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僑民 30여만 명이 살고 있는 美 뉴욕市 플러싱(Flushing).
플러싱은 우리로 치면 서울의 區 정도에 해당한다. 지역 주민의 45%가 중국·한국 등 아시아系인 플러싱의 YMCA 理事陣을 1926년 창립 이후 처음으로 동양인이 이끌고 있다. 한국 국적인 존 유(한국명 柳鍾守ㆍ39) 이사장은 미국 主流 사회에 뿌리내린 몇 안 되는 한국인으로 손꼽힌다.
플러싱 Y(YMCA)에서 매일 수영과 헬스를 하는 成人 회원은 8000여 명, 지난해 청소년 1만4000여 명이 플러싱 Y의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해 미국 내 3000여 개의 Y 가운데 청소년 참여 성적 2위를 차지했다. 정규 직원 169명, 파트 타임 직원 190명이 체육시설 등을 관리하고, 청소년들을 지도하고 있다.
일요일인 지난 9월2일 방문했을 때 플러싱 Y에서는 교회 건물이 없는 미국 교회 두 곳, 중국 교회 한 곳이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뉴욕 도심에 위치하고 있지만, 7층 건물에 125室의 숙박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플러싱 Y는 지역사회의 중심이다. 지난 5월 파타키 뉴욕 주지사는 플러싱 Y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不法 이민자들에 대한 법적 배려, 가난한 이민자들에 대한 재정지원 확대를 약속했다.
柳이사장은 뉴욕市 전체 YMCA의 이사를 이미 한 차례 역임했고, 내년에 다시 이사직을 맡을 예정이다.
그의 本業은 가톨릭 뉴욕 敎區의 재산 관리와 가톨릭 家庭福祉 사업분야를 지휘하는 일이다. 뉴욕은 가톨릭 신도가 300여만명으로 시카고에 이어 미국에서 가톨릭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지역이다. 그가 굴리고 있는 가톨릭 투자 기금(Endowment Fund)만 1억3000만 달러(한화 1690억원) 규모다.
30代인 그가 白人들이 배타적으로 이끌어온 플러싱 Y의 이사장 자리를 맡고, 가톨릭 뉴욕 敎區의 재산을 관리하는 비밀스러운 일에 참여하게 된 과정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미국에 온 지 20년째인 그는 아직 미국 국적을 취득할 생각이 없다. 『너와 네 자식들 뼈를 선산이 아니라, 미국 땅에 묻을 생각이 굳어지면 미국 국적을 가져라』는 부친의 당부 때문이다.
『몇년 전 CIA 국장이 CIA 안에서 미국 Y 지도자들을 위해 파티를 열었는데, 저는 보안심사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참가를 거부당했습니다. 백악관 파티에 갈 때는 신원조회로 고생합니다. 미국 친구들이 그럴 때면 「존, 너 미국 사람 아니었느냐」고 놀랍니다』
그가 플러싱 Y의 이사직을 맡은 것은 1995년. 1991년부터 뉴욕 敎區 재산 관리에 참여하면서 친구가 된 월 스트리트의 금융계 인사가 당시 플러싱 Y의 이사장이었다. 「그린 포인트 세이빙 뱅크(Green Point Saving Bank)」의 수석 부회장인 마틴 대시(Martin Dash)는 柳이사장에게 『사회봉사를 하지 않는 한 당신은 언제까지나 미국 메인 스트림(主流사회)의 바깥에 떠돌 수밖에 없다』며 이사 참여를 적극 권했다.
『그때 이사가 17명이었는데, 저를 빼면 이사들이 대부분 白人에 60代의 월 스트리트 금융계 간부들이었습니다. 뉴욕 자이언츠 팀의 수석 부사장을 역임한 댄 스미스씨 같은 거물은 이미 이사장을 지내고, 명예이사로 있었구요. 30代 초반은 저 하나였습니다. 아시아系 사람들은 이사진에 끼워 줘도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가 없겠더군요』
오코너 추기경 추천으로 가톨릭 재단 기금관리 참여
그가 1991년 오코너 樞機卿(추기경)의 지시로 가톨릭 기금 관리에 참여하기 시작했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가 들어가기 전 가톨릭 재단의 재산 관리인은 세 명. 그는 오코너 추기경의 개인 비서 자격으로 참석했고, 다른 세 사람은 월 스트리트의 쟁쟁한 은행가 출신 인사들이었다. 메릴 린치, J P 모건 같은 資産관리 회사에 맡긴 가톨릭 기금들이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지 분석하는 게 이들의 임무였다.
