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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주에 관해서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기를 미국 대륙을 탐험 한 인물이 콜럼부스이고 호주대륙은
제임스 쿡선장이고 남미를 발견한 사람은 마젤란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런 인물보다 약 90년 전인
15세기 초 세계일주를 한 조선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황제 태종(영락제)의 명령을 받아 약 2만
명이상을 실은 대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뿐만이 아니라 아메리카까지 도달해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대
항해를 이끈 정화라는 인물이다. (명은 성조때)
잠수함 함장 출신 아마추어 역사가 개빈 멘지스는 조선인 정화(鄭和)제독이 이끄는 탐험대가 1421년부
터 1423년 사이에 움직인 경로를 지난 14년간 연구한 끝에 포르투갈의 항해사 레르디난드 마젤란보다 1
세기 앞서서 세계를 처음으로 일주했던 사람은 정화 제독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멘지스는 영국 왕립
지리학회에서 200여명의 외교관, 학자, 해군장교, 출판업자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발표했다고 한다.
멘지스는 당초 1421년의 세계적인 중요성에 대해 책을 쓸 의도였으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조사작
업을 하던중 1459년의 구형도를 봤으며 그 구형도에는 아프리카 남부와 희망봉이 들어있었다고 말했
다.
희망봉이 바스코다가마에 의해 '발견'된 것은 1497년이였는데 멘지스 자신이 본 구형도에는 중세 페니
키아어로 1420년 희망봉을 돌아 베르데제도까지 갔던 항해에 대한 기록이 있었고 조선 정크선의 그림
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쿡 선장이나 마젤란, 다가마, 콜럼버스 등보다 앞선 조선의 천체도와 지도를 이용해 정화의 항해를
재구성했다고 말하고 조선인들은 현재 우주선 항행시의 기준별이 되고 있는 용골자리의 으뜸별을 이용
해 항로를 그려나갔으며 남극 근처까지 항해했었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유럽의 탐험가들이 어떻게
지도를 갖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의 탐험선(정크선)들은 넬슨제독의 빅토리호보다 3배나 큰 배였고 16세기 유럽의 원양 범선들
을 압도하는 등 15세기 초반 중국의 원양 항해술 우위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멘지스는 말했다. 조선
황제의 지원을 받은 정화는 7차례의 대항해를 한끝에 1423년 10월에 귀국했으나 당시 조선은 정치.경제
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어 함대는 버려지고 제독들은 퇴역했다는 것. 그래서 정화 제독에 대한 기록은 대
부분 사라졌으나 지도 몇장과 천체도들은 남았고 이들은 인도에서 조선 정크선에 탔던 상인 니콜로 다
콘티에 의해 베네치아로 옮겨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멘지스는 말했다.
콘티는 1434년에 출판된 기행문에서 호주를 경유해 조선으로 항해했다고 주장, 쿡 선장보다 350년 앞
서서 호주에 갔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멘지스는 포르투갈왕의 장남이 1428년 베네치아를
지나가면서 이 지도를 손에 넣었고 이를 세계지도에 합쳐넣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지도를 다가마, 마
젤란, 쿡 등이 이용했을거라고 말했다. 콜럼버스를 비롯한 유럽탐험가들의 편지의 기록들은 그들이
지도를 갖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며 '그들은 항해를 떠나기전에 이미 그들이 갈 곳을 알고 있었
다'고 그는 말했다.
멘지스는 1421년 12월 카리브해에서 난파한 조선 탐험선 9척의 위치를 알아냈으며 대륙붕에 놓여있는
배의 바닥짐(ballast) 돌들의 사진은 그 형태와 크기가 최근 필리핀에서 발굴된 조선 보물선에서 발견된
것들과 동일하다고 말했다.
그럼 그의 주장 대로 라면 세계를 최초로 일주한 인물은 정화라는 조선인이 된다. 우리가 배웠던 역사
책의 한쪽에 나오는 정화란 인물과 같은 인물이다. 정화의 남해 원정.. 그럼 그가 어떤 인물이고 어떤
항해를 했는지 자료를 찾아 한번 다시 그의 항로를 보기로 하겠다.
미국의 “라이프”지가 지난 1천년을 만든 세계적 위인 1백명을 순위별로선정했는데, 동양인들 중에서 가
장 앞자리(14번째)를 차지한 사람은 15세기 남해를 7번이나 항해한 중국(조선)의 명장 정화(鄭和)이라
고 한다.
