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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식의 세계 드러내기(2)
세르반테스의 동시대인들과 더불어 소설은 모험이 무엇인가를 물었다면, 사뮤엘 리처드슨과 더불어 소설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은밀한 감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밀란 쿤데라/‘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에서
소설은 일련의 행동의 변화를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을 그 본질로 하는데, 그 필연성 확보는 한 인물의 남다른 성격만이 아니라 마음속의 복잡한 생각이나 감정들과 밀착되어 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한다. 아무리 의지가 굳더라도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예상치 않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대개 어떤 행동을 이루게 된 주인공의 숨겨진 동기란 결국 어떤 분규의 발생으로 인한 내적 갈등이나 새로운 감정의 싹틈과 관련된 것들이라 볼 수 있다. 작가는 어떤 행동을 이루게 된 이 같은 숨은 동기를 (1)직접적인 설명을 통해 드러내기도 하지만, (2) 상상의 언 어로, 다시 말해서 사물의 묘사를 통하여, 즉 객관적 상관물을 끌어들여서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흔히 이용한다.
(1) 작가의 직접적인 설명을 통해서
[보기1] 소녀가 걸음을 멈추며,
“너 저 산 너머에 가 본 일 있니?”
벌 끝을 가리켰다.
“없다.”
“우리 가 보지 않을래? 시골 오니까 혼자서 심심해 못 견디겠다.”
“저래뵈두 멀다.”
“멀믄 얼마나 멀갔게? 서울 있을 땐 사뭇 먼 데까지 소풍갔었다.”
소녀의 눈이 금새 바보, 바보, 할 것만 같았다.
논 사잇길로 들어섰다. 벼 가을걷이하는 곁을 지났다.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소년이 새끼줄을 흔들었다. 참새가 몇 마리 날아간다. 참 오늘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 텃논의 참새를 봐야 할 걸 하는 생각이 든다.
������황순원/ ‘소나기’에서
소녀가 산에 올라가 보고 싶다고 했을 때 소년은 “저래뵈두 멀다”며 망설였다. 그것은 집에 가서 ‘텃논의 참새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요청을 거절하면 소녀로부터 또 다시 ‘바보’ 소리를 듣게 되고 말 것이다. 알고 보면 소년이 산에 오르기로 한 것은 이런 내적 갈등 끝에 ‘바보’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중대한 결단에서 이루어진 행동인 셈이다. 이런 속마음은 그 뒤에 나타난 행동, 이를테면 먹던 무우를 멀리 던져 버리거나, 용감하게 비탈진 곳에 올라 꽃을 꺾어 오기도 하고, 소잔등에 올라타는 용감성을 보이는 행동에서 잘 알 수 있다.
[보기2] 생머리의 여자가 아무리 침묵으로 위장을 한다 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고 은목은 생각했다. 자신이 바꿔준 동전으로 누군가의 남편을 꼬드기는 전화를 하고 있다고 상상하자 은목은 더더욱 그 여자가 싫어졌다. 은목은 언젠가 그 여자에게 해 주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한 마디의 말을 입 속에서 수도 없이 수도 없이 발음해 보았다.
������김현영/ ‘숨은 눈’에서
주인공인 ‘은목’이란 여자는 자기 상점에서 동전을 바꾸어 전화에 매달리는 ‘생머리 여자’를 좋게 보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위에서 보듯이 한 여자가 자기 남편을 전화로 불러내 유혹해 갔듯이 전화에 매달리는 여자를 모두 그런 나쁜 여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어떤 행동이나 남을 대하는 남다른 태도 뒤에는 반드시 마음 속에 어떤 숨은 동기가 있는데, 그것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1) 내적 독백(internal monologue)
우리는 어떤 사람, 사물, 사건, 상황을 접할 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내적 독백이란 바로 이런 생각들을 언어화해 놓은 것이다. 독자는 이런 내적 독백을 통해서 한 인물의 심리적인 체험을 직접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보기1] 서울이 가까워오자 에프엠 방송이 또렷이 잡혔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인데요. 이렇게 흐린 날 듣기 좋은 음악으로 골라 봤습니다. 그녀는 음악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구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그녀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런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났다. ‘기상청은 한랭전선이 지나갈 때 대기가 불안정해지면서 구름 두께가 평시보다 2배 이상 두꺼운 10킬로미터 정도 되는 경우가 있으며········.’
평시보다 2배 이상 두꺼운 10킬로미터. 그렇다면 보통 때에도 구름 두께는 5킬로미터나 된다는 말이다. 머리 위에 늘 5킬로미터나 되는 구름이 싸여 있어 보지 못했던 것일까. 타인 속의 허상을.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했었지.’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그것이 사랑의 본색일 뿐인데.’
서울로 들어오기 전 마지막 휴게소에서 그녀는 국수를 사 먹었다. 문득 생각이 나서 그녀는 핸드백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호출기를 꺼낸 뒤 빼놓았던 전지를 다시 끼웠다. 국수를 다 먹고 나서 종이커피를 한 잔 뽑아드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호출기가 울어댔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그녀는 전화를 걸었다.
“너 지금 어디야? 정말 그럴 수 있는 거야? 대체 어떻게 된 거냐구?”