컬럼비아 대학 행정학 박사과정에 籍을 두고, 가톨릭 복지재단에서 일을 시작한지 3년밖에 안 된 그로서는 『한 수 가르쳐달라』고 말을 건네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저한테 한 분이 「월 스트리트 어느 투자기관에서 일하다가 스카우트됐느냐」고 묻는데 눈앞이 캄캄하더라구요. 제가 아는 경제지식이라곤 대학 때 배운 경제원론 거시-미시 경제학이 전부였거든요. 메릴 린치, 모건 스탠리의 전문가들이 보내는 기안서가 책상에 쌓이는데 난감했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뉴욕 타임스와 월 스트리트 저널을 「聖經」처럼 읽었다. 월 스트리트에서 일하는 미국인 대학(뉴욕 포덤 대학) 동창들을 만나, 돈이 어떻게 굴러다니며 불어나는지 열심히 공부했다. 하버드 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에도 참가했다. 스트레스로 식사가 늘어선지 체중이 10kg쯤 갑자기 불었다. 도저히 하기 어렵겠다는 말을 하려고 찾아갔더니 오코너 추기경은 『존은 돈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돈을 만들 運이 있는 사람』이라며 공부를 계속하라고 격려했다.
『어떤 날은 수영장에서 세 시간 이상 수영을 했습니다. 답답하니까. 부모님 생각도 하고, 형님들 생각도 하고, 명상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러다 갑자기 이런 깨달음이 왔어요. 혼자하면 바보다. 나 혼자의 지식과 머리에만 의지해서 무슨 좋은 생각이 나오겠느냐는 거지요』
柳이사장은 자신이 가동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무엇이 있는지 고민했다. 가톨릭 재단에 몸담고 있으니 가톨릭 인맥을 활용하자는 결심이 섰다. 미국 내 큰 성당 중 포트폴리오 성적이 좋은 곳의 재산 관리인과 가톨릭 信徒인 금융계의 거물들을, 뉴욕 대교구의 主敎와 추기경에게 부탁해 집중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가까운 뉴욕 대학, 컬럼비아 대학의 투자 세미나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절박한 필요에 따라 공부하니 2~3년 지나자 나름대로 株價나 기업 內在가치에 대한 투자 분석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柳이사장은 『가톨릭 투자기금의 목표 수익률이 7~8%인데 지금까지 매년 13% 정도의 收益을 내고 있다』며 『자금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나도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1995년 Y 이사로 취임한 후 柳이사장은 동료 理事들이 무얼 생각하고, 무얼 공통분모로 갖고 있는지 파악에 나섰다. 白人 이사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아시아系 주민들이 공동체(Community)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고,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적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사로 취임한 직후 이사장 마틴이 柳이사장을 이사들의 골프 모임에 첫 초대했다. 柳이사장은 함께 골프칠 이사장과 이사들의 취미와 식사 취향, 가족관계를 꼼꼼히 파악했다. 그리고 프로 골퍼를 데리고 골프장을 그 전날 한바퀴 돌았다.
1998년 여름 후임자를 물색하던 당시 이사장 닉 이노서스(Nick Inousus)는 柳이사장과 골프를 치면서 『오늘 당신이 90대 초반의 성적만 내면 이사장 자리를 물려 주겠다』고 농담을 했다. 柳이사장은 「닉이 나를 마음에 두고 있구나」하고 짐작을 했다고 한다.
몸이 불편했던 이사장 닉이 1999년 초 병원에 입원하면서 이사장 代行으로 柳이사장을 지명했고, 1999년 11월 이사회에서 柳이사장은 참석한 이사 15명 전원의 찬성표를 얻어 3년 임기의 이사장에 당선됐다.
이사장 취임 후 그는 이사회 정원을 19명에서 25명으로 늘리는 안건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뉴욕 韓人 회장인 앤드류 킴, 세계 최대 규모의 회계법인 KPMG의 美 본사 파트너인 박상환씨를 이사로 영입했다. 朴이사는 플러싱 Y의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다. 사업을 하고 있는 김유창, 이명우씨도 이사로 선임됐다.
플러싱 Y를 거점으로 한 韓人 사회의 사회 봉사활동은 눈에 띄게 활발해지고 있다.
지난해 플러싱 Y의 「올해의 인물」로는 삼성물산의 미국 현지 브랜드인 후부(Fubu)를 관리하고 있는 이만수 전무가 선정됐다. 李전무는 삼성의 돈을 出捐(출연)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人的 네트워크를 활용해 少額 寄附만으로 5만 달러를 모은 공로를 인정받았다.
