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하 세례자요한 신부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15,22-31 요한 15,12-17
요한 복음 15장 12-17절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되어
800여 년 전 가녀린 나뭇잎이나 듬직한 바위나 풀을 뜯는 양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자신을 내려놓은 덕분에 눈이 트이고 귀가 열린 것입니다.
겸손과 가난을 받든 덕분에 보이는 임들 안에서 사랑을 속삭인 것입니다.
어떤 임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고 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모습도 생각도 환경도 다르지만 임을 위하여 내려놓고 받아들이기에 대화할 수 있습니다.
격을 무너뜨린 친구끼리의 대화는 사랑을 만날 수 있기에 힘이 솟고 기쁨이 넘칩니다.
하늘에 계신 임께서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하여 목숨을 내려놓으시고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목숨을 팔아서 당신의 임인 인간을 품속으로 사들입니다.
친구로서 보여주시는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임을 친구로 두었다는 것이 먹지 않아도 배부를 만큼 한량없이 기쁩니다.
/ 광주교구 김동하 세례자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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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우배 요셉 신부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15,22-31 요한 15,12-17
신을 인간으로 만나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을 인간으로 만나게 됩니다.
우리처럼 느끼고, 슬퍼하고, 사랑하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자기가 믿는 신을 우리처럼 인간으로 만나는 종교는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더욱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당신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누며
당신과 일치하도록 초대된 자녀들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십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한낱 피조물인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품격은 엄청난 격상을 하게 됩니다.
옹기장이는 자신이 만든 옹기를 소중히 아낄 수는 있지만, 자신이 만든 옹기를 사랑하고
또 벗이라고 부르며 심지어 자신이 만든 옹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바로 ‘나’라는 옹기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내어 놓으시는지요!
/ 예수회 손우배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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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승 요한세례자 신부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사도행전 15,22-31 요한 15,12-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세상에 있는 종교들을 설명해 놓은 책들을 보면, 유교의 근본 가르침은 인이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자비요,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가장 중심은 사랑이다라고들 적혀있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라고 우리가 지켜야 할 바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계명은 바로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가르침, 바로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언젠가 제가 살고 있는 집 마당에 앉아있는데 동네 꼬마 한 녀석이 입에 음료수 깡통 하나를 물고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장난기가 좀 발동을 해서 ‘아무개야, 그것 좀 나 한 입만 주라’
하고 말을 꺼냈더니, 먼저 깡통을 잠시 흔들어보고서는 제 앞에로 얼른 깡통이 든 손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깡통 안에 음료수가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을 해 본 것이겠지요.
흔들어보니 내가 한 입 정도 먹어도 괜찮을 만큼의 양이 남아있고,
또 명색이 신부인 내가 있는 것을 와락 다 먹어버리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어쨋든 저는 아주 기분좋게 그 음료를 받아
한 입을 먹고는 녀석에게 다시 깡통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과장된 표정으로 ‘어휴 맛있다. 어휴 맛있어. 아무개야 고맙다아“
하고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기분이 좋아하는 것을 보더니, 가기도 기분이 좋은지
이 꼬마 녀석 씨익하고 웃으면서는 뽀르르 골목으로 뛰어가는 겁니다.
그런 뒷모습을 보는 저도 역시 기분이 좋았구요. ”역시 우리 동네 애들은 서로 나눠먹을 줄을
안단 말이야!“ 라고 혼자 기분이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두어 시간이 지난 다음에 벌어집니다.
무언가 제 자동차에 그 꼬마 녀석을 태우고 움직여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자, 안전밸트 매고, 너무 심하게 움직이면 내가 안전운행을 못하니까 얌전하게 있어야 되요.“
라고 말한 후 차를 움직이는데, 아, 이녀석이 글쎄 자동차 안에 있는 동전들을 봐버린 것입니다.
이 녀석 대뜸 한다는 소리가, ”신부님, 나 백원만!“입니다.
”으응, 그건 곤란한데, 신부님이 너한테 돈을 줘야 할 이유가 없쟎아“하고 대답을 했더니,
이젠 약간 톤을 높여서, ”그래도 백원만 주세요“라고 말을 합니다.
똑같은 이유를 대면서 안된다고 했더니, 이 녀석이 이젠 하는 말이
”내가 아까 음료수 줬쟎아요“입니다. 아니, 주기야 줬지만, 음료수 한 모금 마신 것과 내가 자기한테
백원을 줘야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교육적으로 이건 아니다 싶어
저도 언성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서로 나누어 먹는다는 것과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서 주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제 나름대로 알아듣도록 설명을 하기는 했는데
녀석이 제 말을 알아듣고서 조용해진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보다는 귀찮아서
혹은 씨알도 먹힐 것 같지 않은 못된 신부라서 포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해야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법칙은 Give and take라 준 것이 있으면 받아야 하고, 받은 것이 있으면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한 분이셨더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 물고기도 많이 잡게 하고 빵도 많아지게 해서 배불리 먹게도 해주고,
병도 고쳐주었으니, 이젠 내가 시키는 대로 나에게 이러 이러한 것들을 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에게서 우리를 향해 주셨던 그 사랑이 이제는 우리 안에서 서로 나누어지기를 바라십니다.
에릭 프롬이라는 한 심리학자는 자신의 책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위대한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위대한 것은 단순히 자녀가 사랑스러워 자신의 품안에 꼭 품고
자신을 온전히 다 바쳐 헌신한데만 있지 않고 아픔과 외로움을 감내하며 스스로 세상을 향해
설 수 있도록 자신의 품에서 떼어내는데 있다."
맞는 말입니다. 훌륭한 부모는 자녀들을 제 품 안에 놓고 키우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옹야 옹야라고 하며 제 품안의 자식으로만 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부모는 자녀들이 스스로 세상을 향해 설 수 있도록 성장시킵니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다가올지라도 말입니다.
훌륭한 부모는 자녀에게 베푼 사랑이 형제 간의 우애로, 세상을 향한 희생과 봉사로
더욱 더 커져가기를 바랍니다. 그저 내가 주었으니 그만큼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해서야
어찌 자신의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울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빗줄기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없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내려와 당신 사랑의 열매를 맺으십니다.
그 열매는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세상이 알게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받은 계명이 무엇이었던가
항상 기억하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부산교구 서유승 요한세례자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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