그는 쉴새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은희경/ ‘그녀의 세 번째 남자’에서
위에서 그녀가 혼잣말로 내뱉는 이 말 속에는 첫 번째 남자에 대한 그녀의 오해, 즉 그는 나를 처음부터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 육체만을 탐했던 사람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순진하게도 그 남자만을 생각하며 매달려 8년 가까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자신을 뉘우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 볼 때 그녀는 이제 그 첫 번째 남자를 다시 만나러 가지만 종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그를 대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보기2] “아무래도 너무 마셨어. 그러는 게 아닌데. 그래도 할 수 있니? 넌 못 보았을 거야. 얼마나들 권하는지. 난 가끔 아주 쓸쓸하거든. 그런데 여기가 어디쯤이더라. 집으로 가는 길을 기억하겠니?”
������오정희/ ‘야회’1)에서
이 대목에서 표면적으로는 주인공 ‘나’가 아이를 향해 건네는 말로 돼 있지만, 평소 고독한 나(아내)가 남편과 함께 어느 집 저녁 초대에 참석했다가 약간 술에 취한 채 아이를 업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서 중얼거린 말이다. 나는 남편과 살고 있지만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여자다.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한 것은 바로 자신의 참존재가 자리할 집이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보기3] "일등을 했다구? 좋은 일이다. 열심히 공부해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 영국, 불란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나랏돈이나 남의 돈으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돈 없는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흔헌 것이 장학금이다. 머리와 노력만 있으면 된다. 부지런히 공부해라, 부지런히. 자신을 가지고."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는 입을 다물고 흥얼거렸다. 그 말이 끝나자 그의 머리 속에는 몽롱한 가운데에 하나의 천재가 열등생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 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이었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서정인/ ‘강’2)에서
주인공 김씨는 한때 주변 사람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았던 천재였고, 꿈의 실현 가능성을 신뢰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초라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위의 독백은 바로 그가 갖고 있던 믿음, 즉 열심히 노력하면 모든 꿈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한갓 낭만적인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깊이 깨달은 자조적인 인생관에서 나온 것이다.
2) 일기(日記)
일기는 그날그날 삶의 체험과 마음속의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어서 일상생활 속에 잠겨 있는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잘 드러내어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일기는 어떤 미지의 행동과 사건의 알리바이가 되기도 한다.
[보기1] 나는 다음날 다시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일기장을 앞뒤로 뒤지다가 드디어 '연애'라는 글자를 발견한 나는 정색을 하고 그 페이지를 읽기 시작 했다.
9월 4일
나는 연애하고 싶다. 남자에게 심각한 얼굴로 헤어지자고 한 뒤 술을 마시고 싶다. 같이 자자고 요구하는 남자에게 눈물만으로 사랑을 확인해 달라며 폼잡고 싶다. 누구든 애태우고 싶다. 누구도 내 환심을 사려 들지 않을 뿐더러 나 때문에 마음 졸이지 않는다. 나는 하찮은 존재다. 나는 소박만 맞는다. 그이는 이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일 조차 별로 없다.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이렇게 안 쳐다보고 살 걸 남자들은 왜 그렇게들 예쁜 여자와 결혼하려고 안달인지 몰라, 나는 이제 얼굴을 밀어 버리고 그냥 남들과 구별만 가게 '마누라'라고 써붙이고 있을게, 라고
어휘력이 떨어지는 탓이겠지만 소박이 뭔가, 소박이, 그녀는 여전히 내게 소중한 아내인데. 그 소박이란 말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난 그냥 좀 바쁠 뿐인데. 정보도 얻어야 하고 부탁도 해야 하고 친해 두어야 할 사람도 있고, 그래서 술도 좀 먹고 모임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고 또 가끔씩 매운탕집에서 화투도 치고 그러는 것뿐인데. 사실 영업부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닌가.
-은희경/ ‘빈처’3)에서
이 소설은 남편이 아내의 일기를 훔쳐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실상 잘 모르고 사는 것이 사실이다. 작가는 일기체를 택함으로써 어떤 일로 아내가 고독을 느끼는지 남편에게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게 전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적인 비밀을 은밀히 엿보는 듯한 분위기가 전달 효과를 더욱 높여 주고 있다.
[보기2] 일월 일일. 주요 일간지마다 신춘문예 당선발표가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났다. 세수도 하지 않고 지하철 구내까지 다녀왔다. 눈이 쌓여 있었다. 목이 시렸다. 세 장의 일간지를 사 왔다. 권재경의 <풀밭 위의 식사>. 나는 아연실색해지고 말았다.
재경의 소설이 당선되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동명이인인가 싶었다. 사진과 약력을 살펴보았다. 권재경. 내가 아는 그 재경이었다. 신문을 밀쳐 버렸다. 담배 한 대를 피웠다. 욕실 창틀이 얼어붙어 있었다.
재경의 당선작을 읽었다. 치매환자가 있는 한 가정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 처음 읽는 소설은 아니다. 습작했던 중편을 단편으로 개작한 것이다. 소설실습론 시간에 읽은 기억이 있다. 내가 알기로 그건 재경이 쓴 여섯 번째 소설이다. 겨우 당선소감도 읽었다. 시가 자신을 외면해 소설을 쓰게 되었노라고. 가당찮은 소리다. 응모를 했다고 하길래 당연히 시 부문인 줄로 알았다. 2학년이 되면서 시보다 소설을 더 많이 쓰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아 보였었다. 나는 시를 쓰는 재경이가 좋았다. 이제 그 애는 소설을 쓴다. 그런데 재경은 왜 내게 미리 말하지 않은 걸까. 그 애의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는 건 아니다. 재경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분간 나는 재경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조경란/ ‘중독’4)에서
[보기3] 나는 조심스럽게 노란 봉투를 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노트가 들어 있다. 이게 무슨 노트죠? 라고 물어도 그는 대답이 없다. 붕투 안에서 노트를 꺼내 무릎 위에 내려놓고선 그를 건너다보았다. 산기슭의 신새벽 산그늘이 그의 얼굴에 내려와 있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 노트의 첫장을 펴는 동작이 망설여진다. 망설이고 나니 호흡도 가다듬어야 했다.
