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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학원 원보, 총신원보 http://www.wonbo.or.kr/ 에서 가져왔습니다.
[총신논단] 가정교회에 대한 성찰
2년 김성근
1. 들어가는 말
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교회가 그 사명에 충실한가 또는 자기목적에 몰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질문 받는다. 현재의 교회는 내.외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이러한 혼란상은 날로 더해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는 가장 원초적인 부분부터 짚어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작이 잘못되었다면 거기서 비롯되어 유기적 관계에 놓여있는 전체는 오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오늘날 교회의 무제는 그의 원형으로서 가정교회에 있다고 전제하고 가정교회의 원형성 증명과 가정교회가 지닌 문제와 대안을 찾도록 하겠다.
2. 교회의 본질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의 통일을 보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사실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다. 이것은 "그것이 무엇이냐?"의 형태를 띠는데, 이에 대한 답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본질보다는 속성, 역할, 사명 등을 거론할 수밖에 없는 언어적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하나님 존재를 전제한 교회는 그를 예배하는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의 본질을 소유한 교회는 하나이다.
원래 교회의 어원적 의미는 구약의 경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앞에 모여 있는 무리, 곧 회중이라는데서 찾아질 수 있으며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회중이라고 번역된 말이 교회의 어원적 의미이다. 어떤 이들은 신약에 있어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는 무관하게 사도들의 활동에 의해 특징 지워진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이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반론은 "교회"라는 말이 그리스도 강림하시기 2백년 전부터 이미 보편화되었던 단어여서 70인역에서는 이 단어를 이스라엘 백성의 공식적 회합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예수께서 마태복음 16:18과 18:17에서 말씀하시듯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이 말을 사용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약 이후 오늘까지 우리가 교회란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또한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하기 위한 모임임을 알 수 있다. 즉 교회가 있는 곳에는 어떤 형식으로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하고 있으며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즉 하나님께 대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가 된다.
3. 교회의 원형으로서 가정
그렇다면 이러한 교회의 원형적인 모형은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두는 독립적인 건물을 가진 가견적인 교회는 어디서 출발하는 것인가?
여기서 교회의 비가견적 특성을 논의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태복음 18:20에서 지시하듯 두, 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도 함께 하겠다는 데서 근거지워질 수 있으나, 이러한 비가견적 모임이 주로 영적인 의미를 동반하는 데서 언어의 차원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의 논의는 철저하게 가견적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가견적 교회의 원형으로 그 출발은 바로 가정이 된다. 그것은 교회를 이루는 최소한의 단위이다. 혹자에 따라서는 각 개인이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은 교회의 회중성을 도외시한 주장이다..
이에 대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형편상 엄연히 존재하는 바 부모의 동의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미성년자는 어떻게 보느냐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교회의 사명 중 선교적 사명에서 재차 거론하게 되겠지만 그들의 존재가 교회의 최소단위를 개인차원으로 끌어올리기보다는 오히려 바로 그 점에서 가견적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부각된다고 설명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성경에서 볼 때 가정의 원형성이 발견된다. 하나님의 행위언약은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주어졌으며 사도시대에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파된 곳은 지하동굴이나 공동묘지보다는 개인주택에서였다. 바울은 여타의 교회에는 물론이거니와 빌레몬에 있는 가정교회에 편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각각의 가정이 모여 이루어지며 이 둘의 관계는 유기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가정들 역시 유기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문제에 대한 고찰 역시 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더욱이 시작에 대한 교회론적 검증이 필요하다.
4. 가정교회의 원형성 검증
사도신조 고백에 따라 교회의 특성은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그리고 사도성의 네 가지로 특징지어진다. 나아가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른 개혁교회에서 루터나 칼빈의 해석에 따라 교회는 어디든지 신언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합법적으로 집행되는 곳에 있다는 입장을 수용하고 있다. 이상의 특징 중 앞의 네 가지 특징은 교회됨에 있어 내부적 성격이고 뒤의 것은 외형적 성격이다. 교회의 본질로서 하나님 예배는 내부적 성격만을 전제하고 외형적 성격과 직결된다.
