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정은 용문면 소재지에서 44번 도로를 따라 횡성군 방향으로 3.5㎞ 지난 오른쪽 길가에 서 있다. 일반 정자와는 달리 담이 처져있고, 대문이 서 있다. 입구에는 일붕 서경보 큰 스님의 통일을 염원하는 시비가 한편에 서있다. 봉황정은 서쪽의 산자락이 동으로 길게 뻗어 흑천(黑川)과 마주친 절벽 위에 정자가 건립되어 있는데, 그 일대는 봉황이 춤추는 형상으로 경치가 빼어나 시인묵객들이 들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글로 적고는 했다.
봉황정이라고 쓴 문을 들어 계단을 오르면 먼저 정자 안편에 남휘정이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그리고 흑천 쪽으로 정자를 돌아가면 구성대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한 정자에 이렇게 방향에 따라 세 개의 정자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이러하다. 먼저 「九成」은 태평성대가 아홉 번 이루니 봉황이 와서 춤추는 형상을 말함이고, 「覽輝」는 봉황이 천리 길을 날아가다 덕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내려앉았다는 뜻을 지닌 말이라고 한다.
봉황정은 세개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문에는 봉황정이, 그리고 정자에는 구성대,
안쪽에는 남휘정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봉황정이 처음 건립된 것은 인조 2년(1624) 남원양씨 용문면 입향조인 양응청(梁應淸)과 그의 사촌인 양응함(梁應涵)에 의해서였다. 그 뒤 66년 후인 정조 14년(1791)에 후손들이 중건하였으나, 철종 1년(1850)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고, 다시 1967년에 남원양씨 종중에서 옛 규모대로 복원하였다.
봉황정은 당대의 시인묵객들이 시와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지평에 은거하였던 이식(李植, 1584~1647), 명시인 유희경(劉希慶, 1545~1636), 대학자 김창흡(金昌翕, 1653~1722), 한말의 재상 이중하(李重夏, 1846~1917) 등이 봉황정에 올라 그들의 회포를 글로 남겼다. 이중 「봉황정」이라는 제목으로 이항복, 유희경, 김창흡의 작품이 있고 『봉황청풍(鳳凰淸風)』이라는 제목의 양창석(梁昌錫)의 시와 『봉황대지평(鳳凰臺砥平)』이라는 임숙영(任叔英)의 시가 전한다. 봉황정은 팔작지붕에 겹처마 건물로서 내부에는 누마루를 놓았다. 규모는 정ㆍ측면 각각 3칸으로 정방형이다. 정자 안에는 「봉황대남휘정중수기」부터 최근에 만든 시문현판까지 모두 7개의 현판이 남아있다.
일붕 서경보 큰 스님의 통일을 염원하는 시비
봉황정을 올라 절벽 밑 흑천을 바라보니 한낮의 더위를 피해서 모여든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물놀이를 하고 있다. 지금도 저리 물이 맑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지난날은 어떠했을까? 아마 이곳을 지나는 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을 붙들고 시 한수 읊조리게 만든 것도, 다 저 맑은 흑천과 아름다운 주변 경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람 한 점이 불더니 더운 여름 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준다. 정자 주변에는 돌로 성곽처럼 쌓아 운치를 더했다. 정자 옆 노송에 불은 매미 한 마리 한낮의 더위에 지쳤는지 소리를 죽인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참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작은 쓰레기 하나도 없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는 정자 한편 기둥에, 이곳은 양평군 문화재임을 나타내는 글이 붙어있다.
단청도 되어있지 않은 봉황정. 그러나 그 모습이 참으로 단아하다고 생각이 든다. 오히려 치장 하지 않은 순수함 속에서 자태를 내보이는 봉황정에서 또 다른 멋을 발견할 수가 있다. 많은 정자를 찾아다녔지만, 소박하면서도 중후한 느낌을 주는 봉화정이야말로 칭찬을 해주고 싶은 정자다. 오늘 봉황정에 올라 그 동안 잘못 보존되어지고 있는 수많은 문화재를 보면서 쓰리던 속이 다 가시는 듯하다. 그래서 아름다운 전국의 정자를 찾는 길은 계속되어지는가 보다.
