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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내 집을 채우라
본 문 : 눅 14:15-24
오늘 날 기쁨을 빼앗는 요인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근심,
둘째는 스트레스,
셋째는 두려움입니다.
이들은 모두 엇 비슷해 보이지만, 뚜렷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근심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터무니 없는 염려"입니다.
제 경험에 보면,
근심하던 일은 보통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결말을 기다리는 동안,
근심은 서서히 기쁨을 부식시켜 버립니다.
둘째, 스트레스는 근심보다 더 심각한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우리가 변화시키거나 조정할 수 없는 상황,
즉 우리 통제 밖에 있는 것에 대해, 심하게 긴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대신, 우리는 마음에 동요를 일으킵니다.
지속되는 마음의 동요속에 스트레스가 가중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우리 밖으로 내 놓으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문제를 밖으로 내 놓으면 됩니다.
문제를 가지고 내 안으로 들어오니,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사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셋째, 두려움 공포는 더욱 위험합니다. 두려움은 근심 혹은 스트레스보다, 위험합니다.
두려움은 위험, 불행 또는 고통이 있을 때 느끼는 무서운 감정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근심이나 스트레스와 같이 어떤 사실을 매우 크게 과장시킵니다.
우리속에 기쁨을 다 잡아 죽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에서 자유롭게 되기 위해선 믿음밖에 없습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루를 기쁘게 살려느냐? 이발을 해라.
한 주간을 기쁘게 살려느냐? 자동차를 사라.
한 달을 기쁘게 살려느냐? 결혼을 해라.
일 년을 기쁘게 살려느냐? 새 집을 사라."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잠시 기쁨을 주지만,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복음은 영원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고달픈 우리의 인생에서 영혼의 안식처를 찾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제 2차 대전 후,
독일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마르틴 니뮐라 목사가,
'2차 대전 책임 백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2차 대전의 발발에 대해 히틀러를 비방하기보다는,
독일 교회와 독일 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가 히틀러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때 다음과 같은 간증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동일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지나가는데,
제 뒤에 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디에서 많이 듣던 그 목소리였습니다.
예수께서 '너는 왜 나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아무도 저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소리가 익숙해서 돌아보니,
그는 다름 아닌 히틀러였습니다. 똑같은 꿈을 일곱 번 꾸었습니다.
이 사건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때까지 그가 죽기를 바란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독일 그리스도인들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은 것에,
모두 책임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삶이 자유롭지 못하고 삶이 공허하고 불안하고 뒤틀려 있는 사람들,
불안 근심 공포 스트레스로 인해, 인생의 자리에서 악을 쓰고 있는 이웃들,
그들이 느끼는 삶의 절망에, 당신은 책임이 없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가운데 보면,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 받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은 잔치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습니다.
잔치 시간이 되어 종들을 보내었는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거절합니다.
주인은 노하여,
종들을 시켜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사람, 소경, 절름발이들을 데려와,
자리를 채우라고 명합니다.
그래도 빈자리가 있음을 보고는,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를 우리는 반드시 채워야 합니다.
빈자리는 내가 채워야 합니다.
저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빈자리를 체워 주소서!
사역자의 빈자리!
기도자의 빈자리!
전도자의 빈자리!
사명자의 빈자리!
예배의 빈자리!
성경공부의 빈 자리!
빈 자리를 체워 주소서!
원수 마귀 는 주님의 교회에 더 많은 빈자리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더,
낙심하게 하려고,
근심하게 하려고,
공포에 시달리게 하려고,
절망에 빠뜨릴 려고, 우는 사자처럼 달려듭니다.
우리는 결코 사탄의 먹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생명 걸고 싸워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더 복음을 강력히 전해야 합니다.
복음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사명은, 복음 전하는 전도입니다.
'내 집을 채우라' 는 명령은 전도의 명령입니다.
과연 전도란 무엇입니까?
