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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글터지기님의 '1980년대 운동권 야사 모음 1~19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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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명동성당 6월시위항쟁 너무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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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 집회일지와 향후 예상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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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6월 항쟁 일지
1985. 02. 12 -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 실시. 신한민주당(신민당) 제1야당으로 부상
1985. 03. 10 - 노동자·학생 등 1000여 명,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주최로 '근로자의 날' 기념 행사후 노동악법 개정 요구하며 시위
1985. 03. 20 - 신정·목동 주민과 대학생 등 600여 명, '철거중지' 요구하며 시위 및 철야농성(목동시위사태) - 국가안전기획부, 서울과 안동을 거점으로 활동해온 김철(72세) 등 42개 간첩망 14명을 검거했다고 발표
1985. 04. 12 - 노동자·학생 2000여 명, 신당동 일대에서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노동3권 보장 등 요구 시위
1985. 04. 16 -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 2100여 명, 임금인상 요구 시위
1985. 04. 17 - 전국 23개대생 1200여 명, 고려대에서 전국학생총연합회(전학련) 결성
1985. 05. 01 - 세계 노동자의 날' 맞아 대학생·노동자 2800여 명, 영등포시장 로터리에서 노동운동 탄압중지 요구 시위
1985. 05. 17 - 전국 80여개 대학 3만 8천여 명의 대학생들, 광주사태 진상규명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 '민청련' 등 재야단체 회원들도 가두시위
1985. 05. 18 - 신민당, '광주사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특별성명 발표
1985. 05. 23 - 서울대·연세대 등 5개대생 73명, 서울미문화원 점거하고 광주항쟁에 관한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단식농성(26일, 자진해산)
1985. 05. 31 - 신민당, 소속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헌법개정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국회 제출
1985. 06. 07 - 전학련, 서울대에서 8000명 참가한 가운데 광주사태 등에 대한 '국민대토론회' 개최
1985. 06. 22 - 대우어패럴 노동자 300여 명, 구속자 석방 및 노조탄압 중지 요구 농성
1985. 06. 24 - 구로공단내 대우어패럴·가리봉전자·효성물산 및 양평동의 선일섬유 등 4개업체 노동자 1200여 명, 구속자 석방·노동자 탄압 중지·노동법 개정 등 요구하며 연대농성
1985. 07. 06 - 서울대 등 3개대 학생 200여 명, 노조탄압 중지 요구하며 구로공단서시위
1985. 07. 08 - 대한마이크로전자 근로자 70여 명 근로조건 변경에 항의, 노총위원장실 철야농성
1985. 07. 11 - 충북 음성군 농민 50여 명, 소값하락 보상 요구하며 시위
1985. 07. 18 - 정부, '삼민투위' 사건 발표. 김태룡 등 56명 구속
1985. 07. 20 - 정부, 유인물 '깃발' 사건 발표
1985. 08. 01 -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학인 401인 선언' 발표
1985. 08. 05 - 정부와 민정당, 학원사태 해결을 위한 '학원안정법' 제정키로 결정
1985. 08. 13 -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재야 39개 단체로 구성된 '학원안정법반대투쟁전국위원회'와 공동으로 학원안정법 추진 철회 요구 성명 발표
1985. 08. 15 - 노동자 홍기일씨, 광주 YMCA 앞에서 유인물 뿌리며 분신 자살
1985. 09. 05 - 서울시내 6개대생 1000여 명, 고려대에서 '85년도 2학기 민중민주운동선언대회' 열고 연합시위
1985. 09. 09 - 안기부, 김성만·양동화 등 이른바 '구미유학생 학원침투 간첩단' 검거사건 발표
1985. 09. 24 - 서울시내 6개대 학생 2000여 명, 연세대에서 전학련 복구대회 및 민중민주주의를 위한 '삼민투쟁위' 결성식
1985. 10. 01 - 해고된 한국노총간부 김금수 등 4명, 해고무효확인 및 임금청구소송 제기
1985. 10. 08 - 서울시내 12개 대학생 2800여 명, 외채정권 규탄하며 교내외 시위
1985. 10. 17 - 문익환 목사 등 재야인사 60여 명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문수사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 구성
1985. 10. 29 - 서울지검,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과 관련 문용식 등 26명을 구속 발표
1985. 11. 01 - 국군보안사령부, 라종인 등 5개 간첩망 16명 검거 발표
1985. 11. 04 - 고려대생 30여 명, 새마을중앙본부에서 시위 농성 - 서울대 등 서울시내 7개대생 14명, '수입개방철회' 등 요구하며 주한 미상공회의소 점거 농성. 2시간만에 전원 연행됨
1985. 11. 11 - 서울시립대 등 4개대 대학생 9명, 민정당 중앙연수원 상황실 점거 민정당기 불태우며 농성
1985. 11. 15 - 고려대생 6명, '노동악법 철폐' 요구하며 노동부장관 비서실 점거
1985. 11. 18 - 전학련 소속 서울시내 14개 대학생 186명, 민정당 중앙정치 연수원 기습 점거. 헌법 철폐, 수입개방 철회, 권력형 부조리 척결 등 주장 (20일, 191명 구속)
1985. 11. 21 - 서울시내 10개 대학생 2000여 명, 서울대에서 '독재종식과 제5공화국 헌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토론회' 개최
1985. 12. 02 - 전남대·전북대 등 10명, 광주미문화원 점거하고 미국의 수입개방 압력중지 등 요구하며 농성
1985. 12. 04 - 민추협, 개헌추진운동의 일환으로 10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결정 - 감신대생 6명, 전국섬유노련 사무실 점거농성 중 연행
1986. 02. 04 - 경인지역 15개 대학생 1000여 명, 서울대에서 '86 전학련 신년투쟁 및 개헌서명운동추진본부 결성대회' 후 시위
1986. 02. 11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 기독교단체 대표 20여 명, KBS-TV 시청료 거부운동본부 발족식을 기독교회관에서 개최
1986. 02. 12 - 신민당과 민추협, 1000만 개헌서명운동 시작
1986. 02. 24 - 전 대통령, 3당대표회담 '1989년에 국민의 의사에 따라 개헌할 수 있다'고 언급
1986. 03. 01 - 천주교 서울대교구, 125개 성당서 '정의와 평화를 간구하는 시국기도회' 시작
1986. 03. 17 - 신흥정밀(주) 노동자 박영진 씨, 임금인상요구 농성 중 분신자살
1986. 03. 19 - 노동자 120여 명, 구로공단 일대에서 박영진군 추도시위 벌여
1986. 03. 28 - 고려대 교수 28명, 시국선언문 발표
1986. 04. 02 - 한신대 교수 42명, 개헌촉구 시국성명서 발표, 이후 각계로 파급
1986. 04. 28 - 서울대생 김세진·이세호 씨, 전방부대 입소거부 시위 도중 반전반핵 외치며 분신자살 기도(5·3, 5·26 각각 사망)
1986. 04. 29 - 전국 30개 대학생 1000여 명, 연세대에서 '전국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학생연합(전민학련)' 결성
1986. 05. 01 - 구로공단 노동자 100여 명, '삼민헌법쟁취' 등 구호 외치며 횃불 가두시위
1986. 05. 03 - 학생·노동자 등 5000여 명, 신민당 개헌추진위 인천지부 결성대회에서 경찰과 충돌. 129명 구속(5·3 사태)
