내 고통과 더불어 나에게도 똑같은 상황이 일어났다. 의학적으로 보면 내 고통은 자명한 일이지만 의

학은 그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부서진 척추에게 고통이란 것은 그나마도 가장 괜찮은 결과였다.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희망은 거둘 수 있었지만 고통이 무엇 때문에 좋은지는 자문해야 했다.

이 책을 쓰면서도 고통이 날뛰기 시작했지만 뚜렷한 육체적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내 세포들은 나의

부상을 기억하고 창문에서 떨어진 뒤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고통의 상태로 돌아갔다. 20년이 넘게 나는

내가 무엇 때문에 걸을 수 있는지 다른 사람들과 말하지 않았꼬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책을 쓰

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경위를 설명하려 했고 그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이 책을 끝마치게 되

면 비로소 나의 신경이 진정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예감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을 쓰는 오늘, 나는 고통 없이 고통엠 대해 쓰고 있다. 이 점이 이 책을 쓰면서 얻게 된

나의 개인적 소득이다. 아마 몇몇 독자도 이와 비슷한 체험을 했을지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장애가

조금 완화되거나 아니면 사라졌을 수도 있따. 그렇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감! <다음 차원으로 가는 여행

>이라는 영화는 이미 몇몇 관객에게 이런 효과가 있었다. 정신적 치유가 효과가 있음을 관찰하면 무척

흥분된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여러 차원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보는 것 또한 사람을 들뜨

게 한다. 의식의 영역을 넓히고 자신의 힘을 강하게 믿으면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불안을 완전히 극

복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나의 어머니는 아흔 살이 되셨고 고통에 시달렸기 때문에 모르핀을 맞았다. 내 형제자매들은 어머니의

연세 때문에 그 방법에 동의했다. 인간은 원한다면 의도적으로 고통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에 우리는

동의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고통에 시달셨지만 1년 후에 평화롭게 돌아가셨다. 갈등이 전혀 없었다고

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질병 때문에 사망한 것은 아니다. 즉, 영혼에 맺힌 것 없이 생을 마감하신 것이

다...어머니는 수술을 거부했다 사람은 어떻게든 죽어야 하는 것이라고, 동맥류가 터져서 죽는 것은

그리 나쁜 죽음은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정맥류는 그대로 있어서 어머니의 영혼상태를 가늠하는 척도

가 되었다.

의사들은 그런 결정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어머니의 의견에 동의했다. 다행히 동맥류는 한계

선을 넘지 않을 정도로만 부풀었으며 어머니는 평화롭고 고통없이 그리고 몸부림치는 일 없이 편안하

게 세상을 떠나셨다. 아흔한 살 생신이 지난 후에 숨을 거두셨는데 돌아가시는 그날도 찾아온 아들딸

과 손자가 많았다. 바로 성령강림대축일인 일요일이었는데 7년 전에 어머니가 글로 써서 돌아가시기를

원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360-362쪽

 

* 디바인 매트릭스/ 그렉 브레이든/ 김시현 옮김/ 굿모닝미디어 2008.11.25


<의식 변화의 20가지 비결>

비결 1: 디바인 매트릭스는 우주를 담고 있는 그릇이자, 만물을 이어주는 다리이며, 우리가 창조한 것

        을 우리에게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비결 2: 우리 세계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비결 3: 우주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이 우주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일부 

        임을 깨달아야 한다.

비결 4: 한때 하나였던 것들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든 아니든 항상 서로 이어져 있다.

비결 5: 우리가 의식을 집중하는 행위는 곧 우주를 변화시키는 행위이다. 의식이 우주를 빚는다!

비결 6: 우리에게는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모두 일으킬 힘이 충분히 있다!

비결 7: 우리 의식의 집중이 우리 세계의 현실이 된다.

비결 8: 새로운 현실을 선택한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비결 9: 느낌은 디바인 매트릭스와 "소통하는" 언어이다. 꿈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기도가 이미 답을 

        받았다고 느껴라.

