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배에 메스가 닿아야 시작이지
- 본문 : 시 42편
◆ 기도
아버지, 긍휼히 여겨 주세요. 몸과 마음이 지칠 때 특히나 육신의 구습을 따라 행치 않게 하소서. 가장 좋은 길은 아버지의 말씀과 성령으로 제 영을 채우는 것입니다. 오후 늦게 말씀을 편 제 모습, 지난 하루 순간순간 짜증과 분노와 날카로움이 웃자란 잡초처럼 발견되었습니다. 연약하고 나부끼는 제 모습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아버지 아니면, 말씀이 아니면 이렇게 금새 시들어 버립니다.
◆ 본문살핌
42편을 시작으로 다윗의 시 외에도 다수의 찬양대 노래들이 등장한다(시편 제2권의 시작). 42편은 고라자손의 노래다. 고라자손은 성전 문지기였다가(대상 9:19, 26:1) 성전 찬양대가 된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의 찬송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신자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신자의 갈망은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이 간절하고 애처롭다(42:1). 그러나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시므로 신자의 하루는 눈물로 점철된다(42:3). 이런 상황애 사람들은 돕기는 커녕 빈정대며 질문할 뿐이다. "네가 찾는 그 하나님이 어디 있냐?" 심지어 이 빈정거림은 종일토록 반복된다(42:3) 그러나 신자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낙심과 불안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타나 도우실 것이니 그분께 소망을 두라"고 이른다(42:5). 이 구절은 5절, 11절, 43편 5절에서 반복된다(후렴구처럼). 신자가 기억하는 하나님은 자신과 친밀히 만나주셨던 분이시며(43:8) 또한 전능한 구원의 하나님이다(43:7,8). 42편과 43편을 하나의 시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러나 나눠보든 합쳐서 보든 큰 의미는 없는 듯 하다.
◆ 묵상
신자의 원수는 종일토록 같은 질문으로 공격한다. "네 하나님은 지금 (이 고통 가운데서) 대체 어디에 있냐?" 이로 짐작컨대 신자의 오늘이 즉각적인 응답 가운데 있지는 않구나 알 수 있다. 사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음직한 일이기도 하겠다. 문제가 여전히 있고 조롱이 여전히 들려오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을 신자의 잘못으로 단정할 수 없다.
치성의 부족해서, 열심이 부족해서 신이 응답하지 않는다는 개념은 무속신앙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형태다. 여호와 하나님은 신도들의 치성에 의해 움직이는 바알같은 신이 아니시다. 사랑과 공포를 먹고 사는 올림푸스의 신들과도 같지 않으시다. 그분의 뜻과 그분의 때에 따라 적합하고도 풍요로운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신자는 간구해야 한다.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신자는 복종하고 사랑하고, 신뢰하고 용서해 주는 상호관계이며 결코 대등한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친밀한 관계, 구하고 간청할 수 있는 관계, 대화하는 관계다. 아브라함의 요청을 들으시고 소돔 땅에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심판을 철회하겠다 하신 분이며, 모세의 간청으로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분노를 거두셨던(모두 없애고 모세로부터 새 민족을 만들 뻔 하였다) 분이시다. 그러므로 욥처럼 아무 말 없이 가만히만 있는 것도 항상 정답은 아니다. 외려 시편은 하나님을 찾는 시인의 부르짖음으로 넘쳐난다.
그런데 응답이 즉각 오지 않아서 이런 절절한 기도들이 나온 것 아닌가. 그럼 대체 왜. 하나님은 즉각 응해주시지 않을까?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은 마치 수술대에 올라가 의사를 기다리며 시계만 쳐다보는 환자를 보는 것 같다. 물론 의사는 오고 있다. 그는 반드시 간호인력과 수술도구를 구비하여 자신이 재 놓은 시간에 맞춰 수술대 앞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는 그러리라고 알면서도 시계를 본다. 기다린다. 언제 오나. 언제올까. 왜 안 올까. 저 발소리는 의사의 것인가 마취약에 몽롱해져 잘못들은 소린가.
사실 수술실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의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의사의 소견과 계획이 아니고서야 환자 혼자 수술실에 들어올 수 있을리가 없잖은가. 그럼 수술은 언제 시작되나? 칼이, 메스의 날카로운 끝이 내 배를 가르는 순간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때 비로소 수술이 시작된다 말할 수 있겠다. 수술실에 실려온 것, 환부를 소독하고 마취약을 투여받은 것, 그런 것들은 수술 자체는 아니고 수술을 위한 준비단계, 전제되는 행위들이다. 물론 꼭 필요한 행위임에는 분명하다.
비유컨대 수술실에 들어오는 것은 신자가 인생에서 겪는 고통들이라 생각된다. 일상에 찾아든 아픔의 시간들, 어두운 수술실에 홀로 들어가는 시간이라 말하고 싶다. 얼마나 고독하고 아프고 두려운 시간인가. 의사는 아직 안 보이지 병은 그대로지... 사방은 어둡고 손에 닿는 침대의 감촉은 차갑고 공기는 건조한듯 습하고 서늘하다.
그러나 수술실에 들어왔어도 몸에 메스가 닿아야 수술이 시작이듯이, 무덤같은 고통의 상황에 처했어도 영혼에 말씀이 닿지 않으면 그 무덤은 베다니 나사로의 닫힌 무덤이지 예수님과 연합된 무덤이 아니다. 말씀이 내 영혼의 메스다. 말씀이 나의 존재를 파헤치고 찔러 쪼개어 하나씩 제하고 하나씩 고치실 성령의 검이자 치료의 광선이다. 이는 내 말이 아니고 사도들의 증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부르짖는 이가 해야 할 일은,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는 마음으로 말씀과 노트를 펴는 것 뿐 이다. 기도만으로는 자의식의 음성, 내면의 무의식적 외침을 신의 음성과 혼돈할 위험이 있다. 기드온의 젖은 양털처럼 눈에 보여지는 상황의 변화만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생각하면 그 또한 잘못된 결론을 내리기 쉽다. 인간은 합리화의 달인이기 때문이다. 그냥 심플하게, 성령께서 인도하고 알려 주시기를 구하면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가장 좋다. 성경 66권을 다 암송하고 있는게 아니라면.
오늘 하루 나라는 사람은 너무 강팍하고 퍽퍽했다. 몸도 안 좋은데 묵상도 오전에 거르고 분주한 일과를 시작한 탓이 분명하다. 왜냐면 지금이 시간, 내 영혼이 다시 평안을 얻고 쉼을 누리고 말랑해졌기 때문이다. 오전에 부린 까칠하고 무례한 언사들에 합리화는 커녕 사죄와 반성의 마음이 든다. 오전엔 내가 나를 변명하느라 바빴다. 그냥 아침에 묵상할 걸.
◆ 기도
아버지 감사합니다. 말씀을 통해 날마다 적합한 은혜의 비를 내리시는 성령님 찬송합니다. 때로 촉촉히, 때론 퍼붓듯이, 그날에 합당한 만큼 생명의 비를 내리시되 이 비가 그치는 날만은 없게 하옵소서. 매일 말씀 앞에 나가겠습니다. 습관으로 만들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장사 복음의 신비,
좌우의 날선 검으로 찔러쪼개는 말씀을 수술실의 메스로 비유하니 쏙쏙 와닿네..
폭포수 같은 생명수가 부어지니 종일 퍽퍽한 심령까지도
은혜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