현중국에서 ‘Chinese Columbus’로 숭앙을 받고 있는 정화(鄭和, Zheng He, 1371~1435)는 1371년
(고려말)에 곤양(현재의 운남성 진닝)에서 태어났다.그의 선조는 원나라시대에 서역에서 윈난으로
이주해 온 이슬람 교도였고, 그는 2남 4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1382년 운남성이 명나라에 정복되자 체
포되어 연왕(燕王)을 섬겼다. 1399년부터 1402년에 걸친 전쟁에서 연왕을 위해 싸워 무공을 세우고,
1404년에 연왕이 혜제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후국 명의 성조 (조선은 태종 황제시기)로 즉위했다.
이때 조선황제 태종은 정화를 환관의 장관으로 발탁했고 그때 정(鄭)씨 성을 하사했던 것이다. 그당
시 성조(1360~1424)는 제후국 명의 3대왕으로 명태조의 넷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연왕에 봉해졌고, 사
천성에 주재하면서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 당시 중앙 아시아에서는 몽골인의 티무르 제국이 세력을 떨쳐 조선과 서역과의 육상 교통을 방해하
고 있었다. 1405년에는 티무르가 조선을 공격하는 전쟁을 일으켰지만 명왕이 도중에서 병사하였다.
육상 교통이 막힌 조선은 해상 교통을 통하여 서남 아시아 여러 나라와 접촉할 필요가 있기에 조선황제
태종은 고민을 하다가 정화제독으로 하여금 남해를 원정하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정화의
약30년에 걸쳐 남해(南海)를 원정하였다. 그의 원정은 1405년-33년까지 7회에 걸쳐 대선단(大船團)을
지휘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동해에 이르는 30여국에 원정하여 조선의 국위를 선양하였고, 무역
상의 실리를 획득하였으며, 조선인의 남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동남아시아 각지에서의 조선
인들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보통 화교집단만으로 알려져 있다.
정화의 항해도
정화 의 남해 원정의 일정은
제1회: 1405년 겨울~1407년 9월 2일,
제2회: 1407년 겨울~1409년 여름,
제3회: 1409년 9월~ 1411년 6월 16일,
제4회: 1413년 겨울~1415년 7월 8일,
제5회: 1417년 겨울~1419년 7월 17일,
제6회: 1421년 봄~ 1422년 8월 18일,
제7회: 1430년 12월 6일~1433년 7월 6일.까지 였었다
우선 그의 선단의 규모를 보면 예를 들어 제1회 원정은 최대 길이 44자,너비 18자인 큰 배 62척으로 구
성되고, 그 인원은 2만 7000명을 넘었다. 그 중에는 장병 외에 뱃사람, 배를 만드는 목수, 통역, 서기, 의
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항해한 거리가 18만5천km에 이른다고 한다. 백년 뒤에 1492년 콜럼버
스의 1차 항해에 참가한 인원이 120명, 함선 3척, 그 중에 가장 큰 기함의 산타 마리아호의 크기는 200-
250톤이라고 하는데 비교하여 보면 정화 함대의 크기를 알 수 있다. 정화 함대가 인도양에 진출한 것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이나 앞섰다고 한다.
나중에 ‘하서양(‘下西洋’-서양 아래)’이라 불리게 된 이 원정을 이끌었던 정화는 키가 7자 (약 2.1m)를 넘
는 당당한 체구이고,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말이 유창하였다. 이슬람 교도이면서 불교에도 귀의했던 것
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이 그가 여러 나라 사람들과의 교섭에 가장 적합했던 것이다.
정화가 이끈 대선단은 조선 부산항(상하이) 서북쪽에 있는 쑤저우 항에서 출발하여 해안선을 따라 남하
하여 푸저우에 이르고, 거기서부터 동북쪽의 계절풍을 기다렸다가 남해를 향해 출발하였다. 동북쪽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은 10월 이후였기 때문에 푸저우에서의 출발은 겨울에 이루어졌다. 한편 쑤저
우 항은 원나라 이후 해군의 근거지였고 국제 무역항이기도 하였다. 또 푸저우는 선박의 기항지로서 알
려져 있었다.