교회의 시작으로서 가정의 원형성 검증은 과연 가정이 교회의 시작이냐는 문제를 풀기 위해 가정교회에 교회 일반적인 특성이 있느냐를 밝히는 일이 된다.
이에 앞서 밝혀둘 것은 사도신조의 고백할 때 내가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는 의미는 여기 이 장소, 이 보이는 모임 중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물론 성령의 역사가 피조물의 신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론은 필연적으로 성령론을 전제하게된다. 하지만 이 고찰에서는 성령론의 부분은 다루지 않겠다. 그것은 교회의 역사가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도신조에는 열두 사도에게서 시작한 "보이는 모임"이라는 개념이 이미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거룩성은 그 근거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있다 거룩이 라는 말의 성경적 사용은 "특별히 구별해 놓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생성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가정은 이러한 거룩성에 가장 잘 부합한다. 비록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가정의 출발은 죄에 대한 형벌로 주어졌지만 본래적인 의미의 가정은 창세기 1:26에서 하나님이 가정의 주체되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데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출발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그것이 복을 주신 것이든 죄에 대한 저주가 아닌 형벌의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든 간에 틀림없이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여 한 테두리 안에 넣어두신 것을 알 수 있다.
단일성이 뜻하는 것은 교회의 모이는 목적과 가지는 신앙, 그리고 믿음의 대상이 하나라는 점이며 따라서 모든 신자들의 생각의 중심이 동일하다는 뜻이다. 이 점에 있어 가정은 가장 원형적이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축복과 형벌을 내리셨으며 그로부터 가정은 하나의 삶의 공동체로서 그 축복을 누리고 그 형벌을 감당하며 살게 된 것이다.
보편성은 흔히 로마 카톨릭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 로마 카톨릭을 연상하게 되어 다소 혼란스러움을 주기도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이 말을 철저하게 자신들에게 적용시켰다. 가정의 보편성은 하나의 가정의 출발이 인류의 조상으로서 전 인류를 대표한다는 데서 찾아질 수 있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대표성의 문제를 중복해서 논증하고 있다. 사도성은 가정과 관련하여 가장 근거 지우기 어려운 부분이다. 앞서 말한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을 지닌 교회가 다른 모든 자연적, 역사적 단체와는 구별되는 요소는 바로 사도성에서 찾아진다. 교회는 사도의 증언에 기초되고 이 증언을 계승하고 이 사도의 증언을 들음으로 자신을 재형성하며 또 새로이 형성되어 가는 사도적 교회이다. 또한 사도적 교회가 있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본향을 사모하게 된다. 바꾸어 말해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재촉하며 그것에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정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도들이 전한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소망은 다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인류의 최초의 가정에 이 메시야에 대한 예표가 주어진다. 창세기 3:21에서 하나님 원시복음으로서 가죽옷을 취하여 자신이 부여한 형벌을 받은 새 가정에 넘겨주신다. 또한 가인의 손에 의해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주신다. 신약시대로 와서 사도성에 기초한 가정의 예를 앞서 밝힌 빌레몬 가정 외에도 알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가정을 꼽을 수 있다. 사도행전은 이들이 바울의 전하는 바를 그대로 전한 모범을 보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5. 교회의 사명 고찰
문제는 과연 가정교회에서 신언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합법적으로 집행되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고 보여진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의 네 가지 내부적 성격은 가정교회 내에서 그대로 보존되고 발견되어지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 직결되는 외형적 성격이 변질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근원은 외형적 성격에 있으므로 본질상 외부적 문제이며 이에 대한 대안은 가정교회의 내부성격 수정은 필요 없고 외부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가정이 일반적인 교회의 특질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수행함에 실패한데서 교회문제의 단초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과연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거룩한 보편적 교회는 자신에게 위탁된 사명을 완수하는데서 존재의의가 찾아진다. 물론 교회는 다른 일반 조직들과 같이 경영될 수 있다. 하지만 신언의 선포와 합법적 성례전의 집행을 통한 하나님 예배는 교회만이 지닌 사명이다. "그리스도의 무리"라고 흔히 불려지는 교회는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을 받은 모임이다. 이제 교회가 있는 곳에는 최후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구원이라는 대 사명에 교회를 참여시키신 의도를 생각해 볼 때, 이 사명의 수행에는 하나님의 내적 은총과 인간의 내적 활동이 아울러 요청됨을 알 수 있다. 우리 믿음이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시면서 설교를 하시고 기적을 베푸셨다.