비결 10: 아무 느낌이나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이기적 자아나 편견 없는 그 느낌만이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다.

비결 11: 우리는 우리 세계로서 경험하기를 선택한 것과 삶 속에서 하나되어야 한다.

비결 12: 우리는 오늘날 알려진 것과는 달리 물리 법칙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

비결 13: 홀로그램인 "무엇인가"는 모든 부분부분에 전체를 담고 있다.

비결 14: 우주적으로 연결된 의식 홀로그램은 소망과 기도가 우리마음에 생겨나는 순간 이미 목적지에

         존재하게 만든다.

비결 15: 우리 삶의 작은 변화는 의식 홀로그램을 통해 세계 곳곳에 반영된다.

비결 16: 집단 의식의 변화를 "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의 인원은 총 구성원의 1%의 제곱근이다.

비결 17: 디바인 매트릭스는 우리가 우리 믿음으로 만들어가는 관계를 거울처럼
         되비추어준다.

비결 18: 우리의 "부정적" 경험의 뿌리는 세 가지 보편적 두려움 중 하나로(혹은 셋 중 몇 가지가 결 

         합된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 셋은 바로 버림받음의 두려움, 낮은 자존감의 두려움, 신 

         뢰 부족의 두려움이다.

비결 19: 우리의 가장 친밀한 관계는 우리의 참된 믿음을 비추어 준다.

비결 20: 우리는 우리 세계에서 경험하기를 선택한 바로 그것과 삶 속에서 하나되어야 한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입자가 다른 입자와 즉각 소통할 수 있으며,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할 수 있으며,

미래뿐 아니라 과거에서 살 수 있으며, 현재의 선택으로 과거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 역시 그럴수

있다. 입자와 우리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수많은 입자들이 의식의 힘으로 한데 뭉쳐진 존재

가 우리라는 것이다.

오래된 종교들은 우리 마음을 깨우고, 현대의 과학은 우리 정신을 깨움으로써 우주의 단일하고도 더없

이 강력한 힘이 루이 안에 있음을 가르쳐준다. 우주의 가장 큰 비밀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상상력 속에는 세계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 너무 단순한 말 같아서 헛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

는 이것이 사실임을 단호히 믿는다.          292-294쪽
 


* 조개 줍는 작은 새/ 바그완 쉬리 라즈니쉬/ 편집부옮김/ 호암출판사 1992.3.15


<물결은 끊임이 없고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동물이나 식물계를 살펴보면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식물의 활동을

관찰해 보면 우리는 무엇을 찾아낼까? 그 성장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식물의 온 에너지는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 내는 데 향해져 있다. 식물의 온 존재는 새 씨앗을 만드는 데 종사하고 있다. 새는 무

엇을 하고 있는가? 동물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연의 활동을 가까이서 관찰해 보면 우리는 거기서

단 하나의 과정만을 발견할 것이다. 전심을 기울이는 단 하나의 진행 과정을. 그리고 그 과정은 끊임

없는 창조, 생식, 새롭고 다른 자신의 형상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꽃들은 씨를 갖고 있다. 과일들도

씨를 갖고 있다. 그러면 그 씨의 운명은 무엇인가? 그 씨는 새로운 나무로 자라고 새로 꽃피고 새 열

매를 맺고 새 씨앗이 되기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 자체로써 순환을 반복한다.

생식 과정은 영원하다. 생명은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시키는 힘이다. 생명은 창조이다. 자기 창조의 과

정이다. 인간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열정' '성(性)'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는 그것을 성욕이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이름붙여 분류하는 것은 욕을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일종의 악용이다. 그리고 그 비난 자체는 환경을 오염시켜 왔다. 그렇다면 그 성욕이란 무엇인

가? 열정이랑 무엇인가? 성이라고 불리는 힘은 무엇인가?
 