제1회 항해에서는 인도까지 도달하였다 제1회 원정에서는 참파(현재의 베트남 중부), 자바 섬 및 팔렘
방 등의 수마트라 섬 각지(인도네시아), 말라카(말레이시아), 실론(스리랑카)을 거쳐 인도 서쪽 기슭 캘
커타 까지 도달하고, 이들 각지에 상륙을 기념하는 석비를 세우고 귀국하였다. 귀국하는 배에는 이들 각
지에서 조선으로 가는 조공 사절이 동행하였다.
제1회 기항지인 참파는 현재의 베트남 중부에 있었다. 베트남 북부는 교지 지나라고 불려, 당시는 조선
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 정화는 다른 나라에 있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제2의 기항지인 자바는 예
로부터 조선과 교섭하고 있었고, 조미료나 음식물 보존에 사용하는 후추, 1년에 두 번 거두는 벼 등의 산
물이 풍요로운 나라였다. 자바 인들은 정화 일행이 조선에서 가지고 온 청화(靑花) 자기, 사향,비즈(장식
작은 구슬) 등을 기꺼이 사 주었다. 당시 자바 섬에 있던 마자파히트 왕조는 인도네시아섬의 대부분을
영유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까지의 힌두교나 불교를 대신하여 이슬람교도 전파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정화 일행은 자바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건에 휘말렸다. 당시 자바에서는 마자파히트 왕조의 동왕과 서왕 사이에 싸움이 일어
나고, 싸움에 진 동왕이 목숨을 잃었다. 우연히 동왕이 지배하던 곳에 있던 정화 일행도 싸움에 말려들
어 170명의 병사를 잃었다. 정화는 서왕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고 사죄의 사절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러한 일이 계기가 되어 마자파히트 왕조는 마침내 멸망하게 된다.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에서도 정화는 한 사건에 휘말렸다. 당시 팔렘방에는 광둥과 그밖의 지역에서 온
조선인이 많았다. 조선동포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나는 통과하는 무역선에서 재물을 약
탈하는 해적질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 그룹으로부터 지원을 요청받은 정화는 그것에 응하여 해적 패거
리 5000여 명을 토벌하고 그 대장을 생포하였다. 벌을 받기 위해 정화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온 해적 대
장은 조선황제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이렇게 하여 팔렘방 지방의 치안이 회복되고 무역의 안전이 보증
되었다.
정화의 대선단을 보고 캘커타 사람들은 놀랐다. 그보다 1세기 후인 1498년에 희망봉을 돌아 찾아온 바
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의 선단은 겨우 3척이고, 기함 산 가브리엘 호도 120t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캘커타 국왕은 불교를 믿고 소와 코끼리
를 숭배하였으며, 국사는 두 사람의 두목에게 맏겨 놓고 있었다. 정화 일행은 캘커타 사람들과 상품을
거래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베와 생사를, 캘커타 상인들은 후추ㆍ보석ㆍ산호 등을 팔았다. 상인들은 정확히 계약서
를 썼고, 나중에라도 그 계약서를 어기는 일은 없었다. 계산이 잘못되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각국과 통상 관계를 맺은 제2회 항해
제2회 항해에서는 자바ㆍ시암(타이)ㆍ캘커타ㆍ코친(인도)으로 가고, 돌아오는 길에는 실론(스리랑카)
에 들렀다. 참파에서 서남쪽을 향해 7일 낮과 밤을 항해하여 시암 항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메남 강을 거
슬러 올라가 도읍지 아유타야에 도착했다. 이 곳에 있는 왕궁은 대단히 호사스러운 것이었다. 당시 아유
타야 왕조의 인타라지아 1세는 즉위 전에 난징을 방문한 일이 있고, 계속하여 조공 관계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코친은 캘커타보다 약간 남쪽에 있는 인도 서쪽 기슭의 도시이다. 국내에 이슬람 교도가 상당히 있었지
만 국왕은 불교를 믿었다. 엄중한 카스트 제도가 행해지고, 조미료인 후추의 산지였다. 정화의 제2회 항
해에 대해서는 문헌적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나 1911년에 실론의 가레라는 곳에서 하나의 비석이 발견
되었다. 그것은 한문ㆍ타미르 어ㆍ페르시아 어의 3개국어로 쓰여져 있었다. 그 중 타미르 어는 현지어
이고, 또 페르시아어는 당시의 국제어였다. 이 비석은 현재 콜롬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정화는 그
비석에 평안한 항해에 대해 감사하고, 장래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불사에 공양했다고 써 놓았다.
