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4대 사화
조선 전기 중앙관직에 진출했던 정치세력을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는데, 이들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은 주로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사화는 사림파들이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들을 가리키며 '사림의 화'의 준말이다. 4대 사화에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중종`14)의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즉위)의 을사사화가 있다.
무오사화 [戊午士禍]
조선 연산군 4년(1498)에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에 대해서 일으킨 사화.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로,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 〈조의제문〉을 트집 잡아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목을 베고,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냈다.
사초(史草)가 계기가 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한다.
배경
태종에서 세조대에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한 조선 봉건국가 체제는 성종대에 이르러 완성단계에 들어갔다. 〈경국대전〉의 반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의 실시 등 법제가 완성되고, 유학이 일어나면서 유교문화가 융성했다. 1469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세조 이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476년(성종 7)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했는데, 이로부터 정치·경제·사상 등 여러 면에 걸쳐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깊어갔다.
훈구세력은 예종대와 성종 초년에 걸친 세조비 정희왕후(貞憙王后)의 수렴청정기간 동안 남이(南怡), 구성군 준(龜城君浚)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인척과 정실 등이 벌족을 이루면서 부패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세종대 이후 관인(官人) 지배층의 토지겸병이 확대되던 경제적 상황과 훈구파의 권력장악은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한편 길재(吉再)로부터 학문적 연원을 갖는 사림파는 경제적으로 지방의 중소 지주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점에서 토지겸병 확대현상을 시정하려고 했다. 또한 이들은 사상적으로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에 치중하고 이의 기본정신을 성리학에서 찾고 있었다.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 보급운동과 유향소(留鄕所) 재건운동을 통해 향촌을 성리학적 질서로 편성하고 나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 같은 사림세력의 정치·경제·사상적 지향은 성종의 왕권강화 노력과 결합되면서 김종직을 필두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의 사림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림파가 급속히 성장하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사림파에 대한 숙청을 꾀하게 되었다. 1498년의 무오사화가 그 시작이었다.
전개과정
사림파는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유자광·이극돈·윤필상 등 집권세력을 비판했다. 김종직은 남이의 옥사가 유자광의 무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김일손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세조대의 실정을 비판하는 한편 이극돈의 비행을 문제삼았다. 또한 이목은 윤필상을 불교숭상을 주장하는 '간귀'(奸鬼)로 지목하여 탄핵했다. 사림을 중용한 성종의 재위기간 동안에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던 훈구파는 연산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사림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김종직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을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이었다. 1498년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임명된 이극돈은 〈조의제문〉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지목하고 이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등과 사림파로부터 탄핵을 받고 있던 외척과 함께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부도(大逆不道)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연산군은 김일손·이목·허반 등을 보름간 스스로 신문하여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 옛 일을 거짓으로 문자에 표현하며,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거짓으로 나무라니 난역부도(亂逆不道)한 죄악이 극도에 달했다"며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했다. 이에 이미 죽은 김종직은 대역의 우두머리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받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서들이 불살라졌으며, 김일손·이목·허반·권오복·권경유 등은 세조를 욕보였다고 처형했다.
그리고 표연말·홍한·정여창·이주·김굉필·이계맹·강혼 등은 〈조의제문〉의 내용에 동조했거나 김종직의 문도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곤장을 맞고 귀양을 보냈다. 또한 김종직의 관작만을 빼앗자고 주청한 대간(臺諫)들도 모두 논죄되었으며, 어세겸·이극돈·유순 등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반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 등 훈신들은 논밭과 노비 등을 상으로 받았다.
영향
무오사화의 결과 신진사림파는 커다란 타격을 받고 중앙정계에서 일단 후퇴하게 되었다. 사화로 많은 수의 사림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전횡과 훈구파의 득세로 분위기도 크게 경색되었다.
한편 이 옥사의 주모자 가운데 유자광은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서 위세를 떨쳤으며, 이극돈은 잠시 벼슬에서 쫓겨났으나 곧 광원군(廣原君)으로 봉해지는 등 훈구파들은 권력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그뒤에도 연산군과 중종의 재위 동안 사림파는 잇단 사화를 겪으면서 훈구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그러나 사림은 재지(在地)의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조선 성리학의 중심을 이루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도 선조대에 이르러서는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하고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람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해서 이를 무오사화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첫댓글 공부해 봅시다.
무오사화에 대한 공부, 잘 하고 갑니다.