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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라 코리아 사바 봉사단 이야기
개요
아드라 코리아 사바 봉사단은 2. 13-24, 말레이시아 사바주 루복 마을에서 수도시설공사(이하 워터 프로젝트)를 하고 왔다. 봉사단은 단장 박권수(아드라 영남지부장)목사, 총무 조홍준(아드라 코리아 직원)집사, 황수민(삼육대학교 건축과 학생)양, 봉화/춘양지역 교우들 총 21명으로 구성되었다.
본 프로젝트를 위한 재원은 아드라 코리아와 아드라 영남지부가 부담했으며, 봉사단원들은 항공료와 약간의 부담 만으로 10박 11일 간의 일정을 보낼 수 있었다.
아드라는 ‘그리스도교적 박애 정신을 가지고 국제적인 구호활동을 수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민간구호 기구’이며, 아드라 코리아는 ‘삼육국제구호개발기구’로 번역되며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우는 다정이를 떼어 놓고
2월 13일(수) 새벽 3:30! 춘양교회 교육관에 모였다. 그런데 와야 할 사람이 한 사람 오지 않았다. 이현숙 씨였다.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 가장 늦게 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늦게라도 교육관에 모여야 기도를 드리고 출발하는데 끝내 교육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와 함께 출발기도에 동참하지 못했다. 집에서 차로 바로 갔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정이가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서 혹은 함께 가고 싶어서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울고 있는 다정이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우는 것을 보고 집을 나서야 했다.
이 일이 10박 11일 내내 뇌리속에 떠나지 않았다. 이 일은 이렇게 정리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에는 온 가족이 못가도 된다. 하지만 하늘나라에는 온 가족이 가야 한다.
온 가족이 가야 행복한 나라가 있다면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가 아닐까? 이번 기간에 가장 부러운 가족은 단연 정희석 집사님 가족이었다. 네 식구 모두가 함께 말레이시아에 동행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족은 일종의 책임의식을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통해서 가족끼리 서로 사랑을 나누고, 필요를 채워줌으로 하늘까지 가야 한다는 암시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배어 있는 것이다. 하늘 가는 가정! 우리 모든 가정들의 모토가 되어야 한다. 꼭!
코타키나발루 중앙시장에서 만난 재림교인
2월 15일(금) 12:00-15:00는 점심 및 쇼핑 시간이었다. 우리 조는 제과점에서 빵과 쥬스로 점심을 해결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전통시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니 꽤 큰 시장이 보였다. 과일, 채소 등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을 구경하는데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끼에 적힌 ‘아드라 코리아’를 보고 한국에서 왔냐며 반가워하셨다. 과일상을 하시는 분들이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아드라 코리아에서 말레이시아로 수 차례 봉사를 다녀갔기에 한국을 잘 알고 있었고, 매우 우호적이었다. 파인애플을 사려고 했더니 한사코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진정으로 돈을 받을 의사가 없는 것 같아서 감사를 표하고 난 후, 파일애플을 깍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자리에서 파인애플을 맛있게 먹었다. 그분이 출석하는 교회에 교인이 천명이라고 했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잘못 말했거나 잘못 들었겠지 하며 돌아왔다. 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사바 주에 재림 교인이 26000명이라고 들었다. 그 때서야 교인수 1000명이 믿어졌다.
그날 우리는 시장 바닥을 헤매며 많은 것을 보고 들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과일상을 하는 재림교인을 만난 것이다.
영어로 나누는 대화라서 확실한 소통은 쉽지 않았지만 만나서 반가웠고, 또한 즐거웠다. 한 소망, 한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 무엇에다 비교할 수 있으랴! 헤어지면서 말했다. See you heaven! 그랬으면 좋겠다. 사실 그 분을 이 땅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하늘에서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에서 꼭 만났으면 좋겠다. ‘그날 연두색 아드라 코리아 조끼를 입고 있었던 김목사입니다’ 라고 말하는 그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포투리동 교회에서 드린 예배
2월 16일 안식일에 우리는 포투리동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8:45에 안식일학교를 시작한다기에 서둘러서 교회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갔는데, 가는 길에 재림교회 간판 4-5를 찾을 수 있었다. 말쑥하게 차려 있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사람들을 차창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직감으로 ‘아 저분도 재림교인이구나’하고 생각했다.
약 100명 정도가 모이는 시골교회였다. 말레이시아말로 준비찬미와 안식일학교가 진행되었는데 라스코(아드라 사바지부 코디네이터)씨께서 영어로, 황수민 양이 한국으로 통역해 주었다. 찬미를 부르는 시간은 가장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여성들이 주로 나와서 찬양을 지도했는데 중고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 두 명이 나와서 지도하는 것을 보았는데 퍽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를 부를 때는 전율하는 듯 했다. 생일을 맞이한 7세 가량의 아이를 엄마가 데리고 나왔고 함께 축가를 부르며 축도를 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어떨까?