첫째로 전도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봅 그레이 박사는 항상 전도에 관심을 갖고 사는 분인데 이른 아침에 기도하면서 오늘도 한 영혼을 하나님께 초청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차를 타고 달려가는데 고속도로변에서 한 젊은이가 손을 들며 차를 태워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저기 너의 사람이 있다' 고 말씀하더랍니다. 박사는 차를 멈추어 그를 태웠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으니 '시내로 갑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그레이 박사는 '오늘 어디 가느냐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죽을 때 어디로 가느냐는 뜻입니다' 했더니,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해 봤습니다.' 그레이 박사는 좀더 관심을 가지게 한 다음에 의도적으로 '잠깐 차를 세우고 이 문제를 설명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좋습니다' 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차를 멈추고 성경 몇 군데를 찾아 읽어주며,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세요' 하고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그 젊은이는 눈물을 닦더니 손을 깊숙이 넣어 권총 한 자루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선생님, 제가 차를 멈출 때 저를 태워주는 사람을 이 권총으로 쏴 죽이고 차를 빼앗아 타고 시체를 다른 주로 가서 묻어 버리려고 했습니다'. 봅 그레이 박사는 영혼을 하나님께로 초청하였을 뿐 아니라 당장 그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
두 형제의 아버지가 갑자기 집안에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가 됐습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를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여전히 아버지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큰 아들은 응급조치를 하면서 동생에게 “빨리 가서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황급히 의사 선생님을 모시러 갔습니다. 그런데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동생이 오지 않았습니다. 초조해진 형은 “도대체 이 놈이 죽은 거야,산 거야”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순간적으로 의식이 돌아온 아버지가 이 소리를 듣고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아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내 의도와는 다르게 상대방이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깊이 생각하고 그 다음에 말을 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의식이 없는 상태라 할지라도 또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 사람이 들어서 좋지 않을 말이라면 삼가야 합니다. 성경은 “네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재갈을 물리라”고 말씀합니다.
호주 사람과 결혼해 시드니에 살면서 호주 한인교회에 출석하는 한인 여집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여집사가 호주인 남편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매우 답답하게 느껴진 여집사는 한국말로 “야,이 녀석아”라고 말했습니다.
말다툼을 하다 말고 호주인 남편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여집사는 엉겁결에 그 말은 한국에서 쓰는 속어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이라고 얼버무렸습니다.
며칠 후 한인교회 목사님이 여집사 집에 심방을 왔습니다. 마침 그 날은 남편이 쉬는 날이라 남편도 집에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오셨다고 하자 남편은 반갑게 맞이하면서 서투른 한국어로 “목사님,안뇽하세요!”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을 안으면서 한 마디 더 보탰습니다.
“야,이 녀석아”
거짓말은 순간적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큰 낭패를 초래하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John Stott)목사는 '전도하지 않는 죄' 란 책에서 "복음을 말하지 않는 침묵은 죄에 해당된다" 고 지적합니다. 또 반 하우스(Van Haus) 신학자는 현대의 기독교인을 '자폐증' 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자폐증은 좌 신경 호르몬 계통의 이상으로 생기는 장애입니다. 자폐증환자는 의사소통을 잘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사귀지 않습니다. 자신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자폐증에 걸렸다고 한 의미는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가 구원자이며, 소망이라는 사실을 다른 이에게 전하지 못하는 약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떠하십니까? 전도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확신으로 전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잔치의 주재자입니다. 하나님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모두를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종들입니다. 17절을 보니 종은 다니며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라고 외칩니다. 종에게는 많은 사람들을 청하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초청을 당당하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초청에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시대야말로 복음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져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복음의 필요성을 외치며 하나님의 초청을 강하게 전해야 합니다.
둘째로 전도는 강권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열심히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집의 문을 두드립니다. 세 번까지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어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께서 다시 두드리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문을 두드리자 집 주인이 퉁명스러운 모습을 하며 나왔습니다. 전도자는 여러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 전도지를 주며 꼭 한번 읽어보라며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바로 전도지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도자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안방에 걸려있는 밧줄을 보여 주며 전도자가 찾아온 그 시간에 죽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받은 전도지를 읽고 또 읽다가 갑자기 전도자를 만나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전도자를 통하여 새로운 삶의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전도는 이렇듯 강권적으로 할 때 죽어가는 생명까지 구하는 놀라운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잔치를 준비한 주인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잔치의 참석을 거절한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노하며 명령합니다. 21절에 "종들에게 이르되 거리의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고 합니다. 종들은 순종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았다고 보고하자 "길과 산울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고 명하십니다.