1986. 05. 10 - YMCA중등교육자협의회 산하 교사 546명, '교육민주화선언' 발표
1986. 05. 15 - 대학교수와 전현직교사 120여 명, '민주교육실천협의회' 발족
1986. 05. 18 - 유족, 대학생들 1000여 명, 망월동 묘지에서 광주항쟁희생자 제6주기 추모식후 시위
1986. 05. 20 - 서울대생 이동수 씨, 문익환 목사의 강연회 도중, '미제 물러가라'는 구호 외치며 분신 자살
1986. 05. 21 - 서울대·고려대생 21명, 부산 미문화원 점거
1986. 05. 30 - '서노련', '인노련' 소속 해고근로자 16명, 반미구호 외치며 한미은행 점거
1986. 06. 02 - 전국 23개대 교수 265명, 정치·경제·사회·대학 등 4대 항목에 대해 시국선언문 발표
1986. 06. 17 - 영남대생 등 5명, 한미은행 대구지점 점거, 반미시위 농성
1986. 06. 22 - 서울대생 김성수씨, 부산 송도 매립지 앞바다에서 익사체로 발견
1986. 07. 02 - 부천에서 성고문사건 알려짐. 인천지역 구속자가족 30여 명 문귀동 형사의 성고문에 항의농성
1986. 07. 16 - 상계동·하왕십리 철거민 130명, 재개발계획 중지를 요구하며 명동성당 입구 시위
1986. 08. 12 - 분신·투신자살 노동자 유가족 10여 명,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결성
1986. 08. 14 - 신민당과 재야 34개 단체 공동주최, '고문·성고문 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 개최, 2000여 명 참가
1986. 08. 29 - 민주교육실천협의회 회원 초·중·고 교사 300여 명, '민주교육실천대회'를 갖고 '교육악법 철폐' 등 결의
1986. 09. 07 - 대한불교조계종 승려 2000여 명, 해인사에서 '불교악법 철폐' 등 결의
1986. 09. 17 - 고려대생 등 5명, 일본대사관 점거, '나카소네 방한 결사반대' 등의 구호 외치며 농성
1986. 10. 24 - 경찰, ML당 사건 발표, 27명 검거
1986. 10. 28 - 25개대생 2000여 명, 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발대식 후 시위중 경찰에 밀려 철야농성
1986. 10. 31 - 경찰, 전경 8000여 명을 투입, 건대 농성 학생 1,219명 전원 연행(총연행자1,525명)
1986. 11. 12 - 경찰, 민통련 사무실 폐쇄 - '반제동맹당' 사건 수사발표
1986. 11. 13 - '민민투' 소속 대학생 500여 명, '반미·제헌의회소집' 등 외치며 야간 기습시위
1986. 11. 18 - KNCC 소속 교직자 60여 명, 민정당사 앞에서 군부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 중 연행
1986. 11. 29 - '서울개헌대회', 경찰봉쇄로 무산, 산발적 가두시위로 2200여 명 연행. 6월항쟁 당시 데스크의 부당취재에 대항한 기자들의 입장
1987. 01. 14 - 서울대생 박종철군,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
1987. 02. 07 -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에 대한 경찰의 원천봉쇄로 전국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 경찰 799명 연행
1987. 03. 03 - '박종철군 49제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거리시위, 439명 연행됨
1987. 03. 04 - 선린상고생 400여 명, 교육민주화 선언한 교사의 백령도 전출에 항의농성
1987. 04. 02 - 서울대 학생 학부모 130여 명, 건대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 요구하며 철야농성
1987. 04. 09 - 서울 택시기사 2000여 명, 업적급여제 폐지를 요구하며 차량시위 및 연대파업
1987. 04. 13 - 전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 성명, '현행헌법으로 정부이양', '대통령 선거 연내 실시' 발표(4·13 호헌 조치)
1987. 04. 14 - 김수환 추기경, 4·13 조치를 비난, 이후 각계에서 시국 성명이 발표됨
1987. 04. 24 - 가칭 '통일민주당' 관악지구당 창당방해 사건 발생
1987. 05. 01 - 경찰, '서울남부지역노동자연맹' 사건 발표 - 신민당 탈당의원 66명 등 김영삼을 총재로 하는 '통일민주당' 창당
1987. 05. 12 - 미국 상원 외교위, 4·13 조치 재고를 촉구하는 '대한결의안' 통과
1987. 05. 20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축소·조작되었으며, 전범이 따로 있다'는 내용의 성명 발표 - '정토구현전국승가회', '민불련' 등 90여 명, 5·18 추모법회 중 경찰의 광주 원각사 난입에 항의하며 서울 개운사에서 농성
1987. 05. 23 - 재야인사 등 134명, 기독교회관에서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하고, 6월 10일 규탄대회 갖기로 결정
1987. 05. 26 - 전대통령,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문책개각 단행, 총리 임명
1987. 05. 27 - 민주당·종교계·재야단체 등 발기인 2191명,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발대식 거행하고 4·13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
1987. 06. 09 - 연세대생 이한열 군, 학교 앞 시위 중 최루탄에 부상 (7·5 사망)
1987. 06. 10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18개 도시 가두시위 형태로 전개
- 민정당 전당대회 개최하고 노태우 대표위원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
- '6·10 고문살인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개최 장소인 성공회대성당 원천 봉쇄됨. 오전 10시경 성당 옥상에서 민정당 전당대회의 무효를 선언하는 성명 발표. 오후 5시 경, 김성수 성공회주교의 집전으로 4·13 조치 철회를 위한 미사 거행.
* 수원 오후 6경, 남문 주위로 모여든 1000여 명의 시위대가 3곳에서 연좌시위 후 매교동성당에서 철야농성과 토론진행. 4·19 이후 수원지역 최초의 대중적 정치시위.
* 인천 7개 단체 연합체 인천공대위의 주도로 주안역·백운역·부평시장·부평4공단·청천동 등지에서 시민·학생·노동자 등 1만여 명이 모여 오후 4시경부터 자정 너머까지 시위.
* 성남 오후 7시경, 인하병원 앞 170여 명이 연좌예배를 마친 후 시청으로 행진, 3만 여 시민·학생들이 집결하여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성남시민대회준비위원회]의 주관 하에 집회 개최
* 부산 대회장인 대각사 주변을 비롯한 시내 곳곳에 삼엄한 경비망이 쳐진 가운데 부산시민·학생 수만여 명이 오후 5시경부터 '독재타도, 민주헌법 쟁취' 등을 외치면서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계속
- 부산대생 300여 명이 교내 곳곳에서 '구국출정식'을 갖고 부산의대·치대, 동아대, 부산산업대, 외국어대, 동의대 등에서 6·10대회 참가를 결의하는 출정식 거행
- 가톨릭센터 앞, 충무동 국제시장, 부산역, 광복동 거리 등에서 오후 11시가 넘을 때까지 산발적 시위 계속 * 마산 시위대가 마산공설운동장에 진입하면서 경찰이 마구 쏘아댄 최루탄 가스로 인해 국제축구대회 한국A팀 대 이집트의 경기가 무산됨. 경기장 관중들이 합세하여 3만여 명의 시위대가 자정까지 시위 계속.
* 울산 1000여 명의 시위대가 오후 6시 30분경부터 곳곳에서 오후 11시경까지 시위를 전개.
* 대구 대회장이었던 대구중앙공원을 비롯 시내 중심가가 철저히 봉쇄된 가운데, 오후 5시경부터 시내 30여 군데에서 시민·학생 등 2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시위 계속. 오후 8시경 연행 버스에 집중 투석하여 연행자 전원 구출.
* 포항 대회예정지였던 죽도시장이 봉쇄되자 그 앞에서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약식 규탄대회를 갖고 자정까지 시내 곳곳에서 산발시위 계속
* 안동 2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밤 8시경까지 시위 후 해산
* 경주 별도의 규탄대회 개최예정이 없었으나 동국대생 100여 명이 자정까지 가두시위를 벌임. 가두시위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있는 일이었음.
* 대전 대회장인 가톨릭 문화회관에서 도민대회 옥외방송을 시작으로 시위대가 늘어나기 시작. 오후 9시경에는 중앙로에 4~5000여 명의 시민이 결집해 연좌농성하며 대치, 자정까지 이어짐.