각반으로 나누어서 교과공부를 진행했는데 좋은 시설들은 아니었지만 그런 공간이 있는 것이 참 부러웠다. 유치반이 교과공부하고 잇는 곳으로 가보았는데 모세의 10재앙에 대하여 공부하고 있었다. 칠판에 MUSA(모세)라고 적어두고, 10재앙을 순서대로 기록해 두었다. 플라스틱 통이 눈에 띄었는데 거기엔 개구리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개구리를 보여주면서 개구리 재앙을 설명했으리라. 교사의 남다른 준비가 돋보였다.
안식일학교를 일찍 시작하니까 시간에 쫓기지 않아서 참 좋았다. 쉬는 시간도 충분했다. 예배 갱신의 해에 좀 더 일찍 안식일학교를 시작하기로 해 보는 것은 참 좋을 것 같다.
식사 시간이 기다려졌다. 밥통, 반찬 통을 들고 식당으로 향하는 것을 보니 파틀락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10미터 남짓한 긴 식탁에 과일, 반찬, 빵과 떡, 밥, 음료 등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준비하는 시간 동안 이곳 저곳에서 담소하며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장로님께서 나오셔서 한국에서 온 아드라 대원들을 환영한다는 멘트에 이어서 다 함께 찬미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온세상 널리 전하세. 모두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 크신 사랑 온세상 널리 전하세” 식사 기도를 드린 후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몽키 바나나, 바나나 잎에 싸인 찰밥, 떡, 미란다 등 맛있는 것을 고르고 골라서 먹었다. 그날 그 식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식사하면서 19세, 17세 된 두 자매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슬픈 영어지만 대화하고 웃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따뜻한 우정을 나누었다. 말레이시아에 다시 오면 관광 안내를 해 주겠다고 했다. 메일 주소를 서로 교환했는데 시간 내어서 교류하고 싶다.
식사 후 준비해 간 의류 두 박스를 개봉했다. 가지고 가지 못한 분들도 있어 보였지만 모두들 만족해하는 듯 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낯설지 않았다. 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도 소중하고 특별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음을 실감했던 참 행복한 안식일이었다. 모 장로님은 50년전, 처음 교회에 다닐 때를 회상할 수 있었다면서 기뻐했다. 우리가 잃은 것을 그들은 아직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옛 신앙을 회복하고 싶다. GIVE ME THAT OLD TIME RELIGION!
비내리는 안식일 오후에 찾아간 교회, 만난 여학생
2월 16일 안식일 오후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라스꼬 씨, 박권수 목사님, 이병기 장로님, 조홍준 집사님과 한 여학생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 3년전, 영남 아드라에서 포도스에 수도시설공사를 하러 왔을 때, 영남 아드라에서 그 학생의 형편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고 한다. 신앙심이 돈독하고, 성적이 우수하지만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 학업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었다. 박권수 목사님은 몇 분들의 도움을 받아 그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 방문 목적의 첫 번째 목적은 그녀를 직접 만나보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의 진로가 어떠한지, 그리고 가정형편이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합회에서 약 30분 쯤 지났을 때, 우리는 한 작은 시골 교회에 도착했다. 어른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아이들만 교회에 있었다. 고등학교 학생 정도로 보이는 몇 명의 교사와 초등학교 및 미취학 아동들 이 십 여명이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하고 있었다.
그 여학생은 5분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진행하고 있는 시간을 마친 후에 집에 갈 수 있다고 했다.
네 그룹으로 나누어서 활동하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어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정확하게 알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활동은 내용은 과학, 성경암송, 끈매기법, 교사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향상급 교육 시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한국 재림교회에도 이런 때가 있었다. 삼육고등학교 학생들이 방학 때 고향교회에 오면 설교했고, 성경학교를 지도했고, 심지어는 전도회 강사로 활동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때가 있었나?’ 싶다.
말레이시아 산골에 위치한 한 작은 교회의 활동 모습을 보면서 부러움과 함께 깊은 생각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것은 발달된 문명을 향유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는가를 생각하니 부끄러운 생각이 밀려왔다.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 여학생의 집이 있었다. 아버지는 암으로 투병중이었고, 시각 장애가 있으신 분이셨다. 가장이 저렇게 누워있으니 가정의 형편이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몇 마디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드렸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인도해 주시길 … .
그 여학생은 간호학을 공부하고 싶어했다. 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선하신 길로 인도해 주시길 바란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가운데 장학금을 지원해 주실 분이 있으시다면 영남합회 아드라 박권수 목사님께 연락해 주시길 바란다. 한국에서는 적은 돈이지만 말레이시아에서는 큰 돈이다.