여기의 '강권하여' 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낭카조' 인데 '기어코 설득하여' 의 뜻을 가집니다. 교회가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추고, 사랑으로 준비하여도 사람들은 오기를 거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권해서라도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단의 역사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의 종으로 삼기 위하여 우는 사자처럼 사람들을 삼키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방법은 얼마만큼 끈질기게 강권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강권하는 데에는 마귀도 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도 대상자들을 기어코 설득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교회부흥과 성장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집을 채우는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전도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미국의 제임스 케네디 목사의 설교 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반짝반짝하게 구두를 닦고, 훈장을 달고, 또 군복을 멋지게 입고 길거리를 힘차게 걸어간다고 좋은 군인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생명을 내걸고 앞으로 나아가는 군인이 좋은 군인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바로 군인 정신이 아닙니까?" 우리가 집사, 장로, 권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좋은 교인이 아닙니다. 직분 받은 것을 명예로 만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전도할 때 하나님은 축복의 통로로 쓰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느 권사님이 병원에 입원하여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병원에 가 보니 경제적으로 풍족한 분이 특실이 아닌 일반 병실에 입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아니, 권사님! 특실에 계셔도 될 형편인데 왜 사서 고생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아니예요. 제가 왜 병이 들었는지 기도해 보니, 하나님께서 '너는 복과 은혜를 받았지만 전도하지 않았구나' 라고 깨닫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누워서라도 전도하기 위해서 일반 병실에 입원했지요". 일반 병실에 있으면 여러 사람과 이야기하며 전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권사님은 하나님 앞에 전도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병원에서라도 전도하며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가족과 이웃, 친척, 주변 사람들, 죄짓고 절망한 사람들, 병들고 실패한 사람들, 좌절에 빠진 사람들, 슬픔과 외로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전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전도보다 더 큰 상급은 없습니다. 전도보다 더 큰 면류관이 없습니다. 전도보다 더 큰 영광스런 일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전도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일본의 우치무라간조(內村鑑三)는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 즉 전도하는 것은 진정으로 복된 일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 말하였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여러분은 전도하지 않아서 화를 당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전도하여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으시겠습니까? 부디 화를 당하기 전에 미리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모, 형제, 남편, 아내, 아들, 딸, 가족부터 시작해서 이웃까지 전도하여 언제나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 목 :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본 문 : 마태복음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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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홈즈와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 수배 중이었던 루팡이 두뇌 대결을 펼치는 추리소설이 있습니다. 변장의 귀재(鬼才)인 루팡이 범죄하고 수배 중이었을 때 잡히지 않으려고 여자로 변장을 하고 시내를 다녔습니다.
감쪽같이 변장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여자로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홈즈는 한 눈에 그가 루팡 임을 알아차리고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웁니다. 루팡이 잡혔을 때 참 궁금했습니다.
워낙 감쪽같이 여장(女裝)을 했기 때문에 모두 자기를 남자인줄 모르고 여자인줄로만 보고 있었는데 홈즈가 어떻게 알고 체포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내가 여장을 했는데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홈즈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거요. 내가 백화점 앞에 서 있을 때 당신이 백화점 앞을 지나갔는데 아름다운 여자 옷들이 많이 걸려있는 쇼윈도우에 한번도 눈길을 주지 않고 지나가는 당신을 보고 당신이 여자가 아니고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소. 여자라면 반드시 그 옷에 관심을 가지고 쳐다볼 것인데 당신은 옷들을 쳐다보지 않고 갔기 때문에 당신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된 거요.”
사람은 자기 관심분야에 눈이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눈길을 주기 마련입니다.
저는 한 5-6년 전까지만 해도 제 얼굴에 그렇게 점이 많은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피부과 의사와 이야기를 하다가 “목사님, 얼굴에 참 점이 많네요.”하는 말을 듣고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까 정말 점이 많더라고요.
피부과 의사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볼 때 피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보니까 본인이 알지도 못하는 점도 보게 됩니다. 지난주에는 장로님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의사이신 장로님 한 분이 그 책 속에서 병(病)과 죄(罪)를 잘 연결시켜서 설명하시는 것을 보고 역시 의사는 다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성지순례 때 이집트에 가니까 십자가처럼 보이는 것이 있더라고요. 십자가를 예술적으로 참 잘 표현했구나 싶어서 아주 큰 십자가를 하나 샀는데 나중에 이집트를 떠나면서 안내자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게 십자가가 아니고 ‘생명의 열쇠’라고 하더라고요.