위험한 전투를 수반한 제3회 항해
제3회 항해에서는 제2회와 거의 같은 항로를 더듬어 자카르타ㆍ자바ㆍ말라카ㆍ수마트라ㆍ실론ㆍ쿠이
론(인도)ㆍ코친 및 캘커타에 들렀다. 당시의 말라카는 북쪽에서는 시암, 남쪽에서는 자바의 마자파히트
국왕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것에 대항하기 위해 말라카는 조선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 요청에 따라
조선은 정화를 사절로 하여 말라카를 조선의 보호국으로 할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시암으로부터의 침입이 없어지고, 말라카는 급속히 국력을 회복하여 말레이 반도 대부분과 수마
트라 섬의 동쪽 기슭을 영유하는 강대국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말라카는 조선의 조공국이 되고,1511년
에 포르투갈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기까지 그 관계가 계속되었다.
실론의 이름난 산물은 용정향이었다. 그것은 향유고래의 체내에서 생기는 일종의 병적인 분비물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그 기묘한 형태와 색깔, 멋진 향에서 이것을 용의 침이 굳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향료
·화장품ㆍ약품으로 귀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당시의 실론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조선으로 가는 도
중 정화가 실론에 들를 것을 전해 들은 국왕은 금은 보화를 헌상한다고 하고, 5만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선대를 공격할 계략을 짰다. 그것을 알아차린 정화는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왕성을 공격하여,
국왕과 그 가족을 붙잡아 조선에 복속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바다를 건너 기린을 가져온 제4회 항해
제4회 항해에서는 캘커타에서 더 북서로 올라가 호르무즈까지 원정하였다. 정화 일행이 갔던 장소로는
호르무즈가 가장 서쪽 땅이다. 기뻐한 호르무즈 왕은 조선황제에게 보내는 헌상품으로 사자ㆍ기린ㆍ아
라비아 말 그리고 페르시아산 진주를 배에 실어 보냈다. 수마트라에서 본대와 헤어진 별대는 몰디브(인
도양 몰디브 군도)를 거쳐 아프리카 대륙 동쪽 기슭의 모간디슈ㆍ브라바ㆍ마린디를 방문하고, 북상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아덴과 즈파르를 거쳐 호르무즈로 가서 본대보다 약 1년 늦게 귀국하였다. 별대가 방
문한 나라에서도 초대에 응해 조공 사절이 조선을 방문하였다.
수마트라에서도 정화는 한 사건에 말려들었다. 수마트라 왕이 이웃 나라의 나쿠르 왕에게 공격을 받고
전투 중에 독화살을 맞아 세상을 떠났다. 국왕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으나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원
수를 갚을 수가 없었다. 왕비는 ‘남편의 원수를 갚고 국토를 회복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은 그의 아내
가 되고, 그는 이 나라의 왕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약속하였다. 나이가 든 한 사람의 어부가 나타나
멋지게 국왕의 원수를 갚았다. 약속대로 왕비는 그와 결혼하고 그를 노왕이라 부르며 국정을 일임하였
다. 그런데 어렸던 선왕의 아들이 성인이 되어 부하와 함께 의붓아버지인 노왕을 죽이고 왕위를 이었다.
이렇게 하여 선왕의 아들과 노왕의 동생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 때 정화는 선왕의 아들을 도와 그
를 왕위에 앉혔다. 정화에게 감사한 새로운 왕은 조선과의 조공 관계를 계속할 것을 약속했다.
경험을 쌓아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제5ㆍ6회 항해
제5회 항해의 항로는 제4회 때의 항로와 거의 같았다. 즉 정화가 이끄는 본대는 호르무즈까지, 별대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기슭 및 아라비아 반도까지 갔다. 전회의 항해에서 조선황제에게 헌상한 기린과 그
밖의 희귀한 동물을 조선황제가 대단히 좋아했다는 말을 들은 여러 나라의 왕이 사자ㆍ기린ㆍ아라비아
말ㆍ얼룩말ㆍ낙타ㆍ타조 등을 헌상하였다. 이 가운데 조선인이 가장 좋아한 것은 기린이다.
제6회 항해에서 정화의 본대가 어디까지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호르무즈까지 갔다는 설과 수마트라ㆍ시암까지밖에 가지 않았다는 설 등이 있
다. 그러나 별대 쪽은 지금까지대로 아프리카 동쪽 기슭에서 페르시아 만까지갔다. 아프리카 동쪽 기슭
의 산물 중에서 조선인이 특히 흥미를 가진 것은 유향이었다. 그것은 이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얻어
지는 수지 향료로서, 조선인은 이것을 향료및 화장품으로 귀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제6회와 제7회 항해 사이의 1424년 1월부터 8월까지 조선 황제의 명령을 받은 정화는 팔렘방으로 갔다.