언젠가는 이 노트를 언니가 읽게 되길 바래.
그리고 당신. 만약 내가 간 후 곧 바로 이 노트를 발견하게 되거든 십일월에 우리가 가려던 장소에 뿌려 줘요. 어딘지 잊지 않았겠죠··· 영혼들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늘 말한대요. 몸은 비록 떨어져 나왔지만 영원히 곁에서 지켜보며 사랑하고 있다고. 나도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할게요.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했어요. 여보. 다만 기다릴 순 없어요. 어차피 가야 하는 거라면 내가 가겠어요··· 이 일이 당신에게 상처가 되어서는 안 되요. 1993년 10월 22일.
������신경숙/ ‘그는 언제 오는가’에서
3) 편지
당장 어떤 사람을 만나 내 생각을 전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흔히 이용하는 것은 편지다. 어떤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그 동안 말 못하고 지녀온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실타래를 풀어내 듯이 글로 쓸 때, 그 글은 상대방에게 더욱 절실하게 받아들여져 읽는 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보기1] 이 고장을 찾아올 때는 당신께 이런 편지를 쓰려고 온 것이 분명 아니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려고 오다니요? 저는 당신과 함께 떠나려 했잖습니까.
비행기를 타 버리자.
당신이 저와 함께 하겠다는 그 결정을 내려 주었을 때, 저는 너무나 환해서 꿈인가? ····· 꿈이겠지, 어떻게 그런 일이 내게····· 다름도 아닌 내게 찾아와 주려고, 꿈일 테지, 했어요.
죄라면 죄겠지. 내 삶을 내 식대로 살겠다는 죄.
제가 꿈인가? 헤매는데 당신은 죄라면 죄겠지, 하시며 진짜 일을 진척시키기 시작했죠. 당신을 알고 지낸 지난 이 년 동안에 무너져만 내리던 제게 어떻게 그런 환한 일이, 스포츠 센터 일을 다 정리하고 나서도 암만 꿈만 같아서, 당신에게 다짐을 받고 또 다짐을 하다가 결국은 또 눈물·····이.
������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5)에서
이 소설은 사랑하는 유부남으로부터 미국으로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받은 ‘나’가 남자에게 그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같이 떠날 수 없는 애절한 사연을 편지로 써서 보내는 서간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사형식을 과감히 생략한 채 멀리 떨어져 있는 수신자에게 내 마음속의 생각을 어떻게 하면 잘 이해해 줄 수 있을까를 걱정하며 잔잔하게 들려주고 있어서 화자의 아픔을 더욱 잘 드러내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보기2] 집안으로 들어와서야 발송인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서완희. 완희언니······? 그녀의 이름을 확인하고도 소포를 집어들었을 때의 그 불가해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가 내게 왜 이런 걸 보내왔을까. 나는 느닷없이 내게로 전해져온 소포꾸러미 앞에서 망연자실 서 있었다. 별다른 예감은 없었지만 도무지 펼쳐보고 싶은 기분이 동하지 않았다. (…중략…)
나, 어느새 서른다섯까지 살았다.
소식이 없다. 이번에도 당선되지 못한 것이겠지.
이십사일 이후 집에 와줘야겠다.
너도 알다시피 내겐 아무도 없다.
내가 쓰는 마지막 글이다.
자서(自序)와 유서(遺序)는 짧을수록 좋다고, 너 언젠가 그런 말 한 적 있지.
너를 사랑할 수 없었다.
사월에, 완희가
자서와 유서는 짧을수록 좋다고 내가 그런 말을 했었던가. 기억에 없는 말이다.
시인의 자서를 읽을 때면 왠지 단순한 자서가 아니라 유서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었다. 완희언니의 글씨가 쓰여진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온 그 작은 종이가 생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담긴 유서라고는 믿지 않았다.
������조경란/ '중독'에서
[보기3] ������������인제 갑니다. 새삼스럽다구요? 하지만 그젯밤 선생님은 제가 이제 정말로 떠나간다는 인사말을 하게 해 주지도 않으셨지요. 그건 선생님께서 너무 연극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시겠죠. 저를 위해 축복해 주시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다만 안녕히 계시라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했어야 했고, 그걸 못 했기 때문에 다시 이런 연극을 하는 거예요.