아득한 옛날부터 물결은 끊임없이 넘실거렸고 기슭을 향해 밀어닥쳐 온다. 미치고 몸부림치고 흩어지

고 그리고 밀려난다. 삶의 발전을 향한, 앞으로 나아가려는 내적 충동을 갖고있다. 물결은 끊임이 없

고 머물지 않는다. 삶의 물결도 이와 같다. 거기에는 무엇인가를 달성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다 나은 상태를 구하려는 강렬한 욕구이다. 보다 위대한 높은 곳에 도

달하려는 정열이다. 결코 다함이 없는 에너지의 배후에 있는 것이 삶, 그 자체이다. 훌륭한 삶을 얻으

려고 노력하고 있는 삶, 보다 좋은 존재를 얻으려고 하고 있는 삶이다.

인간이 처음 이 지구 위에 나타난 것은 결코 오래 전이 아니다. 아마 겨우 몇천 년 혹은 몇만 년 전의

일일 것이다. 그 이전에는 동물들만이 있었다. 그 동물들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랜 일은 아

니다. 그 이전엔 어떠한 동물도 없었던 시기, 오직 식물만이 존재했던 시대가 있었다. 이 지구상에 식

물들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 또한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 이전에는 바위와 산, 강, 그리고 바다

만이 있었다.
 
이 바위와 산, 강, 그리고 바다의 세계는 쉼없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식물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식물들이 생겼다. 그 생명력은 새로운 형태로서
나타났다. 그런 후 지구는 식물로 뒤덮였다. 그것은 생명을 계속해서 가져왔다. 식물은 계속 생겨났다

꽃은 피어났고 열매는 자랐다. 그러나 식물 또한 쉬지 않았다. 식물도 자기 자신에 만족하지 않았다.
식물의 내적 충동 역시 무언가 더 높은 것을 향해 있었다. 식물은 동물들과 새들을 만들어 내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물과 새가 존재하기 시작했고 이 지구 위에 오랫동안 머무르게 된 것이

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역시 인간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동물

들 안에 내재하여, 장애를 부수려고 노력하면서, 태어나려고 노력하면서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그리

하여 얼마 안 있어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은 새 생명을 창조해 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기본적인 충동은 창

조하는 것, 새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생명, 그 자체는 끝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인간이 보다 훌륭한 인간을, 자신의 보다 높은 차원의 형태를 가져

오려고 내부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일까? 그것은 생명이 인간 자신보다도 훨씬 훌륭한 존재를 기대하

고 있다는 것일까?              257-259쪽

 

* 행복한 바보 성자 물라/ 알렉산드로 조도로프스키/ 임왕준 옮김/ 샘터 2002.2.15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후일 티베트 불교의 위대한 스승이 된 마르파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에 전념하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무거운 짐에 눌려 허리가 굽어진 노인을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문득 자신이 추구하는 깨달음의 해답을 그 노인이 가지고 있으리란
직관을 얻은 마르파는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말씀해주세요 스승님,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가던 길을 멈춘 노인은 말없이, 등에 지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노인의 동작을 강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마르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어찌 행동해야 합니까?"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내려 놓았던 짐을 들어 등에 메고는
유유히 길을 떠났다.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너는 수많은 근심들과 과거의 생각들로 가득하구나.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미망에서 벗어나라."

"그 후에는?" "그 후에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라. 현실에 대한 의식 자체가 되어라. 그러면 네가 지고

있는 짐의 본질을 알게 될 것이고, 네 짐은 운명이 아니라 너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지고 짐의 운명을 네가 결정할 수 있게 되고, 그때 네가 바라보고 있는 현실은 더 이상

미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일 것이다. 심지어 너의 가족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비극은 네가 그 본질을 인식하여 그로 인해 깨달음을 얻게 될 짐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일단 미망

의 함정을 헤치고 나오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인생이란 그리 비극적인 것이 아니고, 네 손

아귀에 잡을 수만 있다면 정말 멋진 선물이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117-119쪽

 

* 동물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도널드 그리핀/ 안신숙 옮김/ 정신세계사 1994.6.18