이 모범을 따라 교회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한 내적인 힘과 가시적인 조직과 방법을 통한 외적 활동을 병행하여 사명을 수행한다. 하나님 예배와 인간의 구원이라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은 별개의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이 영광이 된다. 여기에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은 교회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6. 가정 교회의 사명
그렇다면 가정은 구체적으로 어떤 개혁이 필요한가? 앞서 밝힌 대로 한국교회의 문제가 가정교회의 외형적 성격에 놓여 있고, 가정교회가 교회인 것은 그곳에서 행해지는 예배에서 찾아질 수 있다면, 가정의 개혁은 하나님 예배의 회복을 요체로 한다. 그 중 무엇보다 중대한 문제는 가정교회에서 신언의 선포 및 성례전의 합법적 집행의 조속한 회복이다. 가정이 이러한 일에 실패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가장이 지닌 제사장적 권위의 상실에 있다. 가장의 제사장적 권위의 실례는 욥을 자신의 가정을 위하여 실제적인 제사를 드리고 있다. 가정에서 가장이 제사직무의 실천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가장이 지닌 제사장적 권위에 대한 근거가 된다. 또한 개혁교회가 공인하는 만인제사장 교리 역시 가장의 제사장직에 대한 근거가 된다. 가장의 제사장적 직무의 수행이 바로 가정교회가 회복될 수 있는 요인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가정교회에 던져지는 요청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가정예배의 철저한 준수이다. 제사장으로서의 가장이 신언을 선포할 수 있는 장은 바로 가정예배에서 이다. 가정예배는 신언선포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교육이 뿌리내리는 사람의 모임이다. 이 모임을 통해 자녀는 부모의 신앙을 전수 받고 그의 영과 육이 온전한 하나님 형상으로서 자라나게 된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있으며 인간의 구원이 있다. 하나님 예배도 있다. 그러므로 가정예배의 회복이 가정교회의 회복이 된다. 그리고 이 회복은 교회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된다. 그러나 가장이 담당할 합법적 성례전 집행은 욥 이래 정신적 유산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이미 이를 집행할 가견적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별도의 성례전 집행은 불필요하지만 가견적 교회에서의 형식적 집행 이전에 가정교회 내에서의 내용상 집행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신적이라는 특징을 지니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바로 교리교육이 된다. 어거스틴 이래 교리교육은 기독교교육의 핵심적 부분이었으며, 특히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그 의미는 단순히 세례자 대상 교육이 아닌 개혁신앙의 전달수단이었다. 그러므로 구체적 신앙교육에 있어 성례전의 합법적 집행의 내용은 가정에서의 교리교육을 통한 준비과정과 가견적 교회의 형식절차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7. 맺는 말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본고에서는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 교회의 시작이 되는 가정교회의 회복을 주장했다. 가정교회의 회복이 갖는 의미는 원형적 교회의 회복에 있으며, 이는 유기적 구조체인 교회의 자기정체성 회복에 시발이 될 것이다. 또한 가정교회의 회복은 건강한 기독인을 배출하고 바른 교회생활을 영위할 터전을 제공하여 이로부터 교회에 대한 온갖 이단사설의 공격을 감당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이 확실성을 띠는 것은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