결혼식을 하루 앞둔 신부의 편지라고 겁내실 필요는 없어요. 어떤 일도 선생님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으셨고, 저는 선생님에게 책임을 지워 보려는 모든 노력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으니까요. 결국 선생님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어요. 혹은 처음부터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 이미 책임 있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겠어요. 감정의 문제까지도 수식을 풀고 해답을 얻어내는 그런 방법이 사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는지 모르지만, 그것도 결국 선생님은 아무것도 책임질 능력이 없다는 증거지요. 왜냐하면 선생님의 해답은 언제나 모든 것이 자신의 안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선생님을 언제나 그렇게 만든 것은 선생님이 지니고 계신 이상한 환부(患部)였을 것입니다. 내일 저와 식을 올릴 분은 선생님의 형님되시는 분을 6.25전쟁의 전상자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저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요즘의 병원 일과 소설을 쓰신다는 일, 술(놀라시겠지만 그분은 선생님의 형님과 친구랍니다)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갔어요. 그렇지만 정말로 저는 선생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어요. 6.25의 전상이 자취를 감췄다고 생각하면 오해라고, 선생님의 형님은 아직도 그 상처를 앓고 있다고 하시는 그 분의 말을 듣고 저는 선생님을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부를 지닌, 어쩌면 처음부터 환부다운 환부가 없는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환자 일까고요. 더욱이 그 증상은 더 심한 것 같았어요. 그 환부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것이 무슨 병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선생님의 증상은 더욱더 무겁고 위험해 보였지요. 선생님의 형님은 그 에너지와 어디에 근원했건 자기를 주장해 왔고, 자기의 여자를 위해서 뭔가 싸워 왔어요
몇 번의 입맞춤과 손길을 허락한 대가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치료를 해 드릴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결국 선생님 자신의 힘으로밖에 치료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빌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어떻든 행복해지고 싶으며, 그러기 위해선 누구보다 먼저 자신이 자신을 용서해야 하리라는 조그만 소망 속에 이 글을 끝맺겠어요.
영영 열리지 않을 문의 성주(城主)에게
혜인 올림
������이청준/ ‘병신과 머저리’에서
(2) 상상의 언어를 통해서
주지하듯이 현대소설로 올수록 이와 같은 숨은 동기로서의 내면세계를 작가는 좀더 세밀히 다루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그것을 우리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서술해 준다기보다 상상해서 알아내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술성이 높은 작품은 더욱 낯설어졌다고 볼 수 있다.
1) 사물 또는 타인의 응시
숨은 동기를 직접 설명해 알려주지 않고 상상해서 알 수 있도록 할 때 흔히 작가는 자연의 사물을 끌어들여 그런 효과를 잘 이루어낸다. 우리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남다른 응시를 통해 어떤 동물이나 식물, 혹은 물이나 돌, 안개나 구름과 같은 자연의 온갖 사물들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묘사를 흔히 보게 된다. 이는 세한도(歲寒圖)의 나무가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의 나무이듯이 주인공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도사리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게 된다.
소설이란 어찌 보면 가능한 한 직접적인 전달을 피하고 상상의 언어로 바꾸어 놓는 특이한 형식의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 속에 꽃, 나무, 새, 달, 강물, 구름, 안개 등등에 대한 묘사나 삽화가 소설 속에 들어오게 되는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서 작중인물의 내면을 잘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다.6)
작가는 주인공의 생각과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고 등가물이라 볼 수 있는 자연의 사물에 대한 묘사나 삽화를 끌어들인다. “소녀는 고독에 빠져 있다”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면, 소녀가 바라보고 있는 사물을 고독한 눈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그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만일 그것을 직접 설명하면 그 글은 문학적인 표현에서 멀어지게 된다.
일찍이 노스롭 프라이(N. Frye)가 말했듯이, 모든 작가는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상상력을 남달리 갖고 있는 사람이다. 작가는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가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나 상징, 나아가 객관적 상관물을 끌어들여 상상하도록 그들의 언어를 바꾸어야 한다. 편지나 설명문 같은 글보다 소설 쓰기가 어려운 것도 바로 이런 관습 때문이다.
[보기1] 저, 저만큼, 집이 보이는데, 저는, 집으로 바로 들어가질 못하고, 송두리째 텅 빈 것 같은 마을을 한바퀴 돌고도······ 또 들어가질 못하고······ 서성대다가 시끄러운 새소리를 들었어요. 미루나무를 올려다보니 부부일까? 두 마리의 까치가, 참으로 부지런히 둥지를······ 둥지를 틀고 있었어요.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둘이 서로 번갈아 가며 부지런히 나뭇잎이며 가지들을 물어 나르는 것을.
-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이처럼 한참동안 까치가 집을 짓고 있는 모습을 의미 깊게 바라본 것은 집을 짓고 있는 부부까치의 모습에서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나는 막상 불륜의 남자와 미국으로 떠나기로 약속해 놓았지만 과연 이 까치 부부처럼 그 남자가 끝까지 나와 행복한 보금자리를 만드는 일에 전념해 줄 것인가에 대해 새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장면은 까치의 집짓기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끌어들여 모순과 이율배반으로 가득 찬 주인공의 심리와 그가 처한 상황을 상상적인 언어로 잘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인물들의 주변 상황을 무심하게 카메라로 훑으며 이야기를 펼치는 방식에 가까운 것인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말을 빌면 작가의 역량은 바로 이런 자유 모티프(free motif)를 얼마큼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보기2] 경쾌한 하얀 다리들. 그녀는 거기 무릎을 싸안고 앉아서 붉은 모자를 쓴 인부들처럼 배드민턴 치는 여자들을 바라본다. 공중에서, 참새처럼 날아다니는 하얀 공이나, 그녀들의 머리결이나 얼굴이나 가슴은 보지 않고, 미끈한 다리들만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다 바라본다. 울지 마. 어느새 그녀 곁에 와 앉아 있는 그가 나직이 속삭였을 때야, 그녀는 자신이 울면서 배드민턴 치는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저리 가세요. 그녀는 그를 밀어내는 시늉으로 몸을 옆으로 비키려다, 내가 왜 이러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울지 마, 속삭였던 그 목소리가 너무 생생해서 되돌아봤지만, 그는 없다. 나뭇잎들만 출렁거리면서 저희들 몸 위에 쌓인 빗물을 털어내고 있다. 배드민턴 치는 여자들의 미끈한 다리는, 물고기들이 물살을 차내듯이 미술관 뜰의 잔모래들을 사삭, 차내며 명랑하게 움직인다. 바닥에 떨어진 공을 주울 때 짧은 진치마는 더욱 아슬히 올라간다. 어쩌면 엉덩이가 보일 듯하다. 그녀는 지레 가슴이 설레어서 얼른 지하철 공사장의 인부들을 바라본다.