생명의 열쇠는 벌써 모세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고대 조각품 등에서 십자가와 비슷한 형태를 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개 눈에는 뭣만 보인다고 하더니 제 눈에는 그게 꼭 십자가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1. 나의 주된 관심은 무엇입니까?
나의 주된 관심이 뭡니까? 모든 것을 그것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그것이 뭡니까? 어떤 사람을 볼 때도 저 사람 얼굴이 잘 생겼구나, 옷을 잘 입었구나, 얼마나 배웠을까,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영혼은 구원받았을까, 구원받지 못했을까, 잃어버린 자일까, 하나님이 찾은 자일까, 하고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람이 성숙해지고 나라가 선진국이 되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생명입니다. 미개한 나라들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필리핀 같은 나라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동차가 사람을 치어 죽여도 돈 몇 만원만 주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중동지방에는 지금도 돈 50만원만 주면 아내를 한 사람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미개한 나라들은 생명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회나 나라는 생명의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지성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부자는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졸부(猝富)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참 지도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신앙인은 아무리 오래 믿었고 아무리 큰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숙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 안으로, 신앙의 깊은 곳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그 속에 있는 참된 생명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타임지에서 20세기의 위인 1백 명을 뽑을 때 빠트리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은 미국의 의학자 조너스 솔크(Jonas E Salk)라는 사람인데 1955년 소아미비 백신을 개발한 사람입니다.
그는 백신을 개발한 후 생체실험을 할 때 자기와 자기의 가족에게 생체실험을 했습니다. 특허를 내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허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태양도 특허신청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하고 그 백신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가 백신을 무료로 나누어 주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아마비에 걸렸겠습니까?
생명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돈을 포기하고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위인 백 명 가운데 한 번도 그의 이름이 빠진 적이 없습니다.
미국의 제약회사 머크(Merck & Co.)는 아프리카에서 흑파리 떼에 물려서 시력을 잃는 풍토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2조 원의 돈을 들여서 ‘멕티잔’이라는 약을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무료로 약을 공급했습니다.
창립자인 존 머크는 "의약품은 이익보다 인간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포춘지는 그해부터 7년 연속 머크를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뽑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며 성숙한 사회인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2. 하나님의 주된 관심
하나님만큼 인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본래부터 귀하게 만드시고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죄로 인하여서 잃어버린 자가 되고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죄와 탕자의 죄는 같은 죄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마음먹었을 때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납니다.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자가 되고 맙니다.
탕자도 아버지의 간섭이 싫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돌아 올 상속분(相續分)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그도 아버지께 잃어버린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살아가려는 사람은 아담이 지었던 죄, 탕자가 지었던 죄와 같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 잘 될 것 같아서 나가보았지만 결국 가진 것 다 탕진하고 돼지 치는 일을 하며 돼지먹이를 먼저 먹겠다고 돼지와 다투는 사람으로 전락했습니다. 실로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모습을 예레미야서 50장 6절에는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 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은 종들을 보내십니다.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보내고 또 보내십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 인간의 역사 안으로 친히 들어오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무대 뒤에서 연출하던 감독이 너무 답답해서 무대 위로 뛰어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인간을 찾기 위해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뛰어들어 오셨습니다.
그 사건이 성탄이요, 그렇게 인간의 역사 속에 뛰어 들어오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누가복음 19장 10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가? 사람들은 다 잃어버린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 이유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느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구원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쓰인 목적입니다. 성경 전체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다시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건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선지자와 제사장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요, 이것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요,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요, 이 목적을 위해서 교회의 모든 조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고, 집사가 있고, 권사가 있고, 이것을 위해서 당회가 있고 제직회가 있고 모든 조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 여기에 하나님의 온 관심이 쏠려있는 것입니다.
1년에도 수천 명의 미아가 생기는데 아이를 잃어버린 가정의 아버지는 대부분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찾아서 전국의 보육원이란 보육원은 다 찾아다니고 도시나 시골이나 할 것 없이 찾아다니느라 경제는 파탄되고 이혼으로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자식을 잃어버리면 부모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일이 안 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자식을 찾기 전에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소 한 마리를 애지중지 키워 왔는데 소도둑이 소를 훔쳐가 버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소를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마음이 너무 상해서 그만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에 잃어버린 소가 송아지까지 낳아서 돌아왔습니다. 소를 찾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방영이 되었습니다.