<사려깊은 돌고래>

이제껏 내가 전개해 온 바와 같이 대상을 구별하지 않은 이러한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하나의 반응은, '작은 동물들은 몸집이 작은 만큼 당연히 열등한 사고력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뇌가 지구상에서 가장 큰 뇌가 아니라는 사실을 혹시 인식하지못

한 사람에게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래나 돌고래는 실로 커다란 뇌를 갖고 있다. 제일

커다란 고래의 뇌는 인간 뇌의 몇 배나 된다. 사육되는 것이든 야생의 것이든, 고래나 돌고래는 그 행

동에 있어 놀랄 만큼 풍부한 융통성을 보인다. 더구나 그런 행동의 대부분은 비버나 꿀벌이나 정원사

새의 행동보다 더 의식적인 사고가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강하게 엿볼 수 있는 행동이다.

돌고래를 사육하기 위해 극복해야 했던 기술상 및 재정상의 곤란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것이 어느 정

도 해소된 것은 불과 50년 전의 일이었다. 훌륭한 곡예를 선보이는 돌고래 쇼 이외에도 돌고래들의 행

동면과 정신면의 능력을 조사하기 위해 널리 이용되어 온 것이 태평양돌고래Tursiops gilli이다.

돌고래를 조련시키는 것은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돌고래는 때때로 조련사의 의표를 찌를 만큼 민

감하고 영리한 동물이다. 고래나 돌고래가 보이는 각기 다양한 행동 패턴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사고나 주관적인 감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가운데서 극

히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행동 패턴을 몇 가지 언급하는 정도에 그치기로 한다. 자세한 것은 허면이

편집한 책 들을 참고 하기 바란다.

고래나 돌고래가 보이는 행동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다른 동물의 행동을 흉내내는 능력이다.본

래 흉내는 관찰에 의한 학습의 특별한 예이므로 고래류의 특유한 행동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고

래류의 흉내내기는, 고래가 흉내라는 행동 그 자체에 대해 때때로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여겨질

만큼 정교하다. 허먼은 자신의 책 가운데서, 수조에 함께 들어 있는 바다표범의 행동을 흉내내는 태평

양돌고래를 관찰한 테일러와 사이먼의 보고를 소개하고 있다.

"흉내를 낸 행동은 바다표범의 헤엄치기와 잠자기 그리고 위안 행동(스스로를 쓰다듬거나 하며 편히

쉬는 행동) 등이었다. 돌고래는 마치 자기가 바다표범이라도 된 양 꼬리지느러미는 움직이지 않고 가
슴지느러미만 움직여 헤엄쳤다. 잠자기 흉내는 옆구리를 수면 쪽으로 향한 채 비스듬히 누워 꼬리를

수면 위로 드러낼 듯이 하면서 가슴지느러미를 펼치는 방식이었다. 위안 행동의 흉내는 한쪽이나 양쪽

의 가슴지느러미 아래 부분으로 배를 열심히 쓰다듬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돌고래는 바다거북, 가오리, 팽귄의 헤엄치기 방식과 자세를 흉내냈다. 또 물에 떨어진 갈매

기 깃털을 사용해서 물속 유리창에 낀 물풀들을 닦아내려는 행동도 보였는데 그것은 정기적으로 수족

관 유리창을 청소하는 사육사를 흉내낸 것이었다. 더구나 돌고래는 이 유리창 청소를 흉내낼 때, 사육

사가 등에 지고있는 산소통에서 나는 소리와 그 기포까지 흉내내 보였다. 또 다른 한마리도 부서진 타

일조각을 물고 와서 수족관 바닥에 난 해초를 긁어내, 사육사가 진공 펌프의 호스를 손에 쥐고 수족관

바닥을 청소하는 것을 보고 그 긁어내기 작업을 흉내냈다.    310-312쪽

 

* 판차탄트라/ 판디트 비쉬누 샤르마/ 찬드라마나 영역/ 서수인 옮김/ 태일출판사 1996.6.10<


<브라민의 아내와 족제비 이야기>

어느 도시에 데브 샤르마라는 이름을 지닌 브라민이 한 사람 살고 있었네. 어느 날 그이 아내가 남자

아이를 낳았어. 그런데 바로 그날, 암족제비도 새끼를 낳았는데 새끼를 낳자마자 암족제비는 죽고 말

았다네.