저년, 여우 같은 년들!
우리가 보고 있다는 걸 알고 더 그러는 거야!
귀엽잖아, 놔둬! 우리 같은 처지에 돈 안 내고 어디 가서 공짜로 저런 구경을 하겠나? 아, 나는 피로가 다 풀리네 그래!
밝히기는!
뭐, 눈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그녀는 더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일어선다. 인부 중의 한 사람이 담배를 땅바닥에 내꽂으며 그녀 쪽을 쳐다본다.
������신경숙/ ‘배드민턴 치는 여자’에서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여성은 관습적으로 남자에게 먼저 프로포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공터에서 짧은 진바지 차림으로 배드민턴을 치는 여자들처럼 간접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여자가 먼저 프로포즈한다면 남자들은 그런 여자를 색안경을 끼고 보기일수다. 배드민턴 치는 광경을 바라보고 눈물까지 흘렸던 것도 바로 그런 모습에서 자신의 처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기3] 한 선생이 미리 꺼내놓았던 안경을 찾아갔다. 계산을 하면서 한 선생은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좀 깎아 주시면 현금으로 계산할 수 있는데. 안경 값은 십 이만 원이었고 한 선생이 지니고 있는 현금은 십만 원이라고 했다. 은행까지 가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나는 카드로 계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금으로 십만 원을 받았다. 전교조에 연루되었다가 유치원선생을 하게 되었다는 한 선생은 가슴골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목선이 깊이 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 한 선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내게 아이가 있었더라도 그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지는 않았을 거라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샌들을 신은 한 선생의 발톱에는 검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조경란/ ‘불란서 안경원’에서
주인공 ‘나’는 한선생을 나쁜 여자로 보고 있다. 그 동기는 간접적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즉 나는 집을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어떤 묘령의 여자가 자기 남편을 유혹해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슴골이 깊이 패인 원피스를 입고 있고, 발톱에까지 메니큐어를 칠한 한 선생이 곱게 보일 수가 없다.
위에서 보듯이 요즈음 소설 중에는 행위의 동기를 잘 드러내 주지 않고 독자의 상상에 맡기거나 결말에 이르러서야 알아차릴 수 있도록 감추어 놓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이럴 경우 독자는 알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인물의 모습들만을 계속 접하게 된다. 그런 예를 보자.
① 어머니가 전화를 받은 것은 어제 정오 경이었다. 점심에 비빔국수나 하려고 물을 올려놓으려던 참이었다. 수화기를 통해 흘러가는 어머니 음성은 낮았지만 흔들렸다. 나는 그저 또 지인이 세상을 버렸겠거니 하고 무심히 가스 밸브를 돌렸다. 언제부턴가 어머니에게 있어 죽음은 또 하나의 일상이 됐다. 남겨진 자에게 떠나는 자는 경계를 달리하는 그 순간부터 몇 장의 사진 속에서나 떠오르는 추억 같은 것. 추억이 잦아지면 어느새 그것은 일상으로 변주된다. 부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어머니는 베란다에 서서 한동안 화단에 있는 목련나무를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생의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베란다에 서는 일은 늘어났다. 고희를 넘긴 노인네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머니의 침 묵은 주위 사람들을 견디기 힘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중략…)
어멈아, 내 옥색 한복이 어딨더라?
나는 멸치국물을 다시다 말고 돌아보았다. 옥색 저고리는 칠순잔치 기념으로 형제간에 얼마씩 거둬 해드렸던 한복이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려 애쓰는 것은 점잖지 못하다 하여 문인의 밤 행사 때나 입은 게 고작이었다. 빛이 마주치자 어머니는 민망한 듯 다시 목련가지로 시선을 황망히 옮긴다.
������김주옥/ ‘봄’7)에서
② 어머니가 벌레 난 쌀을 고르고 있다. (…중략…) 나는 쌀벌레 고르는 일을 도우려고 어머니 앞으로 다가앉는다. 하지만 어머니는 손사래를 친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어머니는 움켜쥔 쌀알들을 두 손에 가득 쥐고 베란다 난간에 뿌린다.
“아니, 그걸 왜 거기다 버려요?”
나는 까닭없이 불만스럽다.
“날아들더구나.”
“네?”
“이걸 여기 두니까 쪼아먹으려고 ...... 기르는 것마냥 온다.”