소 한 마리가 집을 나가도 병이 드는데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은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데 자식을 잃어버린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이 얼마나 컸던지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역사 속으로 뛰어 들어 오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집을 나가서 상심하고 밥을 먹지 못하고 드러누워 있는데 집에 남아있는 자식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않고 ‘옷 사 주세요, 반찬이 맛이 없어요, 용돈 더 주세요.’ 하고 투정이나 부린다면 얼마나 못난 자식이겠습니까?
이 못난 자식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은 아닌가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잃은 자식 때문에 애통해하고 아파하는 아버지의 마음, 그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싱가폴에 FCBC라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로렌스 콩(Lawrence Kong) 목사님입니다. 그 목사님은 “나는 1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싱가폴에서 만 명이 모이는 교회는 대단한 교회입니다. 싱가폴 전체의 땅이 서울 정도 밖에 안 돼요. 인구는 300만도 안 됩니다. 부산도 380만인데 300만도 안 됩니다. 그리고 싱가폴의 문화는 불교문화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1만 명의 교회를 이끌고 간다는 것은 대단한 영향력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이어 말하기를 “내가 1만 명의 교회를 목회한다고 행복한 줄 아십니까?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10만 명의 교회를 목회하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그때도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100만 명의 교회를 목회하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싱가폴에 잃어버린 영혼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고 하면 나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싱가폴 사람들이 다 주님 앞에 돌아오고 단 한 명만 돌아오지 않고 있어도 그 한 명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산에 380만 명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 다 예수 믿고 잃어버린 영혼 단 한 명이 있어도 나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이 열 명 있는데 한 명이 집을 나갔습니다. 잃어버린 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아홉이 남아 있으니까 그까짓 한 명 쯤 나가도 괜찮아’ 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 한 명이 돌아오기까지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산 땅에는 열 명 중에 한 명이 잃어버린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집을 나가 잃어버린 자가 되어 있습니다. 한 명만 아버지 집에 살고 있는데 그 한 명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아홉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하고 부산 시내를 헤매고 다니는데 나는 쿨쿨 잠을 잔다든지 ‘나에게 이것도 안 해 주십니까? 저것도 안 해 주십니까?’ 하고 불평하며 투덜댄다든지, 항상 생각하는 것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 같은 걱정이나 한다든지, 어떻게 하면 좀 편안하게 살까, 어떻게 하면 내 가족, 내 자식이 잘 살까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아버지가 우리를 보실 때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이 철없는 놈아! 이 인정머리 없는 놈아! 언제쯤 철이 들겠느냐, 언제쯤이면 아픈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느냐, 언제쯤이면 잃어버린 네 형제를 생각하겠느냐.”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닙니까? 자식을 잃어버려서 산천을 헤매고 다니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파하고 같이 찾아 나서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린 자식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되어 오신 것만 해도 최고의 희생인데 이것은 내가 구더기가 되어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한 비하(卑下)입니다. 또한 마지막에는 내가 지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아서 온 몸은 피로 낭자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만한 힘도 없을 만큼 채찍에 맞아서 완전히 탈진을 했습니다. 인간이 당할 수 없는 가장 혹독한 십자가의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내가 머리로 지은 죄 때문에 가시관을 쓰시고 온 얼굴에는 피가 낭자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손으로 지은 죄 때문에 양 손에는 쇠말뚝 같은 굵은 못이 박혔습니다. 내가 발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의 발에 쇠말뚝 같은 못이 박혔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의 가슴이 창에 찔렸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생명의 값을 지불하고 나를 찾았습니다. 다시 우리를 살렸습니다. 잃은 자식을 찾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의지 때문에 우리가 찾아 진 자녀, 돌아 온 자녀, 회복된 자녀가 된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은 온통 잃은 자식을 찾는데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하고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내 마음은 이런데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무디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전부가 나, 나, 나 위주로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결코 행복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희생할 수 있는 한,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아니하고 힘쓰고 애쓰면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지금도 헤매고 계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이런 마음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한다, 생명을 살린다, 나는 생명의 구조대원이다, 그것을 자각하기 위해서 주황색의 옷을 입고 다닌다고 온 교회가 들뜨고 힘쓴다고 할지라도 나는 전혀 거기에 반응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무감각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 모릅니다. 오늘 이 세대를 예수님께서 뭐라고 표현하셨습니까? <애곡하여도 울지 아니하고, 피리를 불어도 슬퍼하지 아니하고, 꽹과리를 쳐도 춤을 추지 아니하는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3. 생명에 무감각한 마음
금세기 일본 최고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도다’라는 젊은 의사는 2차 대전 당시 후방 기지병원 군의관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 군부의 '명령'으로 미군 포로들을 마취시켜 생체 실험을 하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미군포로를 잡아서 간단한 진단을 하는 척하며 병균을 투입시켜 병이 들게 한 후, 수술을 한다며 포로의 몸을 해부합니다.