가여운 생각이 들어서 브라민의 아내는 새끼 족제비를 데려다가 자기 젖을 먹이고 기름으로 목욕을 시

키며 자식같이 키웠네. 그러긴 해도 그녀는 항상 새끼 족제비를 감시했었다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

이지, '족제비는 어쨌든 족제비일 수밖에 없어. 피를 속일 수는 없는 법이거든 - 태생이 그러니까, 언

젠가는 우리 애를 해칠지도 몰라.' 그녀는 자식에게 참으로 자애로운 어머니였네. 이런 옛말이 있지

않나,

  자식이 미련하고 버릇도 없으며
  못나고 어리석고 개망나니라도
  부모에게는 언제나 귀여운 자식이라네.

어느날, 그녀는 아들을 요람에 눕히고 물을 긷기 위해 물동이를 들고 집을 나섰네. 나서기 전에 그녀

는 남편에게 이렇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지. "여보, 저는 지금 물을 길러 우물에 가는데요. 아기

를 보고 계세요. 족제비가 애를 해코지 못하도록 잘 보셔야 해요."

그러나 무심한 남편은 아내가 나가자마자 자기도 탁발을 하러 집을 나가 버렸어. 그런데 부모들이 집

을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방 한쪽 구멍으로부터 검은 뱀이 기어 나왔네. 족제비는 자기의 형제나

다름없는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천적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네. 결국 족제비는 뱀을 갈가리 물어뜯어

죽이고 말았지. 족제비의 입과 발톱은 온통 뱀의 피로 물들었네. 뱀을 죽인 족제비는 자기가 한 일이

스스로 대견해서 그것을 자랑하기 위해 집밖을 나가 브라민의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피칠갑을 하고 잇는 족제비의 입과 발톱을 보고는 족제비가 자기의 아들

을 해친 것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말았어. 그녀는 화가 치밀어서 물이 가득 찬 무거운 양동이로

족제비를 눌러 죽이고 말았다네.

집안으로 급히 뛰어들어간 그녀는 아들이 요람에 아무 탈없이 누워 있고 갈가리 찢긴 검은 뱀의 시체

가 그 옆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네. 그녀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네. 자기의 친자식을 죽인 것

이나 다름없는 슬픔과 죄책감에서 그녀는 자기의 가슴을 두드리며 슬피 울었네.

얼마 후, 브라민이 집으로 돌아왔네. "망할 놈의 화상 같으니라구!" 족제비를 잃은 슬픔에 제 정신이

아닌 아내가 울부짖었네, "이 욕심꾸러기! 탁발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내 말을 안 듣더니 지금 어떻

게 되었나 좀 보라구요! 저기 저 둘째 아들이나 다름없는 족제비를 좀 보세요. 당신 탐욕의 제물이 되

어서 저기 죽어 자빠져 있지 않아요? 옛말이 하나도 그른 게 없다더니!

  욕망을 갖더라도 정도껏 가지라.
  욕심이 지나치면
  머리 둘레로 수레바퀴가 돌아가네.
  차크라다라 가 그러했듯이."                   385-387쪽

 

* 중음의 꽃/ 겐유 소큐 지음/ 김춘미 옮김/ 열림원 2003.1.24


<옮긴이의 글>

저자 겐유 소큐는 임제종(臨濟宗) 묘심사파(妙心寺派) 후쿠쥬지의 부주지(副住持)로 현역 스님이다.