단독주택 2층 베란다라고 해봐야 거실 창문 앞으로 두 평이 채 안 되는 공간이다. 단풍나무 분재가 소담스레 심어져 있고, 직사각형의 플라스틱 화분에는 비비추가 보라빛 꽃을 오종종 매달고 있다. 군자란의 속잎에는 주홍 꽃봉오리가 종이처럼 구겨진 꽃대를 살짝 숨기고 있다. 푸른 이파리들 아래로 쌀알들이 흩어진다. 그 옅은 그늘 밑, 쌀알 뭉치 중의 어떤 것에는 통통하게 살찐 애벌레가 들어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것들을 뿌리며 새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가 기다리는 새는 무슨 새일까? 그게 정말 새이기는 한 걸까.
������변혁수/ ‘흰 구름’8)에서
본래 한 사람의 버릇은 자아 의식적인 데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①에서 보듯이 시어머니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으면 목련꽃을 바라보곤 한다. 며느리는 이런 행위를 또 누군가의 부음 소식을 듣고 허무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라고 시어머니의 속마음을 짐작해 보았지만 그건 틀린 것이었다. 결말에 가서 밝혀지지만 시어머니는 옛 애인으로부터 구혼을 받고 마음속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②에서 보듯이 작가는 이 작품에서 암에 걸려 투병 중인 어머니가 새에게 쌀을 뿌려 주는 이상한 행동을 여러 차례 보여준다. 나(딸)는 그런 어머니의 속마음을 모르고 있다. 작가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 없다. 그러나 꽃과 새의 원형적 이미지를 익히 알고 있는 독자라면 어머니(꽃)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새)을 마음속으로 퍽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다음 예에서 사물이나 타인의 응시가 어떤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알아보자.
[예시1] 박경사는 정순경이 나가버린 빈 사무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현관 외등에 어지럽게 날아들기 시작하는 날벌레들을 멍청히 내다보고 있었다. 외등이 밝힌 저 어둠의 무한한 공간 중의 극히 작은 한 부분의 빛을 찾아 날아든 보잘것없는 날벌레들의 난무. 무엇을 위해서,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기 위한 저런 어지러운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저 외등이 밝히지 못한 저 무한대의 어둠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살아 있는 것들의 허망스러운 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외등을 찾아 모여든 날벌레들의 똑같은 동작이 반복되는 그런 따분한 난무의 질서가 갑자기 흐트러졌다. 그것은 날개짓이 요란한 커다란 나방 한 마리가 끼어들어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난폭한 난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몸뚱에 비해 날개가 작기 때문에 나비의 그 유연한 비상(飛翔)에 비교될 수 없는, 좀 서글퍼 보이는 나방은 외등에 덤벼들어 죽을 둥 살 둥 몸통을 부딪쳐대며 날았다. 날개에서 떨어지는 미세한 분말이 불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 그러나 한 마리 나방은 자신의 아름다움 같은 건 아랑곳없다는 듯 외등에 맹렬하게 부딪쳐 드는 그 허망한 작업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 한 마리 날벌레는 자신이 찾아낸 이 불빛 앞에 이제가지 어둠 속에서 몸에 묻힌 그 지겨운 고독을 다 떨어버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전상국/ ‘외등’에서
[예시2] 모래톱에는 여전히 갈매기들이 흩뿌려진 듯 내려앉아 있고 바람은 갈매기들이 바라보는 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무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두 마리 갈매기가 눈에 들어왔다. 한 놈은 고개를 들고 정면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고 곁에 있는 놈은 그런 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짝꿍이 눈길을 주지 않자 한 발 다가서서 부리로 짝꿍의 목덜미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나 짝꿍은 고개를 한 번 비틀고는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거절당한 갈매기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번에는 아예 짝꿍의 눈앞을 막아섰다. 짝꿍은 좌우로 몇 번 고갯짓을 하더니 가볍게 바다를 향해 날아올랐다. 남자는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껐다.
������김형경/ ‘금강교>9)에서
[예시3] 사실, 가장 깨끗한 바다는 이곳 헌화로를 지나 심곡으로 들어가는 바다다. 그런데 여기는 기차역도 없고 고현정인가 앉았던 의자와 작은 소나무 한 그루도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는다. 우묵하게 산들이 돌아앉은 곳, 바위가 각기 제 속살을 유난히 바위에 부딪혀 가며 수작을 부려보지만 검은 바위의 마음을 빼앗지 못해 애태우고 있다. 가끔, 한적하게 춤추는 새들이 바위에 걸터앉기라도 하면 바다는 성난 제 속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바위의 얼굴을 철썩 때려보지만, 바위는 끄떡도 않는다. 고기떼도 많이 몰려 작은 배가 나가기만 하면 며칠 찬거리로 고기를 한 배 가득 실어올 수 있다.
������박명애/ ‘바다의 벽’10)에서
[예시4]사내는 결국 자신의 호기심을 숨길 수가 없어졌다. 그는 마치 어른들의 은밀스런 비밀을 엿보려 드는 어린애처럼 신중하게, 그리고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끝내는 스스로를 억제할 수가 없어져 버린 장난꾸러기처럼 순진하게, 한 발짝 한 발짝 두 사람 곁으로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그리고 그 흥정을 끝낸 손님이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모처럼만의 구경거리를 중단해 버리지나 않을지 염려된 듯, 은밀하고도 조급스런 표정으로 작자의 거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자, 이 녀석아 그럼 잘 가거라. 장을 나가 넓은 하늘을 날으면서 내 은혜나 잊지 말아라!」
그러자 이윽고 그 중년의 고객이 장 속의 새에게 자신의 선행에 관한 다짐의 말을 주고 나서 장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장 속의 새는 금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장문이 열리고 나서도 녀석은 잠시 어리둥절한 눈길로 목짓만 몇 차례 갸웃거리고 있더니, 뒤늦게 사정을 깨달은 눈치였다.