폐를 잘라내기 시작합니다. 폐가 어느 정도 잘라냈을 때까지 사람이 살 수 있는가, 어느 정도 잘라내면 얼마 동안 살 수 있는가를 생체로 실험을 합니다. 또 폐에 공기를 주입하여 어느 정도 공기가 들어가면 죽는가를 실험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서 장기를 떼어내어 실험을 하면서도 이 일이 의료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상부의 지시에 조금도 양심의 가책이 없이 참여를 합니다.
함께 생체실험에 참여한 다른 군의관 ‘스구로’가 생체실험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도다’는 두려움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무감각 합니다.
조금 전까지 멀쩡히 살아있던 사람의 몸에서 떼어 낸 폐를 보고도, 도무지 감각이 없고 두려운 마음도 없어져 버린 자기 마음을 보고 그는 답답해 합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차라리 양심의 가책이었습니다. 마음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이 도무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생명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감동한 ‘도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앓고 있는 병이 있다고 하면 바로 이 ‘무감각’이라는 병일 것입니다. 죽어가는 가족의 영혼을 보고도 아파할 줄 모릅니다. 지옥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이웃을 바라보고도 무감각합니다.
낭떠러지에 걸려있는 양을 보고도 건져낼 마음 없이 안타까워 할 줄 모르는 이런 무고통(無苦痛), 무감각(無感覺)의 질병이 성도들의 가슴에 번져가고 있습니다. 잃은 자식을 찾아서 헤매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슴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전체에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하나님의 절규로 가득 차 있는데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되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보고도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 무감각한 내 마음에 아버지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한 명의 잃어버린 자가 있어도 아버지의 마음은 행복할 수 없는데 아홉 명이 집을 나가고 한 명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혼 사랑의 마음을 제게 회복시켜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과 관심과 희생 때문에 찾아 진 것이 바로 우리들 아닙니까? 이런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이제 잃은 양, 잃은 자식 함께 찾으러 가자. 잃은 양, 네 형제를 찾으러 나가자.”
오늘 본문 5절과 6절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며 사마리아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거절할 수 없는 이 명령에 순종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고을에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너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 네가 잘 아는 사람, 네 가족부터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내게 가장 가까운 가족을 전도하기가 가장 힘듭니다. 그래도 내 가족부터 먼저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네 가족을 구원한 후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여서 영혼을 구원하라는 말입니다.
4.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내게 있는 것을 사용합시다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는 교활하고 이기적이며 기회주의자인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나치당의 일원으로 1940년에 폴란드에 와서 유대인을 고용하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나치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가는 공장들을 인수하고 또 유대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많은 돈을 벌었고 장교들과 정치가들을 술과 여자와 돈으로 매수해서 생산된 제품을 군납(軍納)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어느 날 독일군인들이 마을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비참한 광경을 본 쉰들러는 충격을 받고 이들을 구원해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쉰들러는 공장에 쓸 숙련공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그동안 벌어들인 돈으로 장교들을 매수하여 1,100명의 유대인 명단을 주어서 그 대학살에서 구해 냅니다.
그 후 독일이 2차 대전에서 패전합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쉰들러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와 같은 구원자로 추앙을 받게 됩니다. 1,100명의 생존자들이 쉰들러와 헤어질 때 생명의 은인인 쉰들러에게 감사의 표시로 자기들의 금니를 뽑아서 기념반지를 만들어 줍니다.