1956년 후쿠시마현 미하루 시에서 주지의 아들로 태어나, 게이오 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회사

등에 근무하다가 27세에 출가하여 교토 덴류지 전문도장에서 수행. 아버지가 주지로 있는 절에 부주지

로 들어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회사 등에 근무하면서 집필 활동을 계속 하다가 일시 중단. 1998년 17

년만에 집필한 소설<<물의 뱃머리>>가 아쿠타가와 상 2000년도 후보작이 된 후, <<중음의 꽃>>으로

2001년에 제 125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실력파이다. 데부직 <<물의 뱃머리>>부터 최근까지 그가

발표한 작품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2001년 1월 <<연>>, 5월 <<중음의 꽃>>, 9월 <<아브라쿠사스의 축제>> 9월 <<나팔꽃 소리>>, 11월 <<

화접산화>> 2002년 1월 <<어개장기담>>, 5월 <<퓨어.스커트>>. 현재 입수된 자료만 보아도, "둑이 터

진 듯이"라는 말이 연상될 만큼 쌓이고 쌓였던 문학에 대한 집착과 정열이 한꺼번에 분출한 듯한 느낌

이다.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중음의 꽃>>은 스님으로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무당이나 예지 능력자에

대한 이야기로 차 있다. 민간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고, 한국이나 일본의 민중의 기층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샤머니즘(shamanism)과 아니미즘(animism)을 주인공인 선종(禪宗)의 스님 '소쿠도'는 "선종
의 포기라고도 할 수 있는 표명" 이라고 자인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실존'으로 받아드리고 있다.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무당 내지는 무녀라고 불리는 존재의 영험한 예지 능력 혹은

신통력에 대한 긍정적 관심이 이 작품을 쓰게 한 동기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후 수상소감에서, "선승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6월에 돌아가신 장모가 주신

관음죽에 본 적도 없는 핑크빛 꽃이 핀 것을 보고 길조라고 생각하는 저는...." 이라고 본인이 말하고

있듯이 이 작품의 매력은 "선승으로는 있을 수 없는 사나이일지도 모릅니다"라는 토로에 나타나 있듯,
선승으로서의 신념과 본분에 대한 자각이 보통 사람들이 갖는 영계에 대한 신앙의 흔들림에 대한 심정

의 솔직한 고백에 있다 하겠다.

"작품의 중요한 기연(機緣)이 된 지승과 대화를 제공해준 아내" 라는 작가의 말대로 그는 대처승이다.

그가 대처승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 읽기에 앞서 대처승이라든가 세습

제라든가 하는 생소한 이야기가 한국의 독자들을 당혹시킬 것이 예상되므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본 불교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이 작품이 아쿠타가와 상 심사위원회

에서 만장일치로 뽑힌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문화의 기층을 이루며, 이토록 많은 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교 작가가 교단내에서 태어나지 않

는 것은 왜일가? 라는 의문을 지녀왔었다...이제 나는 죽음과 구원, 가는 자와 전송하는 자를 그려 투

철한 임종관臨終觀으로 구원의 지평을제시하는 이 작가에게서 한동안 눈길을 뗄 수 없을 것 같다. 또

다른 심사위원은 "종교와 주술呪術이 중첩되어 있는 일본인의 무의식적 현실에 와 닿으려는...정말로

보통 일본인의 무아의 경위境位를 저절로 알아맞힌 것 같은 작품"이라고 평가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64-167쪽

 


얼이 말이구 말이 글이 됐다네 그리하여 얼말글 속에 깨우침이
늘 살고 있다는 구먼, 그려 그렇군 그러네 허허 허- 오늘은 이만 !

http://cafe.daum.net/nicebook 얼마든지 퍼 옮겨도 되는 글..? 좋은책나눔에서 이풀잎 드림.
http://blog.daum.net/pulip41  언제든 그릇된 내용이 있으면 바로 잡도록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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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2.02 17:40

    첫댓글 풀잎선생님 좋은글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항상 건강하세요~~~

  • 작성자 09.02.03 13:48

    고오맙습니다.. 허허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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