柳이사장은 『메인 스트림(主流)이 사회에 영향 끼칠 결정을 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라고 한다면, 미국 사회의 메인 스트림에 더 많이 진출할수록 좋은 것』이라며 『寄附라는 것이 큰돈을 내야 하는 것도 아닌데, 韓人 사회는 축적된 힘을 메인 스트림에 표출하는 일에 아직은 서투르다』고 걱정했다.
『NGO는 봉사활동을 많이 해야』
柳이사장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1989년부터 가톨릭 복지재단에서 가정복지 사업을 하고 있다. 美 정부에서 매년 3000만~4000만 달러를 지원받아, 미혼모 母子 보호, 불법 이민자 및 빈민 구호, 入養 前 어린이들에 대한 예능교육 사업을 했다. 입사 1년 만에 과장으로, 다음해에 실장으로 진급했고, 지금은 뉴욕 가톨릭 교구 가정복지 사업의 기획조정·감사 책임자다. 정부에서 받아온 돈을 사업별로 나누고, 정부의 사후 감사를 준비하는 게 그의 일이다.
그는 이런 경험을 Y의 재정위원장, 이사장으로서 「기금 모금」을 하는 데 백분 활용했다.
柳이사장은 1980년 대구 성광고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1982년 가톨릭 예수회가 운영하는 포덤(Fortham)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어렸을 때 신라의 스님들이 인도로 공부하러 갔었다는 얘기에 감명을 받아, 대학은 무조건 미국 가서 다니겠다는 생각이었다』며 『더구나 서울대학 갈 실력이 안 돼 과감히 한국을 떠났다』고 털어놓았다.
학생회 부회장으로 등록금 인상, 학생회관 운영 등을 놓고 神父들과 접촉이 잦았다. 총장 공관에서 해질 무렵 벌어지는 神父들의 와인 파티에도 가끔 초청됐다. 그는 신부들의 각별한 신임을 받게 됐고, 4학년 때에는 뉴욕 대성당 官邸에서 오코너 추기경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柳이사장은 한국의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다. 할 얘기가 많았다. 특히 한국 사회운동단체들이 사회적 쟁점이 생길 때마다 「보건연대」, 「통일연대」 같은 대규모 연합조직을 만드는 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한국 사회단체들은 주어진 모든 것에 참여하고, 모든 것에 代案을 제시해야 한다는 숙명적인 압박을 받는 것 같아요. 미국 Y는 「청소년들이 미래 지도자로 자랄 수 있도록 지도한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도록 한다」는 임무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사실 그것보다 중요한 사명이 뭐가 있겠습니까』
柳이사장은 미국 정치권에 발이 넓다. 닉슨 前 대통령 집안, 쿠오모 前 뉴욕 주지사 집안 사람들은 플러싱 Y 행사의 단골 손님들이다.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 리처드 게파트 민주당 하원 원내총무 등과도 잘 아는 사이다. 정치인들의 정치자금 모금 파티에도 자주 참석한다. 그는 IMF 직후인 1998년 초 월 스트리트의 투자전문가 4명과 한국을 찾았다. 국회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국회의원 회관에서 열린 의원 후원회에 참석했다.
미국 금융인들은 국회의원 후원회 모금함에 사람들이 돈봉투를 집어넣고 가는 광경을 보고 『야, 한국 와서 정치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놀랐다고 한다. 반드시 수표로 정치자금을 내고, 영수증을 받아가는 미국 정치자금 수수 관행과 비교할 때 한국은 정치인의 낙원이라는 것이다.
한국 유학생이나 교포 학생들이 미국 主流사회에 接續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일이 뭐냐고 묻자, 그는 열 가지를 꼽았다.
① 대학에 다니면서 반드시 운동 클럽, 학생회 활동에 참가하라.
② 미국 친구를 깊게 사귀어라.
③ 문화활동에 많이 참가하고 즐겨라. 값싼 연극표, 콘서트표는 사방에 널려 있다.
④ 학교 밖의 사회단체나 정부기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라.
⑤ 동문 선배들을 찾아가서 만나고 자문을 구해라. 가만히 앉아 있는 한국 학생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⑥ 남을 인정해라. 남을 인정하고, 책임감을 가질 때 이해와 중재가 가능하다.
⑦ 책을 많이 읽어라. 시간이 없으면 오디오 북이라도 들어라. 문화적으로 접속이 되려면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
⑧ 자기 시간을 가져라. 30분이라도 조용히 자기 성찰을 하면 나만의 氣를 살릴 수 있다.
⑨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라. 미국인들은 당연히 당신이 한국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⑩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어라. 그 시간에 공부하는 게 낫다고 하지만, 공부는 성공의 여러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