그 반지에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 자는 세상을 구한 것’이라는 탈무드에 나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유대인들에게 쉰들러는 “내가 좀 더 노력했더라면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좀 더 구할 수 있었는데...” 하면서 탄식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쉰들러에게 “당신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쉰들러는 “좀 더 구할 수 있었는데...내 편안한 삶을 위해서 남겨 놓은 자동차, 저것을 팔았다면 10명의 생명을 더 구했을 텐데, 왜 저 자동차를 팔지 않아서 10명을 더 구하지 못했는지...” 하고 탄식하며 자기 외투에 꽂고 다니던 장식 핀을 떼어 보이면서 “이 핀을 팔았더라면 2명을 더 구할 수 있었는데, 왜 내가 이것을 달고 다니면서 두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지 못했는가, 더 살릴 수 있었는데, 더 살릴 수 있었는데 내가 안 했구나, 내가 안 했어.”하며 절규합니다.
그때 살아남은 1,100명의 후손 5천 여 명이 전 세계에서 퍼져서 살고 있는데 그들이 쉰들러의 무덤에 찾아가서 경의를 표하는 모습이 영화에 나옵니다.
내게 주신 물질, 조금만 사용했더라면 구원될 영혼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찻값만 아꼈어도, 내 용돈을 조금만 썼더라도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게 주신 건강, 조금만 사용했다고 하면, 피곤하다고 앉아있지 않고 조금만 사용했다면 구원받을 영혼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게 주신 시간, 사용했으면 구원될 사람이 많았을 텐데 사용하지 않아서 구원하지 못한 일은 없었습니까? 어차피 두고 갈 물질, 아끼며 살다가 한 명도 구원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그때 내게 주신 그 물질, 조금만 사용했다면, 내게 주신 건강, 시간, 사용했다면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을 텐데, 할 수 있는데도 내가 하지 못했어.’ 이런 절규를 천국에 가서 하지 말고, 마지막 인생의 숨을 거둘 때 하지 말고 지금 깨닫고 내게 주신 물질과 건강과 시간, 달란트를 영혼구원에 사용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갔을 때 나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몇 명이나 내게 와서 “당신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하고 경의를 표하겠습니까?
내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영혼구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못하실 일이 없을 만큼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까, 어떻게 하면 자식 잘 키울까, 어떻게 하면 자식에게 유산 많이 물려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내 얼굴을 내면서 살까, 어떻게 하면 좋은 곳 다니면서 좋은 것 먹으면서 살까,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이런 관심은 영혼구원에 온 관심을 가지신 하나님께 얼마나 부끄러운 마음들입니까? 이제 영혼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는데 우리가 가진 모든 달란트를 사용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가리라고 결심하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 목 :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
본 문 : 행 20: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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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0:2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행 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어느 사람은 한 하나님을 믿고, 한 교회에 출석하여, 동일한 말씀을 들으면서 주일마다 기대감과 행복감에 젖어서 기쁨의 신앙생활을 합니다. 반면에 어느 누구는 무엇이 불만인지 마치 먹기 싫은 음식을 먹는 사람처럼 불평만 늘어놓고 다른 사람까지 시험에 들게 합니다. 과연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물론 음식도 중요하지만 식성이나 입맛은 더 중요한 것처럼 교회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이상이 생기면 교회에 대한 회의가 제일 먼저 찾아오게 됩니다.
악한 마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하여 시험에 듣기를 바라고 날마다 유혹을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교회와 등을 돌리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싫어지면 자연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평안과 재충전을 위해서 가정이 절대로 필요하며 가정의 안정이 없이 국가의 안정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평안과 재충전을 위해서는 교회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가정이란 가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몸담고 있는 집을 포함하는 것처럼 교회도 교인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건물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한방에서는 인체의 양과 음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을 질병의 원인으로 보는 것처럼 신앙에 있어서도 좌와 우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좋은 가정, 좋은 교회의 균형이 필요한 것처럼, 교회관에 있어서도 보이는 지상 교회와 보이지 않는 천상교회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상주의도 문제가 있지만 무교회주의는 더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갈수록 가정이 해체되어가는 경향이 심화되는 것처럼 교회에 대한 무관심과 탈루 현상이 젊은 세대일수록 심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더 바울이 변하여 사도가 된 후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생명을 다 바치는 가운데 오늘 성경은 에베서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 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과 사랑이 나의 관심과 사랑으로 일체화되어지는 것이 승화된 사랑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관심사가 곧 나의 관심사요 사랑의 대상이 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처럼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지상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교회’라고 호칭한 것은 하나님이 지상 교회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할 까요?