* 광주 시민·종교인·학생 등 수만 명이 오후 5시경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금남로·충장로 일대 등에서 시위전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상당수 시민 부상, 총 239명 연행, 오후 5시경 가톨릭센터 옆 골목과 금남로 4·5가에서 시민·학생·목사 등 1000여 명 시위 시작. 오후 6시경 가톨릭센터에서 녹음된 타종을 방송, 이에 맞추어 도청 앞에서 미문화원에 이르는 보도에 5000여 명이 돌과 화염병 시위. 기와 피켓, 프랭카드 등을 들고 연좌농성 시도, 전북대에서도 학생 1000여 명이 돌과 화염병 시위.
* 춘천 죽림동 성당에서 신부 등 50여 명 미사 후 성명서 낭독, 가두진출 감행, 20여 명 연행
1987. 06. 11 - 성공회안에서 대회를 주관했던 국민운동 관계자 11명이 기독교회관으로 들어가려다가 경찰에 의해 남대문경찰서로 연행됨(박형규·계훈제·양순직)
- 서울시내 7개 대학생 1000여 명 '명동출정식' 거행후 도심에서 산발 가두시위. * 수원 경기대생, 연행된 동료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철야농성 전개. 서울농대생, 동맹휴학 촉구하며 총학생회가 단식농성 시작.
* 대전 충남대생 700여 명, '6·10 보고 및 규탄대회'에서 학기말고사 연기 결의후 200여 명 도서관 철야농성. 한남대생 500여 명 경찰과 대치후 가두로 진출.
* 전주 덕진동 공설운동장에서 프로야구 해태-OB전 끝난 후 관중 500여 명 20분간 투석전
1987. 06. 12 - 명동성당 주변에서 점심식사길의 회사원·시민 등 1000여 명이 '호헌철폐'를 외치며 시위. 오후 2시경 연세대생 3000여 명 '살인적 최루탄 난사에 대한 범 연세인 규탄대회' 개최 후 학교 앞 도로점거 연좌시위. * 부산 부산지역총학생회협의회 소속 대학생 1500여 명 부산 수산대에서 연합집회 개최후 투석, 화염병 투척 등 격렬시위
* 춘천 강원대생 1000여 명 교내 시위 후 횃불시위,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가 오후 11시 20분경 해산.
1987. 06. 13 * 부산 병영집체훈련 마치고 부산역에 도착한 수산대·산업대생들과 마중나온 학생들이 합세한 1000여 명, 역앞 8차선 도로 점거 연좌농성. 주변 1만여 시민, 박수로 환호부산대에서 집회를 마친 학생 7000여 명 중 2000여 명이 경찰 저지선 돌파로 가두진출, 사직동·고속버스터미널까지 진출.
* 대전 한남대생 1000여 명, 도서관 앞 집회 후 대치 중 동료학생의 최루탄 부상에 항의 200여 명 철야농성
1987. 06. 14 -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6·10대회와 관련 "우리의 기도와 선언"제하의 성명서 발표. 명동성당 주변 1500여 병력 완전 철수. * 부산 사직동 프로야구(롯데:해태) 경기 종료후 많은 관중들 '우리의 소원', '애국가' 등을 부르고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발적으로 시위
* 광주 5시 30분경, 광주시 동구 문빈정사에서 불교승려와 신도 100여 명 '민주쟁취 및 구속자 석방을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
* 전주 4시경, 예수교장로회(통합) 전북노회 주최, '나라를 위한 연합예배'가 성직자·신도 등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부교회에서 열림. 예배후 가두시위
1987. 06. 15 -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회의에서 현 위기수습방안 제시 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평화적인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거행하겠다고 발표. 4·13호헌조치 철회, 6·10대회관련 구속자 및 양심수 전원 석방, 집회시위 및 언론자유보장 등 요구
- 명동성당, '나라와 민주화를 위한 특별미사' 후 학생·시민·신자 등 1만 8000여 명 촛불가두 행진.
* 부산 부산산업대·수산대 등 부산시내 일부대학 학기말고사 거부하고 부산대 등 대학별 시위 후 가두로 진출, 서면일대·광복동·국제시장·부산역 등에서 자정이후까지 시위 계속
* 마산 마신대·경남대·창원대생들의 교내시위와 가두시위 이어짐. 경상대생 3000여 명, 진주시청 앞과 시내 간선도로 등에서 농성과 시위.
* 대전 한남대·충남대생 각각 5000여 명 결집, 교내집회 후 대전역까지 평화행진. 대전역 광장에서 대중집회 후 한남대생 주도로 다음날 새벽 1시 20분까지 시위 후 100여 명은 철야농성.
* 청주 청주대생 600여 명, 6·10대회 중 사고를 당해 입원중인 동료에 대한 최루탄 배상 요구와 반정부 구호 등을 외치며 격렬한 시위.
1987. 06. 16 - 국민운동본부,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결정, 행동지침 발표
- 연세대생 2000여 명, '조국을 위한 민주화와 이한열 군 회복을 위한 기도회' 개회
- 시민·학생 등 500여 명, 명동주변 시위
- 경찰, 국민운동본부 사무실 수색해 성명서·상황일지 등 압수
* 수원 수원역 앞에서 시민·학생 등 1만여 명이 모여 밤늦게까지 대중집회 갖고 시국토론 진행
* 부산 부산지역 9개 대학에서 6000여 명 비상학생총회 개최. 전날 시위 평가회 가진 후 구속자 석방과 군사독재 타도에 의견일치, 오후 6시에 남포동에 집결할 것을 결의. 부산대 등 6000여 명 가두시위, 오후 9시 30분경 농성·시위대 300여 명 가톨릭센터 앞 유엔로를 점거 연좌시위, 도로마비. 오후 11시 40분경 학생들 자진해산 종용 위해 경찰 완전 철수.
* 광주 3시 40분경 전남대생 2000여 명 교내 중앙도서관 앞에 모여 '제 2차 전남대민주학생 비상총회' 개최 이후 교문 앞 시위 도중 학생 5명이 연행되자 주변의 시민들이 경찰차를 막고 석방을 요구, 연행학생 모두 풀려남. 전남대생 '호헌철폐 및 최루탄 추방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 구성
1987. 06. 17 * 부산 전날 시위가 그대로 이어진 가운데 새벽 3시경 국제시장 신호대 앞 바리케이트 설치후 시위중 경찰과 충돌, 최루탄 발사하자 경찰 기동대 버스 반소 및 승용차 1대 파손. 부산시내 10개대생 7000여 명 각각 교내에서 출정식 거행, 500여 명은 가톨릭센터 안에 남아 농성하기로 결정. 그 후 350여 명은 7일간 군사독재 타도 양심수 석방 등을 요구하며 농성 결의, 오후 10시 35분경 3만여 시민·학생 부산 KBS 앞에서 경찰과 대치중 방송본부 건물을 습격, 철제 울타리 30개 파손
* 마산 경상대생, 마산발 진주행 열차를 점거 농성하다가 해산.
* 대구 대구지역 5개대학 연합시위 3일째인 이날 8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5시간 동안 시위, 이날 시위로 학생·시민 등 30여 명과 경찰 7명이 중경상, 저녁시위때는 부녀자 등 일부 시민이 로얄호텔 앞에서 시위대열에 앞장서는가 하면 학생을 연행하려는 전경에 야유와 제지를 하고 최루탄 발사에 항의.
* 광주 전남대생들 교내에서 '호헌철폐 및 최루탄 추방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 결성식 마친 후 시내로 진출, 시내 10여 군데에서 비폭력적 산발 시위
1987. 06. 18 -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 장소인 연동교회가 경찰에 의해 완전 봉쇄. 기독회관 1층으로 집결 중 고려대생과 전경 대치, 2500여 명의 학생들은 동대문에서 연좌 '독재타도, 호헌철폐' 구호 외침. 종로 5·6가 일대 시민·학생 1만여 명 등 시내 곳곳에서 오후 3시 30분경부터 11시까지 시위 지속. * 인천 최루탄 추방대회'에 4만여 명 이상의 시민이 참여.