신랑이 더디 오매
아드라 코리아 사바 봉사단으로 말레이시아에 온 것은 일반 여행과 크게 다르다. 목적도 그렇지만 현지인들과 더 깊은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점이 더욱 그렇다. 한국 아드라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계신 어떤 분이 우리 봉사단을 결혼식에 초청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실감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어떤 절차와 분위기 속에서 결혼식을 거행할까? 우리는 설레었다. 기대되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결혼식은 지난 일요일에 했고, 오늘은 피로연이 베풀어진다는 것이었다. 약간 실망했지만 ‘그게 어디냐’ 하면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우리를 초청해 주신 분이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비가 많이 와서 출발 시각이 늦추어 졌고, 11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출발할 수 있었다. 12시 30분 쯤에 피로연 장소에 도착했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신랑집인 듯했다. 마당에는 천막이 쳐져 있었고, 100석이 넘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뷔폐로 준비된 음식이 놓여졌고, 스피커 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려왔고 전통 악기도 걸려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서 우리만 도착하면 시작되는 줄 알았더니 30분이 지나도 시작되지 않는 것이었다. 신랑 신부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다. “신랑이 더디 오매”는 말레이시아에도 예외는 아닌 듯 했다. 한 시가 넘어서야 신랑 신부가 도착했고 이윽고 피로연이 시작되었다.
피로연 순서는 환영인사-특창:즐거운 곳에서는(교인들이 나와서 부름)-멘트(내용은 모름)-기도(일어서서)-멘트(일어서서)-사진 촬영시간-멘트-케익자르기-신랑신부, 시댁어른들에게 케익 한 술 떠서 드리기-기도 로 이어졌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라는 주제로 사경회를 인도했던 경험을 상기할 수 있었던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식사 시간이 너무 늦어 배가 고프긴 했지만. 신랑이 더디 오더라고 흐트러짐 없이 신랑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순결한 처녀 재림교인이 되고 싶다.
우리를 초청해준 혼주와 신랑 신부에게 감사드린다. 부디 주님이 계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시길 바란다.
루복 마을에서 보낸 3박 4일
피로연을 마친 다음 우리는 루복 마을로 향했다. 한참 가다보니 더 이상 버스가 갈 수 없었다. 많은 비로 인하여 비포장 도로는 4륜 구동 차량이 아니면 언덕을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리 대기해 있던 트럭과 지프차에 나누어 타고 10분 가량 가니 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커뮤니티 홀이라고 불리우는 마을 회관 같은 곳에 우리의 여장을 풀었다. 잠자리 등의 불편에 대해서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예상을 능가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모기장을 치고 짐을 정리했다.
라스꼬 씨로부터 간단한 사업 설명을 들었다. 루복 마을은 3개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약 50가구, 100여 명의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수원지는 마을에서 3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수원지에서 저수지, 저수지에서 부락 물통, 물통에서 각 가정으로 이어지는 수도관 공사가 이미 진행되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수도관을 뭍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이곳에서는 ‘water project’ 라고 말했다.
괭이 같은 데 괭이는 아닌 연장을 하나씩 받아들고 우리는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수도관을 묻는 작업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남자 대원들은 농사일과 건축일에 뼈가 굵은 분들이어서 빠른 속도로 땅을 파 나가기 시작했다. 봉사팀으로는 드림팀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여자분들도 제법 잘 했다. 대부분의 작업은 현지 청년들과 같이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비가 오고, 일을 할 때에는 비가 오지 않고, 일을 마칠 때 쯤에는 비가 왔다는 사실이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랬다. 비가 오지 않은 날은 거의 없었지만 비 때문에 지장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분명하지 않은가?
아침 6:30분에 예배 드리고, 7:00에 식사했다. 8시에 작업을 나가서 두어 시간 정도 땅을 파고 호스를 묻었다. 빠른 작업 능력, 그리 많지 않은 작업 분량 등으로 그렇게 오래, 힘들게 일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힘든 노동이었을 것이다. 12:00에 점심식사하고 잠시 쉰 다음 2시쯤 작업을 시작했다. 5:00에 저녁 식사, 7:00에 저녁 예배로 하루 일과를 마쳤다. 저녁 예배 후에 진행된 윷놀이, 열대 과일들을 배부르게 먹은 시간! 다시 되돌리고 싶은 추억들이다.
준공식
2월 20일 정오, 루복 마을 커뮤니티홀에서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말이 커뮤니티홀이지 마을 회관 수준에도 못 미치는, 헛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준공식 예정 시간이 다가오자 동네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왔다. 아이들도 십 여명 왔다. 청년들이 징 6개를 매달았고, 그 소리에 맞추어서 전통춤을 배웠다.