푸르륵---
가벼운 날갯소리를 남기며 녀석이 마침내 조롱을 떠나갔다.
저녁 노을이 서서히 물들어 오기 시작한 서쪽 하늘로 새는 잠시 드높은 비상을 자랑하는 듯하다가 이내 한 개의 까만 점으로 변하여 공원숲 그늘로 사라져 가 버렸다.
「고녀석 그래도 날으는 폼이 제법이로군.」
공원 숲 속으로 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다음 중년의 방생자가 한 마디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젠 그 자신도 어떤 눈에 보이지 않은 날개를 얻어 지닌 듯 가벼운 발길로 가게를 떠나갔다.
한데 그 중년의 방생자가 가게를 떠나간 다음에도 사내는 아직 몸을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비로운 방생자가 이미 가게를 떠나가 버린 것도 의식하지 못한 듯 그의 거동에는 아예 아랑곳을 않은 채 새가 사라져간 공원 쪽 하늘에 시선을 오래오래 못박고 있었다. 새를 날려보낸 일은 그 새를 사고 간 사람보다도 오히려 사내 쪽에 더욱더 깊을 감동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새가 처음 하늘을 치솟아 오를 때 사내는 아닌게 아니라 그 어린애 같은 천진스런 즐거움과 억눌린 흥분기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이청준/ ‘잔인한 도시’11)에서
2) 삽화의 삽입
소설 이야기란 어찌 보면 여러 에피소드를 연속적으로 엮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요즈음에 이르러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와 동떨어진 것과 같은 짧은 이야기를다양한 방식으로 삽입시켜 인물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데 큰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① 어느 동물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마리의 수컷 공작새가 아주 어려서부터 코끼리거북과 철망담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주고 받는 언어가 다르고 몸집과 생김새들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느덧 수공작새는 다 자라 짝짓기를 할 만큼 되었다. 암컷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그 멋진 날개를 펼쳐 보여야만 하는데 이 공작새는 암컷 앞에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엉뚱하게도 코끼리거북 앞에서 그 우아한 날갯짓을 했다. 이 수공작새는 한평생 코끼리거북을 상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다····· 알에서 갓 깨어난 오리는 대략 12-17시간이 가장 민감하다. 오리는 이 시기에 본 것을 평생 잊지 않는다.������������박시룡, 「동물의 행동」중에서
������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② 이 도시에 작은 동물원이 하나 있습니다. 동물원이라면 으레 그렇듯 원숭이 우리도 하나 있지요. 그 우리 안엔 원숭이 가족이 살았는데요. 암수 한 쌍과 새끼 네 마리였답니다.
다른 동물원 여느 원숭이들과 마찬가지로 햇빛 좋은 날엔 길게 하품을 하며 해바라기를 하고, 서로의 이를 잡아 주며 다정하게 살았답니다. 특히나 그 한 쌍은 흉내내기의 명수였습니다. 방문객들의 몸짓은 물론 가끔은 암수가 마주보고 앉아 서로의 흉내를 내곤 했지요. 마치 서로가 서로의 거울인양 말이죠. 새끼들도 온갖 재롱을 떨며 방문객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암컷이 없어졌답니다. 사육사가 저녁에 먹이를 주고 문을 열쇠로 잠그는 일을 잊었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사라진 것은 아마도 새벽녘쯤인가 봅니다.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새벽 이내 속에서 한 산책객이 어슴프레한 그 짐승의 실루엣을 보았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하도 심상해 보여 그는 새벽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견쯤으로 보아 넘겼답니다. 어쩌면 암컷은 정말로 산보를 잠시 나갔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암컷은 우리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암컷을 보았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암컷이 없어진 날의 T.V 뉴스를 기억합니다. 늙수구레한 사육사는 말했습니다.
“날이 어두웠고, 원숭이들은 숙소로 돌아가 먹이를 먹으면 곧 잠을 자는 습관이 있어요. 자물쇠만 잊고 안 채웠다 뿐이지 문은 얌전히 닫혀 있었어요. 우리 안에서는 문이 열려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을 텐데……일부러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문을 열어보지 않는다면 겉보기엔 다를 바가 없었거든요. 암놈이 꼭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암놈이 없어지고 나서도 문은 그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요. 짐승들은 일단 빠져나가면 그 흔적이 남거든요. 문이 휑뎅그레 열려 있다든가……그런데 문은 아귀가 잘 맞도록 닫혀 있었고……감쪽같았어요. 우리를 빠져나가며 암놈이 원래대로 닫고 나간 모양이에요. 그래서 진작 몰랐던 겁니다.”
암컷은 어디에 갔을까요. 그녀는 정말 탈출을 시도했던 걸까요. 그녀는 갇혀 있는 우리 밖이 자신의 고향인 아프리카의 평원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어쩌면 그녀는 짧은 여행을 떠났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지금, 원숭이 우리의 문은 더욱 완강한 자물통으로 잠겨 있답니다. 그런데, 말이죠……불행히도 원숭이는 잠긴 문은 못 연답니다…….