* 수원 동수원감리교회에서 기도회를 마친 신도들과 시민들이 빈센트 병원쪽으로 시위행진.
* 성남 시위대 2만여 명이 전경 포위 무장해제 시킴.
* 부산 새벽 1시 20분경 서면로 로터리에서 택시 200여대 경적시위. 부산역과 초량 삼거리에서 택시 기사 100여대 1시간 동안 경적시위. 새벽 2시 20분경 초량동 YMCA 뒤 편에서 흩어져 있던 시위대 횃불시위. 오후 4시 시민포함 3만 5000여 명의 시위대가 영주파출소 등 파출소 3곳을 습격, 민간트럭과 소방차 탈취. 부산진구 중앙로에서 택시기사 300여 명, 3시간 40분 동안 시위, 경찰에 의해 시위주동혐의로 2명 구속됨. 서면 로터리에 6만여 시위군중 운집.
* 대구 최루탄 추방대회가 경찰에 의해 저지되자 1만여 명의 시민·학생들이 한밤 도심에 집결 시위 지속. 연 나흘째 계속된 이날 시위에서 경찰의 최루탄 무작위발사가 시민들의 거센 항의 야기. 시위대도 투석전과 화염병 투척 등 종전과 달리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
* 광주 전남대생 500여 명이 충장로 1가 무등극장 앞 길을 점거하며 시위를 시작, 시민 3000여 명과 함께 도심지 20여 곳에서 최루탄 발사에 항의하는 평화시위를 벌임. 이후 학생·시민 400여 명, 동구의 남동성당으로 들어가 철야농성.
* 춘천 강원대·한림대생 등 3000여 명, 8호 광장 로터리·운교 로터리·명동·도청 앞 광장 등에서 산발 시위, '비폭력'으로 진행되다가 오후 11시 투석전으로 변함. 경찰장비 30여 점 탈취하여 소각시킴
1987. 06. 19 - 고려대생 3000여 명 시국토론회 개최 및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 출정보고회' 후 경찰에 투석 등 교문 밖 진출시도, 시위전개. * 성남 4만여 명의 시위대중이 시청 앞에서 '무장해제'를 외치며 전경과 격렬한 몸싸움 벌임. 이 와중에 테레사 수녀가 사복형사에 의해 집단 폭행당함. 시위는 다음날 아침 7시경까지 계속됨. 6·10대회 이후 최대의 격렬한 양상.
* 부산 전날 시위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부산역 앞 간선 도로 점거 시위대 5000여 명, 새벽 0시 45분경 방송국 점거 시도, 경찰 저지로 실패. 이후 시청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격하였으나 경찰 저지선 돌파 실패, 오후 11시경 가랑비가 계속 내리자 시위대가 줄어 1300여 명으로 줄어듦.
* 마산 오후 6시경 5000명으로 늘어난 시위대, 88올림픽 선전탑을 부수고 불태움.
* 대구 비가 내리는 가운데 5000여 명이 결집, 연 5일째 시위. 낮에는 학생들이 제의한 무탄무석이 받아들여져 평화 시위가 이루어졌으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최루탄과 돌이 등장 격렬해짐.
* 광주 8시경 학생·시민 등 500여 명이 동구 계림동 파출소를 점거, 집기 등을 밖으로 꺼내 소각. 10시경 시민들의 대거 참여로 1만여 명 이상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원각사 앞 중앙로 일대와 금남로 3·4가, 공용터미널, 충장로 일대 등에서 20일 아침 8시경까지 철야시위. 경찰은 이날 광주에서 모두 63회 연인원 4만 40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
* 전주 정오에 전북대생의 시위를 시작으로 대통령배 축구시합이 끝난 후 관중들이 시위대에 합세, 6000여 명 시위에 참가.
* 춘천 오후 11시경 강원대 2000여 명, 비상학생총회 개최 후 학내시위하다가 오후 3시경 해산한 후, 1만여 명의 시민·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거리에서 저녁 6시부터 새벽 2시경까지 시위 지속.
1987. 06. 20 - 경찰의 원천봉쇄 속 종로1가 소재 조계사에서 '민주화를 위한 구국법회' 진행, 승려 70여 명과 신도 1백여 명이 법회 후 조계사 앞 큰 길로 시위행진.
- 명동 일대에서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 투석전 등 전개
- 오후 8시경 구로공단내 가리봉 5거리에서 노동자 80여 명, '호헌철폐, 독재타도'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투석시위. * 성남 저녁 9시경 전날 경찰의 폭력규탄 시위, 자정까지 계속됨. 경찰의 최루탄 공세에 돌과 화염병 투척.
* 부산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사제단 위원장 박승원 신부, 가톨릭센터 내 학생농성과 관련 기자회견. 지하철 서면역 중심 시위 새벽 2시까지 산발 전개.
* 대구 6개대 학생 5000여 명이 대구 시내 곳곳에서 6일째 가두시위, 10시간 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임. 달성파출소가 화염병에 전소된 것을 비롯, 4개 파출소가 불타거나 부서짐.
* 광주 7시 35분경, 중앙대교 앞에서 스크럼을 형성한 학생 중심의 500여 시위대에 주변 시민들 급속히 가세, 약 3만 명으로 증가하여 중앙로 앞까지 도로를 완전 장악. 7시 42분경, 중앙로-대성국로 사이 지역에 10만여 명 운집, 메가폰과 마이크를 사용하며 시위 계속. 9시경, 원호청-광주은행 사이 약 20만으로 추정되는시민운집.
* 춘천 강원대·한림대생 1000여 명이 밤 늦게까지 격렬한 가두 시위.
* 해외 약 200여 명의 재미 한인들이 샌프란시스코 영사관 밖에서 한국의 반정부시위를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임
1987. 06. 21 - 오후 5시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신도 및 학생 2000여 명, 종교교회에서 '민주화를 위한 구국기도회'를 가진 뒤, 이 가운데 800여 명이 교회 밖으로 진출 1시간 동안 시위. * 부산 0시를 기해 택시운행이 전면 중단
- 오후 4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학생과 일부시민 5000여 명 부산시내 주요 간선도로 점거하고 반정부 가두시위 계속. 오후 5시 부산지역총학생회협의회, 서면 로터리에서 '범시민궐기대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자, 이후 가두시위로 이어짐. * 대구 대학생 중심의 1500여 명, 경북대 운동장에서 '2보 전진을 위한 애국학생 시민연합 대동제'를 개최
* 광주 새벽 1시경 공원쪽 시위대가 중앙로 시위대에 합류, 10만여 명 운집. 시내 곳곳에 대자보 붙고, 시국토론회 전개. 새벽 4시경, 호남동 천주교회 부근에서 시민들이 스스로 화염병 제작, 학생들은 비폭력을 주장했으나 시민들은 화염병 사용의 정당성을 주장함.
- 오후 1시경 고등학생 350여 명이 모여 광주지역 민민투 결성. 10시경 중앙로 쪽 시위대와 공원 부근 시위대가 선현교회 방면에서 합류, 1000여 명의 대열 형성.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민들이 제작한 화염병이 사용됨. * 제주 제주대생 100여 명이 제주종합시장 앞 중앙로에 집결하여 경찰과 대치하는 등의 시위를 벌임.