환영사에 이어 아드라 코리아 봉사단의 특창이 있었다. ‘내게 강같은 평화’와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을 부를 때는 몇 분의 단원들이 춤까지 곁들여 졌는데 흥겨운 시간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아리랑’을 참 좋아했는데 준공식에서 그 노래를 부른 것도 그들의 요청에 의해서 였다. 며칠 동안 주방에서 봉사해 준 사모님들께서 우리들에게서 아리랑을 배우고 참 좋아하셨다. 혼자 부를 수 있을 만큼 되셨다.
이어서 루복 마을 이장의 감사의 인사가 있었다. 아드라의 water project는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하셨다. 일하는 가운데 마을 청년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 적이 혹시 있다면 용서를 구한다고 하셨다. 그런 일은 조금도 없었다. 깊은 산 속에 사시는 분이시지만 예의 바르고 친절하신 분이셨다. 이장께서는 water project가 계속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라스코(아드라 사바지부 코디네이터)는 비가 오는 데도 불구하고 일을 더 해야 한다는 아드라 코리아 봉사단을 칭찬해 주셨다.
테이프 커팅, 수도 꼭지 열기, 선물 증정(마을 주민들에게 전하는 의류, 학용품), 감사패 증정으로 준공식은 마치고 성대하게 차려진 파틀락으로 점심식사를 즐겼다.
루복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한 시간이 좀 더 많았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루복 마을을 떠났다.
단원들의 간증
2. 23(안) 일몰예배는 단원들의 간증으로 이루어졌다. 각자 받은 은혜들을 나누었는데 수첩에 간략하게 정리한 것을 풀어보았다.
이태자 집사
출국하기 하루 전에 감기에 걸렸다.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아프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말레이시아에 와서 첫날 저녁, 기침 때문에 새벽 두 시까지 잠을 잘 수 없었다. 본인이 잠을 못자는 것은 견디겠는데 다른 사람들의 잠을 방해하는 것이 미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간절하게 기도했다. 기도 드린 후 편하게 잘 수 있었는데 일어나보니 새벽 6시였다. 처음 4-5시간 동안 한 잠도 자지 못했는데 기도 후 4시간은 한번도 깨지 않고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잠자는 동안 흰옷 입은 한 남자의 품에 안겨 잤는데 후에 생각해 보니 그분이 천사였던 것 같다. 가장 빠른 시간에 기도를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이현숙 사모
포투리동 교회에서 드린 예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예배생면부지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도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들과 함께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라는 찬양을 불렀을 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안혜경 집사
놀라운 일이 있었다. 일할 시간이 되면 비가 그치고, 일을 마칠 시간에는 비가 왔다.
임상훈 집사
꽤 오랜 기간 동안 신앙적 갈등 속에 있었는데 이번 기간에 큰 도움을 받았다. 동료들의 감화와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감동이 충만했다.
이철현 장로
전도단 활동을 하게 될 때 늘 부족한 것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기간 동안 우리 남자 숙소에서는 매우 깊고 진지한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박권수 목사
관점과 시각에 따라 득과 실이 다르다며 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한 사람이 랍비에게 물었다. “성경을 보며 담배를 피우면 됩니까?” 랍비의 대답은 절대 불가였다. 다른 사람이 랍비에게 물었다.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성경을 보면 됩니까?” 랍비의 대답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달아서 여유로워지기를 주문했다.
조홍준 집사
아드라 코리아의 해외 봉사 활동 가운데 교회 단위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합도 잘 되었고 건강한 가운데 무사히 일정을 마치게 된 것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정희석 집사
아름다운 경험,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김진국 장로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 구석구석에 복음을 전하고 싶다.
최경숙 집사
가족이 다 와서 좋았다. 예지와 수민이가 아팠을 때 주방에 일하는 분들-말레이시아 현지 인들-의 근심 어린 얼굴, 맛사지 해주시는 모습, 주방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친절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분들을 만나서 행복했다. 이병기 장로
주민들과 함께 말레이시아 전통 춤을 추었는데 정말 기뻤다. 또한 예배드리는 모습이 자유분방한 것 같으면서도 경건했으며 찬미를 수없이 많이 불렀다. 처음 신앙을 할 때가 떠올랐다.
박권수 목사
“주님께서는 나에게 또 다른 세상들을 구경시켜 주셨다. 나에게 날개가 주어졌고 한 천사가 나를 그 도성으로부터 밝고 영광스러운 세계로 안내했다. 그 곳에 있는 초목들은 싱싱한 녹색이었고, 새들은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 곳에 거하는 주민들은 키가 다 같지 않았으며 고상하고 위엄이 있고 사랑스러웠다. 그들은 예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의 용모는 거룩한 기쁨으로 빛났으며 그 곳의 자유와 행복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중 하나에게 어찌 그들이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를 물어 보았다. 그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전적으로 순종하는 생애를 살았고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처럼 불순종으로 인하여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오.””(초기, 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