강에서 새벽안개가 피어오를 때쯤이면 이상하게 잠을 설치게 된답니다. 잠긴 우리 밖에서 서성거릴 것 같은 암컷의 환영 때문에……
������권지예/ ‘뱀장어 스튜’에서
작가가 삽화를 삽입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다. ①에서 보듯이 신경숙은 박시룡의 「동물의 행동」이란 글의 한 구절을 소설 첫머리에 삽입시키고 있고, 권지예는 ②와 같은 어느 신문기사에서 인용한 원숭이 이야기를 고딕체에다 별도의 장으로 삽입시키고 있다.
작품 서두에 제시된 삽화 ①은 이 소설의 결말과 연결된다. 즉 첫사랑 남자를 평생 잊지 못하고 살 것이란 주인공 여자의 마음속을 이 삽화를 통해 비유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삽화 ②는 그녀가 신문기사를 그대로 첫사랑의 남자에게 보낸 글이다. 작가가 이런 삽화를 삽입시킨 것은 그 남자의 집에서 한번 나온 그녀가 원숭이처럼 다시는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고통을 겪고 있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지금 ‘남자’가 아니라 ‘가정’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이런 그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섹스 파트너로만 생각할 뿐이다. 이제 다음의 삽화들은 주인공의 어떤 속마음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가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자.
[예시1] 아버지가 돌아왔다. 초췌한 몰골을 아무렇게 둘러싼 옷매무새와 독한 술 냄새는 귀가시간의 아버지에게서 거의 매일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고, 오늘처럼 앵무새가 든 새장을 손에 들고 오는 날이면 그가 더욱 측은하게 보였다. 주위가 낯설어서 그러는지 앵무새는 새장 안에서 푸드덕거리며 불안해 했다. 그러면서도 앵무새는 머리를 두어 번 조아리며 사람의 말을 흉내냈다.
“안녕, 안녕”
“그참 신기하네. 어떻게 사람 말을 다 하네. 새 이름이 뭐예요?”
처음 본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거리며 파출부가 물었다.
“앵무새예요. 앞으로 아주머니도 좀 챙겨주세요.”
새장을 베란다 쪽으로 들고 가며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죽은 새의 새장이 매달렸던 자리에다 또 걸겠지. 베란다 천장에서 내려온 끈의 끝은 바닥에서 1미터 높이에 있었는데, ‘너무 높이 달면 깃털 청소하기가 힘든 법이다’라며 아버지가 손수 끈을 단 지가 7, 8년은 된 성싶다. 그동안 우리 집에서 죽어나간 앵무새의 수만 해도 2, 30마리는 될 것이다. 중학교 국어 선생님답게 처음에는 아버지가 앵무새에게 먹이를 주는 훈련을 시켰으나 그런 아버지의 정성과는 달리, 새는 서너 달을 못 넘기고 죽어나갔다. 먼젓번의 파출부는, 집안에 벙어리 귀신이 있어 말하는 새를 시샘하여 정신을 홀려 죽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굿으로 벙어리 귀신을 달래야 한다고 했다. 어쨌든, 나중에 아버지는 힘에 부쳤는지 조련사에게 훈련된 앵무새만 사오게 되었다. 훈련된 앵무새라 해도, 처음 몇 달 제법 사람 말도 지껄이며 제 몫을 톡톡히 해냈지만 점점 말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시름시름 앓다 죽어 버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강만우/ ‘앵무새의 죽음에 관하여’12)에서
[예시2] 그가 핸들에서 오른손을 떼고 카세트 버튼을 눌렀다. 산에 산에 꽃이 피네··· 볼륨이 너무 높다고 생각되었는지 그가 다시 오른손으로 볼륨을 조절했다. 들에 들에 꽃이 피네.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는 내 얼굴을 그도 쳐다보았다. 그와 나는 동시에 바람 소리 나게 웃었다. 그러나 곧 웃음이 거두워진다. 제부는 어쩌면 속으로 빌어 먹을, 이라고 웅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벽부터 어쩌자고 이런 노래를 틀고 있나··· 그러나 그는 끄지는 않는다. 봄이 오면 새가 울면 임이 잠든 무덤가에 너는 다시 피련마는 임은 어이 못 오시는가. 지금 산엔 꽃이 없다. 가까운 산에도 먼 산에도 단풍도 반은 졌다. 지금도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새떼들이 앉았다 일어나는 것처럼 후루룩 지고 있다.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신경숙/ ‘그는 언제 오는가’에서
1) 오정희소설집, 바람의 넋 (서울 : 문학과지성사, 1986)
2) 서정인 소설집, 「강」(서울 : 문학과지성사, 1979)
3) 은희경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서울 : 문학동네, 1997)
4) 조경란 소설집, 「불란서 안경원」(서울 : 문학동네, 1997)
5) 오정희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 (서울 : 문학과지성사, 1993)
6) 이처럼 한 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을 객관화하여 전달하고자 끌어들인 자연의 사물을 T.S. 엘리엇은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이라 불렀다.
7) 200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8) 2000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임. 이 소설의 주인공인 어머니는 타자기를 팔어 버리는 일, 새옷을 차려 입고 빈번한 외출하기 등 여러 이상한 행동을 보여준다.
9) 이청준 외, 제1회 21세기 문학상 수상 작품집 (서울: 이수, 1998)
10) 200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임.
11) 1978년 제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12)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