* 해외 LA교민 1500여 명, 코리아타운에서 3시간 동안 개헌요구시위 및 집회 개최
1987. 06. 22 - 국민운동본부, 22일부터 28일까지 '민주화실천기간' 선포
- 동국대학교 복학생들, 장충단 공원에서 예비군훈련 거부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을 외치며 퇴계로 방면으로 진출 가두시위
- YMCA회관 정문에서 1000여 여성, "최루탄을 쏘지 말라" 서명운동 전개
- 광화문 새문안교회에서 목사·장로·신도 등 1500여 명, 기도회 마친 후 촛불가두시위. 경찰의 최루탄 난사로 밀린 1000여 명, 철야농성
* 부산 부산대 1000여 명 등 대학생들 가두로 진출. 오후 9시 45분 가톨릭센터에서 농성하던 시민·학생들 해산 후 귀가 도중 이들이 탄 버스가 부산대 앞에서 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발사 및 구타와 함께 남부서로 전원 연행됨.
* 대구 방학이 실시된 이날 4개대생 2500여 명 자정까지 7시간 가량 연합시위 지속. 경찰은 병력을 50%정도로 증원, 전격적으로 체포조를 동원, 마구잡이 연행 시작, 110명 연행
* 안동 약 2만여 명의 시위대가 22일 목성동 성당에서 농성중 연행된 곽종철 군 등 9명의 석방요구를 관철시키고 해산.
* 김천 김천 정생회, 김천·금릉·상주·선산지구 가톨릭 농민회, 기독교 농민회 회원 및 통민당 당원 등 70여 명이 김천역에서 모여 가두 시위
* 광주 새벽 0시 30분경, 중앙교회 앞에서 택시 중심 차량시위. 1시경 전남대 의대생 400여 명, "한병근을 살려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 치대생 합세하여 의대 앞 로터리에 재집결, 일반시민 가세. 학생들 '경적'이라고 쓰인 종이를 들어보이자 차량들 계속 경적으로 호응함. 9시경 1만 5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 최루탄 난사에 대항해 화염병·각목·투석전 전개
* 전주 국민운동본부 및 제 민주운동단체들이 6월 22일~28일을 '민주화실천기간'으로 선포, 저녁 9시경에 시위대가 2만여 명으로 급증, 새벽 2시까지 투석전 전개.
* 제주 제주대생 2000여 명이 교내에서 민주화 출정식을 가진 후 제주시내 중심가 쪽으로 8km 행진, 오후 4시 30분 중앙로타리에 집결, '민주헌법쟁취범도민실천대회'를 개최, 오후 11시 30분까지 시위. 100여 명은 중앙성당 앞 뜰에서 철야농성.
1987. 06. 23 - 서울지역 25개 대학생 2만여 명,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주최로 '호헌철폐와 독재종식을 위한 서울지역 청년학도 결의대회'를 갖고 6·26 국민평화대행진 적극 참여 결의.
* 부산 오후 3시 전후 부산대·동아대·부산산업대 등 1500여 명 학교별로 '가톨릭센터 농성 보고대회 및 가두출정식' 개최.
* 광주 3시경 신흥택시 기사들 라이트 켠 채 경적시위, 4시경 중앙로 4거리의 택시 시위대 도청쪽으로 이동, 1만여 명 택시 뒤에 쓰인 '독재타도' 뒤따라 가며 시위. 7시경 광주상고생 200여 명 '독재타도, 최루탄 추방' 구호 외치며 시위.
* 전주 6시경 민주화실천 이틀째를 맞아 1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 코아백화점 앞으로 운집, 8시경에 2만여 명의 시위대가 '시국토론회'를 개최. 기도회를 마친 4000여 명의 '촛불대행진' 행렬과 합세, 시위군중 4만 명으로 급증.
* 제주 제주대생 700여 명, 중앙로터리에서 가두시위 전개, 새벽 1시까지 지속.
1987. 06. 24 - 제헌의원 이상돈 씨등 전·현직 의원 71명,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입장' 제하의 성명서를 통해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시위 적극지지' 표명.
- 대학생과 노동자 700여 명, 영등포역과 영등포 시장 부근에서 2시간여 동안 산발 시위
- 전·김 회담 개최되었으나 김영삼 민주당 총재 측에서 협상 결렬 선언. * 부산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단 소속 신부 80여 명, 가톨릭센터 농성해산자 집단 구타 사건에 항의. 가톨릭센터 7층에서 항의농성 돌입. 6·18 시위 현장에서 직격탄 맞아 입원중이던 회사원 이태춘 씨 사망.
* 대구 경북대·계명대·영남대·대구대 등 4개생, 9일만에 가두시위없이 교내집회만진행.
* 광주 새벽 0시경 서현교회 앞 횃불시위 주력 500여 명과 시민들 3000여 명, 12시경 고교생 100여 명의 집단적 참여로 시위대 2만여 명으로 증가, '4·13철회만이 아닌 군사독재 타도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시민토론회 개최.
* 전주 6시경, 시민·학생 2000여 명, '민주개헌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실천대회' 개최 이후, 시위대 1만여 명으로 늘어나 새벽까지 격렬 시위.
1987. 06. 25 - 민주당 최루탄조사대책특위 소속 의원 10여명, 최루탄 제조회사인 S화학을 방문, 최루탄 제조 중지 촉구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국민운동본부 참여 변호인단, '6·24여야영수회담'결과에 대해 공동성명 발표
- 서울대·경기대 등 150여 명, 구로동 코카콜라 공장 앞 4차선 도로 점거, 격렬시위, 불발 최루탄 터져 7명 부상 * 부산 부산시경, 6·10대회 이후 부산시내 시위 주도 학생, 재야인사 64명 긴급 검거령
* 진주 3시경 전북도내 7개 대학 6000여 명 전북대 '민주광장'에서 '전북지역대학생협의회' 결성 이후 가두 연좌시위
1987. 06. 26 - 전국 37개 도시에서 평화대행진 시위, 경찰 3467명 연행.
* 수원 북수동 성당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를 마친 신부·수녀와 7000여 명의 군중이 수원역으로 행진. 밤 11시 1만여 명의 시민이 수원역에서 집회, 남문시장 안 노점상 50여 명이 자체적 시위 벌이며 학생들에게 동참을 촉구.
* 성남 '성남지역 민주화연합(의장:이해학 목사)'이 '평화대행진' 선포, 3만여 시위대 평화행진, 자정 무렵 해산. 이후 시내곳곳에서 새벽 3시까지 산발적 시위 계속, 중앙파출소 점거. '노동3권 보장', '저임금 박살' 등의 구호 등장.
* 인천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서도 1만여 명의 시민·노동자·학생들이 도로를 완전점거한 가운데 시위,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지속, 부평로의 대중집회에서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보고대회 개최.
* 안양 대학생·노동자 4000여 명이 오후 8시경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철야 시위.
* 부산 오후 4시경 신부 70여 명, 수녀 700여 명과 신도 등 2500여 명이 중앙 성당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 거행. 미사후 가톨릭센터 앞까지 침묵시위. 이후 부산시내 전 지역에서 27일 새벽 2시까지 시위 지속.
* 마산 국민대회에 앞서 경찰책임자와 '무탄무석'을 약속한 후 촛불행진, 다음날 새벽까지 평화적인 시위가 계속됨.
* 대구 4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 유신학원 네거리-반월당 네거리-명덕로터리-수도산 사이의 간선도로 등에서 27일 새벽 1시 30분까지 시위, 가장 격렬한 양상 전개.
* 대전 시내 중앙로, YMCA 앞 원동 4거리, 가톨릭 문화회관 앞, 선화교 등에서 연 인원 5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오후 11시 20분경 까지 시위. 경찰은 오후 9시경부터 충남국민운동본부·대전인권위원회·충남민청의 전화를 불통시킴.
* 광주 6시경 원각사 앞, 5·18 유족회·국민운동전남본부 중심으로 2000여 명 시위. 7시경 한일은행 사거리 일대 10만여 명 운집 시위, 27일 새벽까지 산발시위 계속, 26일의 시위는 20~30만에 달하는 최대 규모의 시위.
