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뗏목은 인류 진화 과정에서 자연스레 나온것이라고 한다.
두꺼운 판자나 통나무를 엮어서 수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구조물을 뗏목이라고 일컫는다.
어느지역에서 누가 발명했다는 특별한 기록이 없다.
원시시대 인류가 물을 만나면 못 건너갔다. 물론 얕은 물은 헤엄쳤다.
비로 불어난 물에 나무가 떠다니는 걸 보게 됐을 것이고 그 통나무를 잡으면
물을 건널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여러사람이 타거나, 아이들과 같이 물을 건너거나, 짐을 옮길 필요가 생겨서
그 통나무들을 여러개 묶어서 안정적인 형태로 만든 것이 바로 뗏목이다..
뗏목은 대궐이나 궁, 양반집을 짓던 재목을 큰 산에서 벌목한 뒤 여러 개씩 묶어
장마철 물이 많을 때 물 위에 띄워 서울 광나루 뚝섬 마포까지 운반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그 시절에는 뗏목꾼이 가장 소득이 높았다고 한다.

'나무토막 따위를 엮어 물에 띄워서 타고 다니거나 물을 건너게 된 물건'인 떼를 사람이 타고 몰고 가는 구조물을 뗏목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초기의 뗏목은 갈대를 엮어 만들었고 대부분은 단지 물이 흐르는 대로 떠다니도록 설계되었다.
벌채된 원목을 물을 이용해 운반하는 데 뗏목의 형태가 이용되기도 한다. 벌채된 원목의 가지를 치고 골짜기로 미끄러트려 제작할 장소까지 운반한 후 조립한다. 원목을 엮기 위해서는 두께·길이가 비슷한 목재를 나란히 띄워놓고 이 목재에 구멍을 뚫어
나무덩굴이나 철사 등으로 바늘 귀를 꿰는 것과 같이 묶거나 목재를 하나하나 서로 매듭을 져서 연결시키거나 목재 위에 쇠고리를 박고 나무덩굴이나 밧줄·철사 등을 꿰어 묶는 방식이 이용된다.
뗏목을 물의 흐름을 이용해 하류로 운반하는 방법을 '벌류'(筏流)라고 한다. 벌류는 뗏목 위에 1명 또는 2~5명의 뗏목을 부리는
사람이 타고 삿대나 노 등 하천의 바닥까지 닿을 수 있는 긴 막대를 이용하여 뗏목이 계곡의 급류에 휩쓸리거나 바위에 부딪치지 않도록 운반하는 방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압록강 중상류의 무성한 산림에서 벌채된 목재를 하류로 운반하던 것이 특히 유명하나, 지금은 운송수단의 발달로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

“우리 서방님은 떼를 타고 가셨는데/황새여울 된꼬까리 무사히 지나 가셨나
황새여울 된꼬까리 다 지났으니/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 놓게”
영월 동강의 마지막 떼꾼 홍원도(77·영월읍 거운리)옹이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들이킨 뒤 구수하게 들려준 동강아라리 한 소절이다.
떼꾼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동강 된꼬까리 여울을 지나 만지나루에는
지난 1960년대 중반까지 강물에 목숨을 내건 떼꾼들을 상대로
들병장수 전산옥(全山玉)이라는 사람이 기생들을 데리고 주막거리를 차린 뒤
목숨을 부지한 뗏군들에게 술과 웃음을 팔았다.
당시 전산옥은 자그마한 키에 용모가 뛰어나고 아라리 소리를 잘 해 동강유역
떼꾼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홍 옹은 열아홉살에 떼밭(뗏목)에 처음 발을 디뎌 스물여섯인 1959년까지
떼꾼으로 일했다. 집에서 남의 밭을 얻어 담배 등의 농사를 지었지만 어려운
생활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떼돈을 벌기 위해 뗏목을 타는 떼꾼이 됐다.
처음 2년간은 동강 상류 정선에서 내려오는 뗏목을 인계받아 영월과 충북 단양군 경계까지 보내는 초보 떼꾼 역할을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서울 노량진이나 마포나루까지 가는 떼꾼이 됐다. 동강과 남한강의 험한 1200리 물길과 사투를 벌이며 한번 다녀오면 품삯으로 소 한마리 값은 너끈히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물이 풀리는 3~4월쯤 정선 벌목장 인근 동강변에서 영월읍 덕포나루터에 이르는 뗏목은 강폭이 좁고 물도 많지 않아 길이 30m, 폭 3m 50∼4m 규모의 한바닥 뗏목을 세바닥으로 연결해 목재를 운반했다.
덕포나루터에서는 다시 길이 40m, 폭 5∼5m 50한바닥의 뗏목 세바닥을 엮어 길이만 해도 100여m가 넘는 장광을 연출하며 서울로 향했다. 물이 많을 때는 7~10일,물이 적을 때는 25~30일까지도 걸렸다.뗏목의 앞뒤에는 노의 구실을 하는 그래를 매달았다.
2인 1조일 때는 물길에 익숙한 경험자나 담이 센 사람이 앞을 맡았고 초보자가 뒤를 맡았다.
60년대 중반 팔당댐이 착공돼 물길이 끊기고 열차 운행이 일반화되면서 서울로 가는 뗏목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 대부분의 떼꾼들이 물길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술판이나 노름판 유혹에 넘어가 이래 저래 떼돈을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됐지만 홍옹은 한눈을 팔지 않고 알뜰하게 돈을 모았다.