행복한 사랑은 일방적인 짝 사랑이 아니라, 서로 이해와 섬김과 배려와 주고받음이 있는 나눔의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세상, 독생자 예수, 구원의 복까지 값없이 주신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족하던 어린아이와 같이 미성숙한 신앙에서 우리도 하나님을 능동적으로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의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용적인 자세로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을 때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가 이전보다 더 큰 신앙의 기쁨이 동반되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예루살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교회가 성전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가지고 오늘날도 신학적인 대립이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의 성전처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형식의 장소로는 오늘의 교회가 성전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라는 영적 의미로는 오늘의 교회는 여전히 성전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의 지상 교회를 낳은 어머니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늘 우리 교회도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교회의 열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바로 그 성령이 임재하시고 주관하시는 예배라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시고 사신 곳이며, 교회가 성령이 임재하여 예배를 주관하시는 곳이며,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성부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교회는 여전히 성전인 것입니다.
1)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거룩한 곳입니다.
2)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령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3)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을 통해 인간들을 만나시고 역사하시는 곳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 교회를 묘사하는 여러 호칭들이 열거되어 있는 가운데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깊이 배어있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1) (시 65: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2) (시 28:2)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3) (합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4)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5) (사 56:7)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6)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7)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이상 열거한 일곱 가지 중에서 집이나 뜰과 같은 것들은 언제든지 바꾸기도 하고,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떠나는 것은 죽음외에는 불가능한 것이라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 말씀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엡 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앱 4: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골 1:24)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 몸된 교회 사랑
세상에서 아무리 몰인정한 사람도 자기 몸은 사랑합니다. 현대인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건강입니다. 그 건강은 바로 자기 몸을 돌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도 몸을 돌보는 것으로 표현되어진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그 몸을 못 박아 피 흘려 값을 지불하여 교회를 사신 것은 곧 교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단적으로 잘 표현한 것이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피는 곧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피를 팔아서 무엇을 산다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를 단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의 피보다 더 고귀한 피가 없다면 그 거룩한 피로 교회를 사신 것은 세상에서 교회보다 소중한 곳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 믿음의 성도는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예배와 전도
예수께서 피 흘려 교회를 사실 정도로 교회가 중요하다면 우리는 교회의 어떤 면이 그 정도로 중요한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중요성은 곧 교회의 사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교회의 사명은 여려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두 가지는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일과 인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1)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구약의 성전보다 더 강력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거룩한 처소가 되도록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가 드려지는 일에 전교인이 참여해야 합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중간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불신자들이 교회에 나아와서 예수님을 믿어 천국가게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본보여 주신 대로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전진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 봉사와 헌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아와서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일과 복음을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일에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들여 구체적으로 헌신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수행해야 할 모든 사명들의 주권자이시다. 공적인 예배란 부활하신 구속주께서 자기 백성들과 만나시는 것이며, 복음 전파란 사람들을 구세주께서 초청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율법을 공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성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육성은 어린 신자들을 양육하고 기성 신자들을 훈육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충복시키기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대의사(大醫師)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는 것이다.
1) 이를 위해 한주간의 삶을 거룩하게 하고, 예배시간에 늦지 말고, 질서를 지키고, 예배의 훼방자가 되지 말고 봉사자와 섬김이가 되어야 합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공생애 기간에 주님이 본보여 주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교회 안에 조직된 여러 기관과 계획된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의 실천을 위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필요로 하심을 깨닫고 기관의 회원이 되어 회비를 드리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헌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약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보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교회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몸된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역점 두고 있는 일에 방관자나 비판자가 아니라 기도와 헌금과 시간을 드려 헌신하는 성도가 되는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말로만 교회를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갈수록 교회 안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은 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는 성도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면 얼굴에 기쁨으로, 입술의 고백으로, 삶의 수고로 나타나질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회복하는 일과 복음 전파와 선교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지상 명령도 교회를 세우신 주목적도 예배와 전도와 선교의 전진 기지가 되게 하기 위함이며,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시고 훈련시키신 궁극적인 목적도, 교회가 직분자를 세우는 까닭도 바로 이를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는 예배는 전 교인이 참여하면서도, 전도와 선교와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일에는 소수만이 참여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회가 저절로 부흥하고 저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헌신하고 봉사하는 이들에 의해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2005년 전 교우들이 공 예배에 다 참여하고, 태신자를 작정하여 전도하고, 선교회와 장학회원이 되는 전교인 회원 되기 운동에 참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