* 전주 농민·학생·시민 등 2만여 명이 7시에 관철동 네거리를 점거 연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전북본부' 주도하에 '민주헌법쟁취 전북도민평화대행진' 발대식을 갖고 10만으로 늘어난 시위대와 함께 서광중학교 앞까지 대행진을 강행.
* 춘천 명동 입구에서 개최하려던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봉쇄되자 오후 11시20분까지 시내 곳곳에서 산발 시위.
1987. 06. 27 - 충남 중·고교 교사 34명,' 교육민주화' 선언. * 부산 직격최루탄 맞아 사망한 이태춘 씨 국민운동본부장 장례식이 범일동 성당에서 거행, 500여 명 참석.
* 대구 대구 지역 5개대생 7백여 명, 경북대 대강당에서 3시간 동안 '애국학생 6·26연합보고대회' 개최 후 행동 방향을 논의, 가두시위 계속할 것을 결의
1987. 06. 29 -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 8개항의 시국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6·29 선언)
- 국민운동본부·민통련·변협·NCC, 개헌작업 즉각 착수와 양심수 전원석방 및 수배해제 촉구 성명
1987. 06. 30 -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단, 7일만에 농성 해제
- 민가협 구속자 가족 70여 명, 민정당 중앙당사에서 전원 석방 요구 농성
1987. 07. 01 - 전대통령,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6·29선언 8개항을 모두 수용 - 파주여자종합고 전교생 시위, 학내민주화와 교장 및 폭력교사의 퇴진을 주장
1987. 07. 02 - 이리 '후레아훼션' 해고노동자 12명, 독일대사관에서 해고자 복직요구 농성 돌입
1987. 07. 03 - 시민·학생 1만 5000여 명, 서대협 주최로 연세대에서 시국토론회 개최 - 서울구치소 양심수 100여 명, 전원 석방 요구하며 단식 농성
1987. 07. 06 - 서울지역 대학생 8000여 명, 연세대에서 이한열 추모집회 후 시위 - 이천경찰서 소속 전경 양승균, 양심선언 발표 후 NCC에서 농성
1987. 07. 06 - 한국기독교총연맹 등 노동관계 17개 단체, '민주헌법쟁취 노동자공동위원회' 결성
1987. 07. 08 - 민통련 문익환 의장 등 시국관련 357명 가석방, 가결 양심수 86명은 제외
1987. 07. 09 - 고 이한열 열사 영결식, 시민·학생 1백만여 명, 서울 시청 앞 운집,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
1987. 07. 10 - 정부, 김대중 등 2335명 사면·복권, 357명 석방, 270명 수배 해제
1987. 07. 11 - 성공회 서울사제단, 성당내 경찰 난입과 기물파손에 항의, 단식농성 돌입 - 여성단체연합, 명동성당에서 '민주시민대동제' 개최
1987. 07. 12 - 33개 단위노조 간부들, 노동법개정을 촉구하기 위한 '노조 민주화실천위원회' 결성 - 인천 자유공원에서 열릴 예정이던 '이한열 군 추모 및 양심수 전원석방 촉구대회'가 경찰에 의한 무차별 각목 폭행으로 무산, 360명 연행
1987. 07. 13 - 문화방송(MBC) 기자와 프로듀서 95명, 관선경영진 퇴진과 방송 민주화 요구하며 제작 거부 농성
1987. 07. 14 - 국민운동전남본부, 시민대회 개최
1987. 07. 15 - 문화방송(MBC) 기자와 프로듀서, '방송민주화추진위원회' 구성하고, '지시성' 프로그램은 제작·송출 거부키로 결의 - 청계피보노조, 사무실 탈환
1987. 07. 16 - 인천 성진택시기사 80여명, 일일업적금쟁취 농성 돌입
1987. 07. 17 - 김대중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대통령 불출마 선언 번복
- '구속청년학생협의회' 발족
1987. 07. 18 - 경기도 안성농민 권영규 씨, 학생들의 농촌활동 제공 막은 기관에 항의, 음독자살
1987. 07. 19 - '서울지역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발족
- '민주헌법쟁취 노동자공동위원회'. 흥사단에서 '노동기본권쟁취대회' 개최, 경찰의 각목 폭행
1987. 07. 20 - 태백시 한보탄광 노동자 600여명, 퇴직금 등 처우개선 요구 파업 농성
1987. 07. 21 - 전국 28개대 교수 534명,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창립
-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현직 언론인들의 방송민주화투쟁 지지성명 발표
- 광주 MBC 보도국, 민주언론선언 후 뉴스 제작 중단
- 인천 남일금속 노동자, 어용노조 설립에 항의 농성
1987. 07. 22 - '민청련' 등 6개 단체 400여명, '석방청년 환영 및 양심수 전원 석방, 수배자 전원 해제 쟁취 결의대회' 개최
- '민교협', '여성의 전화' 등 6개 단체, 학생시위 탄압과 여학생 추행 규탄 성명 발표
1987. 07. 23 - 부산 태광산업 노동자 100여명, 어용노조 해체 등 요구하며 회사 앞마당에서 농성
1987. 07. 24 - 인천 한성운수 운전기사 340여 명, 어용노조 해체와 해고자 복직 등 요구하며 파업 노성
1987. 07. 25 - 부산 조선공사 노동자와 가족 3500여 명, 어용노조 해체와 해고자 복직 등 요구하며 파업 농성
-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자 6000여 명, 파업 농성
1987. 07. 26 - 강제철거 중지와 재개발 악법 철폐를 위한 도시빈민대회, 동대문운동장 앞에서 1000여 명 가두집회
- 부천 원미동 성당에서 '노동기본권 쟁취대회 및 구속석방 노동자협의회' 발족 및 실천대회 개최
1987. 07. 27 - 울산공단내 태광산업.풍산금속.동양나이론.동양폴리에스텔 4000여 명, 파업농성
- 부산 세신정밀금속 노동자 400여 명, 파업 농성
1987. 07. 28 -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 1만 7000여 명, 어용노조 퇴진 요구 파업 농성
- 부산 국제상사 1500여 명, 어용노조퇴진 요구 파업 농성
- 전남 여천 호남에틸렌 노동자 360여 명, 기업통합 반대 농성
1987. 07. 30 - 현대미포조선소 노동자 1800여명, 근로조건 개선 등 요구 파업 농성
1987. 07. 31 - 국민운동본부, 수재모금단 발대식
- 창원 효성중공업 노동자 1000여 명, 어용노조 퇴진요구 파업 농성
- 부산 (주)화성 노동자 600여 명, 농성 6시간 만에 근로조건 개선 요구 사항 쟁취
1987. 08. 01 - 국민운동본부, 수해복구단 3개 지역 파견 - 태백시 황지광업소 노동자 250여 명, 상여금 인상 등 요구 파업 농성 - 울산 현대종합목재 노동자 1500여 명, 임금인상 등 요구 파업 농성
1987. 08. 03 - 현대자동차 부산공장 노동자 3000여 명, '울산노조결성보고대회' 후 파업 농성 - 울산 대우중공업 노동자 800여 명 농성 - 창원 현대정공 노동자 600여 명, 임금인상 요구 농성 - 대성탄좌 정성광업소 노동자 350여 명, 상여금 인상 요구 파업 농성 - 한국은행원 일동, 헌법상 독립적 지위 보장 및 관련 법규 개정 촉구
1987. 08. 04 - 국민운동본부 제1차 정기총회 개최. 하반기 목표를 '군사독재 종식을 위한 선거혁명'으로 설정 - 논노패션 노동자 30여 명, 민정당 남재희 의원 사무실에서 노조탄압 항의 농성 - 대우중공업 창원 1, 2 공장 노동자들, 처우개선 요구 농성
1987. 08. 05 - 울산공단내 고려화학·현대강관·현대자동차·럭키 등 노동자, 파업농성
- 창원 한국중공업 노동자 2000여 명 농성
- 정선군 석공함백광업소 노동자 600여 명, 근로조건 개선 등 요구 파업 농성
- 민정당, 제2대 당총재로 노태우 선출