봉황정은 용문면 소재지에서 44번 도로를 따라 횡성군 방향으로 3.5㎞ 지난 오른쪽 길가에 서 있다. 일반 정자와는 달리 담이 처져있고, 대문이 서 있다. 입구에는 일붕 서경보 큰 스님의 통일을 염원하는 시비가 한편에 서있다. 봉황정은 서쪽의 산자락이 동으로 길게 뻗어 흑천(黑川)과 마주친 절벽 위에 정자가 건립되어 있는데, 그 일대는 봉황이 춤추는 형상으로 경치가 빼어나 시인묵객들이 들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글로 적고는 했다.
봉황정이라고 쓴 문을 들어 계단을 오르면 먼저 정자 안편에 남휘정이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그리고 흑천 쪽으로 정자를 돌아가면 구성대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한 정자에 이렇게 방향에 따라 세 개의 정자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이러하다. 먼저 「九成」은 태평성대가 아홉 번 이루니 봉황이 와서 춤추는 형상을 말함이고, 「覽輝」는 봉황이 천리 길을 날아가다 덕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내려앉았다는 뜻을 지닌 말이라고 한다.
봉황정은 세개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문에는 봉황정이, 그리고 정자에는 구성대,
안쪽에는 남휘정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봉황정이 처음 건립된 것은 인조 2년(1624) 남원양씨 용문면 입향조인 양응청(梁應淸)과 그의 사촌인 양응함(梁應涵)에 의해서였다. 그 뒤 66년 후인 정조 14년(1791)에 후손들이 중건하였으나, 철종 1년(1850)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고, 다시 1967년에 남원양씨 종중에서 옛 규모대로 복원하였다.
봉황정은 당대의 시인묵객들이 시와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지평에 은거하였던 이식(李植, 1584~1647), 명시인 유희경(劉希慶, 1545~1636), 대학자 김창흡(金昌翕, 1653~1722), 한말의 재상 이중하(李重夏, 1846~1917) 등이 봉황정에 올라 그들의 회포를 글로 남겼다. 이중 「봉황정」이라는 제목으로 이항복, 유희경, 김창흡의 작품이 있고 『봉황청풍(鳳凰淸風)』이라는 제목의 양창석(梁昌錫)의 시와 『봉황대지평(鳳凰臺砥平)』이라는 임숙영(任叔英)의 시가 전한다. 봉황정은 팔작지붕에 겹처마 건물로서 내부에는 누마루를 놓았다. 규모는 정ㆍ측면 각각 3칸으로 정방형이다. 정자 안에는 「봉황대남휘정중수기」부터 최근에 만든 시문현판까지 모두 7개의 현판이 남아있다.
일붕 서경보 큰 스님의 통일을 염원하는 시비
봉황정을 올라 절벽 밑 흑천을 바라보니 한낮의 더위를 피해서 모여든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물놀이를 하고 있다. 지금도 저리 물이 맑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지난날은 어떠했을까? 아마 이곳을 지나는 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을 붙들고 시 한수 읊조리게 만든 것도, 다 저 맑은 흑천과 아름다운 주변 경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람 한 점이 불더니 더운 여름 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준다. 정자 주변에는 돌로 성곽처럼 쌓아 운치를 더했다. 정자 옆 노송에 불은 매미 한 마리 한낮의 더위에 지쳤는지 소리를 죽인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참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작은 쓰레기 하나도 없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는 정자 한편 기둥에, 이곳은 양평군 문화재임을 나타내는 글이 붙어있다.
단청도 되어있지 않은 봉황정. 그러나 그 모습이 참으로 단아하다고 생각이 든다. 오히려 치장 하지 않은 순수함 속에서 자태를 내보이는 봉황정에서 또 다른 멋을 발견할 수가 있다. 많은 정자를 찾아다녔지만, 소박하면서도 중후한 느낌을 주는 봉화정이야말로 칭찬을 해주고 싶은 정자다. 오늘 봉황정에 올라 그 동안 잘못 보존되어지고 있는 수많은 문화재를 보면서 쓰리던 속이 다 가시는 듯하다. 그래서 아름다운 전국의 정자를 찾는 길은 계속되어지는가 보다.
첫댓글 조선의 정자 봉황정이 반도 용문면에 설치되었다면 대륙에는 산서성 영제(용문)에 있어야 합니다. 남원양씨와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