◆ 뗏목 관련 용어해설
▨ 뗏목벌류시기= 우수 경칩이 막 지난 3∼4월에 시작한다.
첫번째 뗏목은 갯떼기(개(川))의 얼음이 풀리는 3∼4월에 띄운다. 마지막 뗏목은 막서리(막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9∼10월)에
띄우고 강이 얼음으로 뒤덮이는 겨울철에는 뗏목을 띄우지 못한다.
▨ 떼의 구조와 크기=한 동가리는 길이 6m 내외(20자), 말구 20㎝내외(5치) 크기의 통나무 25∼30개를 칡끈으로 엮은 떼를
말한다. 인제∼춘천간은 물이 나쁘고 여울이 많아 벌류 운항이 힘들어 한바닥 크기의 떼를 띄웠다고 한다.
한 바닥은 다섯 동가리를 하나로 이어 묶은 떼를 말한다. 춘천∼서울간은 세 바닥에서 다섯 바닥이 일대(一隊)가 되어
벌류 운행했다고 한다.
▨ 여울=인제∼춘천 간의 여울은 약 18개처가 있으며 여울은 물 깊이가 얕고 물살이 세고 빠른 험한 물길을 말한다.
떼가 난파되기 쉬운 곳으로 떼꾼들은 각별히 이 구간을 지나면서 신경을 쓴다.
물길 속에 송곳바위가 있어 한번 걸리면 떼를 비튼다 하는 비투리여울(인제), 물살이 세게 휘돌이하여 떼를 돌게 한다 하여
포와리여울(양구)이라 불리고 있다. 이들 여울은 떼꾼의 생사까지 위협했다고 하며 인제와 춘천에 거주했던 이태순
(작고·1914년생) 옹은 포와리 큰여울에서 크게 다쳐 다리 불구가 됐다고 박민일 전 강원대 교수에게 일러주었다 한다.
▨ 떼의 종류=크기에 따라 분류한다. 궁궐떼는 궁궐 목재용으로 길이 30자 말구 10치이상이다.
부동떼는 집재목용으로 크기가 20자내외이다. 편목떼 나무 가장 자리를 깎아낸 양각목떼로 주로 목가구, 목기류 제작용으로
쓰인다. 연목떼는 일반 가옥의 서까래용으로 사용된다. 화목떼는 땔감용으로 주로 장작용으로 사용됐다.
▨ 썩쟁이(갈보)가 있던 유명주막=도리거리는 춘천 윗샘밭 버스 종점마을과 소양호 콧구멍다리 주위의 마을이다.
덕두원리는 춘천 덕두원 파출소가 있는 마을이다. 미음은 경기 남북한강이 합수되는 들머리로 춘천∼서울 간에 제일 큰 주막이다.
이곳 도지거리, 덕두원, 미음에 주막에서는 박가분(朴家粉)으로 짙게 화장한 썩쟁이들이 주색으로 뗏꾼들을 유혹했다고 한다.
썩쟁이는 몸이 썩은 여자, 몸을 섞는 여자, 부혼녀(腐混女), 창녀(娼女), 갈보(蝎甫)로 박민일 교수는 해석했다.
갈보는 큰 빈대이며 논다니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남정네와 노라리(주색행류·酒色行遊)하는 창녀이다.
썩쟁이와의 술살(술과 살) 수작으로 공가(임금)는 35원 내외(군수 월급에 버금간다고 자랑)의 돈을 몽땅 날리고
빈털터리가 돼 귀로하는 서울∼춘천∼인제까지 너닷새(4∼5일)를 도보로 걸어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 일화도 이태순 옹은 박 교수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