1987. 08. 06 - 현대중공업 노동자 1만여 명, 어용노조 퇴진, 임금인상 요구하며 다시 농성에 돌입
- 해직교사·구속교사 가족, '구속교사 석방 및 복권 촉구대회' 개최
- 태백시 어릉탄광 노동자 600여 명, 파업농성
- 대우중공업 인천공장 노동자 1600여 명, 임금인상 등 요구 파업 농성
- 포항 부산파이프 300여 명, 근로조건 개선 등 요구 농성
- 전북일보 기자 130명, 편집·경영권 분리 주장, 제작 거부
1987. 08. 07 - 창원 마산공단내 (주)통일·기아기공·한일합섬 등 노동자 3000여 명 파업
- 대우중공업 안양·영등포공장 노동자 1000여 명, 파업농성
- 전주 27개 택시회사 운전기사, 전면 운행 거부, 연합 가두시위
1987. 08. 08 - 옥포 대우조선소 노동자 4000여 명, 파업 농성
- 창원공단내 삼미종합특수강·삼미단조·창원기화기 노동자 700여 명, 농성 돌입
- 울산 현대중전기 노동자 1000여 명, 임금인상 등 요구 파업 농성
- 석공 도계광업소, 대성탄좌 문경광업소, 정선군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등 노동자 3000여 명 파업 농성
1987. 08. 09 - 광주 시내버스 54개 전노선 운전기사 700여 명, 운행거부 농성
- 청주민통련의장단 순회 강연, 경찰방해 무산. 경찰짚차에 의해 조환동 군(13세) 사망
1987. 08. 10 - 국민운동본부, 서울 아현감리교회에서 '양심수 전원석방 및 민주쟁취 국민대회' 개최, 시민 5000여 명 참여
-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등 광산파업 16개소 1만여 명으로 확산
- 전주 4개 버스회사 운전기사 120명, 시외버스 운전사 및 안내양 200여 명, 운행 거부, 임금인상 요구 파업
- 서울 신천운수 운전기사 40여 명, 연좌 농성
-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 1500여 명, 파업 농성
1987. 08. 11 - 성남택시운전사, 사납금인하와 월급인상 요구 파업 농성
- 삼양식품 경남지사 노동자 100여 명, 농성 돌입
- 대형선박수협 소속 선원 700여 명, 부산 공동어시장에서 가두시위
1987. 08. 12 - '양심수 전원 석방 및 민주쟁취 범국민 실천대회',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학생·시민 2500여 명 참가. 집회 후 시위
-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 서울 합정동 마리스따수도원에서 입주식 및 창립 1주년 정기총회
- 충남방적 노동자 3000여 명, 임금인상과 준사원제 폐지 등 요구 농성
- 삼익악기 노동자 1500여 명, 임금인상과 어용노조퇴진 등 요구 농성
- 전북 고창군 심원면·해리면 주민 300여 명, 삼양사 본관에서 소작농지 양도를 요구, 농성 돌입
1987. 08. 13 - 고 조환동 군 장례식 - 서울지하철 노조 결성, 기능직 고용직원 230명 참가
- '노동조합민주화실천위원회'. 노총 퇴진 촉구 성명
- 대우전자 광주공장 노동자 600여 명, 기본급 인상 등 요구 농성
- 인천조선 노동자 700여 명, 임금인상과 상여금 지급 요구 농성
- 구미공단 내 오리온전기·오리온전자 노동자 1000여 명 농성
- 철도노조 부산사업소 노동자 200여 명, 임금인상과 휴가비 지급 등 요구 농성
- 파주여종고생 200여 명, 종합청사 앞에서 문교부장관 면담 요구 철야 농성
1987. 08. 14 - 서울 민통련, '분단42년, 그 극복을 위한 시국대토론회' 개최
- '서대협', 서울대 교정에서 통일염원제 개최, 학생·시민 5000여 명 참가
- 군산, 춘천 등 27개 택시회사 운전사 파업 농성
- 대전 전노선 시내버스 운전사 파업농성
- 삼양교통 해고자 정병두 씨(42세) 분신. 해고자 복직과 살인 배차제 폐지 등 주장
- 국민운동본부, 노동쟁의 실태조사단 파견
- 산재 노동자 400여명, 재활촌 건립, 휴업급여인상을 요구하며 시위
1987. 08. 15 - '8·15민족해방 기념대회', 서울·부산·청주·광주·대전·성남 등 전국 6개 도시에서 개최
1987. 09. 01 - 완전월급제 실시 협상 결렬로 서울택시 파업, 총 1만 6700대 중 1만 900대 참가
- '삼양사 살인미수사건 대책위', 진상규명과 부상자 완쾌를 위한 기도회 및 규탄대회 개최
- 부산 연합철강 노동자 1000여 명, 인금인상 요구 파업
- '포항민주화운동연합' 강호철 사무국장, 국민운동 정선지수 황인오 간사,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구속
1987. 09. 02 - 노태우·김영삼 회담, 정치일정과 노사 문제의 자율원칙 등 5개항 합의
- 서울 조흥택시 노조위원장 이석구 씨 분신
-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 2만여 명, 임금협상 결렬에 항의해 시청 앞 대규모 가두시위
-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노동자 2500여 명, 임금인상 요구 농성투쟁, 경찰·노동자 500여 명 연행. 살인적 폭력 행사
- 성남 동양정밀 노동자 80여 명, 민주당사에서 철야 농성
1987. 09. 03 -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 채태창 씨(41세), 정문 통제중 차에 치여 사망
- 서울대에서 '민중생존권 쟁취투쟁 보고대회', 학생과 노동자·농민 등 500여 명 참가
- 부천 8개 택시회사 운전기사 800여 명 파업농성
-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노동자 정운환 씨 등 2명 구속
1987. 09. 04 - 서울 파업택시 운전사 4000여 명, 교통회관 앞에서 가두시위
- 전·현직 교사 300여 명, '민주교육추진 서울지역교사협의회' 발기인 대회 개최
- '민주헌법쟁취 문화인 공동위' 소속 70여 명,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문화인 구속과 미술품 탈취에 항의 농성
-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노동자 마진수씨 등 4명 추가구속
- 안기부, 장의균 씨(37세) 간첩혐의로 구속 발표
1987. 09. 07 - 국민운동본부, 서울 합정동 마리스따수도원에서 하반기 정책협의 토론
1987. 09. 17 - '민족문학작가회의' 300여 문인 참석한 가운데 창립 총회
1987. 10. 10 - 김영삼 민주당총재, 대통령 출마 공식 선언
1987. 10. 12 - 대통령 중심 직선제개헌 국회의결
1987. 10. 14 - NWA 한국지사 한국인 근로자 80여 명, 노조 측에 대한 집단보복인사에 항의, 5일만에 재파업
1987. 10. 19 - 민정당·민주당 8인정치회담, 대통령선거법·국민투표법·선거관리위원회법 일괄타결
1987. 10. 25 - 김대중·김영삼, 고려대에서 열린 '거국중립내각쟁취실천대회'에 참석, 거국내각 구성 촉구대회 후 2만여 명 가두시위
1987. 10. 27 - 대통령중심 직선제에 관한 새 헌법안, 국민투표로 확정. 찬성 93.1%
1987. 10. 27 - 재야노동단체·학생 3000여 명, 명동성당에서 '노동운동탄압분쇄대회'후 시위
1987. 10. 28 - 민주당 김대중 고문, 대통령 출마와 신당창당 공식 선언
1987. 10. 29 - 한국일보 기자 58명, 노동조합 설립
1987. 10. 30 -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을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
1987. 11. 06 - 대통령후보 단일화촉구 서명에 가담했던 민주당의 박찬종, 조순형, 홍사덕, 이철 의원과 가칭 평화민주당의 허경구 의원 등 5명, 각각 소속정당을 탈당
1987. 11. 09 - 민주당, 김영삼 총재를 제13대 대통령후보로 추대
1987. 11. 12 - 평화민주당, 후보자지명대회를 열고 김대중 위원장을 대통령후보로 추대