팔렘방의 장관이 죽은 후에 그 아들과 딸 사이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는데, 아들 쪽이 이겨서 아버지의
관직을 잇고 싶다고 요청해 온 것이다. 그것을 승인한다는 조선황제의 말을 그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항해는 소규모였기 때문에 정화의 대항해 중에는 꼽지 않는다.
정화의 마지막 항해가 된 제7회 항해
이 항해 에서도 정화의 본대는 호르무즈까지 가고, 별대는 아프리카 동쪽 기슭과 페르시아 만까지 갔다.
별대 중 일곱 사람이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 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항해
에는 없었던 일이다. 메카에 있는 이슬람 사원인 카바 신전에 대해 그들은 다음처럼 기록하였다. 이 신
전에는 성벽을 에워싸는 466개의 문이 있다. 문 양쪽에는 백옥으로 된 기둥이 세워져 있고, 기둥의 수는
467개이다. 앞에 99개, 뒤에 101개, 왼쪽에 132개, 오른쪽에 135개이다.’ 또 ‘메카 서쪽으로 하루 여정
거리에 메지나가 있다. 성인 마호메트의 묘는이 성 안에 있다.’ 고도 기록하였다. 제7회 항해에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은 1434년에 정화는 난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다의 실크로드를 개척한 정화의 공적 북방의 실크로드에 견주는 ‘바다의 실크로드’ 또는 ‘도자기의
길’이라 불리는 남해 항로를 개척하여 인도양을 건너 페르샤만과 동북 아프리카까지 진출하면서 각국에
명 성조의 조칙을 전달하고, 때로는 전쟁을 하면서 까지 조선에 대한 조공 관계를 유지시켰으며 조선인
들의 활발한 해외진출을 촉진시켰다.
정화의 원정대에 동행한 조선인 이슬람교도 마환(馬歡)은 아시아 대항해시대’의 증언으로 이 항해기록
을 남겼다. 항해하는 중의 진기한 견문에 대한 상세한 “下西洋“이라는 이 기록은 지리지(地理誌)로도 가
치의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 다른 인물인 비신(費信)의 <성차승람(星嵯勝覽)>, 공진(鞏珍)의 <서양
번국지(西洋番國志)> 등의 견문기는 조선인의 남지나에 대한 지식을 급속히 높여 주어 남해 지방의 조
선동포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또 이들 견문기 덕택에 정화의 항해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고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
의 <동방 견문록>과 나란히 유럽 인들에게 동양으로의 호기심을 낳게 하였다
정화의 해양 개척정신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정화의 원정으로 조선은 세계의 강대국이 되었
으나 정화함대를 끝으로 바다를 포기하였기 때문에 그 뒤 조선은 서양제국주의 세력이 바다를 통하여
밀려 들어와 시련과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실
을 알지 못하였다.
정화의 남해 원정으로 조선요리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흔히 아는 현중국요리중에 상어지느러미가
요리용으로 문헌에 나오기는 조선 때이고 정화(鄭和)장군이 인도양에 나갔을 때 상어지느러미를 얻어
조선황제에게 바쳤다고 한다
2007.10.28 CNN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도 같은 내용을 방영했다. 물론 글쓴이 변지현님과 CNN은
대륙조선인 정화를 중국인으로 표현했지만, 주된 내용은 모두 조선에 대한 내용이다. 세계을 탐험하며
각국을 조공국으로 복속시키며 결국에 가서는 미국땅을 발견하게 된다. 컬럼버스보다 90여년 전의 일
이다.
조선의 황제가 바뀌면서 세계정복의 길은 중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의 판옥선은 수군을 위한 선박
이었고, 정크선은 해군,무역을 위한 선박이었다. 조선의 조선술은 그당시 세계에서 최고였다. 물론 명
왕 성조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조선황제 태종의 명을 받고 항해를 한 것이다. 대규모의 해군과 물자
싣고 가는 것은 조선황제의 허락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명왕은 사천성,운남일대의 토호세력에 불과
했다. 끝.
참조: 최초의 세계일주 변지현저 . 번호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