1987. 11. 18 - 서울시내 16개대생 700여 명, 건국대에서 '학살원흉 집권분쇄 학생투쟁연합 실천대회' 후 시위
1987. 11. 20 - 국본, '공정선거감시 전국본부' 발대식 개최
1987. 11. 26 - 전남 나주에서 전국 최초로 부당수세거부 결의대회 개최
1987. 11. 27 - 제2금융권 중심의 50개 단위노조대표, 기존 금융노련을 탈퇴하고 '한국자유금융노동조합연맹' 결성
1987. 12. 16 - 제13대 대통령선거 실시, 노태우 후보 당선 - 공정선거 감시단 소속 대학생 등 100여 명, 부재자투표함 밀반출을 적발하여 구로구청사 봉쇄하고 농성(구로구청농성 사건)
1987. 12. 18 - 경찰, 부재자투표함 사건 관련 구로구청점거시위 3일째에 강제진압, 시민 등 915명 연행
1987. 12. 23 - 학생·시민 1000여 명, 광주 충정로 등지에서 선거무효 주장하며 시위
1987. 12. 27 - 서대협 주최로 '부정선거 무효화 및 독재퇴진 결의대회'에 참석한 시민·학생 2000여 명, 명동성당 밖으로 진출 시위
1988. 01. 08 - 경찰, '이사진 개편과 학내민주화'를 요구하며 4개월간 점거농성 중인 조선대에 진입, 강제해산
1988. 01. 12 - 박종철씨 부검의 황적준 박사, "경찰 수뇌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으며, '쇼크사로 해달라'는 강요도 있었다"고 증언
1988. 02. 03 -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중앙위원 60여 명, '택시노련' 신고필증 교부를 요구하며 노총회관에서 철야 농성
1988. 02. 24 - '청년학생구국결사대' 소속 5개대생 5명, 미문화원 도서실 점거 농성
1988. 02. 25 -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 제6공화국 출범
1988. 02. 27 - 시국사범 1731명 등 7234명 사면 복권
1988. 03. 06 - '민중의 당' 창당대회 개최
1988. 03. 21 - 국가안전기획부, '반미청년회'와 관련 장원섭 등 7명 구속 발표
1988. 03. 29 - 서울대총학생회장후보 김중기, 남북한 대학생 공동체육대회 및 국토순례대행진 제안
1988. 03. 29 - '한겨레민주당' 중앙당 창당대회 개최
1988. 04. 01 - 옥포대우조선 노조원 9000여 명, 임금인상 촉구대회 갖고 전면 파업
1988. 04. 08 - 민청련·서대협 등 재야 16개 단체 '반민정정당총선투쟁연합' 결성
1988. 04. 26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투표율 75.8%, 지역구 민정 87석, 평민 54석, 민주 46석. 공화 27석, 기타 10석)
1988. 05. 09 - 현대건설 노조추진위원장 서정의 납치 사건 발생
1988. 05. 13 - 서울지역 28개대 3000여 명, 연세대에서 서울지역총학생연합(서총련) 발대식 거행
1988. 05. 15 - 서울대생 조성만, 명동성당에서 '조국통일', '양심수 즉각 석방' 등 구호를 외치며 할복 투신
- '한겨레신문' 창간호 발간
1988. 05. 20 - 서총련 산하 '애국청년결사대' 소속 7명, 미대사관에서 사제폭발물 4발을 투척, 반미구호 외치며 시위
1988. 05. 21 - 현대그룹 산하 18개사 노조대표 25명, 현대그룹 노조연합회 결성
1988. 05. 29 - 서울시내 85개 노조조합원 등 300여 명,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창립총회
- 인권변호사단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정식 발족
1988. 06. 10 - 6·10 남북한청년학생회담 경찰의 저지로 무산, 전국 40개대 1만 8000명 교내 집회
1988. 07. 02 - 민족문학작가회의, 남북작가회담 개최제의 성명 발표
1988. 07. 07 - 노태우 대통령, 대북정책 6개항 특별선언(7·7선언)
1988. 07. 20 - 민통련 등 재야 11개 단체,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민주단체협의회(조통협)' 발대식
1988. 08. 15 - 경찰, 남북학생회담 저지하고 학생 2020명 연행
- 북한학생대표단, 판문점 회담장에 도착, 남한학생 측은 연세대에서 8·15 학생회담 출정식 개최
1988. 09. 08 - 전남 여수에서 국교 교사 21명, 국민학교 최초로 교사협의회 창립
1988. 09. 19 - 영화감독 50여 명, 미국 UPI사의 영화직접배급에 항의 철야 농성
1988. 10. 25 - '삼청교육대 진상규명 전국투쟁위원회', '삼청교육대 진상규명을 위한 공정조사기구' 구성을 촉구하는 성명 발표
1988. 10. 26 - 경북대생 등 대구지검 공안검사실, 대구 미문화원 등 4곳에서 시위 및 점거 농성 - 전국의 철도기관사 전면 파업
1988. 10. 27 -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 10·27법난 8주년을 맞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촉구성명
1988. 11. 05 - 학술단체협의회 창립
1988. 11. 13 - 노동자·재야인사 등 5만여 명, 전태일 분신 18주기를 맞아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 개최
1988. 11. 18 - 국회 광주특위 1차 청문회
1988. 11. 19 - 대학생·시민 등 1만여 명, 대학로에서 '전두환·이순자 부부 구속을 위한 제2차 시민궐기대회' 개최
1988. 11. 21 - '전교협' 산하 초·중·고 교사, 시간강사 등 1만여 명, 여의도광장에서 '민주교육법 쟁취 전국교사대회' 개최
1988. 11. 23 - 전두환·이순자 부부 사과문 발표, 설악산 백담사 은둔
1988. 11. 26 - 전국 41개 언론사 노조, 전국언론노조연맹 창립대회, 초대위원장 권영길(서울신문 노조위원장)
1988. 12. 03 - 18개대생 1500명, KAL사건 진상 규명 등 요구하며 명동에서 시위
1988. 12. 14 - 정신문화연구원·과학기술원 등 4개 연구기관 노조, 처우개선·자율성 보장 등 요구하며 파업 돌입
1988. 12. 23 -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
첫댓글 어두웠던 역사 다시 반복되면 안되겠죠. 이 자료가 크게 도움 되셨으면 합니다^^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와 근데 엄청오래걸렸군요..
민주화는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통일 혁명당 사건으로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신영복 교수님 말씀: "우리나라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고난 속으로 뛰어든 거대한 물결이었다. 이러한 거대한 민주화투쟁의 역사는 현재의 실천 속으로 생환되지 않으면 역사가 되지 않고 힘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이 거대하고 줄기찬 민주 투쟁을 증거하고, 역사로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 오늘의 실천 속에 생환하는 길은 그야 말로 역사적 과업이다." 출처: <국가폭력, 민주주의 투쟁, 그리고 희생> (조희연 편/함께읽는책)
지랄같은 정부 만나서 일반 국민들이 정치에 눈을 떠서 촛불집회에 나가 무고하게 잡혀가서 경찰한테 취조받고 나오는 심정을 대한민국에 사는 아줌마들 이제는 광우병 쇠고기로는 안 됩니다 이명박 정부가 너무나 미쳐가고 있습니다 더 미치기 전에 숨통을 끊어서 자라나는 후손들 한테 편안하게 살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